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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9:00:37

장빈(후조)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전공과 출세2.3. 하북 평정2.4. 전조(前趙)와의 대립2.5. 후조(後趙) 수어지교
3. 죽음과 사후4. 창작물에서

1. 개요

張賓
(?~322)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정치가.

자는 맹손(孟孫)이며 조군(趙郡) 중구(中丘)출신이다. 석륵의 모사이자 후조의 재상으로, 동진 왕도 사안, 전진 왕맹과 더불어 오호십육국시대 명재상 중 하나로 꼽힌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장빈의 아버지 장요(張瑤)는 서진(西晉)의 중산(中山)태수 였다. 장빈은 어릴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갖가지 경서와 병법에 능통하였으며, 제갈량이 그러했듯 스스로를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에 비견되는 군주를 만나기를 염원하였다. 그 뒤 진나라의 장하도독(帳下都督)이 되었다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2.2. 전공과 출세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309년 유연은 석륵에게 군사를 주어 기주(冀州)를 병합하게 하였다. 이를 위해 석륵이 군자영(君子營)을 설치하고 인재를 구하자, 스스로 찾아가 부하가 되었다. 석륵은 처음에는 그를 중시하지 않았지만 여러차례 계책을 진언하여 성공시켰고, 서서히 중용되었다.

311년 10월에 석륵의 경쟁자인 왕미가 청주(靑州)에서 독립을 시도했는데, 장빈이 이를 알아채고 석륵에게 간언하여 석륵이 왕미를 연회에 꾀어내어 살해하게 하고, 그의 무리를 병합했다.

312년, 석륵은 수춘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소모전을 그만두고 기주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襄國)[1]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나라 이름을 조(趙)라 하였다. 석륵은 장빈의 공을 치하하여 우장사(右長史), 중묵장군(中墨將軍)으로 승진시켰다.

2.3. 하북 평정

기주의 대사마 왕준과 병주의 대장군 유곤은 둘다 선비족 단필제를 의지하였으나, 석륵이 단필제를 사로잡은 후 잘 보살펴 선비족의 지지를 받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동맹을 맺고 석륵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장빈은 왕준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채고, "왕준과 유곤은 실제로 원수 사이라 서로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석륵에게 진언하였고, 계책을 내어 유곤에게 귀순 의사를 보여 안심시킨 후, 유주에 있던 왕준을 급습해 잡아 죽였다. 이를 안 유곤은 뒤늦게 석륵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단필제에게 도망쳤지만 오히려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기주와 병주는 모두 석륵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2.4. 전조(前趙)와의 대립

318년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유연의 조카 유요의 명을 받고 조공(趙公)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지만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수도 평양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석륵은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유요가 이를 죽여버렸다. 이후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2.5. 후조(後趙) 수어지교

319년 석륵이 즉위한 후에는 대집법(大執法)을 맡아 복양후(濮陽侯)에 봉해졌고, 재상으로 후조의 조정을 총괄했다. 장빈은 군략, 관제정비, 유민대책 등 후조 정권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몇 년만에 후조의 국력이 전조를 앞서기 시작했으니, 이는 모두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룬 것이었다. 장빈은 평소 덕이 있어 겸허하고, 신중하고,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법가에 의거한 공정한 정치를 폈다. 또한 석륵의 조카인 대장군 석호를 견제하여 그의 생전에는 석호가 제대로 발호하지 못했다.

석륵은 이런 장빈을 존경하여 조정에서 그와 만날때마다 매일 용모를 단정히 하고, 우후(右侯)라하며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3. 죽음과 사후

장빈은 322년 외척 정하(程遐, ?~333)[2]와의 관계가 나빠져 잠시 요양하던 중 병사하였다. 그의 사후 석륵은 이를 매우 애통하게 여겨 산기상시(散騎常侍)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 의동삼사(儀同三司)로 추증하고, 시호를 경(景)이라 하였다. 정양문(正陽門)까지 그의 시신을 배웅하고는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길 "하늘이 나의 대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가."라며 탄식하였다. 그 후 정하가 장빈의 뒤를 이었는데, 그와 같이 일할때도 빈번히 탄식하길 "우후가 나를 버리고 가서 내가 이런 잡배들과 일하게 되니 어찌 괴롭지 아니한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4. 창작물에서

후삼국지에서는 장포의 아들이자 장비의 손자로, 제갈선우와 더불어 한(유연의 한나라) 진영의 원투펀치 지략가로 나온다. 계략만 걸면 100% 성공하는 먼치킨 군사.


[1] 하북성 형태시 [2] 석륵의 아들인 석홍의 외삼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