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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01:13:57

모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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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0082><colcolor=#ece5b6>
남연 제2대 황제
모용초 | 慕容超
출생 385년
후연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410년 (향년 25세)
동진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남연 황태자
403년 ~ 405년
제2대 황제
405년 ~ 4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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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0082><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초(超)
부모 부황 목황제
모후 목황후 단씨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호연황후
조명(祖明)
신체 190cm, 9위(허리 둘레)
작호 북해왕(北海王)
제호 말주(末主)
연호 태상(太上, 405년 ~ 410년)
}}}}}}}}} ||
1. 개요2. 생애
2.1. 모용납의 유복자2.2. 장안 이주2.3. 남연으로의 귀순2.4. 남연의 황제2.5. 동진과의 갈등2.6. 남연 멸망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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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남연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자는 조명(祖明)이었다. 멸망군주이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고 통칭은 말주(末主)이다. 기록에 따르면 키가 8척[1]이었고 허리 둘레는 9위 정도였으며,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2.1. 모용납의 유복자

아버지 모용납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세조 선소제 부견이 여러 모용씨 황족들에게 관직을 배분할 때 광무태수로 임명되어 몇 년간 광무에서 부임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어머니 공손씨와 동생 모용덕이 있는 장액으로 이주했다. 383년에 모용덕이 비수대전에 참전하러 가면서 공손씨에게 금장도를 주고 떠났다. 이듬해(384), 모용수가 전진에 반기를 들어 후연을 세우고 모용덕이 여기에 가세했다. 이에 전진의 장액태수 부창(苻昌)은 늙은 공손씨와 임신 중인 모용납의 처 단씨만 남겨두고 모용납을 포함한 모용덕의 자제들을 전부 참수했다. 당시 모용초를 임신 중이었던 단씨는 사형이 결정되지 않아 옥에 남았는데, 과거 모용덕 밑에서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옥졸 호연평(呼延平)[2]이 몰래 단씨를 빼내서 공손씨와 함께 강(羌)족 거주구에 숨게 해주었다.

394년, 단씨가 무사히 살아남아 모용초를 낳고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의 친할머니 공손씨가 병이 들어 누웠다. 공손씨는 병으로 죽으면서 아들 모용덕에게 받은 금장도를 모용초에게 쥐어주고는
"훗날 천하가 태평해지면 너는 동쪽으로 가 네 숙부 모용덕에게 이 칼을 돌려주어라."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공손씨가 죽자 호연평은 단씨와 모용초 모자를 모시고 후량의 도읍인 고장(故藏)으로 가 그곳에서 살았다. 호연평은 고장에서도 끝까지 모용초 모자를 섬기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2.2. 장안 이주

403년, 후량의 군주 여륭 후진 요흥에게 항복했다. 여륭은 항복하면서 고장의 10,000여 호를 인솔해 후진의 도읍인 장안으로 이주시켰는데, 모용초 모자도 여륭의 무리를 따라 장안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장안으로 출발하기 전, 어머니 단씨가 모용초에게 말했다.
"우리 모자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호연씨 덕분이었다. 호연평은 비록 지금 죽었으나, 나는 너를 호연평의 딸과 맺어주어 호연평에게 보은할 생각이다."
이리하여 모용초는 호연평의 딸, 호연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모용초는 자신이 모용덕의 조카임이 드러나면 후진 조정에서 체포하러 올까 두려워 신분을 숨긴 채 장안 바닥에서 미친 척하며 구걸하고 다녔다. 모든 장안 사람들이 그를 경멸했지만 동평공 요소는 모용초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는, 후진의 군주인 조카 요흥에게 가 모용초에게 작위를 내려 붙잡아 둘 것을 권했다. 요흥은 모용초를 불러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았으나, 모용초는 일부로 엉뚱한 답을 하거나 질문을 씹는 등 멍청한 연기를 이어나갔다. 요흥은 모용초를 풀어주고 요소에게 말했다.
"'고운 피부는 둔한 뼈를 싸지 않는다'[3]는 속담은 참으로 허황된 말이다."
요흥이 그에게 관심을 모두 버린 덕분에 모용초는 안심하고 장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2.3. 남연으로의 귀순

405년, 모용덕이 자신의 혈족들이 모두 주살되었음을 뒤늦게 알고 절망하던 와중에 장안에 형 모용납의 유복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모용초는 동향인 종정원(宗正元)을 통해 숙부가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 단씨와 처자식에겐 알리지 않은 채 종정원과 함께 국경을 건너 남연으로 도망쳤다. 남연의 영역인 연주 태산군 양보(梁父)에 도착한 후, 진남장사 열수(悅壽)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열수는 이를 연주자사 모용법(慕容法)에게 보고했지만 모용법은 모용초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칭범이라고 생각해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 이에 모용초는 모용법을 원망했다.

한편, 모용초가 연주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들은 황제 모용덕은 3,000명의 기병을 보내 그를 영접했다. 모용초가 모용덕 앞에 가서 친할머니 공손씨에게서 받은 금장도를 모용덕에게 바치자, 모용덕은 금장도를 어루만지면서 죽은 가족들 생각에 빠져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이후 모용덕은 모용초를 북해왕, 시중, 사예교위, 표기대장군, 개부로 임명하고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모용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모용초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에 황궁 만춘문(萬春門) 앞에 저택을 지어주고 그와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모용초도 그런 숙부 모용덕의 심정을 파악하여 안팎에서 항상 모용덕을 극구 모셔 깍듯이 대하니, 모든 사람들이 모용초를 칭찬했다. 그렇게 모용초가 귀순한 지 몇 개월 뒤인 405년 10월, 모용덕은 동양전(東陽殿)에서 군신들을 불러모으고 모용초를 황태자로 삼았다.

2.4. 남연의 황제

동년 10월 11일, 모용덕이 붕어하자 모용초가 황제에 올라 사면령을 시행하고 연호를 태상(太上)으로 고쳤다. 모용덕의 처 단황후를 황태후로 높이고, 여러 군신들에게 관직을 봉서했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옛 대신들인 북지왕 모용종(慕容鍾)과 단굉(段宏)이 편치 않아 외지로 보내 멀리하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공손오루(公孫五樓)를 측근으로 삼아 무위장군, 둔기교위를 더해 내정에 참가하도록 했다. 태위 봉부(封孚)가 공손오루를 비판하며 옛 대신들을 가까이 하라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남연의 개국공신인 모용종과 단굉은 불평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말했다.
"황구(黃狗)의 가죽이 결국 호구(狐裘)[4]를 덧대는 데 쓰일 것이다."
공손오루는 이 말을 전해듣고 저 둘을 원망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이후, 모용초가 정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과도하게 측근을 챙기며 사냥만 즐겨해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봉부와 상서 한작(韓𧨳)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숙부 모용덕의 제사를 지낼 때 모용법이 나타나지 않자 모용초가 그를 규탄한 적이 있어, 모용법은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모용종 및 단굉과 뜻이 맞아 셋은 반란을 모의했다. 황제 모용초가 이를 알고 모용종을 조정으로 부르자, 모용종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에 모용초는 모용종과 친하던 시중 모용통(慕容統), 우위 모용근(慕容根), 산기상시 단봉(段封)을 붙잡아 주살했다. 그리고 좌복야 봉숭(封嵩)이 모용법과 왕래했다는 정남사마 복진(卜珍)의 말을 믿고 봉숭을 거열형에 처했다. 이를 본 서중랑장 봉융(封融)은 북위로 망명했다.

도성 내의 반란 세력을 제거했다고 여긴 모용초는 계림왕 모용진(慕容鎭)을 보내 청주의 모용종을 공격하고, 모용욱(慕容昱) 등을 보내 서주의 단굉을 치고, 제양왕 모용응(慕容凝)과 중서시랑 한범(韓範)을 보내 연주의 모용법을 공격했다. 먼저, 모용욱이 거성(莒城)을 함락하자, 단굉은 서주를 버리고 북위로 도망갔다. 연주를 공격하러 가던 모용응은 한범을 죽이고 군을 독점해 도성을 습격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들키는 바람에 한범에게 역으로 습격당해 모용법에게 도망갔다. 한범은 모용응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모용법과 모용응을 격파했고, 모용법은 북위로, 모용응은 후진으로 각각 달아났다. 모용종도 모용진에게 패배해 청주가 함락되자, 처자식을 죽이고 고도공 모용시(慕容始)와 함께 땅굴을 파 후진으로 도망쳤다. 이렇듯 반란 세력을 성공적으로 궤멸시켰으나, 도망쳤던 봉융이 청주의 도적들을 규합해 석새성(石塞城)을 기습하여 진서대장군 여울(餘鬱)을 죽이니, 남연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다.

406년, 모용초는 과거의 육형과 9관등제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군신들이 모두 반대하여 실패했다.

407년, 말도 없이 장안에 두고 온 어머니 단씨와 아내 호연씨가 생각난 모용초는 어사중승 봉개(封愷)를 후진에 보내 그들을 모셔오도록 했다. 하지만 모용초가 즉위했을 때 이미 요흥이 어머니 단씨와 처 호연씨를 구금해둔 상태였다. 요흥은 그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모용초의 칭번과 태악의 악기 및 무녀(舞女)들의 양도를 원했고, 그게 힘들다면 동진에서 잡아온 1,000여 호를 후진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모용초는 군신들을 불러 의논한 끝에 한범을 사자로 보내 요흥이 선호하는 것에 따르기로 했다.

후진으로 간 한범은 남연이 칭번함을 알리고 요흥에게 유세하여 단씨와 호연씨를 돌려받기로 약속받았다. 요흥이 원외산기상시 위종(韋宗)을 보내 모용초에게 조서를 내리니, 모용초는 신하의 예로 조서를 받았다. 이후 모용초가 좌복야 장화(張華), 급사중 종정원을 보내 태악의 악기와 무녀 120여 명을 바치자, 요흥은 매우 기뻐하며 연회를 열어 장화와 종정원을 초대했다. 술이 무르익고 가무가 시작되자 황문시랑 윤아(尹雅)가 장화를 향해
"은나라( 상나라)가 망할 때 그 악사들이 주나라로 갔는데, 지금 악사들이 연나라에서 진나라로 왔으니 이것만 봐도 흥망성쇠가 예측된다"
며 웃었다. 이에 장화가 답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고, 그 오묘한 도리는 모두 뛰어난 공업(功業)을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노자께서 이르시길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포기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악사들이 서쪽으로 가면 반드시 마치 메뚜기떼처럼 다시 동쪽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이는 화복(禍福)이 번갈아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조입니다!"
요흥이 이를 듣고 소국이 감히 맞먹으려 하느냐며 분노하자 장화가 다시 겸손히 아뢰었다.
"당초 신이 명을 받고 출사할 때 진실로 상국(上國)과 서로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상국이 소국(小國)의 신하를 괄시하고, 그 국군(國君)과 국가를 모욕했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 말에 대한 몇 마디의 대답도 못하겠습니까!"
요흥은 그를 매우 칭찬하고, 다음날 귀국하는 장화 일행에게 모용초의 어머니와 처를 돌려주는 동시에 예물을 두텁게 하여 남연에 보냈다. 모용초는 친히 청주 대현(臺縣) 마이관(馬耳關)까지 나가서 그들을 영접했다.

408년 정월, 어머니 단씨를 황태후, 처 호연씨를 황후로 삼았다.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던 중, 크기가 말만한 붉은 쥐 같은 짐승이 나타나 제단 옆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이때 낮이었는데도 짐승이 나타나자 큰 바람이 불면서 주위가 어두워지고 의장과 장막이 모두 찢겨졌다. 모용초는 매우 두려워 태사령 성공서(成公緖)에게 물으니, 성공서는 폐하께서 어진 이들을 죽이고 아첨하는 간신들을 신용해 나라가 어지러워 그런 것이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모용초는 측근인 공손오루와 복진 등을 내쳤지만 얼마 안가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2.5. 동진과의 갈등

409년 정월, 모용초는 군신들을 동양전에 불러모아 음악과 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에 탄식하며 후진에 악사들을 보낸 걸 후회했다. 그리고는 동진을 침략해 악사들을 납치해올 계획을 세우려고 했다. 영군장군 한작이 병사들을 쉬게 하고 주변에 적대국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렸으나, 모용초는
"내 이미 결정했으니 너와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
고 말했다. 이후 장수 모용흥종(慕容興宗), 곡곡제(斛穀提), 공손귀(公孫歸) 등을 보내 동진의 숙예(宿豫)를 함락시키고 양평태수 유천재(劉千载)와 제음태수 서완(徐阮)을 사로잡았다. 남연의 군사들은 서주 숙예 인근을 약탈하여 사람들을 납치하고는 개중 남녀 2,500여 명을 선발해 강제로 가무를 배우도록 했다.

당시 공손오루는 시중, 상서, 영좌위장군이 되어 조정을 독차지했으며 그의 형 공손귀를 관군, 상산공에, 숙부 공손퇴(公孫頹)를 무위, 흥락공에 앉혔다. 그외에도 그의 종친들은 모두 황제 모용초를 좌우에서 보좌하니, 왕공들마저 공손오루 가문을 두려워했다. 모용초는 숙예 함락의 공을 기려 곡곡제 등을 군현의 공으로 임명했다. 계림왕 모용진이 용기를 내 간언을 했으나 모용초가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신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이후로 누구도 감히 간언하려고 하지 않았다. 상서도영사 왕엄(王儼)이 공손오루에게 아첨하여 말단에서 상서랑, 제남태수를 거쳐 상서좌승까지 파격 승진을 한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남연 사람들 사이에선
"후작이 되고 싶으면 공손오루를 섬겨라"
라는 말이 퍼졌다.

409년 2월, 공손귀를 보내 동진의 제남(濟南)을 약탈하고 남녀 1,000여 명과 제남태수 조원(趙元)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지속적으로 국경에서 깔짝거리는 모용초가 거슬렸던 동진의 권신 유유는 제1차 북벌을 개시하여 남연을 정벌하려고 했다. 유유가 4월에 대군을 이끌고 수도 건강에서 나와, 하비에 배와 치중을 남겨두고 낭야(琅邪)에 도착했다. 모용초는 동양전에 다시 군신들을 불러 회의했다. 공손오루가 청야전술에 장기전을 할 것을 권했지만 모용초는 청야전술을 꺼려 전국의 철기병을 끌어모아 대현산(臺縣山)에서 동진의 북벌군을 요격하기로 결심했다. 보국장군 모용하뢰노(慕容賀賴盧)와 모용진이 철기병은 산이 아닌 평지가 싸우기 좋다며 간곡히 간했지만, 모용초는 산에 매복할 생각에 심취한 나머지, 장군들의 간언을 전부 묵살했다. 이에 모용진은 한작에게 가
"모용초가 마치 유비에게 촉을 빼앗긴 유장과 같다. 나는 나라가 망하면 죽겠지만 한족인 당신은 단발문신하여 동진으로 가라."
며 하소연했다. 모용초는 이를 전해듣고 크게 노해 모용진을 옥에 가뒀다. 이어서 모용초는 거성과 양보 두 곳의 수비병을 한 데 모아, 참호를 파고, 군마를 선발해, 예기를 쌓아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로장군 공손오루, 좌장군 단휘, 광녕왕 모용하뢰노는 보•기 50,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광고 남쪽 임구(臨朐)에 주둔하도록 했다.

2.6. 남연 멸망

409년 6월, 유유의 동진군이 모용초가 매복 중이던 대현산을 그냥 지나쳐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은 채 대현산 동쪽에 있는 동완(東莞)에 도착했다. 공손오루는 유유를 막기 위해 서둘러 임구의 거멸수(巨蔑水)를 향해 나아갔다. 진격하던 공손오루의 남연군은 유유의 선봉인 맹용부와 싸워 패배하고 공손오루는 도주했다. 유유는 전차 4,000승을 좌•우익에 두고 천천히 진격해 임구성 남쪽에서 다시 단휘의 군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해가 지는데도 승패가 갈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유는 참군 호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번, 자의참군 단소, 건위장군 상정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임구성을 몰래 기습하도록 했다. 별동대는 빠르게 임구성을 향해 돌진했고, 상정가 먼저 성벽을 올라 성문을 열면서 임구성이 함락되었다.

임구성이 떨어졌단 소식에 놀란 모용초는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대현산에서 나와 임구 남쪽에서 유유의 동진군을 막고 있는 단휘와 합류했다. 유유가 임구성을 함락시켰다고 외치며 병사들을 풀어 남연의 군사를 공격하자, 황제 모용초가 합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연군의 사기는 바닥을 쳐 이내 격파당했다. 모용초는 대패했고 단휘를 비롯한 남연군의 대장 10여 명이 유유에게 참살당했다. 모용초는 수도 광고로 도망쳤지만 오래지 않아, 유유의 군대가 승세를 타고 광고성까지 진격해 외성을 쳐부수고 내성을 포위했다. 유유는 참호를 3중으로 파 내성의 포위를 굳건히 하는 동시에 남연의 인사들을 회유했다. 모용초는 자신의 무리를 모두 내성으로 거두어 농성을 하고, 상서랑 장강(張綱)을 후진의 요흥에게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리고 옥에 갇힌 모용진을 석방해 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로 승진시키고 대장으로 삼았다. 모용초는 여러 신하들과 모용진에게 그동안의 일을 사죄하고는 말했다.
"짐은 숙부께서 창건한 대업을 계승했으면서 어질고 선량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고, 고집불통처럼 행동했다.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후회막급이로다! 일이 위급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모략을 쓰고, 재난이 닥쳤을 때 충신들은 절개를 세운다고 했다. 그러니 제군은 기발한 계책을 세워 이 고난과 위기를 함께 넘기도록 하자!"
이에 모용진이 답했다.
"백성들의 마음은 오로지 폐하 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었다가 패전하여 도망가셨으니, 신하들은 자신이 없고, 선비와 백성들은 모두 의기소침하여 안팎의 형세는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만약 후진이 내환을 앓고 있다면 그들 또한 병력을 나누어 우리를 구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저희들은 천명에만 의지해 다시 한 번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돌아온 패잔병 수만 명이 아직 있으니, 금과 비단, 궁녀들을 모두 꺼내어 장병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들이 온 마음을 바쳐 명을 받들게 만든 뒤 성에서 나와 동진군을 기습하십시오. 하늘이 우릴 도와주신다면 능히 저 도적을 요격할 수 있을 겁니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죽음 또한 가치 있을 것이니, 문을 닫고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보단 낫습니다."
하지만 사도 낙랑왕 모용혜(慕容惠)가 패잔병으론 계란으로 바위치기니 차라리 후진에 사신을 더 보내자며 반대를 외쳤고, 모용초 또한 모용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한범과 왕포(王蒲)를 후진의 사신으로 보내 다시 한번 구원병을 요청했다.

모용초의 측근이었던 상서 원존(垣尊), 경조태수 원묘(垣苗) 형제가 내성을 빠져나와 동진군에 항복해 행참군에 임명되었다. 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던 장강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중 동진의 태산태수 신정(辛靜)에게 붙잡혀 유유 앞에 끌려왔다. 유유는 장강을 누거에 태워 내성 밖을 돌면서
" 혁련발발이 후진군을 격파해 구원해줄 병사가 없다."
를 외치게 하니, 광고성 안의 사람들은 더욱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동진군은 매일 증원병이 와 그 수가 계속 불어만 갔고 내성의 포위는 점점 조여왔다. 모용초가 사신을 보내 대현 남쪽을 떼어주고 칭번할 것을 청했으나 유유가 거절했다. 요흥도 유유에게 사자를 보내 남연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대기중인 철기병 100,000명을 즉시 진격시킬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유유 또한 지지않고 남연 정벌 이후 3년 뒤에 너네 치러 갈테니 기다리라 말하면서 맞받아쳤다. 북위에 항복해 청주에서 도적질을 하던 봉융도 이때 유유에게 귀순했다.

한편, 장안에 도착한 한범과 왕포는 구원병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후진의 위장군 요강(姚强)이 이끄는 10,000명의 기병과 함께 광고로 향했으나, 후진이 이성 전투에서 혁련발발에게 대패하면서 요강은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에 한범은
"하늘이 남연을 멸하려는구나"
라며 탄식했다. 한범과 왕포는 모용초에게 돌아가지 않고 유유에게로 가 항복했다. 유유가 한범을 누거에 태워 내성을 돌게 하자, 광고성을 지키던 사람들의 사기는 급격히 제작되었다. 어떤 이가 모용초에게 한범의 가문을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모용초는 한범의 동생 한작이 충성을 다한다며 거절했다.

409년 12월, 유유에게 항복한 장강이 동진군을 위해 충차 등 기묘한 공성 무기들을 만든 것을 본 황제 모용초는 대노하여 장강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찢어죽이고 광고성에 매달았다. 영대령 장광(張光)이 천문이 좋지 않다며 항복할 것을 권했다가 그 자리에서 모용초에게 손수 죽임을 당했다.

410년 정월, 모용초가 총애하는 비첩인 위부인과 함께 성벽에 올라 동진군의 강성함을 보고 손을 마주잡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작이 이를 보고
"어찌 아녀자처럼 우십니까!"
라고 호통치자 사과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상서령 동선(董詵)이 항복을 권했다가 분노한 모용초에 의해 옥에 갇혔다.

410년 2월, 모용하뢰노와 공손오루가 땅굴을 이용해 동진군을 공격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포위가 너무 길어져 내성을 지키던 이들이 줄줄이 도망쳐 이탈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용초가 가마를 타고 성벽에 오르자, 상서 열수가 나서서 항복을 권했다. 모용초가 한숨 쉬며 외쳤다.
"흥쇠(興衰)는 모두 천명이다. 나는 보검을 휘두르며 죽을지언정, 항복해서 살 수는 없다!"
유유가 마침내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항복했고, 열수는 광고의 성문을 열어 동진군을 맞이했다. 모용초는 좌우 수십 기병을 데리고 광고성을 나와 도망치다가 동진군에게 붙잡혔다. 유유는 모용초를 앞에 무릎 꿇게 하고는 항복하지 않은 죄 등 여러 죄상을 나열했다. 그러나 모용초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어머니 단씨를 유경선[5]에게 맡깁니다."
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유는 광고성이 오래도록 버틴 것에 분노해 성 안의 사람들을 생매장하고, 그 처와 딸들을 동진군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려 했는데, 한범이 말려서 그만 두었다. 대신 남연의 왕•공 이하 3,000여 명을 참하고 내성 거주자 10,000여 호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유유가 마지막으로 남연의 종묘를 파괴한 뒤, 모용초를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압송해 그곳에서 참수하면서 남연은 건국 13년만에 멸망했다. 모용초는 5호 16국시대에서 같은 모용부 계열인 토욕혼 쪽을 제외하면 마지막 선비 모용부 출신 황제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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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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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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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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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190cm가 나온다. [2] 모용덕 밑에서 하급 관리로 일할 때 실수로 죽을 죄를 지었지만 모용덕이 그를 용서해준 적이 있었다. [3] 연피불과치골(姸皮不裹癡骨), 즉 외모가 아름다우면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중국 속담이다. [4]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옷 [5] 유경선이 환현을 피해 남연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당시 북해왕이었던 모용초와 친분을 쌓은 적이 있었다. [6] 당시 북연도 아직 멸망하진 않았으나 모용씨는 축출되고, 한족인 풍씨에게 먹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