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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전진 4대 황제
부비 | 苻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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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불명 | ||
후조
진주 약양군 임위현 (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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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386년 10월 | ||
동진
사주
홍농군 섬현 (現 허난성 싼먼샤시 링바오 현급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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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없음 | ||
재위기간 | 전진 장락공 | ||
357년 6월 ~ 385년 8월 | |||
전진 4대 황제 | |||
385년 8월 ~ 386년 10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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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성씨 | 부(苻) | |
휘 | 비(丕) | ||
자 | 영숙(永叔) | ||
부황 | 선소황제 | ||
형제자매 | 7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황후 양씨 | ||
자녀 | 5남 | ||
작호 | 장락공(長樂公) | ||
묘호 | 없음 | ||
시호 | 애평황제(哀平皇帝) | ||
연호 | 태안(太安, 385 ~ 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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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제4대 황제. 선소제 부견의 서장자로, 황태자는 아니었지만 부견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등강과 함께 관우·장비와 같은 사람들로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2. 생애
부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였다. 아버지 부견은 그와 군사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재능을 칭찬하였고, 맹장 등강에게 명하여 그에게 병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부비는 문무를 겸비하여, 그 재능이 작은아버지이자 부견의 참모인 부융에 버금갔다고 한다. 이후 부견이 천왕으로 즉위했을 때, 부비를 장락공(長樂公)에 봉하였다.건원 4년(368년) 8월, 옹주자사•연공 부무가 토벌되자(5공의 난), 부견은 부비를 옹주자사로 임명하였다.
건원 7년(371년) 2월, 부견이 옹주자사부 치소를 포판(蒲阪)에 두게 하고, 부비를 다시 사지절•정동대장군•옹주자사로 삼았다. 부비는 군대를 잘 부렸고, 병졸들의 마음도 그를 따랐다.
건원 14년(378년) 2월, 부견은 부비에게 명령해 구장(苟萇)과 함께 동진의 양양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양양의 외성을 순식간에 함락시켰으나 양양태수 주서[1]가 내성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지키니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부견이 모용수 등을 보내 부비를 돕게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형세가 불리해질 것이라 판단한 양양독호 이백호(李伯護)가 주서를 배신하고 양양성 내에서 부비에게 호응했다. 결국 내외로 동시에 공격받게 된 주서는 항복하고 양양을 바쳤다. 이리하여 부비는 양양을 거진 10개월 가까이 포위하고 나서야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다.(양양 공방전)
건원 16년(380년) 6월, 부견이 동진 원정을 준비할 때, 부비는 도독관동제군사(都督關東諸軍事)•정동대장군•기주목에 임명되어 업(鄴)에 주둔하며 하북을 수비하였다.
건원 16년(380년) 7월, 부견이 저족 500,000여 호를 분산시켜 여러 종친들이 마치 제후와 같이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 이때 부비는 3,000호의 저족을 거느렸는데, 구지의 저족 추장인 사성교위 양응(楊膺)을 좌사마로 삼고, 구종(九嵕)의 저족 추장인 장수교위 제오(齊午)를 우사마로 삼아, 각기 1,500호씩 거느리게 하여 관리하였다. 또, 낭중령 원창(垣敞)은 녹사참군, 시강 위간(韋幹)은 참군사로, 신소(申紹)는 별가로 삼았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부견이 동진과의 비수대전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자, 전진의 각 지역에서 이민족의 반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부비가 진수하고 있었던 하북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천왕 부견은 반란들을 제압하고자 권익의 반대를 묵살하고 모용수를 하북으로 보냈으며, 장수 이만(李蠻), 민량(閔亮), 윤고(尹固)와 3,000 병력을 파견해 모용수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효기장군 석월에게도 정예병 3,000명을 주어 업성으로 가서 부비를 보좌하게 하였다.
당시 모용수는 은밀히 전연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나라 부활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안(新安)에서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洛陽)을 위협하였다. 이에 천왕 부견이 부비에게, 모용수를 보내 적빈의 난을 진압하게 하라 명하니, 석월이 반대하며 부비에게 말했다.
"왕사(王師)가 패배한 뒤로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정령족 적빈이 병사를 일으켰더니 10일 만에 이미 수천 명이 모인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모용수는 연나라의 구신으로,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력을 나누어 주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부비가 답했다."어차피 모용수가 업(鄴)에 있으면 호랑이를 침상에 두거나 교룡을 거처에 두는 것과 같아 항상 팔꿈치 아래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해야했는데, 이참에 지금 그를 멀리 내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소? 더군다나 적빈은 흉폭하고 배반할 성향이 있어, 모용수 아래에서 순종하지 않을 것이오. 두 호랑이가 싸우면 우리가 이를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변장자호(卞莊刺虎: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게 하여 이득을 취하는)'의 전략이오."
이후 부비는 모용수가 약한 병사 2,000여 명과 손상된 갑옷과 무기를 주고 적빈을 토벌하게 하였다. 또,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에게 저족 기병 1,000기를 주어 모용수의 부장으로 배속시킨 뒤, 비밀리에 부비룡을 따로 불러 당부하였다."모용수는 삼군(三軍)의 장수이니, 장차 모용수가 수상한 음모를 꾸미면 경이 힘써 그를 도모하시오."
과거 전연의 도읍이었던 업성 내에는 연나라의 종묘가 있었으므로, 모용수는 떠나기 전에 부비에게 종묘에 참배하게 해달라 청하였다. 하지만 부비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용수는 변장을 하고 업성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였다가 초소에서 관리에게 들켜 출입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이에 모용수는 격노하여 초소의 관리들을 베어 죽이고, 초소를 불태운 뒤에 떠났다. 이를 들은 석월이 부비에게 말했다.
"모용수가 감히 경계를 무시하여 관리들을 죽이고 정각을 불태웠으니, 반역의 의도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를 기회로 모용수를 제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부비가 답했다."회남(淮南)의 패배 이후, 모용수는 승여(乗輿)를 북쪽으로 호위하는 공로를 세웠소. 이를 잊어서는 아니 되오."
석월이 다시 말했다."모용수가 연나라에게 충성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완전히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비룡은 끝내 석월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석월은 물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한탄하였다."공(公: 장락공 부비) 부자(父子)는 사소한 인(仁)을 좋아하고 큰 계책을 돌보지 않으니, 결국에는 마땅히 누군가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적빈을 토벌하러 출발했던 모용수는 감시역인 부비룡을 살해한 뒤, 적빈과 손을 잡고 반란하여 업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도 열인(列人)에서 거병하여 하북 일대를 휩쓸고 다니자, 부비는 효기장군 석월에게 보•기 10,000여 명을 주어 모용농을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석월은 모용농에게 대패하고, 참수되어 그 수급이 모용수에게 보내졌고, 비슷한 시기에 광평공 부휘를 도와 낙양을 수비하던 진군장군 모당도 적빈에게 격파되어 참수당했다. 전진에서 지략 있고 용맹하기로 두 장수가 연이어 전사했다는 소식이 천하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모용수의 반란군은 업성 인근에 이르러 모용농 등과 합류하였고, 그곳에서 모용수는 연나라의 부활을 선포하였다.
연왕 모용수의 수만 대군이 업성 앞으로 집결하자, 부비는 강양(姜讓)을 사신으로 보내 그를 이렇게 꾸짖으며 설득하려 하였다.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이를 고친다면 아직 늦지 않았소."
이에 모용수가 대답하였다."과인은 주상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혜를 받았기에, 장락공(長樂公)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군사를 다하여 경사(京師)로 보내려고 하였소. 그리고 그런 후에야 우리 국가의 사업을 복구하고, 진(秦)과 영원히 이웃으로서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소. 한데 어찌하여 기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업성(鄴城)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것이오? 만약 그렇게 계속 방황한다면, 결국 병력이 한계에 이르러 단 한 마리의 말조차 목숨을 구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오."
그러자 강양이 낯빛을 바꾸고 모용수를 책망하며 말했다."장군께서는 가문과 국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목숨을 바쳐 성조(聖朝)에 투항하셨으니, 연(燕)의 땅은 한 자의 땅도 장군의 몫이 아닙니다. 주상께서는 장군과 기질도 다르고, 신분도 달랐으나, 한 번 보고 마음이 기울어 마치 친족처럼 장군을 가까이 대하셨고, 공적이 오래된 신하들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로부터 군신의 만남에서 이처럼 두터운 은혜를 받은 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한순간 왕사(王師)의 작은 패배를 이유로 이와 같은 다른 뜻을 품다니요! 장락공께서는 주상의 원자(元子)로서 나라를 나누어 다스릴 임무를 맡았는데, 어찌 손을 묶어 장군에게 백 개의 성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왕관을 찢고 면류관을 버리며 끝까지 병력을 다해 싸우고자 한다면 그리하셔도 됩니다. 하나, 장군께서 일흔의 나이에 백기를 들고 항복하며, 세상을 떠나 충성을 다하신 분이 역적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모용수는 강양의 말을 듣고 침묵하였다. 좌우의 측근들이 강양을 죽일 것을 청하였지만, 모용수가 거부하며 말했다."그는 각자 자신의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일 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고는 예를 갖추어 강양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부비에게 서신을 보내고, 부견에게도 표문을 올려 이익과 손해를 설명하며 부비를 장안(長安)으로 소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부견과 부비는 이 제안에 더욱 분노하여, 다시 회답을 보내 모용수를 신랄하게 꾸짖고 책망하였다.같은 달 28일[2], 연왕 모용수가 업성을 공격하여 그 외곽을 함락시켰고, 부비는 물러나 중성(中城)을 지키는 상황이 되어 궁지에 몰렸다. 이에 관동의 여섯 주(州)와 여러 군현(郡縣)들이 연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항복을 청하였다.
건원 20년(384년) 2월, 연왕 모용수가 정령족과 오환족 병력 200,000명을 몰아, 공성용 사다리를 드리우고 땅굴을 파서 업성 공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장기전이 될 것을 예측한 모용수는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신흥성(新興城)을 축조하여 군수품을 보관하였다.
건원 20년(384년) 7월, 적빈이 모용수에게 불만을 품고 은밀히 업성의 부비와 내통하며, 부하들을 시켜 제방을 터뜨려 물을 범람시키려고 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모용수는 적빈과 그의 동생 적단민(翟檀敏)만 처형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사면하였다. 이때 적빈의 아들 적진(翟真)은 밤에 정령족 군영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한단(邯鄲)으로 도망가, 병력을 다시 모으고 업성으로 진군하여, 부비와 내외로 모용수를 협공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용수의 태자 모용보와 관군대장군 모용륭이 적진을 요격하였고, 적진은 패하여 다시 한단으로 돌아갔다.
건원 20년(384년) 8월, 업성 내의 식량이 모두 바닥나자, 소나무껍질을 벗겨 말에게 먹였다. 모용수는 부비가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밤에 업성의 포위를 풀고 신성(新城)으로 향하였다.
건원 20년(384년) 10월, 당시 적진은 승영(承營)에 주둔하면서 공손희(公孫希), 송창(宋敞)과 멀리서 서로 연계하였다. 이에 부비는 용종복야 광조에게 병사 수백 명을 주어 중산(中山)으로 가서 적진과 연합하도록 하였고, 양평태수 소흥(邵興)에게 기병 수천 명을 주어 기주(冀州)의 옛 군현들에서 병력을 징집한 뒤에 광조와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후연군은 지쳐있었고, 전진군의 기세는 다시 강해졌으므로 기주의 군현들은 모두 성패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광조와 소흥은 양국(襄國)에서 후연의 관군대장군 모용륭에게 패하여, 소흥은 도망치다가 광아(廣阿)에서 표기대장군 모용농과 조우하여 사로잡혔고, 광조는 서쪽 산을 따라 업으로 도망쳤다.
한편, 공손희가 연나라의 장수 평규(平規)를 격파하자, 그 소식을 들은 독고부의 유고인은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부비를 구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안문(鴈門), 상곡(上谷), 대군(代郡)에서 병력을 징집하여 번지(繁畤)에 주둔시켰다. 하지만 세 군의 병력들은 유고인의 징집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밤에 반란을 일으켜 유고인을 살해하고 그의 준마를 훔쳐 연나라로 달아났다. 공손희의 군사들은 유고인의 군영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흩어졌으며, 공손희는 적진에게로 도망갔다.
전황이 급격히 나빠지자, 부비는 용종복야 광조와 참군 봉부(封孚)를 보내어, 당시 병주에서 5,000명의 우림군을 이끌고 있는 표기장군 장자와 병주자사 왕등에게 원군을 청하였으나, 장자와 왕등은 병력이 적어 부비에게 지원하지 못하였다. 좌사마 양응이 여러 참모들과 함께 부비에게 동진에 귀순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동진군은 비수대전에서의 승세를 몰아 북벌 중이었는데, 용양장군 유뢰지 등은 확오(碻磝)를 점령하였고, 제양태수 곽만(郭滿)은 활대(滑臺)를 점령하였으며, 장군 안굉(顔肱)과 유습(劉襲)은 하북에서 진을 쳤다. 부비는 장군 상거(桑據)를 보내어 여양(黎陽)에 주둔하게 하여 이를 막으려 했으나, 유습이 밤에 상거를 기습하여 그를 몰아내고 여양을 점령하였다. 부비는 두려워져, 사촌인 부취(苻就)와 참군 초규(焦逵)를 보내 당시 동진의 북벌군을 지휘하던 사현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서신을 통해 말했다.
"길을 빌려 식량을 구하고 서쪽으로 가 국난을 해결하고자 하니, 지원군이 도착하면 업성(鄴城)을 그들에게 넘기겠다. 만약 서쪽 길이 막히고 장안(長安)이 함락되었으면, 나는 병력을 거느리고 업성을 지키겠다."
초규와 강양은 서신의 내용을 알고, 비밀리에 양응을 찾아가 말했다."지금 패망한 상황에서 장안과의 연락이 끊겨 생사도 알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진심을 다하여도 식량과 지원군을 구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공께서는 아직도 자만심을 버리지 않고 두 가지 선택을 모두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표문을 작성해 왕사(王師)이 도착하면 귀순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 낫고, 설령 공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억지로 끌고 가야 할 것입니다."
양응은 자신이 능히 부비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신을 바꾸어 보냈다.건원 20년(384년) 11월, 연왕 모용수는 부비가 아직도 업성에 주둔하며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병력을 이끌고 업성을 포위하되 서쪽으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초규로부터 서신을 전달받은 사현은 부비에게 지원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부비의 아들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이에 초규가 사현에게 부비의 진심과 함께 양응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니, 사현은 조건을 철회하고 유뢰지와 등념지(滕恬之) 등을 보내어 병력 20,000명으로 업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부비가 굶주림을 호소하니, 사현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쌀 2,000석을 그에게 공급하였다.
건원 21년(385년) 정월, 유뢰지의 구원군이 방두(枋頭)에 이르렀을 때, 양응과 강양의 계략이 드러나 부비가 그들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뢰지는 진군을 멈추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건원 21년(385년) 3월, 유뢰지가 손취책(孫就柵)을 습격하자, 연왕 모용수는 모용농에게 업의 포위망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친히 손취책에서 유뢰지와 싸우는 여양태수 유무(劉撫)를 구원하러 갔다. 부비는 모용수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군대를 거느려 성 밖으로 나가 후연군을 야습했지만, 모용농이 이를 격퇴하여 부비는 성 안으로 패주하였다.
건원 21년(385년) 4월, 유뢰지가 다시 진격하여 업성에 이르자, 연왕 모용수는 다시 유뢰지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패하였다. 모용수가 업성의 포위를 거두고 신성 북쪽으로 돌아가 숨으니, 유뢰지는 부비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고 동진군만으로 모용수의 뒤를 추격하였다. 부비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병력을 출동시켜 그 뒤를 따랐다. 유뢰지는 동당연(董唐淵)에서 후연군의 꽁무니를 따라잡고, 더욱 질주하여 오교택(五橋澤)에서 후연군의 치중을 습격하였는데, 모용수가 군대를 돌려 요격하고 유뢰지의 군대를 대파하여 동진군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유뢰지는 단기로 달아나다가 뒤따라오던 부비의 군대를 만나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당시 업성에서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자, 부비는 30,000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방두로 가서 동진군으로부터 군량을 얻어오고자 하였다. 유뢰지는 업성에 들어가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으고 잠시 군세를 회복하였으나, 또 패배하여 결국 동진으로 소환되었다.(업성 공방전)
건원 21년(385년) 7월, 부비가 방두에서 업성으로 복귀하려 할 때, 동진의 용양장군 단현(檀玄)이 그를 공격하였다. 부비는 단현과 곡구(谷口)에서 전투를 벌여 단현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다시 업성으로 돌아갔다.(곡구 전투)
건원 21년(385년) 8월, 당시 전진의 유주자사 왕영은 평주자사 부충(苻沖)과 함께 유주(幽州)와 병주(并州)의 병력을 이끌고 모용수를 공격하였다가, 모용수의 장수인 대방태수 평시(平視) 등에게 연이어 패배하였다. 이에 왕영은 창려태수 송창을 파견해 화룡(和龍)과 계성(薊城)의 궁실을 불태우고, 30,000 군사를 이끌고 호관(壺關)에 진을 쳤으며, 사자를 보내 부비를 호관으로 모셔오려 하였다. 마침 부비도 업성을 버리고 조(趙), 위(魏) 일대를 가로질러 서쪽 장안으로 가려고 하였기에, 부비는 마침내 업성의 남녀 60,000여 명을 거느리고 업성을 떠나 노천(潞川)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표기장군 장자와 병주자사 왕등이 부비를 영접하였고, 부비는 방향을 틀어 진양(晉陽)에 입성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영은 부충을 호관에 남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진양에서 부비와 합류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8월, 부비는 진양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장안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부견이 요장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부비는 진양에서 발상하고, 삼군(三軍)이 모두 흰 옷을 입게 한 뒤, 전진의 제4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임시로 부견의 사당을 세우고, 대사면을 선포하였으며, 연호를 '태안'(太安)으로 개원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9월, 부비는 백관을 설치하고, 장자를 시중•사공•상당군공으로, 왕영은 사지절•시중•도독중외제군사•거기대장군•상서령•사도•녹상서사•청하공으로, 왕등은 산기상시•중군대장군•사예교위•양평군공으로, 부충은 좌광록대부•상서좌복야•서평왕으로 각각 삼았다. 또, 구석자(俱石子)는 위장군•복양공, 좌장사 양보(楊輔)는 상서우복야•제양공, 우장사 왕량(王亮)은 호군장군•팽성공로 임명되었다. 강익이(強益耳)와 양창(梁暢)은 시중, 서의(徐義)는 이부상서로 임명되었으며, 모두 현공(縣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나머지 봉작과 임명도 차등있게 이루어졌다. 이때 부비는 자신의 처인 양씨(楊氏)를 황후로, 아들 부녕(苻寧)을 황태자로 세우고, 부수(苻壽)를 장락왕, 부창(苻鏘)을 평원왕, 부의(苻懿)를 발해왕, 부창(苻昶)을 제북왕으로 봉하였다.
안서장군 여광이 서역에서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여 의화(宜禾)에 도착하였다. 전(前) 양주자사(涼州刺史) 양희(梁熙)는 고창태수 양한(楊翰)의 간언을 무시하고, 아들 양윤(梁胤)을 응양장군으로 삼아 군사 50,000명으로 주천(酒泉)에서 여광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양윤의 군대는 여광에게 패배하였고, 양희는 무위태수 팽제(彭濟)에게 잡혀 여광에게 넘겨지니, 여광이 그를 죽였다. 이후 전진의 건위장군•서군태수 삭반, 분위장군•주천태수 송호(宋皓) 등도 모두 여광에게 처형당했다. 이에 상서령•위창공 부찬(苻纂)은 관중을 버리고 부비가 있는 진양으로 도망쳤고, 부비는 그를 태위로 임명하고 동해왕에 봉하였다.
모용수에게 항복했던 부성후 부정(苻定), 고성남 부소(苻紹), 고읍후 부모(苻謨), 중합후 부량(苻亮)은 부비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하북에서 진양으로 사신을 보내 부비에게 사죄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11월, 부비는 부정을 정동장군•기주목(冀州牧)으로, 부소를 진동장군•도독기주제군사(都督冀州諸軍事)로, 부모를 정북장군•유주목(幽州牧)으로, 부량을 진북장군•도독유병2주제군사(都督幽并二州諸軍事)로 임명하고 모두 군공(郡公)으로 작위를 올렸다. 전진의 중산태수 왕연은 신평(新平)의 저족 출신으로, 박릉(博陵)을 굳게 지키며 모용수에게 귀부하지 않았다. 이에 부비는 그를 평동장군•평주자사(平州刺史)로 삼았다.
전진의 옛 장수들인 좌장군 두충,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통, 하주자사(河州刺史) 모흥(毛興), 익주자사(益州刺史) 왕광(王廣), 남진주자사(南秦州刺史) 양벽(楊璧), 위장군 양정 모두 농우(隴右)에서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부비의 즉위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요장을 토벌하겠다 밝혔다. 부비는 크게 기뻐하며 부정을 표기대장군•옹주목(雍州牧)으로, 두충을 정서대장군•양주목(梁州牧)으로, 왕통을 진서대장군으로, 모흥을 거기대장군으로, 양벽을 정남대장군으로, 왕광을 안서대장군으로 삼고, 모두 개부의동삼사와 산기상시의 관직을 추가로 수여하여, 주목(州牧)의 지위를 올려 주었다.
당시 전진은 모용수의 후연, 걸복국인의 서진, 서연, 요장의 후진, 동진과 모두 대적해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부비는 아직 전진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왕영에게 명령해 모용씨와 요씨를 토벌하자는 공문을 서쪽의 관중과 농우 지방에 뿌리도록 했다. 이에 왕영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써서 여러 주군(州郡)에 퍼뜨렸다.
“대행황제(大行皇帝, 부견)께서 불행히 천하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만승의 제국은 주인을 잃고 혼란에 빠져 있다. 이에 선제의 장자이신 정동대장군•장락공 부비께서 천명에 따라 대통을 이어받으셨으니, 그 위엄은 천하를 떨치고, 그 덕은 온 우주에 퍼져 나가며, 그 정치는 성왕과 무왕의 유풍을 잇기에 충분하다.
나, 왕영(王永)은 사공(司空) 장자 등과 더불어, 하늘과 인간의 뜻을 따라 장락공을 높이 받들어 대통을 잇게 하였고, 슬픔 속에서도 장군들을 모아 밤낮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오직 대국의 치욕을 씻고,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모용수가 관동에서 야수와 같은 횡포를 부리고 있으며, 모용홍과 모용충은 수도 장안에서 악행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로 인해 황제의 위엄은 멸시당하고, 종묘는 무너졌다. 강적(羌賊) 요장은 이 기회를 틈타 반역을 일삼고 있으며,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이다. 나는 여러 대에 걸쳐 황실의 은혜를 받아왔기에, 이 반역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우리와 함께 왕도를 따르는 제후들과 공후들, 신하는 이 나라를 지키고 군주를 보위하는 것이 곧 의무이다.
지금 상제께서 하늘의 권위를 받아 다시 세상에 정의를 밝히시려 하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빌어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군사 30만 명이 정의의 깃발 아래 모였으니, 이내 소강(少康)과 광무제(光武帝)의 업적을 본받아 이루게 될 것이다. 위장군 구석자를 선봉으로 삼고, 사공 장자를 중군 도독으로 삼아 천하의 의를 펼칠 것으로, 하늘과 땅은 이들의 정의를 알고 있으며, 이제 원흉을 섬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정의를 세울 것이고, 오직 힘을 다해 이 땅에 새로운 평화를 안겨줄 것이다.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힘을 합쳐 진정한 대업을 이룩할 때가 도래하였다."
나, 왕영(王永)은 사공(司空) 장자 등과 더불어, 하늘과 인간의 뜻을 따라 장락공을 높이 받들어 대통을 잇게 하였고, 슬픔 속에서도 장군들을 모아 밤낮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오직 대국의 치욕을 씻고,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모용수가 관동에서 야수와 같은 횡포를 부리고 있으며, 모용홍과 모용충은 수도 장안에서 악행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로 인해 황제의 위엄은 멸시당하고, 종묘는 무너졌다. 강적(羌賊) 요장은 이 기회를 틈타 반역을 일삼고 있으며,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이다. 나는 여러 대에 걸쳐 황실의 은혜를 받아왔기에, 이 반역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우리와 함께 왕도를 따르는 제후들과 공후들, 신하는 이 나라를 지키고 군주를 보위하는 것이 곧 의무이다.
지금 상제께서 하늘의 권위를 받아 다시 세상에 정의를 밝히시려 하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빌어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군사 30만 명이 정의의 깃발 아래 모였으니, 이내 소강(少康)과 광무제(光武帝)의 업적을 본받아 이루게 될 것이다. 위장군 구석자를 선봉으로 삼고, 사공 장자를 중군 도독으로 삼아 천하의 의를 펼칠 것으로, 하늘과 땅은 이들의 정의를 알고 있으며, 이제 원흉을 섬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정의를 세울 것이고, 오직 힘을 다해 이 땅에 새로운 평화를 안겨줄 것이다.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힘을 합쳐 진정한 대업을 이룩할 때가 도래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12월, 후연의 모용린이 박릉을 공격해 뽑고, 평주자사 왕연과 고안후 부감(苻鑑)을 잡아 죽였다. 창려태수 송창이 오환족과 선비족 탁발부의 군대를 이끌고 왕연을 구원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여 구원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부비가 송창을 평주자사로 삼았다.
태안 2년(386년) 정월, 부비가 다시 왕영을 사도로 삼고 상서(尚書)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이부상서 서의를 상서령으로 삼고 우광록대부를 더해주었다.
태안 2년(386년) 4월, 하주목 모흥과 익주목 왕광이 세력 다툼하다가, 마침내 왕광이 모흥에게 패배하였다. 왕광은 진주(秦州)로 도망쳤으나, 농서(隴西)의 선비족 필란(匹蘭)에게 사로잡혀 요장에게 보내졌다. 모흥은 그동안 왕광을 지원하던 진주목 왕통을 상규(上邽)에서 공격하려 하였으나, 부한(枹罕)의 여러 저족들이 전쟁의 고통에 지쳐 더 이상 명령을 따르기 힘들어하여 결국 모흥을 살해하고, 건절장군 위평(衛平)을 사지절•안서장군•하주자사(河州刺史)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부비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태안 2년(386년) 5월, 부비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위평을 무군장군•하주자사로 삼았고, 여광은 거기대장군•양주목(涼州牧)•주천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비의 사신들은 모두 도중에 요장에게 붙잡혀 부비의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태안 2년(386년) 6월, 표기대장군 부정, 진동장군 부소, 정북장군 부모, 진북장군 부량 등이 다시 모용수에게 투항하였다.
부비는 중외제군사•사도•상서 왕영을 좌승상으로, 태위•동해왕 부찬을 대사마로, 사공 장자를 태위로, 상서령 서의를 사공으로, 사예교위 왕등을 표기대장군•의동삼사로, 상서좌복야 부충을 거기대장군•상서령•의동삼사로, 위장군 구석자를 위대장군•상서좌복야로 삼았다. 나머지 이들의 관직 변동은 없었다. 좌승상 왕영은 다시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하(夏) 왕조는 궁이(窮夷)의 난을 겪었으나, 소강(少康)이 그 난을 극복한 덕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왕망은 평제(平帝)를 독살하였으나, 세조(世祖, 광무제)가 한(漢) 왕조를 다시 부흥시켰고, 이후 한나라의 운명은 106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하늘이 큰 시련을 내렸고, 강호(羌胡)족들이 중국을 교란하였다. 선제(先帝)께서 서거하시고 도적들이 수도를 침범하여 궁궐을 야만족의 소굴로 만들었으며, 중원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심한 고통에 빠졌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 진나라의 사직을 버리지 않으시어, 위대한 군주께서 황위를 이어받게 하셨다. 황제께서는 성스러운 덕을 지니고 있으며, 그 도덕적 위엄은 광무제에 필적한다. 군주께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마땅히 중흥(中興)의 공적을 이룩하고,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이다.
요장은 잔혹하고, 모용수는 포악하여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집안을 멸망시키고, 주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집들을 불태우며, 무덤을 파헤치고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비록 황건적과 적미의 난이 아홉 주(九州)를 휩쓸고 사방에서 폭력을 저질렀으나, 이 두 오랑캐의 해악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고 군사를 일으킬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공후(公侯)와 지방의 목수(牧守), 요새의 장수들과 향촌의 호족들이 모두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해야 할 때다. 각자가 통솔하는 병력을 이끌고, 겨울 초순에 임진(臨晉)에서 황제의 대군과 합류하라."
이에 천수(天水)의 강연(姜延), 빙익(馮翊)의 구명(宼明), 하동(河東)의 왕소(王昭), 신평(新平)의 장안(張晏), 경조(京兆)의 두민(杜敏), 부풍(扶風)의 마랑(馬朗), 건충장군 고평목(高平牧), 관도위 왕민(王敏) 등이 모두 격문을 받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각자가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부비에게 사자를 보내 복종하였다. 이들은 모두 장군으로 임명되고 열후(列侯)로 봉해졌다.요장은 잔혹하고, 모용수는 포악하여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집안을 멸망시키고, 주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집들을 불태우며, 무덤을 파헤치고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비록 황건적과 적미의 난이 아홉 주(九州)를 휩쓸고 사방에서 폭력을 저질렀으나, 이 두 오랑캐의 해악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고 군사를 일으킬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공후(公侯)와 지방의 목수(牧守), 요새의 장수들과 향촌의 호족들이 모두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해야 할 때다. 각자가 통솔하는 병력을 이끌고, 겨울 초순에 임진(臨晉)에서 황제의 대군과 합류하라."
관군장군 등경(鄧景)은 강족 출신으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팽지(彭池)를 점령하여 두충과 함께 요장에게 대항하였다. 이에 부비는 사자를 보내 등경을 경조윤으로 삼았다.
태안 2년(386년) 7월, 평량태수 김희(金熙), 다란부(多蘭部) 선비족의 수령인 북부도위 몰혁간이 선선왕 호원(胡員), 질호강중랑장 양구노(梁茍奴) 등과 연합해, 요장의 좌장군 요방성(姚方成)과 진원장군 강경(強京)을 손구곡(孫邱谷)에서 대패시켰다.
부한의 저족들은 위평이 나이가 들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려고 논의했으나, 권세있는 저족 집안 출신이라는 그의 배경을 두려워해 며칠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저족 중 한 명인 담청(啖青)이 나서서 저족 장수들을 설득해, 위평을 끌어내리고 젊고 용맹한 황족인 부등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부한의 저족들에 의해 사지절•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무군대장군•옹하2주목(雍河二州牧)•약양공(略陽公)으로 추대받은 부등은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농(隴)을 넘어서 남안(南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부등은 남안에 자리를 잡고, 부비에게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받드기를 청하였다.
태안 2년(386년) 8월, 부비가 부등을 정서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사지절, 주목과 도독 등의 직위는 부등이 스스로 칭한 대로 모두 수여하였으며, 아울러 그를 남안왕(南安王)에 봉하였다. 또한, 부비는 사공 서의를 우승상으로 임명하여 표기대장군 왕등과 함께 진양을 수비하게 하고, 상서우복야 양보를 호관으로 보내 지키게 한 뒤, 자신은 40,000 군대를 거느리고 친정하여 평양(平陽)에 주둔하였다.
태안 2년(386년) 9월, 진주목 왕통이 진주를 들어 요장에게 투항하였다.
장안을 버리고 모용수와 합류하러 가던 서연의 군주 모용영은 부비의 군대가 평양에 주둔하여 길을 막는 것을 보고, 자신이 안전하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부비에게 사자를 보내 동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글을 모용영에게 내렸다.
"선비(鮮卑) 모용영은 과거 우리 군대의 기장(騎將)으로서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가를 위태롭게 한 자다. 그가 반역을 계속하며 이제 도망가려 한다. 이것을 용서할 수 있다면, 도대체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후 부비는 좌승상 왕영과 동해왕 부찬에게 명을 내려, 금위군(禁衛軍)과 호기군(虎旅軍)을 이끌고 모용영을 협공하게 하고, 위대장군 구석자를 전봉도독으로 삼아 모용영의 무리를 공격하였다.태안 2년(386년) 10월, 왕영과 모용영과 양릉(襄陵)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왕영이 거느리던 전진군은 대패하고 부비의 최측근인 왕영과 구석자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양릉 전투)
당초 동해왕 부찬이 장안에서 왔을 때, 그의 휘하에는 3,000여 명의 용맹한 병사들이 있었으나, 부비가 그들을 의심하여 모두 흩어지게 한 적이 있었다. 왕영이 패배하자, 부비는 부찬에게 살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남쪽 동원(東垣)으로 도망쳤다. 졸지에 떠돌이 신세가 된 부비는 병사들을 수습한 후, 낙양(洛陽)을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부비가 남은 병력으로 낙양을 향해 진군하던 중, 동진의 장군 환석민이 양위장군 풍해(馮該)를 보내어 섬(陜)에서 그를 가로막고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사기가 바닥난 전진군은 풍해의 공격에 궤멸당했고, 부비는 전사하였으며, 그의 태자 부녕, 장락왕 부수, 상서좌복야 왕부(王孚), 이부상서 구조(苟操) 등은 모두 동진군에게 붙잡혀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보내졌다.(섬성 전투) 동진 조정은 이들을 용서하여 처벌하지 않고, 동진에 투항한 부견의 태자 부굉에게로 보냈다.
한편, 동해왕 부찬은 그의 동생인 상서•수평후(水平侯) 부사노(苻師奴)와 함께 양릉 전투 이후 남은 패잔병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행성(杏城)을 점거하였다. 그 외의 전진의 왕공(王公)과 백관은 모두 모용영에게 붙잡혔다. 부비는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였고, 훗날 황제로 즉위 부등이 그를 추존하여 '애평황제(哀平皇帝)'라는 시호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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