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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월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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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石越
(? ~ 384)

전진의 인물. 자와 출신지는 불명.

2. 생애

건원 5년(369년) 11월, 황문랑을 지내고 있던 석월은 천왕 부견의 명령을 받고 전연에 사신으로 갔다. 전연의 태부 모용평은 석월에게 사치와 호화로움을 과시하여 연나라의 부와 번영을 자랑하였는데, 고태와 태부 참군 유정(劉靖)이 모용평에게 간했다.
"석월의 말은 허황되고 그 시선은 먼 곳을 보고 있으니, 이는 우호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틈을 엿보려는 것입니다. 무력을 과시하여 그들의 계략을 꺾는 것이 상책이나, 지금 사치로움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용평은 끝내 이를 따르지 않았고, 고태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석월은 귀국한 후, 천왕 부견에게 전연을 정벌할 만하다며 자신하였고, 부견은 그를 정로장군으로 삼았다.

건원 14년(378년) 2월, 천왕 부견이 장락공 부비를 정토대도독으로 삼아 무위장군 구장(茍萇), 상서 모용위와 더불어 보•기 70,000명을 이끌고 동진의 양양(襄陽)을 침공하게 하였다. 이때 형주(荆州) 자사 양안이 이끄는 번성(樊城)과 등성(鄧城)의 무리가 선봉이 되었고, 석월은 정예기병 10,000기를 인솔해 노양관(魯陽關)을 넘어 양양 공략을 지원하였다. 경조윤 모용수와 양무장군 요장은 50,000 병력을 거느리고 남향(南鄉)으로 출발하였으며, 영군장군 구지(茍池)와 우장군 모당, 강노장군 왕현(王顯)은 40,000 병력을 거느리고 무당(武當)으로 향하여 양양을 압박하였다.

건원 14년(378년) 4월, 전진군이 면수(沔水) 이북에 이르렀을 때, 동진의 양주(梁州) 자사 주서는 면수가 범람한 것을 보고는 전진군에게 배나 뗏목이 없어 도하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대비치 않았다. 하지만 석월은 기병 5,000기와 함께 재빠르게 수심이 얕은 한수(漢水)로 달려가 그곳에서 강을 건넜고, 이어서 양양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크게 놀란 주서는 중성(中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석월은 양양성 외곽을 무너뜨리고, 배 100여 척을 노획하여 면수 이북에 있는 나머지 병력들을 건너게 하였다. 장락공 부비의 본대가 양양의 중성을 포위 공격하자, 동진의 거기대장군 환충은 전진군의 기세가 두려워 감히 양양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건원 15년(379년) 2월,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주서가 전진에 투항하였다. 이후 석월은 둔기교위로 임명되었다.

건원 16년(380년) 5월, 행당공 부락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월은 동래(東萊)에서 기병 10,000여 기를 거느리고 바닷길로 400리를 나아가, 화룡(和龍)을 습격하여 부락의 장수 평규(平規)를 참수하고 유주(幽州)를 모두 평정하였다.

건원 16년(380년) 8월, 천왕 부견이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고, 석월을 평주자사•영 호선비중랑장(領護鮮卑中郎將)로 삼아 용성(龍城)에 주둔케 하였다. 이후 태자좌위솔로 옮겨져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다.

건원 18년(382년) 10월, 천왕 부견이 동진 정벌에 대해 의논하고자 태극전(太極殿)에 군신을 모아놓고 그 의견을 물었다. 이때 석월이 말했다.
"올해는 두수(斗宿)[1]가 복덕(福德)을 주관하니, 이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장강(長江)의 험준함을 지키고 있으며, 백성들이 그를 위해 힘쓰고 있으니, 지금은 공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부견이 말했다.
"과거 무왕(武王) 주왕(紂王)을 공격할 때, 세차(歲次)를 거스르고 점괘를 무시하였다. 이렇듯 천도(天道)란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법이다. 또, 부차(夫差) 손호(孫皓) 모두 장강에 기대어 강호를 지키려 하였으나,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지금 나의 군사가 강을 건너기만 해도 강물의 흐름을 끊기에 충분하거늘, 적이 어찌 험준함만 믿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석월이 답했다.
"삼국의 군주(주왕, 부차, 손호)는 모두 음란하고 무도하여 적국(敵國)이 그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진(晉)은 비록 덕이 없더라도 큰 죄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우선 군사를 멈추시고, 곡식을 쌓아 그들의 허점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이후로도 신하들이 제각기 이익과 해를 말하였으나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건원 19년(383년) 5월, 동진의 거기대장군 환충이 양양을 탈환하기 위해 100,000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으며, 동시에 전장군 유파, 관군장군 환석건, 진위장군 환석민을 면수 이북으로 파견해 여러 성을 공략케 하였다.

건원 19년(383년) 6월, 환석건 등이 만세(万歳), 축양(筑陽)을 함락시킴으로써 연이어 기세를 올리자, 석월은 정남장군 부예(苻叡), 관군장군 모용수, 좌위장군 모당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양양을 구원하러 출진하였다. 석월의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환충은 양양의 포위를 풀고 면수 이남으로 내려가 주둔하였다.

건원 19년(383년) 7월, 석월과 모용수는 선봉에 서서 면수에 이르렀다. 이때 모용수는 계책을 내어 병사들에게 명해 횃불 10개를 나뭇가지에 묶게 하고는, 밤이 되었을 때 불을 붙여 들고 서있게 하였다. 이를 본 환충은 전진군의 병력이 무척 많다 여기고, 두려운 마음에 모든 군대를 거두어 상명(上明)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석월은 옹주목(雍州牧)으로 임명되었다.

건원 19년(383년) 8월, 천왕 부견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진을 정벌을 선언하며 조서를 내려 10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 석월은 정남대장군 부융의 휘하로 배속되어 선봉에 섰다.

건원 19년(383년) 11월, 전진군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고 물러남에 따라 전진에 복속되었던 여러 이민족과 군벌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천왕 부견은 반란들을 제압하고자 권익의 반대를 묵살하고 모용수를 하북으로 보냈으며, 장수 이만(李蠻), 민량(閔亮), 윤고(尹固)와 3,000 병력을 파견해 모용수를 지원하였다. 석월도 효기장군에 임명되어 정예병 3,000명을 거느리고 업(鄴)으로 가 장락공 부비를 보좌하였다.

당시 모용수는 은밀히 전연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나라 부활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안(新安)에서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洛陽)을 위협하였다. 이에 천왕 부견이 부비에게 명을 내려 모용수를 보내 적빈의 난을 진압하게 하라 명하니, 석월이 반대하며 부비에게 말했다.
"왕사(王師)가 패배한 뒤로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정령족 적빈이 병사를 일으켰더니 10일 만에 이미 수천 명이 모인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모용수는 연나라의 구신으로,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력을 나누어 주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부비가 답했다.
"어차피 모용수가 업(鄴)에 있으면 호랑이를 침상에 두거나 교룡을 거처에 두는 것과 같아 항상 팔꿈치 아래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해야했는데, 이참에 지금 그를 멀리 내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소? 더군다나 적빈은 흉폭하고 배반할 성향이 있어, 모용수 아래에서 순종하지 않을 것이오. 두 호랑이가 싸우면 우리가 이를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변장자호(卞莊刺虎: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게 하여 이득을 취하는)'의 전략이오."
이후 부비는 모용수가 약한 병사 2,000여 명과 손상된 갑옷과 무기를 주고 적빈을 토벌하게 하였다. 또,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에게 저족 기병 1,000기를 주어 모용수의 부장으로 배속시킨 뒤, 비밀리에 부비룡을 따로 불러 당부하였다.
"모용수는 삼군(三軍)의 장수이니, 장차 모용수가 수상한 음모를 꾸미면 경이 힘써 그를 도모하시오."

과거 전연의 도읍이었던 업성 내에는 연나라의 종묘가 있었으므로, 모용수는 떠나기 전에 부비에게 종묘에 참배하게 해달라 청하였다. 하지만 부비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용수는 변장을 하고 업성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였다가 초소에서 관리에게 들켜 출입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이에 모용수는 격노하여 초소의 관리들을 베어 죽이고, 초소를 불태운 뒤에 떠났다. 이를 들은 석월이 부비에게 말했다.
"모용수가 감히 경계를 무시하여 관리들을 죽이고 정각을 불태웠으니, 반역의 의도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를 기회로 모용수를 제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부비가 답했다.
"회남(淮南)의 패배 이후, 모용수는 승여(乗輿)를 북쪽으로 호위하는 공로를 세웠소. 이를 잊어서는 아니 되오."
석월이 다시 말했다.
"모용수가 연나라에게 충성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완전히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비룡은 끝내 석월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석월은 물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한탄하였다.
"공(公: 장락공 부비) 부자(父子)는 사소한 인(仁)을 좋아하고 큰 계책을 돌보지 않으니, 결국에는 마땅히 누군가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이 열인(列人)에서 거병하여 하북 일대를 휩쓸고 다니자, 부비는 석월에게 보•기 10,000여 명을 주어 모용농을 토벌케 하였다. 석월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농이 말했다.
"석월은 지혜와 용기가 있는 인물로, 지금 남쪽에서 오는 대군을 막지 않고 여기 온 것은 왕(모용수)을 두려워하면서 나를 얕보는 것이다. 석월은 반드시 대비하지 않을 것이므로 만반의 대비를 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그를 마땅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모용농의 부하들은 열인성(列人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모용농이 다시 말했다.
"병사를 잘 다루는 자는 병사의 마음을 결속시킬 뿐, 그것 이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의병을 일으켜 오로지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의당 산과 강을 성벽으로 삼아야지, 어찌 열인을 수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같은 달 14일[2], 석월의 군대가 열인 서쪽에 이르자, 모용농은 장수 조추(趙秋)와 참군 기모등(綦母滕)을 보내 석월을 공격하고 그 선봉을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석월군의 기세는 크게 꺾이니, 참군 조겸(趙謙)이 모용농에게 말했다.
"석월의 갑옷과 무기는 정교하나 병사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니 속히 공격하심 좋습니다."
이에 모용농이 답했다.
"그들의 갑옷은 몸에 있으나 우리의 갑옷은 마음에 있다.[3] 대낮에 싸우면 병사들이 외형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니, 어두워질 때 공격하는 것이 필승의 계책이다. 군사들에게 엄히 준비시키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
이때 석월이 진영 둘레에 목책을 만들어 스스로를 굳게 지키려 하자, 모용농은 웃으며 장수들에게 말했다.
"석월의 병사는 정예하고 숫자가 많으나, 처음의 기세를 이용해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굳게 지키고자 하니, 나는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겠구나!"
이윽고 해가 지기 시작하니, 모용농은 북을 울려 성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출진 준비를 하였다. 아문 유목(劉木)이 먼저 모용농에게 나아가 석월의 진영을 공격하기를 청하자, 모용농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어찌 네 청만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의 용맹함이 가상하니 선봉을 맡기겠다."
이후 출진하게 되었을 때, 유목은 장사 400명과 함께 선봉에 서서 석월의 목책을 뛰어넘어 안으로 진입하였고, 석월의 군대는 이로써 큰 혼란에 빠져 금새 무너졌다. 모용농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군을 휘몰아 진격하니, 석월은 대패하여 그 군대가 전멸하였고, 석월은 모용농의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용농은 석월의 목을 베고, 그 수급을 아버지 모용수에게 바쳤다. 비슷한 시기에 광평공 부휘를 도와 낙양을 수비하던 진군장군 모당도 적빈에게 격파되어 참수당하였다. 전진에서 지략 있고 용맹하기로 두 장수가 연이어 전사했다는 소식이 천하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전진의 상황은 더더욱 암울해지기 시작하였다.


[1] 두수는 동양의 3원 28수 중 하나로, 중국에서 오월 지방을 가리킨다. [2] 384년 정월 신묘일. 음력으로 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3일이다. [3] 병사들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비록 갑옷이 없더라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