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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제9대 국왕
장천석 | 張天錫 |
|||
출생 | 346년 | ||
전량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
|||
사망 | 406년 (향년 61세) | ||
재위기간 | 9대 국왕 | ||
363년 ~ 37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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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 장(張) | |
휘 | 천석(天錫) | ||
부모 |
부친
장준 모친 태비 유씨 |
||
형제자매 | 3남 ?녀 중 삼남 | ||
자녀 | 2남 | ||
자 | 순하(純嘏) | ||
시호 | 동진: 도공(悼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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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마지막 군주.자는 순하(純嘏)였다. 자신의 조카인 제8대 충왕 장현정을 무참히 살해하고 전량의 제9대 군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전진의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에게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항복했고, 383년 11월에 일어난 역사적인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망하자 남하하여 동진으로 귀순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제4대 세조 문왕 장준과 그가 총애하던 미인 유씨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얼마 안가 문왕 장준이 승하했다. 어려서부터 문장을 짓는 재주가 있어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이복형인 제7대 위왕 장조가 칭제할 때 장녕왕(長寧王)에 봉해졌다.승평 5년(361), 어린 조카인 장현정이 즉위하고 시간이 지나 반정공신인 장관 형제를 척살한(송혼의 정변, 359) 송혼의 동생 송징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를 시기한 장옹이 9월에 군사를 일으켜 송징과 송씨 가문을 제거했다.(장옹의 정변) 어린 국왕 장현정은 장옹을 중호군, 장천석을 중령군에 임명하여 함께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하지만 장옹은 오만하고 무도하여, 붕당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고 형벌을 남발하니 전량의 백성과 관료 모두에게 원망을 샀다. 이에 장천석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인 유숙, 조백구 등과 암살 계획을 꾸몄다.
361년 11월, 장천석과 장옹이 입조하기 위해 함께 궁문에 들어설 때였다. 그들 뒤에 있었던 유숙과 조백구가 사전에 모의한대로 칼을 빼들고 장옹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장옹이 공격을 모두 피하는 바람에 암살이 지체되자 장천석과 함께 일단 궁 안으로 도망쳤다. 제대로 빡친 장옹은 집으로 도망친 뒤 자신의 사병 300명에게 갑주를 입히고 궁궐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장천석이 궁궐 옥상으로 올라가 소리쳤다.
"장옹은 흉악하고 반역적이며, 도의도 털끝만큼 없어 이미 송징을 죽였고, 이번엔 나와 우리 가문을 전복하려고 한다! 너희 장사(將士)들은 양(凉)의 신하들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가? 내가 잡으려는 자는 오로지 장옹뿐이니 나머지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
속사정과는 별개로 이미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에 쳐들어오는 거부터 외관상 반역이다 보니, 장천석의 호통을 들은 사병들은 아차 싶어 그 자리에서 해산해버렸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역적이 될 위기에 처한 장옹은 절망하여 들고 있던 칼로 자결했고, 이후 우두머리가 사라진 장옹의 무리들은 빠르게 정리당했다. 장옹을 제거하고 1인자가 된 장천석은 관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어 홀로 정권을 장악했다.(장천석의 제1차 정변)2.2. 왕위 찬탈
승평 7년(363), 장현정의 모후인 왕태비 곽씨가 대신 장흠 등과 함께 권신인 장천석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장흠 등은 자살하고 곽씨는 유폐당하자 어린 장현정이 왕위를 양도하려 했지만 장천석이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야밤에 우장군 유숙, 양경 등 측근들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쳐 장현정을 죽이도록 했다. 장현정은 그날 밤에 살해당했고, 장천석은 왕이 병으로 돌연사했다고 공표한 뒤 스스로 전량의 제9대 군주가 되었다.(장천석의 제2차 정변) 장천석은 자신의 어머니인 미인 유씨를 왕태비로 모시고, 동진에 보고하기 위해 사마 윤건을 수도 건강(建康)에 파견했다.왕에 오른 장천석은 그의 형이었던 위왕 장조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방탕하고 색을 밝혀 정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궁궐 정원에서 연회를 즐겨 열었으며, 자신의 찬탈을 도운 유숙과 양경에게 장씨 성을 하사하고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었다. 양주의 민심이 흉흉하여 장천석의 사촌동생인 중랑 장헌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승평 8년(364), 장천석의 즉위 소식을 들은 전진의 명군 부견이 사자를 파견해 대장군, 양주목, 서평공으로 삼았다.
승평 10년(366), 동진에서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 장천석을 대장군, 대도독, 독농우관중제군사,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평공에 임명했다. 본래 동진을 섬기고자 했던 장천석은 임명을 받자마자 전진의 부견과 단교했다.
승평 11년(367), 장천석은 아들 장대회를 세자에 임명했다가 나중에 그를 고창공(高昌公)으로 삼아 쫓아내고, 더 총애하는 막내아들 장대예를 세자로 삼았다. 그 해(367), 전량에 반란을 일으켰던 이엄이 아들 이순을 전진에 보내 항복하면서 농서의 땅이 전부 전진에 넘어갔다. 장천석은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한(枹罕)에서 전진의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한족 출신의 왕맹과 격돌했지만 패배하여 약 10,000여 명이 전사하고 7,000여 명이 전진군에 사로잡혔다. 농서가 전진에 넘어간 뒤로 전진은 지속적으로 전량을 침공해오니 국경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당시 전진은 매우 강성했으므로(왕맹치진) 장천석은 제단을 쌓아 가축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등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
함안 2년(372), 전진의 공격이 점점 심해지자 종사중랑 한박을 동진의 분절장군 강묘(康妙)에게 보내 동진에 맹세하는 한편, 권신이자 명장인 대사마 환온에게도 내년 여름철에 거병할테니 같이 전진을 치자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환온은 이미 세 차례의 북벌을 모두 실패한 직후라 군대를 일으키지 못했고, 373년에 환온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2.3. 전량의 멸망
함안 6년(376) 8월, 전진의 부견이 130,000명의 대군을 일으켜 대대적인 전량 정벌을 선포했다. 부견은 염부(閻負)와 양수(梁殊)를 사자로 보내 투항할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장수 구장, 모성, 양희, 왕변, 요장 등이 각자 대군을 이끌고 하서에 주둔하도록 했다. 대신들과의 의논 끝에 결사항전을 결심한 장천석은 사신으로 온 염부와 양수를 죽이고 용양장군 마건에게 20,000명의 군사를 주어 전진군과 맞서도록 했다.염부와 양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진군은 기다렸다는 듯 강을 도하하여 전량의 수도인 고장(姑臧)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전진의 군대가 일제히 석성진(石城津)과 청석진(清石津)의 두 갈래로 도하하니, 하회성을 지키던 전량의 효열장군 양제(梁濟)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고, 권축성은 저항했으나 순식간에 함락당했다. 앞에 위치한 성들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연이어 무너지자 마건은 겁을 먹고 양비(楊非)로 물러나 그곳을 굳게 지켰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장천석은 이번엔 정동장군 상거(常據)에게 30,000명을 주어 홍지(洪池)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50,000명을 거느리고 금창성에 주둔했다. 안서장군 송호(宋皓)가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장천석은 대노하여 송호를 선위호군으로 강등했다.
강족 출신 장군인 요장이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양비에 도착했다. 공포에 질린 마건은 10,000명을 이끌고 요장에게 투항했고, 항복하길 거부한 나머지 10,000명의 전량군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홍지에 주둔해 있었던 상거의 전량군 또한 구장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고, 참모 석구가 전사했다. 패배한 상거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쳤지만 차마 주군인 장천석을 볼 낯이 없어 갑주를 벗고는 금창성 쪽으로 절을 한 뒤 자결했다.
전진의 군대가 어느새 금창성 부근으로 접근하자 장천석은 조충철(趙充哲)에게 군사를 주어 요격을 시도했다. 조충철은 적안(赤岸)에서 전진군과 크게 싸웠지만 대패하여 조충철은 전사하고 전량군 38,000여 명이 전사했다. 장천석은 남은 친위대 수천 명을 데리고 전진군을 막기 위해 금창에서 나왔으나,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금창을 버리고 고장으로 퇴각했다. 다음날, 전진군이 고장성 앞까지 도착하자 동진으로 도주하려던 장천석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전진군의 장수 구장은 장천석을 사로잡아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니 양주의 모든 군, 현들이 항복하면서 376년에 전량은 멸망했다. 선소제 부견은 잡혀온 장천석에게 장안의 저택을 내어주고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歸義侯)에 임명하는 등 환대해주었다.
2.4. 동진으로의 귀순
태원 8년(383), 화북을 통일한 세조 선소제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켰을 때 장천석을 정남사마로 삼아 동진 정벌의 총사령관인 동생 부융을 보좌하도록 했다. 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패배한 이후 전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천석은 장안에서 탈출하여 동진으로 도망쳤다. 동진의 열종 효무제 사마요는 그를 산기상시, 좌원외에 임명하는 동시에 과거 대대로 누려오던 서평공 작위까지 회복시켜 주었다.비록 한족의 나라에 있기를 원해 도망쳐 왔지만 장천석의 동진 망명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동진의 관리들은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로 정천석을 미워하며 자주 헐뜯었는데, 결국 이런 모욕적인 취급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안그래도 미워하던 인물이 정신까지 이상해지자 동진의 관리들은 장천석을 완전히 무시하며 하대했다. 심지어 장천석은 빈손으로 내려왔기에 집도 재산도 없어 빈곤하게 살았고, 387년에는 그의 막내아들 장대예가 전량을 부흥시키려다가 후량의 저족 군주인 여광에 의해 참수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어야만 했다. 후에 장천석을 불쌍히 여긴 효무제가 여강태수 직책도 겸하게 하여 생활고 문제는 조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융안 원년(397), 사마원현이 정신박약아인 안제 대신 정사를 처리하며 정권을 잡았다. 사마원현은 정신이 이상한 관리로 소문난 장천석을 심심할 때마다 대전으로 초대해 그를 희롱하고 놀리며 즐거워했다.
원흥 원년(402), 환온의 아들 환현이 사마도자 부자를 죽이고 대권을 잡았을 때 장천석은 호강교위, 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되었다. 당연하지만 양주는 당시 저족 여씨의 후량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허울 뿐인 직책이었다.
의희 2년 (406), 장천석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래도 한때 전량의 군주였던지라 장천석 사후 공제는 그를 금자광록대부[2]로 추증했고, 도공(悼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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