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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서연 7대 국군
모용영 | 慕容永 |
|||
출생 | 연대 미상 | ||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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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394년 8월 | ||
서연
상당군 장자 (現 산시성 창즈시 장쯔현)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7대 국군 | ||
386년 3월 ~ 394년 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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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성씨 | 모용(慕容) | |
휘 | 영(永) | ||
조부 | 모용운(慕容運) | ||
자 | 불명 | ||
작호 | 하동왕(河東王) | ||
시호 | 없음 | ||
연호 | 중흥(中興, 386년~ 3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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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연의 마지막 군주.선비족 유력 귀족 집안인 방지(旁支) 출신으로, 그의 조부는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숙부인 서평왕 모용운(慕容運)이었다.
2. 생애
370년, 전진의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켰을 때 다른 선비족들처럼 장안으로 강제이주되었다. 부견이 쓸만하다 여긴 전연의 모용씨 황족이나 선비족에게 관직을 나누어 줄 때, 모용영은 관직을 받지 못한 채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장안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던 모용영은 가죽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처자식을 겨우 먹여살리는 궁핍한 생계를 이어나갔다.384년,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의 동생 모용홍이 관중에서 거병하여 서연을 건국하자, 모용영은 처자식을 데리고 장안을 빠져나와 모용홍에게 귀순했다. 모용홍은 그를 상서에 임명했다.
385년, 모용홍의 뒤를 이은 모용충이 장안에서 부견과 혈전을 벌일 때, 모용영은 여산(驪山)에서 전진의 좌장군 구지(苟池)와 우장군 구석자(俱石子)가 이끄는 5,000명의 병력을 궤멸시키고, 구지를 참수했다. 이 공으로 모용영은 황문랑으로 승진했다.
386년, 모용충이 마침내 장안을 점령했지만 후연의 모용수와 후진의 요장이 두려워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좌장군 한연(韓延)과 장수 허목말(許木末)이 모용충의 소극적인 모습에 실망한 선비족들을 선동해 모용충을 살해하고 단수를 옹립했다. 단수의 옹립은 한연의 독단으로 이루어졌기에 당연히 모용부 선비족들은 크게 반발했고, 이내 모용영과 좌복야 모용항(慕容恒)에 의해 단수와 한연은 제거당했다. 모용영과 모용항은 서로 합의하여 후연에 있었던 모용의(慕容顗)를 불러와 제위에 앉혔다.
모용의는 모용영에게 장안을 맡긴 뒤, 자신은 선비족 300,000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후연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모용의는 도중에 모용항의 동생인 호군장군 모용도(慕容韜)에게 유인당해 임진(臨晉)에서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항은 분노하여 모용도를 버리고 떠났다. 얼마 안가 모용영이 무의장군 조운(刁云)과 함께 모용도를 치자, 모용도는 사마숙(司馬宿)을 보내 근려(勤黎)에서 요격을 시도했다. 모용영은 사마숙을 격파하고 그를 잡아 참수하니, 모용도는 두려워 형 모용항의 군영으로 도망쳤다.
모용항이 모용충의 아들 모용요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이미 선비족의 민심은 모용영에게 향했으므로, 모용항의 부하들은 모두 모용영에게 항복했다. 모용영은 힘이 빠진 모용항의 세력을 제거하고 모용요도 살해한 뒤, 모용홍의 아들 모용충을 황제로 옹립했다. 제위에 오른 모용충은 모용영을 태위, 수상서령에 임명하고 하동공에 봉했다.
386년 6월, 무의장군 조운 등이 정변을 일으켜 모용충을 죽이고 모용영을 하동왕으로 옹립했다. 모용영은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옹진양양사주목(雍秦梁凉四州牧), 하동왕을 자칭하면서 후연에 칭번했다. 7월에는 독고부의 유현(劉顯)이 후연에게 패망해 서연으로 망명해왔다.
386년 10월, 후진의 요장이 황하 서쪽까지 나아가 서연군을 무찌르는 바람에 모용영은 후진이 두려워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전진의 황제 부비가 40,000명의 병력을 모아 평양(平陽)을 점령해버리자, 모용영은 황급히 부비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가 동쪽으로 알아서 도망칠테니 제발 길 좀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부비는 서연의 세력을 손수 궤멸시킬 작정으로 출진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물러날 길이 없어진 모용영은 양릉(襄陵)에서 필사의 각오로 부비와 맞서싸워 전진군을 전멸시키고, 전진의 위대장군 구석자와 좌승상 왕영(王永)을 붙잡아 참수했다. 부비는 자신의 영토를 전부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기세가 한껏 오른 모용영은 북진하여 병주 상당군을 장악하고는 장자(長子)를 도읍으로 삼아 황제에 올랐다. 부비의 황후 양씨(楊氏)를 붙잡아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양씨가 검을 뽑아 저항하니 모용영이 죽였다.
388년 3월, 유주 대(代)에서 할거하던 허겸(許謙)이 후연에게 패배해 서연으로 도망쳤다.
389년 10월, 튀르크계 정령족(퇼레스)의 고제(故堤)가 후연의 기주자사 낙랑왕 모용온(慕容溫)을 암살하고 서연으로 도주했다.
390년 정월, 모용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진의 낙양을 쳤다. 낙양의 수비를 맡은 옹주자사 주서는 북쪽으로 이동해 황하를 건너 모용영의 군대를 요격했다. 모용영은 패퇴하여 북쪽으로 도망치니 주서가 상당군 고도(高都)까지 추격해왔다. 모용영은 주서에 의해 위기에 처했지만, 정령족의 적요(翟遙)가 낙양을 노린다는 급보를 듣고 주서가 동진군을 돌려 퇴각한 덕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391년 6월, 모용영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낙양의 하남군(河南郡)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동진의 하남태수 양전기에게 격파당했다. 7월에는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후연의 세조 성무제 모용수와 불화하여 후연과 교류를 끊고 서연과 화친했다.
392년 4월, 모용수가 활대(滑台)에서 정령족의 적요를 토벌하자, 적요는 서연에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영이 대신들을 불러모아 계책을 강구하니, 상서랑 포준(鮑遵)이
"그들이 서로 싸우면서 천천히 쇠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상책입니다."
라며 구원을 반대했다. 중서시랑 장등(張騰)은 관망하지만 말고 후연의 도읍인 중산(中山)을 습격할 것을 권했으나 모용영이 따르지 않았다. 이후 적요는 모용수에게 패배해 서연에 투항했고, 모용영은 그를 거기장군, 동군왕(東郡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1년 뒤, 적요가 모반을 꾸미다가 걸리자 모용영이 그를 주살했다.393년 11월, 후연의 황제 모용수가 서연 정벌을 선언하며 보•기 70,000명을 이끌고 중산에서 나와 업으로 향했다. 그리고 단양왕 모용찬(慕容瓚)을 진서장군에 삼아 용양장군 장숭(張崇)과 함께 서연의 무향공 모용우(慕容友)가 지키는 진양(晉陽)을 치게 하고, 정동장군 평규(平規)로 하여금 업의 서쪽으로 나아가 사정(沙亭)에서 서연의 진동장군 단평(段平)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모용영도 상서령 조운, 거기장군 모용종(慕容鍾)에게 50,000명의 군사를 주어 노천(潞川)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1개월 뒤, 모용수의 후연군은 업에 도착해 군을 정비했다.
394년 2월, 모용수가 마침내 주력을 거느리고 서연 정벌에 나섰다. 모용수는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태원왕 모용해는 광평군 부구(滏口)에서, 요서왕 모용농은 호관(壺關)에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사정을 통해 서연으로 진격했다. 모용수가 고의적으로 군대의 이동 경로를 유출시키니, 모용영은 군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후연군의 길목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모용영은 군량과 마초를 대벽(台壁)에 모으고, 자신의 조카인 정동장군 모용소일두귀(慕容小逸豆歸), 진동장군 왕차다(王次多), 우장군 늑마구(勒馬駒)에게 대벽을 지키도록 했다.
394년 4월, 모용수의 세 갈래 군대들이 갑자기 모두 나아가기를 멈추고 1개월 가까이 한 곳에 머물렀다. 모용영이 이를 기괴하게 여겨 모용수에게 어떤 속셈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모용영은 생각 끝에 모용수가 군대를 나눈 것은 사실 눈속임이고, 나중에 넓은 태행산(太行山) 길을 통해 기습해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흩어진 군대를 다시 불러모아 지관(軹關)에 주둔하게 하여 태행산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4월 20일, 서연군이 태행산에 결집된 것을 확인한 모용수는 후연의 대군을 거느리고 부구로 가 서연 남부에 위치한 천정관(天井關)을 넘어 대벽에 도착했다.
모용수에게 속았음을 깨달은 모용영은 급히 사촌형인 태위 모용대일두귀(慕容大逸豆歸)를 보내 대벽을 구원하게 했지만, 평규에게 격파당했다. 모용소일두귀도 군사를 이끌고 나와 후연군과 싸웠으나 모용농에게 격파당하고, 왕차다와 늑마구가 사로잡혔다. 모용수가 대벽을 포위하니, 모용영은 지관에 주둔시킨 군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친히 정예병 50,000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모용수는 모용영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포위하던 군사를 거두어 대벽 남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효기장군 모용국(慕容國)에게 1,000명의 기병을 주어 인근 골짜기 아래에 매복하도록 했다. 5월 16일, 모용영의 서연군이 대벽에 도착해 모용수의 후연군과 맞붙었다. 모용수가 못이기는 척 거짓후퇴하며 유인하니, 모용영은 기세를 타고 뒤쫓았다. 하지만 몇 리 정도 추격했을 무렵, 매복해있었던 모용국이 튀어나와 모용영의 후위를 끊어버리자, 모용수는 후퇴를 멈추고 군대를 돌려 모용영을 공격했다. 모용영이 이끌던 서연군은 사면으로 포위당해 대패했으며, 8,000여 명이 참수되었다. 모용영은 달아나 도읍인 장자로 들어갔고, 대벽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우는 진양을 버리고 달아났다. 모용찬과 장숭은 비워진 진양성을 금세 점령했다.
6월, 모용수가 진군해 장자를 포위했다. 모용영이 성을 빠져나와 후진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시중 난영(蘭英)이 말려 그만두었다.
8월, 후연군의 포위가 날이 갈수록 조여오자, 모용영은 곤궁해져 동진의 옹주자사 치회에게 자신의 아들인 상산공 모용홍(慕容弘)을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청하고, 추가로 옥새 한 묶음을 예물로 바쳤다. 치회는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며 후연의 모용수가 서연의 모용영을 흡수하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구원하자고 권했다. 동진의 효무제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겨 청연이주자사 왕공(王恭), 예주자사 유해(庾楷)에게 모용영을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모용영은 동진에서 구원을 꺼릴까 염려해 이번엔 태자 모용량(慕容亮)을 인질로 보냈으나, 모용량은 동진으로 가던 중 고도에서 평규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모용영은 또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즉시 진류공 탁발건과 장군 유악(庾岳)에게 50,000명의 군사를 주어 서연을 구원케했다. 동진과 북위의 구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모용대일두귀의 부장 벌근(伐勤) 등이 성문을 열어 후연군을 맞이했다. 후연군은 모용영을 붙잡아 죽이고, 서연의 공경과 문무관원인 조운, 모용대일두귀 등 30여명을 참살하면서 서연은 건국 11년만에 멸망했다. 모용영이 통치하던 8개의 군[1]과 76,000여 호의 백성, 그리고 전진의 황실에서 쓰던 수레와 가마, 옷, 악사와 악기, 진귀한 보물 등을 모두 후연이 독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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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당군, 태원군, 무향군, 건흥군, 신흥군, 서하군, 평양군, 하동군으로 사실상 병주 남부 전체를 통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