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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2 20:17:46

거용관


파일:중국 거용관.jpg
거용관 장성
||<:><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CC0000><width=100>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2><:><#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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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Juyongguan-003.jpg
명칭 한국어 거용관
간체 居庸关
번체 居庸關
영어 Juyong Pass
분류 고건축 및 역사기념건축물
(古建筑及历史纪念建筑物)
시대
일련번호 1-0098-3-051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창핑구S216
北京市昌平区S216
등재 1961년
차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급

1. 위치2. 구조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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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

거용관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에 있다. 화베이평원에서 몽골고원으로 향하는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장성과 일체가 되는 개념으로 설치된 관문이자 요새이다. '천하제일웅관'이라고도 불렸고 난공불락의 아홉 요새로 꼽혔다. 거용관의 용(庸)이란 한자는 '평범하다.'는 뜻으로[1] 거용관이란 이름은 '평범한 사람이 거(居)하더라도 능히 관(關)이 되는 요새'라는 뜻이다.

2. 구조

파일:중국 거용관 1.jpg
전반적인 전경

딱 보아도 통로에 절묘하게 세워져 있는 모양새이다. 아무리 대군을 끌고와도 주변의 산으로 인해 전투력 집중이 어렵다.

파일:attachment/Juyongguan-002.jpg
거용관은 남구(南口), 관성(關城), 상관(上關)의 3개 관으로 되어 있다. 중심이 되는 관성은 둘레가 4 km인데 1369년에 서달(徐達)이 개축한 것이다.

파일:attachment/Juyongguan-004.jpg
남문 안에 운대(雲臺)가 있다. 그 밑을 내몽골(內蒙古)로 향한 도로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과가탑(過街塔)이라고도 한다.

1343년 승려 덕성(德成)이 교통의 안전을 기원하여 건립했다. 2011년 현재 가로 위에 있는 백색 석회암조 권문(券門, 아치문)은 원대 말기 과가탑(過街塔)의 탑기(塔基) 부분이다. 처음에는 대좌 위에 라마탑 3기가 있었지만 지진으로 훼손되었고, 그 뒤 사찰을 세웠으나 청나라 시절 1702년에 이것마저 훼손되어 대좌만 남았다. 현존하는 탑기는 사각 설계로 하부가 동서방향으로 29 m 남짓, 남북방향으로 16.5 m,상부가 26.5 × 13.5 m이다. 거의 물매가 없는 지붕 주위 고란(高欄) 하단까지의 높이는 9.7 m,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는 아치의 높이는 7.2 m이다.

벽면과 천정 안팎으로 무수한 조각이 있으며 문내측 벽면에는 중국, 몽골, 서하(西夏), 티베트, 위구르, 범어의 6체 문자로 도상(圖像) 내용의 경전을 새겼다. 여기서 서하 문자의 존재가 최초로 알려지기도 했다. 부조된 여러 상들은 티베트 불교 경전에 의한 것으로, 내벽 좌우 중앙의 다라니경은 법신(法身)을 뜻하며 네 모퉁이의 사천왕상과 천정의 오만다라와 시방불 및 천불을 새겼고 당초에는 금 장식이 있었다. 한자명 말미에 지정 5년(1345) 서촉 성도 보적사(寶積寺)의 승려 덕성(德成)이 썼다는 글이 있다(至正五年 西蜀 成都 寶積寺僧 德成書).

3. 역사

파일:attachment/Juyongguan-001.jpg
위 사진에서 석비에 씐 문구는 거용첩취(居庸叠翠, 거용관의 푸르름)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시절 '거용새'라는 요새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동시대 사료인 여씨춘추에는 천하에 아홉요새가 있는데(天下九塞), 거용이 그 첫번째(庸其一)라고 기술했다. 그때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태항(太行)산맥의 고갯길에 있는 태항팔경(太行八徑)의 하나로 알려졌다. 금나라 명나라 산해관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는 최종방어선을 맡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사실 여긴 산해관보다 조금 더 중요시된다. 산해관 지역은 일단 베이징에서 거리가 300 km 정도고 중간에 임시방어선이 될 하천이 흐르지만, 거용관은 만일 함락된다면 베이징 중심가까지는 고작 60 km에 불과하고, 베이징의 성벽에 이르기까지 방어할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기스 칸이 금나라를 정벌할 때 거용관은 2번에 걸쳐서 함락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일단 1차로 함락시킨 후에 방치하자마자 다시 금나라 병력이 들어와서 요새를 수리하고 물자를 적재하는 등 복구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때도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1930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만주국을 만든 이후 지속적으로 허베이성 쪽으로 공략했으며, 산해관과 함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다가 1933년 1월 30일에 산해관이 함락되면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중국군이 철수하였다.

1961년, 거용관(居庸關)은 만리장성의 주요관문 중 하나인 가욕관(嘉峪關)과 산해관(山海關)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장성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다. 올라가기도 힘들고 내려오기도 힘들고..

현재는 베이징 버스 919, 베이징 버스 창핑20이 운행중이며[2], 베이징과 라싸를 잇는 징짱고속공로(京藏高速公路)가 이곳을 지난다.
[1] '평범'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범용(凡庸)이란 한잣말에도 용(庸)이 들어간다. [2] 둘 다 주신좡역 경유가 사실상 강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