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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陳敏(? ~ 307)
서진의 반란자. 자는 영통(令通). 양주 여강군(廬江郡) 출신.
2. 정사
젊을 때부터 그 유능함을 인정받아 군(郡)의 관리로 임관하였고, 나중에 청렴하다는 이유로 상서 창부(尚書倉部)의 영사(令史)에 임명되었다.영강 2년(301년) 3월, 제왕 사마경을 중심으로 뭉친 번왕들의 군대가 황위를 찬탈한 조왕 사마륜을 격파하고 사마륜이 태상황으로 몰아냈던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다. 하지만 번왕들이 목표를 완수했음에도 해산하기는 커녕 낙양에 오랫동안 주둔한 탓에 낙양의 창고는 고갈되고 말았다. 이에 진민이 조정에 건의했다.
"남방에는 수십 년분의 쌀과 곡식이 저장되어 있어 내버려 두면 어차피 부패할 것이니, 이를 중앙으로 조운하여 낙양의 환난을 해결해야 합니다."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진민은 합비탁지로 부임하였다가 광릉탁지로 옮겨졌다.영안 원년(303년) 12월, 강하군(江夏郡)에서 반란을 일으킨 만족 장창의 부하인 석빙(石冰)이 전(前) 남평내사 왕구(王傴)와 의랑 주기(周玘)에게 격파당하고 수춘(壽春)을 향해 서쪽으로 달아났다. 당시 수춘을 지키고 있던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 정동장군 유준(劉準)은 당황하고 근심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마땅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 하고 있었다. 그때 진민이 나서서 말했다.
"저들은 멀리 가서 지키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오합지졸이므로 그 세력에서 이탈시키기도 쉽습니다. 청컨대, 제게도 공(公)의 군사를 조금 나누어 주신다면 반드시 반란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이에 유준이 진민의 병력을 더하여 주니, 진민은 출격하여 석빙, 오홍(吳弘) 등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북으로 나아가 석빙의 무리와 10번이나 더 전투를 벌였다. 비록 진민은 석빙보다 병력이 10배나 적었으나, 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석빙이 차지했던 건업(建業)까지 탈환하면서 그 세력을 양주(揚州)에서 완전히 박멸하였다. 양주의 대부분을 점거했던 석빙은 순식간에 거점을 전부 잃은 채 서주(徐州)로 도망쳐, 또다른 장창의 부하인 봉운(封雲)에게 의탁하였다. 태안 3년(304년) 3월, 봉운의 장수 장통(張統)이 그 둘을 참수하고 진민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진민은 양주와 서주를 동시에 평정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광릉상(廣陵相)에 임명되었다.
당시 하간왕 사마옹이 혜제를 장안으로 끌고 가면서 사방에서 서로 다투기 시작하여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진민은 석빙을 평정한 이후로 자신의 용기와 지략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여겨 강동에 할거할 뜻을 품었다. 진민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뜻을 알고는 분노하며
"우리 가문을 멸망시킬 자는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한탄하고는 근심으로 이내 사망하니, 진민은 부친상을 이유로 사직하였다.영흥 2년(305년),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옹과 맞서기 위해 진민을 우장군, 가절, 전봉도독으로 삼았다. 진민은 군대를 이끌고 사마월이 예주자사 유교를 토벌할 때 합류하였으나, 소현(蕭縣)에서 유교에게 패하였다. 중원의 전란을 직접 경험한 진민은 지금이 강동에서 할거할 적기라는 생각에, 사마월에게 병사들을 모집하고 역양(歷陽)을 지키겠다 자청하였다. 사마월이 이를 허락하자, 진민은 역양으로 들어가 황태제 사마치의 명령을 사칭해 스스로 양주자사(揚州刺史)라 칭하고 감탁과 반란을 일으켰다. 진민은 감탁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자신의 아들을 감탁의 딸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다.
반란을 선포한 진민이 동생 진회(陳恢)와 장수 전단(錢端)을 보내 강주(江州)를 공략케 하고, 동생 진창(陳昶)에게 정예병 수만 명을 주어 오강(烏江)을 점거케 하고, 동생 진빈(陳斌)을 보내 양주 동쪽의 여러 군을 경략케 하니, 양주자사 유기(劉機), 단양태수 왕광(王廣) 등이 관직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마침내 오월(吳越)의 땅을 모두 장악한 진민은 사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고영 등 강동의 여러 호걸과 명사를 불러 관직을 내렸고, 40여 명을 장군, 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관직을 받은 고영 등은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고 진심으로 섬기지 않았다. 진민의 동생 진창은 고영 등을 믿을 수 없다며 모두 죽일 것을 권했지만, 진민이 고영의 간언을 듣고 따르지 않았다.
진민은 스스로 도독강동군사(都督江東軍事), 대사마, 초공(楚公)에 오르고, 구석을 더하였다. 그리고 혜제의 조서를 받았다며 장강과 한수를 통해 장안에 있는 혜제를 봉영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에 하간왕 사마옹은 순양태수 장광(張光)에게 보•기 5,000명을 주어 진민을 토벌케 하였고, 형주자사 유홍도 강하태수 도간, 무릉태수 묘광(苗光)을 하구(夏口)로 보내 진민의 침입에 대비케 하였다. 이때 강주를 공략하던 진회가 무창(武昌)을 치려 하자, 도간은 즉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진회의 군대를 수 차례 무찔렀다. 그리고 장광과 합류해 장기(長岐)에서 전단의 군대까지 대파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2월, 진민은 재능이 평범하고 원대한 전략이 없었다. 일단은 강동에 할거하고 있었으나, 형벌과 정치에 법도가 없어 영준한 인재들이 복종하지 않았고, 그 자제들은 흉폭하여 지역의 우환이 되었다. 고영, 주기 등 강동의 사족들이 이를 근심하고 있을 때 즈음, 동해왕 사마월 밑에서 자의참군을 지내고 있던 화담의 서신을 받고, 임강(臨江)에 주둔하고 있는 정동대장군 유준에게 내응하겠다는 밀서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동봉하였다.
밀서를 받은 유준은 고영 등을 믿고, 이내 일전에 도망쳤던 양주자사 유기와 영원장군 형언(衡彥) 등을 보내 역양을 치게 하였다. 진민은 광무장군 진창과 장수 전광(錢廣)을 보내 오강에서 이들을 막게 하고, 동생인 역양태수 진굉(陳閎)을 역양성 맞은 편에 위치한 우저(牛渚)로 보내 그곳을 수비케 하였다. 진민의 동생 진처(陳處)는 고영 등이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속히 죽일 것을 권했지만, 이번에도 진민은 따르지 않았다.
전광의 집은 장성(長城)이라, 주기와 고향이 같은 사람이었는데, 주기가 몰래 사람을 진창의 진영 내로 잠입시켜 전광에게 진창을 살해하라 지시하였다. 이에 전광은 음모를 꾸미고 부하 하강(何康)과 전상(錢象)에게 서신을 주어 진창에게 보냈다. 하강과 전상으로부터 서신을 전달받은 진창이 글을 읽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이때만을 노린 하강은 바로 칼을 뽑아 진창을 참수하였다. 그 후, 전광은 진창의 병력까지 모조리 흡수해 주작교(朱雀橋) 남쪽에 주둔하였다. 한편, 건업에 있던 주기는 진창 암살 성공 소식을 듣고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 진민이 이미 죽었고 감히 내응하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 엄포하였다.
전광이 동생을 죽이고 건업으로 향하는 다리인 주작교를 점거했다는 보고를 받은 진민은 감탁에게 정예 갑병을 맡겨 전광을 토벌케 하였다. 하지만 감탁 또한 고영과 주기의 설득에 넘어가, 진민에게서 받은 병력을 그대로 들고 관군 편에 서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민은 친히 10,000여 병력으로 감탁을 토벌하러 출격하였으나, 의심이 많아 막상 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면서 나아갈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때 고영이 먼저 백우선(白羽扇)을 가리켜 군대를 지휘해 돌격하니, 진민의 군대는 무너져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대패한 진민은 단기로 동쪽으로 도주하다가 강승(江乘)에서 사로잡혔고, 건업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진민의 모친과 처자식 모두 주살되었고, 회계(會稽) 등 여러 군에서도 진민의 동생들을 붙잡아 남김없이 멸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