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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8:08:05

독발수기능의 난

독발수기능의 난 | 禿髮樹機能之亂
시기 270년 여름 7월 ~ 279년 겨울 12월
장소 관중 일대
원인 서진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
교전국 서진 선비족
군주 황제 사마염 수령 독발수기능
지휘관 진주자사 호열[1]
양주자사 소유
장군 유기
기독 경염
사마량[2]
도독농우제군사 석감[3]
분위호군 전장
진주자사 두예[4]
정서대장군 사마준
양주자사 견홍[5]
양주자사 양흔[6]
서역무기교위 마순
평로호군 문앙
토로호군 겸 무위태수 마륭
몰골능(沒骨能)[7]
상서령 가충[8]
약란니(藥蘭泥)†
백호문(白虎文)
걸문니(乞文泥)†
토돈(吐敦)†
아라다(阿羅多)
후탄발(侯彈勃)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
졸발한(猝跋韓)
차만능(且萬能)
불명의 거수인 선비족 대인†
결과 독발수기능의 패배
영향 서진의 오나라 정벌 추진.

1. 개요2. 전개3. 교전 세력4. 결과와 영향5. 대중매체에서 독발수기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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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말진초 서기 270년부터 279년에 걸쳐 선비족 독발부의 수령 독발수기능 서진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

서진의 진주, 양주 일대[9]에서 전개되었다.

2. 전개

3. 교전 세력

3.1. 서진

3.2. 독발수기능 세력

3.3. 강족

3.4. 기타

4. 결과와 영향

10년 가까이 진행된 독발수기능의 난은 279년 12월 마륭의 군대에 의해 독발수기능이 대패한 후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망하면서 종결되었다. 이후 296년 - 299년 사이에 일어난 제만년의 난 이전까지 농서 지역이 안정화되었다.

독발수기능의 난은 삼국시대의 역사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독발수기능의 난 뿐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진나라는 서북의 독발수기능의 난을 비롯한 여러 반란들의 토벌로 인해 동남의 손오에 병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고 촉한 멸망( 촉한멸망전)으로 삼국 한축이 무너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오나라 잠시 여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유지하던 손오는 진나라가 지방의 여러 반란을 제압하고 소규모의 병력으로 독발수기능의 발을 묶는 결단을 내려 병력을 집중하자 결국 멸망당하고 마침내 삼국은 통일된다. 그러나...

독발수기능 사후 독발부 대인은 독발수기능의 종제( 사촌 동생) 독발무환이 계승했다. 독발무환의 후손 독발오고 오호십육국시대 때 드디어 남량을 건국했다.

5. 대중매체에서 독발수기능의 난

최훈의 만화 삼국전투기에서 독발수기능의 난에 대해 다루었다. 최훈은 이미 막장으로 달려가서 언제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손오를 서진이 잠시 놔두었던 이유가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1] 270년 만곡퇴 전투에서 전사. [2] 호열이 위기에 처하자 유기, 경염 등을 파견해 지원했으나 유기가 관망한 탓에 호열이 전사해버렸다. 조정에서 유기를 죽이려고 하자 변호해주었고, 직위를 박탈당했다. [3] 공을 허위로 논한 것이 연좌되어서 해임당했다. [4] 석감의 모함으로 인해 부임하지도 못하고 중앙으로 돌아왔다. [5] 271년 청산 전투에서 전사. [6] 278년 강족 수령 약라발능과의 전투에서 전사. [7] 융족 출신으로 미륭의 군대와 함께 독발수기능 세력과 싸웠다. [8] 본래 독발수기능의 난 때 책임자로 파견갔어야 했으나 진나라 황실과 사돈을 맺으면서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9] 서량, 오늘날 감숙성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