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한윤(삼국지)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괄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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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 | <colbgcolor=#fff,#1f2023> 이괄 |
조선 조정 | 국왕 인조 · 도원수 장만 · 남이흥 · 정충신 | |
반군 |
지휘관
이괄 · 비정통 국왕
흥안군 기익헌 · 한명련 · 이수백 · 이흥립 · 한윤 · 김효신 · 서아지 · 사쇄문 · 고효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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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윤(韓潤) |
출생 | 1597년 ( 선조 30년) |
사망 | 1633년~ 1650년 사이(향년 36세~53세 사이) ( 인조 11년 이후~ 효종 1년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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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반역자이자 청나라의 공신. 자는 형원(泂源). 황해도 문화현[1] 출신.2. 행적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한명련의 차남이다. 위로 형 한란(韓瀾), 아래로 동생 한간(韓澗)과 한활(韓闊)이 있었다. 정7품 적순부위(迪順副尉)의 품관으로 있다가 1615년( 광해군 7년) 식년시 무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였다. # 한명련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가 이순신, 권율, 정기룡과 함께 명장으로 꼽을 만큼 유력한 장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모함을 받아 부득이하게 이괄에게 가담했다가 이괄의 난에서 패하여 살해당한다.이후 한윤은 사촌 한택(韓澤)과 함께 평안도 구성 땅으로 도망갔다가 관군이 계속 추적하자 국경을 넘어 도주하여 후금으로 망명했다. 이후 유격에 임명되어 강홍립의 휘하에 속해 숭덕제의 중용을 받았고 조선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후금에 알려주며 침공을 부추겼다.
아버지와 집안이 역적으로 몰살 당한 것에 큰 원한을 품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잡이가 되어 적극 참전해 중국의 옷을 입고 사냥꾼으로 위장해서 의주성으로 들어가 군기창고를 태웠다. 이후 화의가 성립됐어도 계속 조선에 대한 침략을 부추겼다. 이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그를 한적(韓賊)이라 지칭하며 매국노로 미워하였다. 대략적인 사서의 행적을 번역한 블로그가 있다.
1632년 6월 29일에 공신 서열 50위에 올랐다. 다만 그 이후에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명련의 일가는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몰락했는데, 청나라로 간 그의 조카들은 천수를 누린 듯 하다. 예를 들어 이괄의 난 당시 삼촌을 따라 종군한 그의 조카 한섬은 워낙 용맹해 싸울 때마다 선봉에 섰으나, 패전 후 붙잡혀 효수된다. 반면 청나라로 간 다른 조카 한일은 평소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고 정묘년 때 한윤과 앞장서 조선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3. 대중매체
- 《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에서도 나오는데 이괄의 난이 실패하자 유운과 같이 도망다녔다. 그런데 둘의 성격은 정반대인지라 관군을 만났을 때 유운은 그 자리에서 항복하고 백의종군해서 병졸로서 살아가지만 한윤은 관군 병졸을 죽이고 후금으로 달아났다. 이후 후금에서 홍타이지에게 중용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강홍립에게 구족이 인조 임금에 의해 멸족당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나라 장수로 참전했지만 거기서 다시 만난, 이제는 조선군 병졸이 된 유운에게 살해당했다. 물론 이는 매체에서의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