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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평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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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 초대 황제 오삼계 | 吳三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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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출생 | 1612년 6월 8일 | ||||
명나라 요녕성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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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78년 10월 2일 (향년 66세) | ||||
오주 곤명시 (現 중화인민공화국 쿤밍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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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청의 평서왕 | ||||
1644년 ~ 1678년 | |||||
오주 초대 황제 | |||||
1678년 3월 ~ 1678년 10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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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성씨 | 오(吳) | |||
휘 | 삼계(三桂) | ||||
자 | 장백(長伯), 월소(月所) | ||||
연호 | 소무(昭武, 1678년 3월~1678년 10월 2일) | ||||
신장 | 173cm[1] | ||||
부친 | 오양(吳襄) | ||||
모친 | 주부인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개천달도동인극운통문신무고황제 (開天達道同仁極運通文神武高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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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청나라의 군인.본디 명조 말기의 뛰어난 장수였다. 하지만 1644년에 이자성의 난으로 명조가 멸망하자 바로 청조로 투항한다. 이후 운남 지방을 통치하는 '평서왕(平西王)' 작위를 받았다. 1673년에 강희제가 밀어붙인 철번 조치에 불만을 가지고 삼번의 난을 일으킨 이래 1678년에 대주(大周)의 황제를 자칭했으나 그해 10월에 사망한다. 하지만 손자 대에 이르러 반란은 진압당했다.
한족의 입장에선 한간(漢奸, '한족의 배신자'를 의미)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며, 그가 투항했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입장에서도 기회주의자이자 배신자이다. 몽골족 중에서도 청나라 때 만주족과 일체화된 바 있었던 내몽골인들에게도 오삼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2] 다만 현대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주도 하에 중화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한간으로서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있다.
2. 생애
2.1.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1612년 6월 8일 지금의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양(吳襄)으로 명나라의 장수였는데 원래 오양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살았지만 오삼계가 태어날 때쯤 만주족이 건국한, 후금이 맹렬한 기세로 팽창해서 명나라군의 상당수가 요동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도 이때 요동에 정착하고 아들 오삼계를 낳았다. 소년 시절 오삼계는 오양이 후금군에게 포위되자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나름 효자이자 맹장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데뷔한 것이다.1641년 29세에 제독이 되었다.[3] 명군은 송산 전투( 1641년~ 1642년)에서의 참패로 결국 만주에서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삼계는 10,000명의 군대를 이끌며 결사적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산해관 안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까지 청군에게 넘어가는 것은 막았으나 송산 전투에서 입은 명나라의 손실이 너무 치명적이라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까지 소멸되었다. 이후 오삼계는 청군을 견제하며 버티기로 했다.
청군과 이자성군 양측으로부터 오삼계에게 투항 권유가 날라왔는데 청나라측은 비록 만주족이라는 큰 단점이 있었으나,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비록 실권은 없지만 그래도 섭섭치 않게 대우를 해주었고, 점령한 명나라 영역에서 모병한 한족들로만 구성된 군대를 창설할 정도로 포용정책을 펼쳤다. 반면 이자성 측은 오삼계의 부친인 오양의 신병을 붙잡고 있었으며, 같은 한족인 이자성과 손을 잡아 청나라를 막는다라는 것이 가능했기에 오삼계는 부하들과 논의한 뒤 같은 한족끼리 뭉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무렵 이자성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꾼 오삼계는 청나라측에 사신을 보내, 투항할테니 함께 이자성으로부터 북경을 되찾게 도와달라는 서신을 바쳤다.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틈을 타 예친왕 도르곤은 대규모 병력의 청군을 동원해서 산해관에 임박했다. 오삼계는 긴급 징병으로 겉으로는 100,000명의 대군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송산 전투에서 겨우 수습한 10,000명과 어떻게든 명군으로 다시 복귀한 병사들을 합쳐 제대로 된 병력의 수가 30,000명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력의 차이, 이자성으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결국 도르곤에게 항복하고 산해관의 문을 열었다.
2.2. 청나라의 번왕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건국된지 276년 만에 멸망했다. 청군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던데다가, 송산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하여 오삼계가 결사적으로 이끌고 퇴각한 10,000명 정도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명나라의 정예군 130,000명 중 대부분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동진하는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기존에는 송산 전투의 참패로 인한 명나라의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에 있었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인 유종민이 뺏은 사실에 격노한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했다라고 알려져 있었다.[4]
첩 때문인 것이 사실이라면 진원원이 중국 대륙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원원은, 당대 오삼계의 배신에 분개한 이들이 '고작 여자 때문에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준' 존재로 비하하기 위해 강조된 설명이기도 하다.[5]
고작 여자 하나라는 원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다른 한가지 원인은 이자성군의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자성군에게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이 많았는데 이자성군은 이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이들의 재산을 쓸어 담았다.[6] 그리고 여기서 삥뜯긴 관리들 중에서는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도 있었다. 명나라는 없어지고 이자성과 청나라 둘 중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오랑캐에 투항하긴 좀 그러니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에게 투항하려 했던 오삼계였으나 북경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감금당하고 고문과 약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하여 투항을 포기했다[7].
이 사실을 인식한 이자성도 오양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풀어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이자성은 발끈해서 오양을 죽이고 산해관을 공격했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군은 투항에 응하지않는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를 벌하기 위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는데 그 병력이 100,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은 정예이긴 했으나 30,000명에 불과했다.[8] 거기에 명나라의 내분을 통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청나라의 섭정 도르곤이 산해관 밖에서 역시 10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 중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이자성 휘하의 대군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욕 먹는 건 싫으니 투항이 아닌 동맹으로 하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끝까지 귀순을 요구했다.[9] 이후 숫적으로 열세인 오삼계군이 밀리면서 전세가 험악해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즉 투항의 진짜 원인은 송산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의 주력군이 궤멸되어, 실질적으로 청군보다도 명군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에 오삼계가 산해관에서 청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청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에 들어와 농민 출신 보병 위주의 이자성군을 일편석 대전에서 박살내고, 그토록 꿈꾸었던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들어온 예친왕 도르곤은 1등 공신인 오삼계를 왕에 봉하고, 자살한 숭정제에 대해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한족의 민심을 다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명나라 잔여 세력의 처단에 나선 청군은 중국 전역을 급속히 장악해 나갔다.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다른 한족 항장과 함께 번왕에 봉했졌는데 멀리 떨어진 귀주성과 운남성을 관할하는 평서왕(平西王)이었다. 이때 오삼계를 평서왕으로 봉한 것에는 단순히 항복한 장군을 우대해줬다기 보단 당시 오삼계가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전체를 회유하고자 했던 청 조정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청 조정에서는 다른 한족 항장이었던 상가희와 경중명을 각각 평남왕(平南王)과 정남왕(定南王)으로 봉해 번왕으로 삼았다. 이는 아직 강남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멸망했다. 오삼계는 평서왕으로 봉해지자마자 이자성 추적에 돌입했고, 결국 이자성을 완전히 처단했다. 이후 남중국 토벌을 명령받고 사천 지역을 차지했던 대서군의 우두머리인 장헌충을 죽여 사천을 확보했다. 그런데 장헌충의 잔당이 남명 정권 밑으로 들어가자 당시 정서대장군이었던 국한과 함께 운남을 밀어버리고, 최종적으로는 따웅우 왕조 버마로 도망간 영력제 주유랑을 데려와 곤명에서 죽였다.[10] 결국 오삼계는 자기 손으로 명나라를 완전히 뿌리 뽑은 셈이었다.
2.3. 통치[11]
청나라 조정에서 명나라의 뿌리를 뽑은 오삼계에게 운남지역을 통치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그가 세운 공을 크게 치하했다. 운남은 중국 최서남의 변방으로, 토착세력이 대대로 통치하여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던 곳이었다. 또한 명말의 혼란기 속에서 반란군과 반청세력의 최후의 근거지였던 만큼 통치하기 빡센 곳인 것은 당연했다.오삼계를 여기 내려보낸 것에는 삼번 중 가장 강한 그를 변방인 운남에 보내 격리시키고자 한 정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또한 오삼계 휘하의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사력으로, 국가 권력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으며 반청복명 세력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운남을 관할하게 함으로써 반청세력의 완전한 소멸과 이후의 변방 보호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삼계는 수월한 통치를 위해 운남의 토착세력을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이때 일부러 토착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성하면서, 북경의 조정에는 번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내부적으론 반란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삶의 기반인 토지를 몰수했다. 토추(土酋)에 대해서도 온갖 방법의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들에게 매년 '조향'(助餉)과 '조병'(助兵)을 강요하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지방 관원을 종용해 비리와 약탈을 부추기는 등의 악행을 지속했다. 한마디로 평서왕 오삼계는 탐관오리들의 최종 빌런이었던 셈이다.
특히 군량 비축을 구실로 민간인에 대한 착취를 심하게 했는데, 흉년이 들자 쌀값 폭등을 구실로 토지 700여 경(頃)[12]을 번장으로 삼았다. 이는 운남 일대의 막대한 토지를 번의 땅으로 만들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한 것이었다. 이로써 운남의 자경농 대부분이 번하 관병의 전호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런 착취를 통해 마련한 재산으로 염정(鹽井)과 광산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또한 관진(關津)을 관할하여 상세와 공업, 무역업을 독점했으며 고리대금업을 통해 재물과 부를 늘리는데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티베트의 수장이었던 달라이 라마(達賴刺麻)와 통사(通使)하여 차와 말 등을 교역하는 시장을 개설하고, 서장(西藏)을 통해 서번(西番) 및 몽골족과 변방 무역을 했는데 사천성에서 생산된 황련 및 부자와 같은 한약재를 멀리 떨어져 있는 요동까지 판매하거나, 요동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운남으로 운송해 판매했는데, 이러한 무역을 모두 평서왕부에서 독점했다.[13]
사실상 오삼계는 중국 서남부의 왕으로 살았던 셈이다. 다른 번들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상가희의 경우, 광산 개발과 바닷소금(海鹽)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였고, 경중명의 손자인 경정충[14]은 나루터 입구마다 관리소를 세워 염과를 징수하고, 이익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했다. 한편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청나라는 삼번에 대한 토사구팽에 들어갔다. 아무리 변경이라지만 중앙집권체제하의 제국 내에 독립국가와 다름없는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소수의 이민족인 만주족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번국들이 북경의 중앙정부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나라로선 큰 위협이었다. 오죽하면 오삼계의 경우 인사, 재정, 군사권을 가지고[15] 본인의 화폐[16]까지 주조해 사용했을 정도였다. 당시 청나라의 재정 수입이 은 875만여 냥인데 반해, 운남에서는 매년 은 900만여 냥이 군량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오삼계가 참 많이도 해 먹었다 싶다. 이때문에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던 젊은 강희제가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17]
2.4. 주나라의 황제
오삼계가 봤을 때 애송이였던 강희제가 초반에 들이닥친 여러 문제로 인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기회라고 생각한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희제가 임명한 운남순무 주국치(朱國治)를 죽이고 군사를 끌어모아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른 번도 호응하여 1673년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때 북경에 살고 있었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18]과 오응웅의 2남인 오세림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 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19][20]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였던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 또는 오주),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했다. 삼번의 난 이전 청나라의 명장들이 건국 초기의 전통인 숙청에 휘말렸기에 북경에서 보낸 진압군은 약체였고, 숙련된 장군이었던 오삼계는 진압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미 67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 해 8월에 노환으로 사망했다.오삼계의 사망으로 반란군의 기세가 크게 흔들렸고, 강희제는 전열을 다듬는 한편, 한족 장군들까지 등용하며 진압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삼번의 난은 1681년 오삼계의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이 자살함으로서 진압되었다. 그후 오삼계는 부관참시되어 곤명의 저잣거리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에 내걸렸다. 장대는 2개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이미 죽은 오삼계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는 오세번[21], 마보, 하국상, 이본심, 왕영청 등의 머리가 걸렸다.
3. 후손
현존하는 오삼계의 직계 후손들은 모두 오삼계의 또 다른 아들인 오응기(吳應麒)의 후손이다. 오응기는 지금의 구이저우성 지역으로 피신하여 몰래 숨어 살아간 덕분에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4. 평가
오삼계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족의 배신자"로 악명이 높았다. 한족이 중국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한족 국가(이자성의 순나라)를 저버리고 외침을 한 변방 민족(청나라)의 앞잡이로 전락해 한족 국가(남명)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한간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그러나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평가가 상당히 달라졌다. 현대 중국의 핵심 주장인 하나의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만주, 티베트, 위구르, 고구려까지 모두 중국 역사이며, 당연히 한족, 만주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여진족, 거란족 등도 모두 중국의 동족이 된다. 만주족은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수민족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된 것은, 마치 한반도 역사에서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된 것과 비슷하게 치부하면 된다. 이것이 아주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남송 초기의 명장 악비와 명대 말기의 명장 원숭환에 대한 재평가인데, 그 전까진 구국의 영웅 혹은 민족의 영웅이었으나 현대 중국의 입장에선 그냥 같은 중국의 국가인 송나라와 금나라의 내전, 명나라와 청나라의 내전에서 활약한 뛰어난 장수 정도로 입장이 바뀌었다. 사실 고구려 말기의 독재자였던 연개소문도 그런 식으로 각색될 수 있었다. [22][23]
청나라의 건국 역시도 아편전쟁 같은 외세의 침략이 아닌, 단순히 중국 내부의 왕조 교체로 해석한다면, 오삼계는 당연히 평가가 달라지며, 그를 일개 기회주의자로 치부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오삼계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인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다. 따라서 명나라를 넘보는 청나라도 적국이지만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도 오삼계에겐 적이자 원수이다.[24] 이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정의일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청나라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도 까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오삼계는 지나치게 강력한 군세를 가졌기 때문에 강희제에 의해 숙청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갈아타기 전적 때문에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데는 실패하여 한족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삼번의 난 실패의 원인이었지만, 이것을 오삼계의 간사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숭정제가 오삼계에게 북경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삼계가 일부러 진군을 늦춘 점[25][26]과 진원원 사건[27]+오양의 감금과 약탈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삼계를 충신으로 여기고 청나라로의 투항도 명나라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정당화하려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남명의 영력제를 버마까지 추격하여 죽인 것은 오삼계 본인이었다.
기회주의자와 배신자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악명에 맞게 자신이 속해있던 나라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배신해가며, 자신의 이익을 탐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최소한 평상시에는 별로 나무랄 데 없는 충성심과 유능함을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 즉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 가문)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가차없이 충성심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충성의 대상으로 편을 바꾸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던 인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르게 보자면 녹봉받은 만큼 자기 일은 잘 하지만 지신이 손해를 보고 희생하면서까지 충성을 다하지는 않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충(忠)[28]보다는 차라리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29] 및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깝게 행동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로 귀순한 다음에는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가차없이 공격하여 후계 황제까지 직접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단 충성의 대상을 바꾼 이상 새 나라에 그만큼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전향(청나라로의 귀순) 자체는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라고 보아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한때 속해 있었던 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정도라면 능동적인 배신자와 별로 다를 바도 없지 않으냐고 지적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결국 오삼계의 배신(또는 매국) 행위에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감안할 수는 있겠지만, 항상 손해를 감수하기보다는 신의를 저버리는 길을 선택했고,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이익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오삼계의 처참한 말로 역시 명청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청나라에 귀순한 이후, 오삼계가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추적하여 뿌리뽑는 역할을 앞장서서 맡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항장(降將) 출신인 오삼계가 운남·귀주의 번왕이 되어 남중국에서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손으로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도륙해버릴 정도로 독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 명나라에 미련이 없고, 새롭게 청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명확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강남의 지리와 정세에 익숙하지 못한 만주족 대신 남명 토벌에 앞장서는 공을 세움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니, 만약 그가 이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실제 역사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권세를 얻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는 하다. 그러나 그 성공가도의 끝은 결국 자신은 반역자로 전락하여 시체까지 훼손당하고, 자신의 가문 역시 몰락하는 것이었으니 당대인들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그렇게 얻은 부귀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비참했던 셈이다. 차라리 살아남기 위한 전향 자체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후 보다 큰 출세를 위한 적극적인 배신자의 행보라도 자제하고 은인자중했다면 대단한 부귀영화와 권세를 얻지는 못할지언정 그나마 노후는 편안히 보내고, 가문이라도 온전히 보전하며 후세에 욕이라도 덜 먹을 가능성이 있었다.[30]
오삼계는 무장으로서는 당대 수준급의 백전노장이었다. 이 때문에 삼번의 난 초기에는 청군을 상대로 굉장한 선전을 해 강희제도 쩔쩔맸다. 오삼계 생전에 정말로 청나라를 뒤집고 한족 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31]
이런 오삼계지만, 20세기 이후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한간이란 이미지를 많이 벗고 있는 것은 중국정부가 행하고 있는 정책의 여파가 크다. 일단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간 정도의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고, 기회주의자 정도로 비판을 낮추었다. [32] 하지만, 그 시대 명나라 유민들에게 있어서 오삼계는 명백한 한간이 맞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민족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민족주의가 없을 때는 집단의식이 없는양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유럽에서조차 민족주의(Nationalism)가 생겨나기 전에도 집단의식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유럽에 한정해서는 로마-기독교 세계라는 단일한 울타리로 이어진 집단의식이 있었고, 기독교 세계를 문명국으로 보며 그외의 이교도들은 야만인으로 차별하는 명백한 구분이 있었다. 그런 집단의식으로 인해서 기독교 세계와 그 외부 세계, 특히 이슬람세계는 오랜 기간 분쟁했다. 즉, 유럽 대륙 내부에서 일어난 봉건영주들 사이의 영토 싸움과는 별개로, 외부의 적에 대해서 유럽 중심의 기독교 국가들이 힘을 합해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고, 몽골의 침입에 대해서는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대항을 하기도 했다. 이후 현대에 와서는 유럽 각국이 EU로 뭉쳐 유럽 재통합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사실상 오역이며, 더 정확하게는 국가주의(Nationalism)가 맞다. 로마-기독교 세계라는 규모가 큰 집단의식이 2,000년 동안 이어지는 가운데, 프랑스나 독일이라는 작은 국가 단위의 집단의식을 국민개병, 보통교육이라는 국가 정책을 통해서 민중들에게 의도적으로 주입했다.[33]
어쨌거나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슬람 세계와의 격렬한 세력 다툼이 있었으며, 특히 이베리아 반도[34]를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시기의 유럽과 십자군 전쟁시의 유럽은 외부의 적에 대해 연합해서 전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게다가 이슬람 세계에선 기독교인들을 약탈하거나 노예로 삼았고, 기독교 세계에서도 무슬림을 그렇게 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제국주의 시기에 행해졌던 식민지 경영 역시, 기독교 세계의 문명국이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개념하에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는데, 사실상 중화제국이나 조선에서 여진족과 거란족 등의 오랑캐를 대한 태도와 거의 같았다.
반대로 오랑캐들인 유목민족이 변방을 침략해서 한족을 지배할 경우에는 명백하게 한족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명나라의 전대인 원나라만해도 4등인제라 해서 종족별로 명백히 차별했는데, 특히 한족을 3, 4등급으로 구분해서 대우했다. 게다가 명나라 말기 변방에서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이 만주족이었으니 명나라 유민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수가 없었다.
즉,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 등 각 문명권의 소속감은 민족주의 이전부터 강력했고, 중국 문화권에서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전통이 수천 년 이전부터 확실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중국에서 수백 년 이상 구국의 영웅으로 숭배된 악비와 원숭환이었고, 서유럽에서는 샤를마뉴와 《 롤랑의 노래》와 같은 서사시였다.
그런 이유로 명청교체기 당시, 농경민인 한족과 수렵채집민인 만주족 사이에는 문화나 생활양식의 차이 및 역사적 경로 등으로 인한 차이가 명백히 있었고, 이 때문에 오삼계 역시 처음에는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이자성의 순나라에 귀순하려고 했다. 즉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발명된 개념'이라고 할 때 흔히 예시로 주어지는 전근대 유럽 국가들처럼 민족 개념이 무의미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전근대 왕조국가에서의 충성은 민족국가와 같은 이념적인 정치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 아니라, 군주 개인이나 왕조와 같은 특정한 실체를 대상으로 한 개념이었으니 숭정제에게만 충성하는 것이었으며, 한족이냐 아니냐하는 구분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즉, 숭정제가 죽었으니 명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라서 충성의 대상이 없어졌으며, 한족이라는 구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35]
이 부분은 두 가지가 반론되는데, 전근대 왕조국가는 군주 한 명에게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황실에 충성하는 것이라서, 숭정제가 죽어도 (주원장의 후손인) 주씨 황족으로 이어지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맞았다. 즉, 숭정제가 사라져도 주씨가 절멸된 것이 아닌 이상, 충성의 대상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유신들은 살아남은 주씨 황족들을 중심으로 강남에 남명을 건국해서 청나라에 대항했는데, 그 남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영력제와 그 가족을 살해한 사람이 오삼계였다.
즉, 숭정제라는 충성의 대상이 없어도 황족을 중심으로 뭉쳐 청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선택이 오삼계에게는 있었지만 그 충성의 대상과 그 일가를 추적하여 학살한 사람이 오삼계였다.[36]
그리고, 숭정제에 대한 충성만 중요하지, 한족이냐 만주족이냐라는 구분은 별로 필요없고, 이자성의 순나라나 청나라나 오삼계에겐 똑같았다는 주장 역시 매우 어폐가 있다.
당장 오삼계 역시 이자성의 순나라에 귀순하는 것을 1순위로 고려했었다. 그가 모시던 숭정제를 사실상 죽인 원수인 이자성에게 귀순하는 것을 고려했던 부분이 명백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이자성에게 귀순하지 않고, 청나라에 귀순했지만, 어쨌든 1순위는 이자성쪽이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거의 명백한 사실이다. 오삼계에게 1순위는 당연히 숭정제에 대한 충성이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2순위로서 같은 한족인 황제에게 충성하기를 원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유교적인 '중화'라는 개념하의 중화문명-오랑캐라는 이분법도 있었지만, 만력 연간 이래 명나라를 괴롭힌 청나라에 대한 분노도 상당했기 때문에 당시 명나라 유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만주족에 대한 증오심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대인 조선만 봐도, 선조나 인조가 죽었다면 조선이 망하는건 불가피했겟지만, 그렇다고 일본군이나 청군에게 바로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조가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기에, 어쩔수없이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지, 내부적으론 오랑캐에 항복했다라는 비판이 많았고, 이후 효종이 북벌론을 내세워서 정권을 안정시켰다. 당시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에서 중화를 계승했다고 자부한 조선조차도 그러했는데, 성리학적 세계관의 종주국이었던 명나라가 망해가던 시절의 중국 내부에선 당연히 오랑캐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없었을 것으로 보긴 어렵다.
오삼계가 당대에는 확실하게 한간으로 취급받은 것이 맞고, 이후 수백년 동안 적어도 한족에게는 한간으로 낙인찍힌 것이 맞다. 하지만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20세기 중반까지 평가가 차츰 달라져서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삼계를 한간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종합하자면 현대 중국 정부의 입장과 관점은 공기화 처리+기회주의자,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한족중심주의 성향을 가진 입장에서는 한간, 만주족과 내몽골인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중원 정복을 도와줬다가 이내 배신을 때리고 청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간사한 기회주의자, 역사를 좀 아는 입장에서는 강희제가 상대한 보스급 캐릭터 정도이고,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 명나라의 입장에서든, 청나라의 입장에서든,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든 충신으로 평가받기는 힘들다.
명말 청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어째 첩인 진원원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인지 로맨티시스트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다.
네이버캐스트 <명청전쟁> 시리즈 마지막편에 오삼계의 활약(?)상이 나와있다.
5. 기타
- 흔히 오삼계의 초상으로 알려진 위의 이미지는 사실 상가희의 초상이다.
6. 대중매체
김용의 유명한 무협소설 《 녹정기》(1969~1972)에 오삼계가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오삼계(녹정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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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
[2]
독립국가인
몽골국과
러시아 내 몽골 문화권인
부랴티야 공화국 ·
칼미키야 공화국에서는 오삼계를 외국의 기회주의자 정도로 여긴다.
[3]
여기서의 제독은 해군이 아니라 그냥 육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오히려 장성(將星)이란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이다. 제독이 해군 장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일본이 Admiral의 번역어로 제독을 채택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유럽은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나라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이순신과
진린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과 달리 수군과 육군의 사령관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구분이 없었다. 이 단어의 원조국인 중국(대만 포함)에서 "提督"이라는 말은 현대에 쓰이지 않고, 해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장령, 계급으로서의 admiral(별넷)은 해군상장으로 번역한다.
[4]
이 첩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오삼계가 산해관을 수비할 때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대세를 따라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북경에 남겨놓았던 애첩 진원원을 이자성군의 난폭한 지휘관이었던 유종민이 끌고 갔다는 것을 오삼계가 알고는 분노하여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이다.
[5]
김용의 무협소설인 《녹정기》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역사의 관점을 유지했다. 다만 작중에서 등장하는 진원원 본인의 입으로 '사람들은 내가 명나라 황제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요녀라고 욕하지만 나는 평생 누구도 해쳐본적이 없고, 그런 마음도 먹은 적이 없다. 나는 정말 그토록 사악한 요녀인 것일까' 라며, 난세에 힘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풍파를 겪어야만 했던 그녀 시점에서의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6]
참고로 명나라 관리들은 자금난에 시달린 숭정제가 자금 좀 기부하라고 할 때, 모두 없다고 궁상을 떨었던 자들이었다. 아예 투항을 작정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자성군은 관리들 뿐만 아니라 힘없는 백성들도 약탈했다.
[7]
이때 이자성이 오양을 협박해서 오삼계한테 이자성에 항복하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오삼계가 받은 직후에 진원원과 오삼계의 재산이 이자성의 부하인 유종민한테 약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오삼계는 분노와 번민 끝에 갈등하다가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심하고는 오양한테 "아버지께서 (명나라의) 충신이 되지 못하셨으니, 이 아들이 효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나무라지 마십시오."라는 글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8]
송산 전투에서 오삼계가 이끌고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은 10,000명에, 송산 전투 이후 가까스로 복귀했을 군대의 숫자를 합쳐서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30,000명의 군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거기에 긴급 징병을 통해서 외형적으로는 100,000명을 유지했을 것으로 파악되나 제대로 된 병력의 수가 너무 적었다.
[9]
이때 동맹을 맺자는 오삼계의 서신에
도르곤이 자기 친동생인 아지거 및 도도와 머리를 붙잡고, 진짜인지 고민하면서 출병을 고민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10]
이때 살려서 북경으로 보내자는 의견도 많았으나 오삼계는 영력제에게 비단끈으로 자살하라고 밀어붙였다. 영력제가 살아서 북경으로 압송될 경우, 남은 세력들이 그를 되찾기 위해 공격할 수 있다는 걱정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만주족들에게 보낸 후 받게 될 악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영력제를 자결시킨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1]
《강희제 평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써서 오삼계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다.
[12]
1경(頃)은 100무(畝)에 해당하는 토지로, 현재의 개념으로 환산하면 약 20,000여 평에 달하는 대토지였다.
[13]
운남에서 먼 서변과 교역하는 데는, 산해관에서 총병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쌓아온 요동과의 오래된 관계가 도움이 되었다.
[14]
耿精忠, 1644~1682
[15]
청나라에서 왕은 일종의 작위로, 토지를 분봉받거나 정사에 관여할 권리는 없었으며, 단지 황제의 명령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할 때 잠정적인 군사 지휘권을 수여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삼계는 순치 16년(
1659년), 운귀총관(雲貴總管)에 임명되면서 지역 내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6]
이용통보(利用通寶)
[17]
물론 청나라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삼번을 철폐하고 싶었을 테지만, 워낙 삼번이 강력하다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가희가 번왕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얼싸좋다 싶어서 철번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즉, 일부러 조장했다기보다는(물론 그런 점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
청태종 홍타이지의 사위였다. 청태종의 14녀였던 건령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19]
오응웅의 적장자인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하여 조부가 있는 운남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20]
《
청사고》<오삼계전>, 吳應熊及其子吳世霖處絞,其餘幼子俱免死入官.
[21]
자살한 후 시신이 부관참시되었다.
[22]
물론 대부분의 한족이 1,000년이 지나도록 영웅으로 여기던 악비가 순식간에 영웅이 아니게 되는건 아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역사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중국의 역사교육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는 점차 인식이 바뀌고 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거의 1,000년 동안 중국 역사의 유명한 악역이었다가 동북공정 이후 이런 시각이 바뀔 상황이었는데, 동북공정의 진행이 늦어지면서 아직까진 연개소문에 대한 시각이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23]
이런 관점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 중국에서도 유명한 무협의 대가
김용이다. 왜냐하면 김용이 홍콩의 언론인으로 살면서, 중국 본토와는 다르게 한족의 입장에서 창작한 소설들이 많기 때문이다. 《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
의천도룡기》등 영웅문 3부작이 상당 부분 침략자인 이민족, 즉 오랑캐에 대항하는 한족의 투쟁사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이 3부작을 관통하는 핵심 배경이 명장
악비와 그의 저작인 《무목유서》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중국에서도 유명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용은 특히 티베트 승려인 라마승을 너무 사악하게 그렸다는 평가 때문에 《신조협려》의 악당인 금륜법왕의 캐릭터를 변화시켜 개작하거나, 《의천도룡기》의 후반부를 상당 부분 개작하는 등 중국 정부의 입장에 맞춰 작품을 개작해야만 했다. 물론 오직 중국 정부 입장에서만 개작한 것은 아니다.
[24]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그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랑캐 정권인 청나라보다는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이 낫지 않냐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것이 청나라가 아니라 농민 반란군이었던
순나라였고, 이 때문에 청나라는 한동안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행세했다.
[25]
다만 오삼계가 의도적으로 조정의 위험을 방치한 것이 아니라, 청군에게 약점을 눈치채이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라는 숭정제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26]
오삼계의 정예부대가 오면 이자성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오삼계가 빨리 북경으로 오면 청나라가 눈치챌까봐 이자성의 진군 속도에 맞춰 북경에 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있었던 명나라의 장수들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자성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것이다.(출처: 《한 권 동양사》)
[27]
다만 오삼계가 정말 첩인 진원원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바꿨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반론이 있다.
[28]
조선의 사대부 및 일본
에도 시대 중후기의 사무라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29]
위의 각주에 나온 에도 시대 중후기 사무라이와는 달리 오히려 현대의 직업적 계약관계에 가까운 활동을 한 이들이었다. 흔히 알려진
부시도나 사무라이 정신은 에도 시대 중후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30]
같은 번왕이었던 상가희가 이 케이스이다, 상가희는 은퇴를 요청했을 때, 그와 동시에 번국을 폐지하라는 강희제의 명령에도 순순히 따랐으며, 동시에 삼번의 난에도 반대하고 강희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장남
상지신의 반란으로 유폐되자 절망하여 자살 시도까지 하고,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사하면서도 유언으로 청 황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덕에 삼번의 난 진압 후에도 장남 상지신만이 자결하는 선에서 끝나고 나머지 가족들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이하기도 했고, 상가희는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31]
사실 이는 태조 누르하치 및 태종 홍타이지와 함께 초원을 누비고 다녔던 숙련도높은 장수들이 죽거나, 늙어서 인재가 많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강희제가 인재를(특히 한족 인재들) 발굴하고 역습에 나서자 곧바로 삼번은 데꿀멍하게 되었다. 소설 《녹정기》에도 이런 모습이 나오는데 장용, 손사극, 조양동, 왕진보 등이(실존인물들이다.) 위소보가 발굴해 강희제에게 바친 한족 인재들이었다.
[32]
아에 비판을 안할순 없었을 것이다.
[33]
실제 국가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국민개병과 보통교육을 국가가 실행하면서 부터였다. 그 전에 초등교육을 맡은 것은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즉, 어릴 때부터 로마-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교육받은 것인데, 예를 들어 프랑스가 보통교육을 실시하면서 '프랑스'라는 국가를 강조하는 역사교육을 했고, 국민개병으로 대다수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모아서 단일한 정신교육과 훈련을 진행하면서부터 '프랑스'라는 단일한 국가의 개념이 전 국가적으로 퍼뜨려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기독교적인 문명국이라는 집단의식이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어서, 국가주의와 공존했다가 21세기에는 자연스레 국가주의(민족주의)가 로마-기독교 문명이라는 집단의식보다 앞서게 되었다.
[34]
현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지역
[35]
민족국가 자체를 가장 중요한 충성(애국)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체제에서는 그 민족국가 내에서의 정권 이동은 상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정치행위의 일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명청교체기 당대의 가치관으로는 '주씨의 나라'인 명나라에서 이씨나 오씨가 정권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매국'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반역'으로 여겨질 것이었으므로, 한족의 민족주의적 상황은 아니었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다.
[36]
《
삼국지연의》만 봐도 유비가 아주 먼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황숙이라는 명분으로 한나라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훗날의 러시아 혁명 당시에도 로마노프 황실의 후예가 백군을 이끌고 여러 지역에서 볼세비키 휘하의 적군에 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