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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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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1]의 대성문 현판을 떼내어 부수는 베이징사범대학의 보황파 홍위병.
파일:홍위병 완장.png
당시 홍위병 완장에 그려졌던 로고. 마오쩌둥의 글씨이다.[2]

1. 개요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3. 흑역사의 시작
3.1. 극단적 대중주의3.2. 홍위병의 만행3.3. 반달리즘3.4. 토사구팽
4. 부작용5. 평가6. 현재7. 여담8. 대중매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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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Chinese) Red Guards[3]
老子英雄兒好漢、老子反動兒混蛋
부모가 영웅이면 자식도 호걸이고,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도 개차반이다
보황파(保皇派) 홍위병의 대표 표어
革命無罪、造反有理
혁명에는 죄 없고, 반란에는 이유 있다(혁명무죄 조반유리)
조반파(造叛派) 홍위병의 대표 표어

명칭에 병사를 뜻하는 병(兵) 자가 붙어 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직접적 연결은 없으며, 본래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즉, 준군사조직 같은 성격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크게 권력자인 부모로부터 좋은 출신성분을 세습받은 소수의 보황파(保皇派) 홍위병과, 권력자들에게 혁명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다수의 조반파(造叛派) 홍위병으로 나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들은 서로 적대했으며 매우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파괴하고 약탈한 것은 주로 보황파 홍위병이 저지른 것이며, 문화대혁명 이후 이들은 기득권 집단으로 복귀하여 현재는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나눠가지고 있다.

반면 권력자를 공격한 것은 주로 당 간부에게 핍박받아왔던 조반파 홍위병이 저지른 것으로 이들은 문화대혁명 이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하방되어 대부분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

3. 흑역사의 시작

3.1. 극단적 대중주의

중국의 민중들은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를 보면서 중국공산당의 통치능력에 대해서 심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국가를 다시 통일시킨 사람이며 원론적으로는 좋은 말만 하는 마오쩌둥 신격화가 가중되었다. 무조건적인 원칙에 대한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하는 말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당시 중국에서 그야말로 구름위의 존재 같은 높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为人民服务)[4],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자." 같은 큰틀에서 원론적인 입바른 소리를 위주로 하였고 실무는 아랫사람들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봉건시대 군주나 마찬가지로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지도자인데 오히려 주변 간신들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논리가 생기기 딱 좋았다. 그리고 이런 말들조차 나중에는 좋은 말도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즉 저 신조들을 따르지 않은 자들은 무조건 숙청하자로 변질되고 말았다. 홍위병이 자발적으로 생성되긴 했지만, 마치 이슬람 근본주의 같은 무시무시한 과격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극단주의로 흐른 젊은이들은 마오쩌둥을 공격할 생각은 못하고 이게 다 관료제와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옛 문화의 잔재 때문이다라며 관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까는 이유는 다양했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 장제스의 똘마니" 등등... 사실 당시 관료제가 폐해로 지적된 건 맞긴 했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개판 내면 어쩌자는 거냐다. 사실 당초 공격 대상은 부패한 관료와 마오주의를 안 따르는 관료 및 옛 문화의 잔재들이었으나, 역시나 통제가 안 되는 집단들인지라 얼마 가지 않아 사회 각 분야로 번지게 된다.[5]

3.2. 홍위병의 만행

청소년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사회의 적으로 비난받거나 기득권층이라고 생각된 사람들, 범죄자들을 마음대로 인민재판을 벌이며 사적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살인범이나 폭행범, 부패사범을 비롯한 범죄자들도 있었지만, 교수, 예술가,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과 정치인, 기업인들까지 대거 끌고 나왔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과 대학생들이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마오쩌둥이 조직한 정치적 대중운동조직에 동원됐으며, 당시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받아 사망한 사람들은 무려 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홍위병들은 길거리에서 법적인 절차도 없이 불법 인민재판으로 자기네 마음대로 반동이라고 선포하며 패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핵미사일을 만드는 로켓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아서 두들겨 패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법적인 원칙대로라면 홍위병들의 상당수는 사법처리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홍위병을 제압해야될 공권력은 무기력하였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을 보면 이 당시의 미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부부가 임신한 딸을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인 교수는 홍위병들에게 끌려가고 교재 좀 본 것 말고는 실습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 의사랍시고 대리를 뛰고 있고, 결국 공산당원인 사위의 힘을 빌어 전문의를 데려왔는데 그 전문의는 잔뜩 굶은 상태라 주인공이 사온 만터우를 급히 먹다가 체한 뒤 기절하고 딸은 아이를 낳다가 제대로 된 도움이 이루어지지 않아 과다출혈로 사망한다.[6]

거기에 주자파로부터 정권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기관을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하고, 각 부처 장관들을 습격해 납치하거나 아예 때려죽이는가 하면 국가 문서고를 공격해서 기밀문서들까지 반동으로 몰아 불태우고 혁명외교를 하자고 외국 외교관들을 조리돌리고 능욕주는 온갖 깽판을 쳐서 중국의 관료제를 사실상 붕괴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똥통에 처박아버렸다. 거기에 음악 무술, 전통 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 시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며 금지[7],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길거리의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죄다 '화약냄새'나 폭탄, , 따위, 그 외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리고 유명한 식당도 미식은 부르주아적이라면서 부수거나 만터우만 팔도록 했다.

한편 홍위병은 군대 경찰조차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했으나 어떤 홍위병들은 차마 그러진 못했고 어떤 홍위병들은 아예 간땡이가 부어서 정말로 군부대를 습격해 차량을 약탈해 가는 등 가지각색이었다. 한편으론 군대 경찰에도 홍위병이 요구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들어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 나중에 가서는 도저히 통제가 안 돼서, 나중에는 공장을 습격해서 물건과 장비, 자재들을 털어가는 개념 밥말아먹은 짓을 저질렀고 공장 노동자들이 홍위병들에게 제발 투쟁을 그만 두라며 파업을 하기에 이르기도 하고, 급기야 마오쩌둥마저 부랴부랴 "무투 말고 문투를 하라."고 지시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상황이 펼쳐진다.

게다가 신호등의 빨간등이 정지신호란 것은 말이 안 되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신호가 되어야 한다고 이를 바꾸기까지 하였다.[8] 그리고 신호등의 정지신호는 '부르주아'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바꿨다. 심지어는 자동차의 우측통행조차 '중국과 같은 혁명적 국가에서는 좌파가 도처에 우세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좌측통행으로 바꿨다고 하며, 다른 소문에 의하면, 우측통행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유산'이라고 바꾸려다가 취소되었는데, 그 이유가 '영국은 좌측통행이다'라고 한다.(...)[9]

은 사람들이 먹을 곡물을 자랄 소중한 땅을 차지하고 노동력을 낭비하게 한다는 이유로 꽃집과 화훼농가들을 습격하고 애완동물도 반동이란 이유로 닥치는 대로 압수했다고 한다. 의 경우에는 더러운 짐승이라고 이미 50년대부터 학살당하고 있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로는 고양이들이 부르주아들의 짐승이라는 이유로 집단학살되었다. 비둘기의 경우에는 사람이 먹을 곡물을 먹는 짐승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되고 비둘기를 기르는 사람들은 조리돌림당하고 체포되었다.[10]

문화대혁명 후반부에 들면 홍위병 분파끼리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말이 좋아 투쟁이지 총기까지 동원한, 사실상 내전이었다.( #) 홍위병들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장한 다음 시가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북경에서는 중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소속 홍위병 부대들이 충돌, 각 부대에 소속된 공학도들이 각자 작업장에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만들어 상대방 캠퍼스로 쳐들어가는 막장 계투 사태도 터졌다.[11] 선판 교수의 회고록인 홍위병을 보면 사상자가 여럿 발생했을 만큼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홍위병은 크게 두 개의 파로 나뉜다. 초기의 보황파[12]와 후기의 조반파. 여기서 말하는 보황파는 권력자인 그들의 부모를 황제에 빗댄 명칭이다. 초기의 무력투쟁이나 사원, 유적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게다가 출신성분이 좋은 홍오류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때문에 대단히 기세가 좋았다. 하지만 1966년 10월 중앙문혁소 조장 천보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통해 혈통론을 배격하면서 그동안 배척받던 흑오류, 회오류가 중심이 된 조반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보황파나 조반파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끼고 살았으며 교과서 암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청소년들이었지만 마오쩌둥 어록은 이미 정복해서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외웠고 너무 자주 읽어서 책의 겉표지가 시꺼메진 적도 많다고 한다.

반면 조반파들은 순수하긴 했지만 뭔가 바보 같고 멋도 없는 극단파 아이들이었고, 후기의 파벌 싸움이나 고문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 다행히도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 식의 만행은 잦아들고, 하방활동[13]을 하거나 70년대 중반의 중국 대지진 때 다같이 구호활동에 나서는듯 좋아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에서는 당 고위층과 관계가 밀접하고 마오쩌둥 추종에 앞장선 보황파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하고 나쁜 짓은 다 조반파가 했다고 물을 흐리면서 마오쩌둥과 공산당 옹호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불성설이다.[14]

홍위병들 본인은 홍위병의 준동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이들이 대다수다.[15] 그 당시에는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자유롭게 집회를 열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단체를 만들어서 지역 기관에 "사무실 좀 달라"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사무실을 내어주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할수 있었다고 하며 당국의 검열이 손에 미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자기에게 안 맞으면 반동, 제국주의 등등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을 보고 맞선다는 게 쉬운 일일까? 애당초 정부 건물까지 점거하는 미친 집단이 무장하고 동네를 헤집는데 남들 다 문 열어놓은 마당에 혼자 잠궈놓고 밥달라고 하는데 안 주고 사무실을 내달라 했는데 안 주면 뭔 꼴을 당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즉 홍위병에게만 좋은 시절이었을 뿐이고 저런 이야기들은 홍위병들 스스로에게 좋은 시절이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시절이었다는 추억보정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다만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장과 교사들을 상대로 갑질을 해도 받아들일수밖에 없던 시대였었기 때문에, 체벌과 불합리한 교칙을 내세우는 교사들의 패악질이 사라졌기도 했다. 이 당시 중국에서 학교체벌은 정부수립 이후로 법적으로 금지되어있었으나,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체벌을 하는것은 일상적이었고, 기준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또한 이러한 일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권와 중남미권, 중동권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전처럼 아무렇게나 체벌을 하면 홍위병들이 떼로 몰려들어서 해당교사를 조리돌림해서 반쯤 패죽이니 체벌을 자제할수밖에 없던것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중국 학교에서 문혁시기와 정반대로 교권이 재강화되고 엄청난 교육열이 불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체벌하는 관행은 부활하였고, 이외에도 두발단속, 저질 재질이나 저급 디자인 교복 채택, 강제 야간자율학습, 0교시, 촌지 같은 한국에서도 대략 2010년대 초중엽 무렵까지 쉽게 볼수있던 부조리가 오랜기간 동안 똑같이 성행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이 많은 학생들은 문혁 시절의 일화들을 보면서 학교 상대로 항의해도 쉽게 받아주거나 학교를 굴복시킬 수 있던 낭만과 패기넘쳤던 시절이라며 반농담섞어 문혁 시절을 부러워하는 경우는 많았고(...), 홍위병의 자식 세대들이 학교에 다녔을 때도 교사나 학부모들이 불합리한 학칙이나 스포츠 머리와 단발같은 짧은 머리모양, 야간자율학습 및 사교육을 강요할 때마다 저 꼰대들은 지들이 학교 다녔을 때는 공부도 대충대충하면서 마음대로 하고 다녔는데 막상 지들이 나이먹으니까 지들도 안한걸 우리한테는 강요나 한다면서 반항했다가 오히려 더 쳐맞았다는 식의 에피소드도 수두록 하였다. 물론 이때가 학생들의 천국이라는것은 홍위병과 따르는 사람들에 한해서였고, 시진핑이나 녜웨이핑처럼 반동의 자식으로 낙인 찍힌 경우에는 혜택은 커녕 대놓고 왕따당하거나 학교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으며, 한창 하방물결이 불었을때, 당국에 의해서 지방으로 끌려가서 막노동을 했던것은 비슷했다.

3.3. 반달리즘

문화 유산에 대한 파괴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서 작게는 도자기, 서예, 고화를 비롯한 개인적 소장품에서부터 크게는 공자의 사당, 절, 성당, 성, 궁궐 같은 유산들을 파괴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화대혁명/악영향 문서로.

마오쩌둥이 심혈을 기울여 보존하라고 지시한 민족영웅인 원숭환의 묘를 평지로 만들어 버렸고, 중국인을 포함한 중화권에서 가장 존경하는 영웅인 악비의 묘를 파헤쳐 불태우고 악비의 상을 부숴버리는 등 도를 넘어선 짓을 많이 했다. 게다가 위의 둘은 공산당을 넘어서 중국인들 전체가 가장 존경하는 구국영웅이며 민족영웅이자 충신들이다. 소문으로는 홍위병이 악비의 묘까지 건드리자 공산당에서 저 놈들 안 되겠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하니 실로 무개념한 것. 한국으로 따지면 이순신 묘소를 때려부순 셈.

다만 홍위병들이 악비의 묘를 불태우고 상을 부숴버렸던 데에는 그냥 미쳐서 그런 것뿐만은 아니라, 이유가 있었다. 악비는 농민들이 봉건 왕조인 남송에 맞서 일으킨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기 때문에, 농민 혁명을 가로막은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16]

3.4. 토사구팽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잡게 된다.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고,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을 정도.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문에 못이겨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않고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된다.[17]

하지만 마오쩌둥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 일파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하여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 모이창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18][19] 홍위병들은 타국의 공산권 지도자들에게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김일성 수정주의라고 공격했다.[20] 특히 마오쩌둥의 아버지를 부농이라며 비난하는 대자보는 마오로 하여금 홍위병들이 자칫하면 자신한테 반란을 일으킬 우려도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판하는 시위를 한것이 결국 북중관계에 악영향을 주었기에 홍위병들을 그냥 놔두다간 타 국가들과의 외교문제도 일으킬 판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공산당 지도부로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고, 68년에서 69년에 걸쳐서 상산하향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 라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버린 것으로, 시골로 한번 가면 도시 거주권을 박탈당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아야 되므로 사실상의 토사구팽을 하는 짓이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다. 하지만 이들은 곧 바로 실망을 느껴야했다. 하방 자체가 홍위병들을 감당못하다보니 별수없이 내보낸것이고, 도시생활을 하던 홍위병들에게 변변한것 하나 없는 농촌의 인프라는 열악하기만 했었다.

수백만 홍위병들이 시골로 끌려갔는데 집도 없고 밥도 없고 질병과 해충과 폭력만 난무했고 강제노동에 항의하다가 농촌 지역의 군인들한테 부르주아랍시고 맞아죽는 경우가 빈번했다. 철이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소녀 홍위병들은 농촌에 도착한 순간부터 성범죄 피해자로 전락했다. 여성 홍위병들이 하방된 농촌에서 강간 등을 당하다가 도시로 귀환도 못 했다는 이야기는 80년대 말 일본이나 대만 경유로 한국에서도 알려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명은 자신을 강간한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강제로 결혼까지 해야만 했다. 당국은 강간과 강제결혼에 대해 '정상적인 성적 관계의 일부.'라고 규정했다. 당국에서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당연히 홍위병들을 시골에 처넣은 게 마오쩌둥이니 감히 마오쩌둥을 아무도 깔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모두 도시에서 빠져나가고 '학력붕괴'가 일어나서 무학자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또한, 이 농촌의 현지인들은 숱하게 전쟁을 겪어 거친 자들이었으며, 거친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농촌같이 닫힌 사회는 지금도 국가를 불문하고 범죄가 일어나더라도 주민들끼리 사건을 은폐해 버리거나, 심지어 해당 지역의 경찰들도 한통속이라서 은폐시켜 주거나, 아예 경찰들까지 범죄에 함께 가담하는 등의 일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곤 하는데 이 당시 중국 농촌이면 과연 어땠을지는 말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들 홍위병들이 하방되면서 이 때까지 높았던 농촌의 문맹률이 급속히 감소하여 중국의 평균 학력은 높아졌고, 사회 인프라망도 어느정도 깔리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기는 했지만, 홍위병 세대의 농민공 문제를 생각하면 언발에 오줌누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민해방군은 홍위병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대량으로 처형했다. 인민해방군이 어찌나 홍위병들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마구잡이로 처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홍위병들은 수백, 수천명 단위로 총살형을 당했다. 또한 이외에도 홍위병들이 악행을 밥먹듯이 저질러대서 당연히 홍위병들한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엄청 많았는데, 결국 홍위병들이 이렇게 힘을 잃자 그동안 홍위병들한테 원한을 품었던 자들이 사적제재인 보복을 가하는 상황까지 왔고,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홍위병이었음을 들켜 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때부터 철저히 과거를 숨긴 채 살게 되었다.

홍위병들이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 저지른 악행들 때문에 힘을 잃자마자 보복을 당한 것은 물리적인 힘에서건 권력에서건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해서 약자들한테 원한 살짓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약자들한테 원한 살 짓을 하다간 이렇게 더 이상 강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보복 당하기 마련이며, 약자들 입장에서도 상대가 더 이상 자신들한테 이전처럼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보복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4. 부작용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하고 사회가 다시 건전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게 되면서, 문화대혁명 자체가 중국에서도 까이는 추세[21] 상술했듯이 당시 홍위병이었던 자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자신이 홍위병이었다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 못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홍위병이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중노년이 되어 자신들이 그토록 공격하던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고, 그들 중 대부분이 과거를 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

이 당시 홍위병이었던 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아예 과거세탁을 하는 것은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단순히 매장당하는 것부터 해서 심지어는 사적제재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인데 사실 자신의 더럽고 추악한 과거를 숨기다 못해 아예 과거 세탁을 한다는 점에선 비슷한 경우들이 한국에서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 젊은 시절에 성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을 일삼던 세대들 중에서 현재에 와서는 마치 자긴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특히나 당시 홍위병들한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매우 많았기에 자신이 홍위병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경우에 따라서는 보복당하고 죽음도 각오해야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마치 흉악범이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학생 대중들이 집단주의, 민중주의, 중우정치 전체주의의 첨병으로써 이용당한 홍위병의 전례는 중국 공산당의 개혁 조치에 대한 거센 반발을 불러와 중국 민주화 운동을 강력히 탄압하는 핑계로 악용되었으며 이는 이후 천안문 항쟁 같은 비극의 참변을 초래하게 되었다.

5. 평가

중국의 문명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아왔다. 중국사의 여러 난세 중의 난세를 겪고, 그 이후로도 수많은 반란과 군웅들의 난립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있었다.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고, 때로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중국의 문화와 전통은 꾸준히 계승되었으며 이민족들의 문화까지 융합하여 양적, 질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동아시아의 일대 문명을 이룩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전승되어 왔던 찬란한 전통과 문화를 중국인들 스스로 무참히 파괴해버렸다.

그렇다. 그들 스스로,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믿었던 중국 스스로를, 중국인의 손으로 파괴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6. 현재

중국 뜨는별 홍위병세대(1998년 기사)
中 새지도부는 홍위병 세대(2012년 기사)
시진핑, 그도 홍위병이었다(2012년 기사)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2016년 기사)
시진핑의 작은 신(新)홍위병(2019년 기사)
노인들이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나이를 먹었다.
- 중국 유행어

중국에서 어린 시절 홍위병을 했던 이들은 마오쩌둥 사망 후에 일부는 몰락하기도 했고, 추후 후회를 토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멀쩡히 살고 있고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거나 "그때는 철이 없어서 부끄러운 일도 했었지" 라고 하면서 묻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일부는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결국,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이 끝나자마자 매우 빠르게 몰락했고 당연하겠지만 홍위병들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홍위병이었던 과거를 한동안 숨기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교육을 받지 못했고 받기도 거부한 홍위병들은 훗날 대부분 사회의 소외층으로 지내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홍위병이 죄다 비참한 삶을 살고있다는 것은 오산인 것이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성장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잘 타서 기업을 차려서 이익을 보기도 했고 당장 홍위병의 리더격이던 쑹빈빈이 미국 MIT에서 공학박사를 따고 영국계 기술 개발 회사의 사장으로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았다.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중국의 직장 중역이 이들이었기 때문에 중국 초기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녀세대들을 열심히 공부시키는데 애썼기도 하고, 1990년대 말에 시행한 부동산 사유화로 큰 이익을 본 경우도 많은지라 평균적으로 전세대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있다. 이건 이전 세대들의 삶이 너무 비참해서 그런것였지만 애초에 홍위병이 불쌍하게 산다느니하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근본적으로 1980~90년대의 중국이 고도성장 기조에 들어가는 했어도, 한국의 1960~70년대 처럼 아직 소득수준이 충분히 올라오기 이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중국의 소득수준이 충분히 올라와 중진국이라 자부할 수 있게 된 것은 2010년대에나 이루어진 일이라 그렇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 활동을 하면서 폭력 행위를 남발한 사례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들을 다 처벌하기가 난감한 데다가 공산당원들 가운데서 덩샤오핑,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처럼 고위급 인사까지 피해를 입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면 필연적으로 총지휘자 마오쩌둥을 격하해야 되는데 마오쩌둥을 대체할 마땅한 국부급 인물이 없었던 데다가[22] 그나마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에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대한 비판담론이 성행했지만 천안문 6.4 항쟁을 기점으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언급을 중국 정부에서 자제하게 되면서 공적인 장소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담론은 냉각되었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은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일부 보상이 이루어지는 선에 그쳤으며, 전면적인 진상규명은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지금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비난하는 이들도 있고 대놓고 미화하지도 않지만 진상규명이 요원한 상태이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비판적으로 혹은 사실대로 그리는 창작물들이 다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사회 생활을 할 때가 되면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의 60대 중반~70대들, 즉 문화대혁명 무렵의 10~20대의 대다수가 홍위병이었다.

중국의 광장무는 문화대혁명 시절의 유산으로 광장무를 추는 아재들은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철부지 학생들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이 이들을 농촌으로 토사구팽한 뒤 특별히 농촌에서 여가활동으로 할것은 없는 와중에 홍위병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을 우려하여 광장무를 장려한 것이다. 이들은 광장무를 하면서 서로 비슷한 걸 겪은 사람들끼리 지금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지식층들을 몰아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현재는 초졸내지 잘해봐야 중졸인 사회적 소외층이 된 걸 잠시나마 위로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나마 마오쩌둥의 권력이 조금이나마 있던 시절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업에서 일하기라도 했지만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도입되자 국영기업이 대부분 민간기업으로 민영화가 된다.

그 결과 민간기업들은 선전용으로 쓰던 초졸 내지 중졸의 사람들은 쓸모가 없으니 다 해고해버린다. 시대의 일회용품으로 사용된 이들은 직장도 취미생활도 없으며 배운 거라곤 광장에서 으쌰으쌰하며 단체활동을 배운 것뿐이라 자연스럽게 늘 하던 대로 광장에 모였으며 현재 만나는 사람도 똑같은 이유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말곤 없다. 게다가 이 세대는 1자녀 정책으로 인해 자식이 적다. 홍위병 세대의 자녀 세대는, 부모들이 "나 때는 말이야 금수저 놈들도 죽창만 박으면 꼼짝 못했어"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이해해줄 리가 만무하며 다사다난한 현대사를 보낸 중국의 세대차이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수준으로 봐도 극심한 수준으로 크다. 이들은 대단히 고독하고 할아버지 내지 할머니가 됐으며 광장에서 노래들으며 춤추는 것은 유일한 구원이 되었다.

노래나 춤보다는 시대의 비극을 경험한 동지들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광장에서 질서정렬하게 줄을 서서 자신들의 최고 전성기였던 그 시절을 재현하고 예전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이들은 예의를 모르는 늙은이의 대명사인 따바 내지 따마가 되었고 어차피 구차한 목숨 말곤 잃을 것도 없다는 식이라 거리낌없는 욕설과 소음공해나 길막에 문제를 제기해도 들어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경찰들도 쩔쩔맨다. 모욕죄로 낼 벌금조차 없다며 몸으로 때우는 식이다.

광장무를 즐기는 인구 역시 1억 이상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2배가 훌쩍 넘는 수준이다. 이들의 전원이 홍위병이었던 건 아니지만 홍위병의 대다수는 여기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이 광대한 숫자와 들고 일어났던 경험 때문에 중국 정부도 차마 이들을 건드리지 못하며 가능한 한 유화적으로 대처하려고 음악을 틀 수 있는 장치들을 무료로 구입해 주고 장소도 제공해주며 이들 홍위병 세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최대한 옛날 일을 꺼내면서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노력한다.

7. 여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는 "청두의 홍위병"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에 따르면 마오쩌둥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 인구가 너무 많이 넘쳐나자 소개(疏開)하기로 하고, 아이들은 홍위병교육대라는 이름만 교육대인 노동 수용소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키러 보냈고, 톱밥으로 만든 섬유질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이며 홍위병을 책임지고 있었던 린뱌오가 불명예 퇴진하자, 당 간부들은 홍위병 아이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아이들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신들의 선생들을 마구 때리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게 되었고 정품 어록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나라 전역에 흩어졌는데, 사실 이 아이들은 중국을 탈출하고 싶어 했고 그 방법으로 기차역을 선택해 기차를 타고 모두 서쪽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에 서쪽에는 은밀히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걸 아이들이 믿었다고 카더라.

하지만 당시 이 열차들의 종점들은 모두 성도(청두)였고, 13살에서 15살된 아이들 수천 명이 이 성도에 모이게 된다. 처음에 아이들은 홍위병 수용소에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고, 청두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동정하여 맛있는 것을 제공하고 먹여주었으며 잠잘 처소와 따뜻하게 입을 것을 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도로 홍위병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처음에는 1,000명 정도였던 홍위병 아이들이 곧 20만 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결국 시민들의 호의는 아이들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었고, 좀도둑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거절한 상인은 강탈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상인들은 시장에게 호소하였으나 아이들이 그를 불러 공개 자아비판대에 넘겨버리고 구타해 시장은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새 시장 선거단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웠다. 그 후보는 뺨이 오동통한 13살의 꼬마였는데 실제 나이보다 더 먹어 보였으며 일종의 카리스마가 있어 다른 홍위병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별 어려움 없이 선출되어 시의회 의장이 15살인 아이들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좀도둑은 더이상 위법행위가 아니었다. 모든 상인들은 새 시장이 만들어 낸 세금을 내어야 했다. 모든 주민들은 홍위병들에게 살 집을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청두가 워낙 서쪽 변두리 도시라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다가, 일부 시민이 지역의 도지사에게 이를 알리러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절의 말을 전해들은 지사는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베이징에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달라고 진정하였다. 결국 베이징 중앙정부는 청두로 전차와 중무장한 수천명의 군인을 보냈는데, 이때 내려진 명령은 "15세 이하는 모두 죽여라"였다. 아이들은 맞서 싸웠지만 시민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바쁘고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으며, 이틀간의 공격끝에 홍위병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마오쩌둥이 회견하게 되어있으므로 중국을 비판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빙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다. 홍위병은 조직에 바탕한 단체행동으로 움직였다. 왜냐한즉 혼자서 멋대로 돌아다니면 반동분자로 찍혀 끔살당하기 쉽고, 홍위병들 사이에서 상호 감시하는 연좌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 본토의 내륙에서 철도 사업은 오랫동안 사보타주 상태였고, 장거리 철도를 달리는 열차의 운행은 높으신 분들의 의중대로 그때그때마다 일정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당대의 공산화된 중국에서 여행의 자유와 이사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은 매우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중국에서 탈출하는 가장 쉬운 길은 우루무치를 경유하여 소비에트 연방 귀순하는 길, 광저우를 경유하여 영국령 홍콩 포르투갈령 마카오 귀순하는 길, 샤먼으로 잠입해서 어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금문도를 다스리는 대만 귀순하는 길이 존재했다.[23]

한국에서는 홍위병을 나치 독일 히틀러 유겐트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린 소년, 소녀들이 흉악한 독재자의 수족이 되어 피비린내나는 끔찍한 역사를 썼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히틀러유겐트와 홍위병은 본질적으로 너무 달라서 홍위병을 중국의 히틀러유겐트라고 칭하긴 어렵다. 히틀러유겐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런저런 문화 복지 중심 청소년단체들[24]을 흡수합병해 나치당의 입맛에 맞게 개조한 산물로, 소비에트 연방의 피오네르 콤소몰 아주 비슷한 조직이었다.[25] 반면에 홍위병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양아치들이 백주대낮에 깽판치는 정치깡패였다. 사실 그들이 한 짓들을 보면 그냥 학교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스케일로 봐서는 대규모 내란에 준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학생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게 그들 절대다수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 한 무학력자들이며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마오쩌둥 어록만 외워서 줄줄 읊을줄 알면 자칭 지식인이라고 하는 지경이었다.

히틀러 유겐트의 경우는 홍위병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하는 소년들도 있었지만 독재정권의 강요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동원된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대중운동에서 시작된 홍위병과 비교하기는 어렵다.[26] 홍위병들은 반권위주의를 내세우면 기존 사회규범을 전면 부정하면서(당연히 국가의 사법체계도 포함된다) 심각한 범죄들을 저지르고 다니며 중국 사회의 심각한 퇴보를 가져왔기 때문에[27] 애초에 단순한 소년단으로 지칭할 수가 없는 집단이었다.

21세기인 현재 시진핑 시대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홍위병으로 등장해 활동하기 시작해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 이들은 IT 강국으로 거듭난 중국에서 온라인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며 대놓고 중국 공산당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는 등,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 네티즌들의 대화를 번역한 사이트에 홍위병 관련 글이 실렸는데, 당 간부 자제들로 이루어진 홍위병들은 겉으로는 무서워보이지만 속은 무르기 그지없어서 약한 사람은 못살게 굴면서 강한 사람에게는 꼼짝도 못한 겁쟁이들이었고 그래서 이들끼리 싸울 때는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민 자제들로 구성된 홍위병들끼리의 패싸움에서는 수시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들렸다고 한다. #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홍위병들은 중국 전역에 문자 그대로의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했다. 1966년 11월 17일에 광둥성 양춘현 출신 중학생이 뇌수막염에 걸린 후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전염병은 양춘현의 다른 학생들에게도 퍼졌고, 이 학생들은 그룹 단위로 전국을 행진하며 선전 활동을 하다가 결국 전국에 뇌수막염을 퍼뜨렸다. 심지어 홍위병들은 외딴 산악마을에까지 가며 선전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평범하게 산에 살던 사람들까지 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게다가 '추위를 견디기 힘든 빈약한 옷+열악한 식단으로 인한 영양실조+열악한 숙소+ 가축수송인 기차와 트럭+추운 날씨[28]' 등 전염병이 전파되기 매우 적합한 환경들이 줄줄이 겹쳤기 때문에 1966년부터 1967년까지 1년간 중국에서 당시 중국 인구의 0.4%에 달하는 304만 명이 뇌수막염에 감염되어 이들 중 16만 명이 사망했다. # 비록 언론통제 때문에 당시 중국 언론에서는 이 뇌수막염이 단 한 기사도 보도되지 않았으나, 대중들은 이 전염병에 큰 충격을 주어 1980년대 초까지도 '뇌수막염에 걸렸다'라는 욕이 유행할 정도였다.

8. 대중매체

왜인지는 모르지만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에서 중국의 기본 보병 이름이 홍위병이다. 원래는 버튼 대령처럼 근접한 보병을 총검으로 찌르는 총검술이란 스킬이 있었는데 밸런스 보정으로 삭제되었다. 인해전술을 중시하는 중국답게 한 번에 2명씩 생산된다. 보병장군은 미니건을 들고 있는 업그레이드 버전 미니거너 생산이 가능한데, 대공능력이 매우 좋아 비행기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그래선지 탱크 헌터보다 비싸고 한 번에 한 명씩만 나온다.

해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중 홍위병과 문화대혁명을 다룬 모닝 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2000년 대한민국 EBS에서 방영을 한 적이 있으나 중국 정부의 항의로 인해 원래 오후 10시에 시작해야 할 방송이 다음 날 오전 4시 30분에 1회성 방영으로 막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마지막 황제에서도 후반부 푸이가 출소한 후에 홍위병들이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에서도 등장한다. 해당 드라마의 이야기가 시작되게 한 만악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9. 관련 문서




[1] 공자와 그 자손들의 무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 물론 당시에는 복사 기능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수천만이나 되는 완장에 마오쩌둥이 하나하나 글씨를 쓸 수도 없고 바느질로 마오쩌둥 글씨를 따라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라 대충 빨간 바탕에 모양만 비슷하면 인정해줬다. [3] 영어에서의 'Red Guards'는 중국의 홍위병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나, 러시아 핀란드 등지에서 벌어진 적백내전에서의 '적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 이쪽은 "적위대"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4] 마치 강제적으로 하는 군복무같이 "복무하다"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 중국어스럽게 번역하려면 "봉사하다."로 번역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 서비스는 복무(服务)로 번역하며 그래서 서비스원은 복무원(服务人)이라 부른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도 단어의 어감과 쓰임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5] 여담이지만 당시 서양의 68혁명 세대들이 마오쩌둥 문화대혁명을 지지한 이유는 이러한 관료제에 대한 반대였다고 한다. [6] 그러나 딸은 죽었지만 아이는 생존했다. [7] 음악의 경우는 당에서 허가하는 음악만 가능 [8] 영화 마지막 황제의 끝부분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9] 실제로 홍위병들이 깽판을 치고 다닐 당시 홍콩 영국 땅이었다. 이 시절의 잔재로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된 후에도 자동차 좌측통행을 한다. [10]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었던 화가 장안거(자신의 집안은 흑오류, 즉 반동으로 몰려서 갖은 고초를 당했고 반동집안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홍위병에 들어갔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집 옆에 어느 노인이 많은 비둘기를 길렀는데 홍위병들이 비둘기를 압수하려고 몰려들자 노인이 커다란 식칼을 들고 "내 비둘기를 건드리는 놈은 내가 죽여주마."라고 버티고 서서 겁에 질린 홍위병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11] 자고로 이 자재들과 만드는 장비들은 위에서 말했듯 공장에서 털어왔는데 군수공장도 절대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무기생산과 품질에 큰 차질을 빚었다. [12] 혹은 보수파. [13] 마오주의 특유의 "농촌에서 배우라"라든가 "농민과 함께 하라",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라"는 전략에 의거한 활동.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 같긴 하지만, 혁명의 역량이 농민이라고 규정하고 농촌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는 마오주의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것도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그럴싸한 농촌 게릴라 활동이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이고, 그냥 농촌봉사활동 내지는 귀농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14] 당연한 소리지만 출신 성분을 보면 조반파는 그야말로 꼬리고 보황파는 몸통이다. [15] 출처 : "문화 대혁명, 또다른 기억" [16] 중국 공산당이 과거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농민 반란들을 보는 시점은 전부 이런 식으로 농민 혁명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사실 농민 반란이라고 해도 정말로 농민들이 지도자였던 일은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은 지식인이나 하급 관리들이 주도하였다. 또한 농민 반란이 전부 무슨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으며, 사실은 그저 마구잡이로 약탈을 하거나 권력투쟁이라는 식으로 개인의 뱃속을 채우는 식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 중국 공산당 정부가 과거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이념에 실제 사건들을 마구잡이로 끼워맞추는 공산주의 유물사관인 셈이었다. [17] 덩푸팡은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활약했으나, 중국장애인협회를 운영하면서 온갖 이권에 개입하는 부정부패 행각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18] 그런데 모함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아버지는 실제로 부농이 맞다. 자수성가한 위인으로 비록 마오쩌둥과 사이는 안좋았지만 교육열이 높아 마오쩌둥에게 투자도 많이 해주었고, 마오쩌둥은 젊은 시절 아버지 재산을 넉넉히 물려받아 유복하게 살기도 했다. [19] 사실 마오쩌둥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 중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았다.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후원자이자 그 자신도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본인부터가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인이자 부유한 자본가였고, 그래서 가난한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해주었다. [20] 북한 접경지역인 동북지방의 홍위병들이 이런 대자보를 붙이면서 반김일성 시위를 하면서 중국-북한 관계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동시에 김일성은 이것을 외세의 압력이라고 간주하고,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주체사상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21] 마오쩌둥의 과오 중 대표적 사례로 지적.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은 " 극좌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흔히 마오쩌둥을 평가할 때 나오는 '공7과3'에서 과3에 반드시 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오쩌둥 말기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게 커서 마오쩌둥은 물러나시오! 같은 시위도 자주 일어났다. [22] 중화권 공통의 국부인 쑨원이 있긴 하지만, 그를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쑨원은 중국공산당의 경쟁자 중화민국의 국부로 중국 공산당은 쑨원의 뜻 그가 세운 나라에 반대의 노선을 타서 중화민국을 쫓아내고 집권하여 중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쑨원 뜻을 안 따르고 있기에 더욱더 마오쩌둥에 대한 혹평은 묻힐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정당 허가를 내준 건 쑨원이지만 쑨원 국민의 목소리가 커야 함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위상이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23]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에 대하여 알고 싶은 사람은 프랑크 디쾨터 박사의 3부작(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대혁명), 리즈수이( 마오쩌둥 주치의)의 회고록( 모택동의 사생활 1·2·3부), 조영남 박사의 3부작( 개혁과 개방, 파벌과 투쟁, 톈안먼 사건), 폭스 버터필드 기자의 공산중국 취재여행을 서술한 기행문( 중국은 있다 上·下권), 중국근현대사학회 논문들을 직접 구해서 읽자. [24] 유소년단들, 소년단들, 청년단들 [25] 다름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그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었다. [26] 실제로 1945년 들어 나치 독일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노인과 아이들까지 국민돌격대로 동원되어 도태된 구식 무기들까지 사용될 정도로 절박할 때 유겐트 출신 소년병들도 전쟁에 동원되어 다수가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었다. [27] 물론 홍위병들은 주석의 명을 받들어 중국과 인민을 위해서 사회의 구습을 타파한답시고 한 짓이었지만 과정과 결과 모두를 봐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28] 원래 뇌수막염은 겨울과 봄에 유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