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정(李繼鄭) 一諱 계훈(繼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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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정[1] | |
관향 | 원주(原州) |
출생 | 중종 34년 1539년 |
사망 | 선조 28년 1595년 |
자 | 경윤(景胤) |
관직 |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어모장군(禦侮將軍)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곤양군수(昆陽郡守) 충청수군절제사(忠淸水軍節制使) |
가족 관계 | 숙부인, 2남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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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무인.
2. 일생
1539년(己亥) 중종(中宗 34년) 아버지 이장(李樟)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사이에서 4째 아들로 태어났다.1570년(庚午) 선조(宣祖 3년)에 중시(重試)에 오르고 현신교위(顯信校尉) 행충좌위(行忠佐衛) 전부장(前部長)이 되었고 1571년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배수(拜受)하였다.
1589년(己丑) 宣祖(선조 22년) 어모장군(禦侮將軍) 함경도 동관진첨절제사(潼關鎭僉節制使)를 배수(拜受)하여 군교(軍校)의 무예연마(武藝練磨)와 진법교육(陣法敎育)에 힘쓰고 작은 진(鎭)을 없애어 군력(軍力)을 키워서 북변(北邊)을 노략질하던 왜적(倭敵)을 물리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였다.
1591년(辛卯) 宣祖(선조 24년) 절충장군(折衝將軍)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전보(轉補)되어 예양(禮讓)으로 군민(郡民)을 이끌고 덕치(德治)로 교화(敎化)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적도(敵徒)들이 물밀 듯이 북상하여 영남(嶺南)일대가 창황(惝怳)한 가운데 적장(賊將) 하세가와(長谷川)등 3만 대군이 곤양(昆陽)과 인접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 공격(攻擊)하니 성(城)이 무너질 위험에 이르렀다, 이에 이계정은 구국애족(救國愛族)을 호소(呼訴)하여 사기(士氣)가 떨어진 군졸(軍卒)들을 격려(激勵)하여 곤양을 굳게 지키게 하는 한편, 진주성을 외곽(外郭)에서 지원하던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에게 군장(軍裝)을 지원하고 식량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니 진주성의 승장(勝將) 김시민(金時敏) 못지않게 이계정(李繼鄭)장군의 위망(威望)과 지용(智勇)이 조야(朝野)에 빛났다.
1593년(癸巳) 宣祖(선조 26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무주(茂朱) 조방장(助防將)에 특제(特除)되어 위로부터 “무주(茂朱)는 왜적(倭敵)이 호남(湖南)으로 침투(浸透)하는 길목이요 나라의 목덜미와 같은 요충(要衝)이니 굳게 지켜 근왕(勤王)하라”는 은근한 당부를 받고 종질(從姪)인 부정(副正) 이원해(李元海)와 판관(判官) 이대행(李大行)을 불러와 돕게 하고, 필요한 장졸(將卒)들을 격려(激勵)하고 의기(義氣)를 북돋았다.
또 성보수축(城堡修築)과 군사(軍事)의 방어책(防禦策)을 조련(調練)하는 한편 군량(軍糧)과 화약(火藥)을 비축(備蓄)하여 이웃 고을의 사정(事情)에 맞추어 방어계획(防禦計劃)을 세움으로서 호남(湖南)의 곡창(穀倉)을 노리고 출몰(出沒)하는 왜적(倭敵)들을 빈번하게 격퇴(擊退). 참획(斬獲)하니 그들은 감히 호남에 침투하지 못하여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다.
이때에 평양(平壤)과 한양(漢陽)에서 물러난 왜적(倭敵)들이 웅천(熊川). 창원(昌原). 울산(蔚山) 등지(等地)에서 성(城)을 쌓고 주둔(駐屯)하며 백성들을 괴롭히더니, 1593년 6월에 적장(敵將) 가등(加藤). 소서(小西). 흑전(黑田)등이 이전에 패전(敗戰)하였던 진주성에 대한 앙심(怏心)을 품고 침공(侵攻)하므로 이를 구원(救援)하고자 이계정은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 등과 더불어 진주성에 들어가 방위(防衛)하였다.
다음날 이계정(李繼鄭)은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 장군으로부터 “전라관병(全羅官兵)은 출성(出城)하여 산음(山陰)의 길목을 막아라.”라는 군령(軍令)에 따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와 함께 성(城)을 나와 산음(山陰)을 방어하니 진주성(晉州城)의 함락(陷落)을 막지못한 한(恨)을 남겼다.
1594년(甲午) 宣祖(선조 27년)에 충청수사(忠淸水使) 이순신(李純信 字 立夫)이 군량미사범(軍糧米事犯)으로 조도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에 의하여 파직(罷職)되니 그 후임(後任)으로 우의정(右議政) 김응남(金應南)은 이계정(李繼鄭)을 비롯하여 박종남(朴宗男). 성윤문(成允文). 구사직(具思稷) 등을 천거(薦擧)하였다, 이에 왕명(王命)으로 열렸던 비변사(備邊司)의 조의(朝議)에서 이계정(李繼鄭)으로 결정(決定)하여 상주(上奏)하니 동년 12월1일 절충장군(折衝將軍)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를 배수(拜受)하였다. 그리고 십일밀부(十一密符)를 받아 사위 최희량(崔希亮 諡號-武肅, 號-逸翁)을 막료(幕僚)로 대동(帶同)하고 특명(特命)에 따라 충청도(忠淸道). 강원도(江原道). 전라도(全羅道)의 세곡(稅穀)을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의 각(各) 군영(軍營)에 운송하는 임무(任務)를 맡게 됨에, 새로운 전함(戰艦)을 설계(設計)하여 건조(建造)하였다.
또 군장(軍裝)을 정비(整備). 확충(擴充)하는 한편 군율(軍律)을 엄중(嚴重)하게 하니 막하(幕下)의 군사(軍士)들의 사기(士氣)는 충천(衝天)하였다. 이런 이계정(李繼鄭)을 보고 명(明)나라 제독(提督) 진린(陳璘)은 6폭 산수화병풍(山水畫屛風)을 보내 노고(勞苦)를 치하(致賀)하였다.
1595년(乙未) 宣祖 乙未(선조 28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급한 후원(後援)을 요청(要請)하니 이계정(李繼鄭)은 통제사(統制使) 영(營)에서 전략(戰略)을 토의(討議)하고 본영(本營)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안(沿岸)을 따라 북상(北上)하는 왜적선단(倭敵船團)을 찾아내어 이를 치니 승세(勝勢)를 잡아 그들을 원산도(元山島) 앞바다까지 추격(追擊)하여 마무리 공격(攻擊)으로 화공(火攻)을 펼쳤다.
그런데 그때 조류(潮流)가 바뀌면서 풍향(風向)도 따라 바뀌면서 역풍(逆風)이 맞게 되니 적선(敵船) 뿐만아니라 아군(我軍)의 전선(戰船)에도 화기(火氣)가 번져 주사(舟師) 600여명과 함께 충의(忠義)에 따라 순국(殉國)하니 그날이 2월27일이요 그의 나이 54세였다.
나라에서는 도승지(都承旨) 정엽(鄭曄)을 제관(祭官)으로 보내 초혼치제(招魂致祭)하니 그 치제문(致祭文)에 말하길
사납고 거친 파도속에 나라를 위해 목숨바첬네,
전정(戰艇)의 화재(火災)는 천운(天運)이지 인력(人力)은 아니로다,
경(卿)을 잃은 슬픔보다 경(卿)이 없는 나라일이 더욱 걱정일세.
라고 하였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도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조정(朝廷)의 오른팔을 잃었구나,”하였다.(난중일기 중)
3. 가족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 성란(成蘭)의 따님으로 2남2여를 두었으니 첫째 아드님은 유(楡)이며 승사랑(承仕郞)이고 둘째는 도(瓙)이고 선전관(宣傳官)이다,사위는 최희량(崔希亮)으로 흥양현감(興陽縣監)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이고 시호(諡號)는 무숙(武肅)이며 수성인(隋城人)이며, 둘째 사위는 백흥남(白興南)으로 현감(縣監)이며 수원인(水原人)이다.
4. 추모
이계정(李繼鄭)을 배향(配享)하는 영산사(英山祠) 창설당시(創設當時) 원임(院任)의 면모(面貌)와 선무원종녹권(宣武原從錄券 -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亂中日記 - 충무공), 일옹집(逸翁集 - 최희량), 호남절의사(湖南節義史), 해남군지(海南郡誌), 조선명륜록(朝鮮明倫錄) 등의 문헌(文獻)에 그 일부만 전해올 뿐, 원산도(元山島) 앞바다에 이계정(李繼鄭)과 함께 수몰(水沒)된 600 원혼(冤魂)의 부르짖음과 1594년(甲午) 식년(式年)에 이계정(李繼鄭) 장군(將軍)에게 내린 가자(加資)의 내용(內容)은 과연 무엇이었던가?서해(西海)에 원혼(冤魂)과 함께 묻히고 말았도다.
정조(正祖) 연간에 우리 문중의 이기욱(李璣郁)이 강진(康津)에 귀양살이하던 응교(應敎) 조흥진(趙興鎭)에게 이계정(李繼鄭)의 사적(事績)과 문헌(文獻)을 보이며 정려(旌閭)로 포상(褒賞)할 것을 역설(逆說)하여 입언(立言)을 부탁하니, 그가 말하길 “수사공(水使公)의 충렬(忠烈)은 사기(史記)에 기록(記錄)되었으며 사람들이나 부녀(婦女)들 입에서도 전해오는 처지니 밝은 나라님께서 모를 까닭이 없음으로 머지않아 정포(旌褒)될 것이다.”하며 수사공(水使公) 충렬(忠烈)에 감격(感激)하여 1798년 정조(正祖 22) 8월27일 행장(行狀)을 꾸미면서 그 명(銘)에 말하기를 “하늘이 걸인(傑人)을 내릴 적에 온전한 인물(人物)을 보냈으리라. 천생(天生)의 효심(孝心)을 옮기니 충성(忠誠)을 이루었구나! 수사병권(水使兵權)을 주심에 보답하고자 죽기를 맹세하고 거친 물결에 배 띄웠으니, 큰 고래가 노는 듯 왜적에게 더럽힌 영해(領海)를 깨끗이 씻었네, 전선(戰船)에 불이 났음은 천운(天運)이지 인력(人力)은 아니로다. 정세(情勢)가 급박(急迫)하니 차라리 몸을 절의(節義)에 던져 깨끗이 하였음에, 바다귀신도 슬피 울고, 파도 또한 울부짖네, 영산사(英山祠)가 자리한 저 언덕에 나무숲도 굽이쳐 흐느끼누나! 사당(祠堂)에 같이 모신 구충(九忠)들이 함께 흠향(歆饗)하니 내 글이 중(重)함이 아니라, 비석(碑石)이 오래도록 무겁게 그 위공(偉功)을 빛내리로다.”라고 하였다.
5.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내고장 얼 (해남군, 1981)
해남군의 문화유적 (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해남군지 상(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해남군지 하(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원주이씨대동보(1991)
원주이씨 강릉공파의 인물과 유산(비천당/김성태 저/2021)
6. 관련자료
이계정(李繼鄭) 유지(有旨) 이계정(李繼鄭) 유서(諭書) 이계정(李繼鄭) 고신(告身)
이계정(李繼鄭) 홍패(紅牌) 이계정(李繼鄭) 고신(告身) 이계정(李繼鄭) 홍패(紅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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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파리화실의 박용백화백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