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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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刁逵(? ~ 404)
동진의 인물로 자는 백도(伯道). 기주 발해군(渤海郡) 요안현(饒安縣) 출신으로, 조부 조협은 동진 원제의 총애를 받아 상서령을 지냈고 부친 조이는 관직이 북중랑장까지 올랐다. 조규와 그의 동생 조창(刁暢), 차남 조홍(刁弘) 또한 조정의 여러 현직을 두루 역임했다.
2. 생애
융안 연간(397 ~ 401), 조규는 광주자사, 영평월중랑장에 임명되었고, 동생 조창은 시흥상, 아들 조홍은 기주자사에 각각 임명받았다. 이들은 모두 명성에 구애받지 않고 축재에 힘쓰니, 밭이 10,000경이나 되었으며 노비는 수천 명에 달했고, 집안에 재화가 지나치게 남아돌았다. 이때 도박을 즐기다가 가산을 탕진한 유유에게 돈을 빌려주어 30,000냥의 빚을 지게 만들고, 유유가 기한 내에 이를 갚지 않자 그를 붙잡아 말뚝에 묶어버렸다. 하지만 평소 유유를 잘 알던 왕밀(王謐)이 유유의 빚을 대신 갚아주니 그제서야 조규는 유유를 풀어주었다.융안 5년(401년) 12월, 동진 조정에서 형주자사 환현을 의심하여 그의 측근인 광주자사 조규, 예장태수 곽창지(郭昶之)에게 입조할 것을 명했으나 환현의 명령을 우선시하고 이를 무시했다.
원흥 원년(402년) 2월, 사마원현이 환현의 죄상을 나열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자, 환현도 사마원현의 죄를 널리 폭로하고 거병해 건강을 향해서 동쪽으로 내려갔다. 환현은 제왕(齊王) 사마유지(司馬柔之)를 참살하고 역양(歷陽) 전투에서 양성태수 사마휴지(司馬休之)를 패퇴시키며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토벌군을 이끌면서도 매일 술에 빠져 살던 사마원현은 환현이 이미 남항(南桁)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건강으로 도망치려 했다. 환현은 추격해 사마원현을 사로잡고 경사로 들어가 스스로 승상에 올랐다. 붙잡힌 사마원현과 사마도자는 저자에서 참수되었다.
원흥 2년(403년) 11월, 승상 환현이 마침내 제위를 찬탈해 초나라를 세우고 안제 사마덕종을 폐위시켜 영안궁(永安宮)에 머무르게 했다.
원흥 3년(404년) 2월, 조규는 서중랑장,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역양에 주둔했다. 유유는 거병 전 조규의 참군 제갈장민과 내통하여 그로 하여금 조규를 죽이게 하고 역양을 점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윽고 거사 날이 되자 유유는 거병하여 안성왕 환수(桓脩)를 참살하고 경구(京口)를 장악했다. 제갈장민은 약속대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역양에서 일어났으나 시기를 놓쳐 조규에게 진압당하고 함거에 실려 건강으로 보내졌다. 제갈장민의 함거가 당리구(當利口)를 지날 때, 유유가 이미 건강에서 환현을 무찔렀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함거를 호송하던 병사들은 함거를 부수고 제갈장민을 풀어준 뒤 그를 따르기로 했다. 제갈장민이 무리를 거느리고 다시 역양을 치자, 조규는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성을 버린 채 도주했다.
당시 우위장군 조창과 무군사마 조홍은 이미 유유의 장수 유의에게 패했고, 조창은 전사, 조홍은 도망쳤으나 행방불명인 상태였다. 조규도 이내 하인들의 배반으로 붙잡혀 석두성으로 끌려갔다. 유유는 조규를 포함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씨 집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했지만, 조규의 막내동생 조빙(刁聘)만은 특별히 사면시켜 급사중으로 삼아 조협의 대를 잇게 했다.
원흥 3년(404년) 9월, 홀로 목숨을 구한 조빙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이내 제압당하고 참수되었다. 이로써 조씨 가문이 완전히 멸절하자 유유는 조씨가 모은 재물을 뿌려 전부 백성들에게 취하게끔 했다. 조씨 집안의 재산이 워낙 많아 백성들은 며칠 동안 하루종일 집안을 드나들며 재물을 분배했음에도 다하지 않았다. 때마침 기근이 들었음에도 백성들은 조씨 집안에서 취한 재물 덕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