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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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신감현공(新淦縣公) 諸葛長民 | 제갈장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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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없음 |
작위 | 신감현공(新淦縣公) |
성 | 제갈(諸葛) |
휘 | 장민(長民) |
자 | 불명 |
생몰 | ? ~ 413년 3월 |
본적 | 낭야군(瑯邪郡) 양도현(陽都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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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낭야 제갈씨 출신으로 문무에 재능을 보였으나, 행실이 좋지 않아 고향에서 평판이 나빴다고 한다.2. 생애
처음에 환현의 부름을 받고 평서군사(平西軍事)로 환현군에 입대했지만, 매우 탐욕스럽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조규가 예주자사에 임명되고 역양(歷陽)을 진수하자, 그의 참군으로 다시 등용되고 양무장군을 겸했다.원흥 3년(404년) 2월, 유유가 환현 토벌을 모의할 때, 그에게 가담하여 조규를 죽이고 역양을 점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제갈장민은 기일을 착각하여 제때 거병하지 못했고, 배신하려던 계획도 탄로나면서 조규에게 사로잡혔다. 조규는 그를 함거에 가두고, 병사들을 보내 도성 건강(建康)으로 압송하게 했다. 제갈장민의 함거가 당리(當利)를 지나던 중, 환현이 유유에게 패해 이미 건강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압송하던 병사들은 함거를 부수고 제갈장민을 구출했다. 제갈장민이 이들을 거느리고 다시 역양으로 향하자, 조규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유유는 제갈장민이 역양을 장악한 공로를 인정해, 보국장군, 선성내사로 삼았다.
원흥 3년(404년) 4월, 환현의 조카 환흠(桓歆)이 인근에서 양추(楊秋)의 저족 세력과 연합해 역양을 침공했다. 제갈장민은 예주자사 위영지의 지휘를 아래, 군대를 거느리고 역양 서북쪽 연고(練固)에서 먼저 저족 무리를 격파하고 우두머리 양추를 참했다. 그리고 진릉태수 유경선과 함께 작피(芍陂)에서 환흠까지 무찔러 패주시키니, 그 공으로 신감현공(新淦縣公)에 봉해지고 식읍은 2,500호에 달했다.
의희 2년(406년) 4월, 유유에 의해 도독회북제군사(都督淮北諸軍事)에 임명되고 산양(山陽)에 진수했다. 남연의 황제 모용초가 군대를 보내 하비(下邳)를 침구하자, 제갈장민은 부장 서염(徐琰)을 파견해 막았다.
의희 4년(408년) 정월, 유유가 조정에 표문을 올려, 제갈장민을 청주자사로 추천했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제갈장민을 사지절, 도독청양2주제군사(都督青揚二州諸軍事), 영진릉태수(領晉陵太守), 청주자사로 삼고, 단도(丹徒)에 주둔하게 했다.
의희 6년(410년) 4월, 강주자사 하무기가 노순의 반란군에 의해 피살당하고 조정이 크게 위태로워지니, 유유는 북벌을 멈추고 도성 건강으로 돌아왔다. 이에 청주자사 제갈장민, 연주자사 유번(劉籓), 병주자사 유도린도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건강으로 들어와 조정을 보위했다. 이때 제갈장민이 조정에 표를 올려,
「요사스런 도적이 배를 모으기 위해 벌목을 했음에도, 남강상
곽징지는 이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은폐하고 서로를 지키면서, 누차 하무기를 속였으니 그 죄는 참형(斬刑)에 합치합니다.」
라며 곽징지를 참할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고 조서를 내려 곽징지를 용서하였다.의희 6년(410년) 5월, 예주자사 유의가 상락주(桑落洲)에서 노순에게 대패하고, 함선과 치중 등 중요한 물자를 반란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건강성 내의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지자, 제갈장민은 유유에게 안제 사마덕종을 모시고 장강 이북으로 피난갈 것을 권했으나 유유가 듣지 않았다. 어느덧 노순의 반란군이 회구(淮口)에 이르니, 유유는 제갈장민, 유의에게 명해 북릉(北陵)으로 가 석두성(石頭城)을 방비하게 했다. 유유는 좌리(左里)에서 노순을 쳐 격파하고, 여러 군대를 파견해 패주하는 노순을 끝까지 쫓아가 평정했다. 노순의 난이 평정된 후, 제갈장민은 도독예주청주지6군제군사(都督豫州揚州之六郡諸軍事), 예주자사, 영회남태수(領淮南太守)로 옮겨졌다.
의희 8년(412년) 9월, 태위 유유는 유의를 토벌하기 위해 건강에서 출진하기 전에, 제갈장민을 불러들여 감태위유부사(監太尉留府事)라 삼고, 조서를 내려 갑장(甲杖) 50명과 함께 입전해 태위부의 일을 맡게 했다. 그러나 제갈장민은 교만해져 건강에서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대저택을 지어 진귀한 보물과 미녀들을 모으고, 일의 집행이 대부분 법에 맞지 않아 백성들은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유유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을 용인해 주었으나, 제갈장민은 스스로 자기 행동이 무례함을 잘 알고 있어, 항상 유유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후 유의가 주살되자, 다음 숙청 대상은 자신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친척에게,라 말하며 모반할 마음을 품었다. 다만, 아직 확신은 없어 단양윤 유목지를 찾아가 은근슬쩍 물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나와 태위의 사이가 평안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오?"
유목지가 답했다."상공(相公, 유유)께서 서쪽을 정벌하면서 노모와 여린 동생을 장군께 맡기셨는데, 어찌 평안하지 않다고 이르십니까!"
유목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제갈장민은 난을 일으킬 마음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는 성정이 경솔하고 교활하며, 이기적인 동생 제갈여민(諸葛黎民)이 있었는데, 형이 모반의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영포와 팽월은 유씨가 아니어서 그 세력을 보전하지 못했습니다. 유의의 주살은 곧 제갈씨의 두려움이니, 아직 유유가 도성에 돌아오지 않은 지금 거사를 도모해야 합니다."
라 하며, 유유가 건강으로 돌아오기 전에 거병하자 설득했다. 제갈장민은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내 탄식하며 말했다."빈천할 때는 항상 부귀를 바라지만, 부귀해지면 필시 위난을 겪는구나. 오늘 단도(丹徒)의 평민이 되고자 하는 길도 있으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후 제갈장민은 기주자사 유경선에게 서신을 보내, 그와 더불어 내란을 획책하고자 했으나, 유경선은 완곡히 거절하고 그 서신을 유유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한편, 건강성 내에서 유목지도 제갈장민이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태위행참군 하승천(何承天)과 이 일을 의논하였다.의희 9년(413년) 2월, 유유는 제갈장민을 깊이 의심하여, 그를 즉시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계략을 꾸몄다. 유유는 조정에 언제쯤 도착할 것이라는 기일을 통보하고 낙타로 치중을 옮겼는데, 번번이 중간에 오래 머무르면서 결국 해당 기일을 지나버렸다. 제갈장민을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은 유유를 마중하기 위해 기일에 신정(新亭)까지 나와서 유유의 군대가 돌아오길 하루종일 기다렸다. 그러나 유유는 본대와 헤어져, 이미 샛길을 통해 빠른 배로 신정을 우회하여 몰래 건강에 도착한 상황이었고, 관리들이 모두 나가있는 틈을 타 동부(東府)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유유가 벌써 건강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제갈장민은 동부로 달려가 유유를 접견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유유는 장사 정오(丁旿)에게 명해 장막 뒤에 숨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제갈장민을 불러들여 그와 평소 다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며, 서로 사사로이 대화를 나눴다. 제갈장민이 기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본 유유는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판단해 정오에게 신호를 보냈고, 마침내 숨어있던 정오가 나타나 몽둥이로 제갈장민을 때려 죽였다. 유유는 제갈장민의 시체를 정위에게 넘기고, 또 사람을 보내 그 동생인 보국장군 제갈여민도 체포하게 했다. 제갈여민은 본래 날래고 용맹했으므로, 체포하러 온 이들과 맨손으로 악전고투를 벌이다 사망했다. 제갈장민의 막내 동생 대사마참군 제갈유민(諸葛幼民)은 깊은 산 속으로 도망치다가 유유가 보낸 추격병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 제갈장민의 사촌동생 제갈수지(諸葛秀之)도 연이어 참살당했다. 이리하여 제갈씨는 모두 주멸되었으나, 백성들은 유유가 그들을 너무 늦게 축출한 것을 원망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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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 평정 이후 부귀해진 제갈장민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는 한 달에 10여일 가량은 자다가 한밤중에 무언가에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마치 무언가와 격투를 벌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고 한다. 한번은
모수지가 그의 집에 놀러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제갈장민이 자다가 갑자기 소란 피우는 모습을 보고 매우 놀라 왜 그러느냐 물으니, 제갈장민이 답했다.
"심히 검고, 털이 있으며, 다리가 있는지는 불분명한 무언가가 보이는데, 기이하게도 힘이 워낙 강해 내가 아니면 그것을 제압할 도리가 없소."
제갈장민의 이런 잠버릇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갔다고 한다.
- 제갈장민이 모반을 꿈꿀 무렵, 그의 주변에는 여러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저택의 기둥과 서까래 사이에서 뱀의 머리가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에게 명해 칼로 베게 했지만, 칼날이 닿기도 전에 뱀의 머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칼을 든 자가 사라지면, 여지없이 뱀의 머리가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또. 빨래방망이 소리가 마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가 하면, 집 벽에 갑자기 7 ~ 8척에 달하는 거대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등과 같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장민은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