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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15:29:47

이벽

<colbgcolor=#C0C0FF><colcolor=#000> 이벽
李蘗
본관 경주 이씨
출생 1754년( 영조 30)
사망 1785년( 정조 10) (향년 33세)
종교 유교( 성리학) → 기독교( 천주교 | 세례명: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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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초기 한국 가톨릭의 지도자. 자는 덕조(德操).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브로시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創立聖祖) 5위 중 한 명이다.

2. 생애

정약현의 처남이다. 정약현의 이복동생인 정약전, 정약용을 비롯하여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과 일찍이 교류가 깊었으며,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연구하다가 천주학을 학문이 아닌 종교( 천주교)로 받아들였다. 이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가성직을 받았다. 이때는 아직 한반도에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들어오기 전이라서 이승훈이 임의로 부여한 성직은 교회법상으로 효력이 없었고, 이벽 사후에 북경교구에서 청나라인 사제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파견하게 된다.

이후 1785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인인 김범우[1] 토마스를 제외한 양반 신자들은 일단 풀려났으나, 이벽은 아버지인 이부만(李溥萬)에게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내가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받자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한 뒤 집에서 칩거하다가 사망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정황적 증거가 있다. 유해 발굴에 참여한 한 해부학 교수는 그가 음독사망했다고 주장하여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KBS역사저널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Ul-b_h-zwY0).

3. 사후



[1]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그의 집터에는 훗날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2] 세례명 안토니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1866년 병인박해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3] 이벽이 늦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강요로 배교하겠다고 한 행적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