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colcolor=#000> 이벽 李蘗 |
|
본관 | 경주 이씨 |
출생 | 1754년( 영조 30) |
사망 | 1785년( 정조 10) (향년 33세) |
종교 | 유교( 성리학) → 기독교( 천주교 | 세례명: 세례자 요한) |
1. 개요
초기 한국 가톨릭의 지도자. 자는 덕조(德操).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브로시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創立聖祖) 5위 중 한 명이다.
2. 생애
정약현의 처남이다. 정약현의 이복동생인 정약전, 정약용을 비롯하여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과 일찍이 교류가 깊었으며,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연구하다가 천주학을 학문이 아닌 종교( 천주교)로 받아들였다. 이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가성직을 받았다. 이때는 아직 한반도에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들어오기 전이라서 이승훈이 임의로 부여한 성직은 교회법상으로 효력이 없었고, 이벽 사후에 북경교구에서 청나라인 사제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파견하게 된다.이후 1785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인인 김범우[1] 토마스를 제외한 양반 신자들은 일단 풀려났으나, 이벽은 아버지인 이부만(李溥萬)에게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내가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받자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한 뒤 집에서 칩거하다가 사망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정황적 증거가 있다. 유해 발굴에 참여한 한 해부학 교수는 그가 음독사망했다고 주장하여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KBS역사저널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Ul-b_h-zwY0).
3. 사후
- 이벽의 죽음에 대해 앙투안 다블뤼[2] 주교는 "배교를 강요당하고 집에서 칩거하다가 전염병에 걸린 채, 가족들에게 이불을 너무 많이 덮여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 이벽의 유작으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에 대해, 후대에 다른 사람이 이벽의 이름을 빌려서 쓴 위작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이 연구 결과가 나오기 이전에도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가 성교요지에는 옛 개신교 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인 '감람'이나 '여화화'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반면 하느님을 뜻하는 '천주'라는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 노아의 대홍수가 노아가 일으킨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는 등 성경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들어 성교요지는 후대의 위작이며, 더 나아가 이를 인용하고 있는 만천유고와 이벽전도 위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 이벽의 집터와 천진암은 성지로 지정되었고, 천진암 터에 천진암 대성당이 건설될 예정이다.
- 이벽은 사후 교황청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고, 김범우(토마스) 및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3]
[1]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그의 집터에는 훗날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2]
세례명 안토니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3]
이벽이 늦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강요로 배교하겠다고 한 행적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