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주교 박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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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산자, 대동여지도중에서 |
2. 상세
이 사건은 1839년에 있었던 기해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을 중국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 교구로 설정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몰락한 양반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갔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벽파인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정권 아래에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1839년에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인 사제들을 처형했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가톨릭에 대해서 그다지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정순왕후 김씨의 죽음 이후 시파와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선 조정이 세도 정치로 접어들면서 특정 정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아 천주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져 내버려둔 것을 이어간 면도 있지만, 대원군의 배우자인 여흥부대부인을 비롯한 집안 여인들이 천주교 신자였고,[2] 관료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3]과도 만나는 등 천주교에 우호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입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 내부에서도 대원군의 집권을 낙관적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이제 조선에서 더 이상 천주교 박해는 없다는 소문이 퍼져 외국인 천주교 선교사가 사제 복장을 입고 조선에 입국을 하려 들기도 했다. 그 전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삼년상을 치르는 사람들과 같은 복장을 입고 다녔는데, 삿갓을 눌러써 외국인임이 보이지 않고 조선 예절상 상을 치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수색도 생략했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놓고 사제 복장을 입고 조선에 입국하면 당연히 즉시 체포될 것이었고, 이는 조선에 이미 들어와서 몰래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말려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한편, 서유럽 열강들과 다른 방향으로 조선에 접근하는 열강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 제국이었다.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연해주를 빼앗고,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러시아는 1864년에 함경북도 경흥부(慶興府)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고, 1865년 음력 9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는데, 일단 이들은 거부하고 되돌려보냈으나, 흥선대원군은 중국과 일본만큼 가까운 거리에 아예 자리를 잡고 들어오려 하는 러시아와 관계를 맺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그 대항마로 프랑스와 연결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와중 대원군의 부인이 자신의 유모인 박 마르타를 경유해 베르뇌 주교와 정부 내부의 천주교 신자인 도승지 남종삼을 설득해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추진하게 되었다. 1865년 약력 12월 말경, 남종삼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올렸다. 이것을 보고 대원군도 만족하고 베르뇌 주교와의 만남을 추진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좋았지만...
2.1. 천주교 박해 동기
- 베르뇌의 거부: 무슨 이유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베르뇌는 대원군을 만나기 거부하였다.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대원군은 천주교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 러시아의 남하 중단: 당시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그레이트 게임 때문에 신경 쓸 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 방면 남하정책을 타 지역 사정으로 중단하였다.[4] 즉 러시아가 오질 않으니 프랑스의 힘을 굳이 빌릴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 상대를 잘못 고름 : 러시아의 남하가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므로 사실 최적의 상대는 당연히 영국이었다. (다만 이 경우 영국은 개신교 국가라서 천주교와는 무관해진다. 게다가 영국은 에도 막부를 지원하는 프랑스에 맞서 이미 삿쵸동맹을 지원하고 있던 상황) 그리고 사실 프랑스는 크림 전쟁에서 비록 러시아와 싸웠지만 또 상황에 따라서는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을 견제하는 미묘한 입장이라서 굳이 러시아와 극동에서까지 적대할 정당성이 떨어졌다.
-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1858년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이다.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와 신도의 박해를 명분으로 사이공을 침공했는데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군을 천병이라 치켜올리며 베트남의 천주교도들로 하여금 이들에게 헌신하라는 지도를 내렸다. 이에 많은 베트남 천주교도들이 프랑스의 편을 들어 베트남을 침공한 프랑스군을 도왔고 응우웬 왕조는 청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이는 이후 1885년까지 약 30년간 이어진 청프전쟁으로 진화되었다. 이 결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베트남의 천주교인은 협력에 대한 대가로서 특수계층이 되어 동족을 착취하는데 협조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에 대해 청나라와 조선은 강한 경계감을 가지게 된다.[5]
- 유림과 척화세력의 요청: 천주교도들이 잠재적인 침략군의 동조자라는 청의 경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를 불온한 분자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를 전해들은 유림 세력에서도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조 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좌의정 김병학 등의 척화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 운현궁에 천주교인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져 대원군은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2.2. 천주교 탄압 시행
결국 고종 3년에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2월 23일(음 1월 9일)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이 포청에 잡혀감으로써 박해의 서막이 올랐다.조정에서는 일반신자와 사제에 각각 다른 교령을 내려 처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
일반신자 : 배교 vs 순교 선택
"배교(背敎, 천주교 신앙을 버림)한다면 죽이지 않고 석방해 주겠다"고 권고하였으며, "어린아이들과 노인은 죽이지 말라"고 대원군이 직접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
사제 : 본국송환 vs 순교 선택
프랑스인 사제들에게는 "원할 경우 처벌 없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거부하고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는 길을 택했다.
조정이 프랑스 사제들에게 송환 제안을 한 것은 일본의 가톨릭 박해에 비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제안이었다. 일본의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 탄압 때 외국인 사제들에게도 본국 송환이라는 선택지 없이 배교하기 or 순교하기 중 택일을 강요하였다. 심지어 배교하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예수회 사제들도 꽤 있었다.[6] 그러나 평신도 대상으로는 일본이 비교적 관대했다.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기도 해서, 일본에서는 배교 없이 조용히 살기만 해도 묵인해 주기도 했다.
2.3. 순교자
선교사와 평신도를 포함한 약 8,000명이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1868년, 샤를 쿠베르탱[7]이 조선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기리며 그린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왼쪽부터)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가족 및 친지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 (파리외방전교회의 모토는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는 것이었다. #)
조선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사제들 |
- 성(聖)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1814-1866)[8][A]
-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1818-1866)[10][B]
- 성 위앵 민 루카 신부(1836-1866)[12][B]
-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1837-1866)[B]
-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1838-1866)[A]
-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1839-1866)[A][17]
-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1840-1866)[18][A]
-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1830-1866)[20][A]
-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1828-1866)[22][A]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제외한[24] 나머지 사제 7명과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생존자는 페롱 권 스타니슬라오 신부(1827-1903)[25], 칼레 강 니콜라오 신부(1833-1884)[26], 펠릭스클레르 리델[27] 신부 세 사람뿐이 었다. 살아남은 3명의 신부들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 톈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귀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103위 성인 중에서 24위, 124위 복자 중에서 19위가 병인박해 순교자이다.
3. 영향
이 사건 때문에 같은 해인 1866년 11월에 프랑스 해군이 보복으로 조선을 침공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고, 피해를 입긴 했지만 프랑스군을 결과적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조선을 공격하는 외적과 한 편이란 이미지가 생겨 더 심화되었다.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 가량이나 되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이후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국교 수립으로 천주교 포교가 공식 승인되면서, 비로소 1세기 가량 계속되어 왔던 조선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도 끝났다. 그리고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천주교 신자의 수는 병인박해 이전 수준을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무려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그만큼 병인박해가 조선 천주교에 얼마나 큰 시련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훗날 한국 천주교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원인을 병인박해에서 찾기도 한다. 조선시대 최초 박해자인 김범우( 토마스)가 1787년에 희생된 이후 병인박해가 끝난 1871년까지 90여년 가까운 박해 기간 동안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했던 천주교 포교자들의 가정사를 보면 누구는 병인박해 때 부모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걸 지켜보고, 누구는 병인박해 때 조부모가 옥사했다더라. 같은 경우가 넘쳐나는 시기였다.
하지만 교회 사학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천주교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28] 대주교가 친일 성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뮈텔 주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면서[29]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신실한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라고 했고, 사제들에게 명령을 내려 안중근 토마스에게 고해성사를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토마스와 친했던 니콜라 빌렘 신부가 명을 어기고 고해성사를 집전해 주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를 고국인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또한 3.1 운동 때에 신학생들이 참여하자 퇴학시키도록 하는 등 탄압을 했다.
병인박해에서 신실하고 명망 있는 신자들이 너무 많이 순교해서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한국에서 천주교는 교세가 크게 위축되어 기독교의 포교가 자유롭게 허용된 후에도 개신교에게 선교의 주도권을 내어주었고,[30] 군사독재 정권 당시 진보 진영 편에 서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을 계기로 교세 회복에 활기를 얻어 2명의 교황이 방한하기까지 했지만, 신자의 수에서 여전히 개신교보다 적은 실정이다. 즉, 병인박해는 오늘날 한국이 개신교 우세 국가가 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1][32]
병인박해로 인하여 평범한 동네 뒷산이었던 마포구 합정동 잠두봉이 절두산(즉, 머리 자르는 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는 1966년 즈음에 각 지역 교구별로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이 건립·봉헌됐다. 서울특별시 절두산 성당( 서울대교구), 대구광역시 신천동 복자 성당( 대구대교구), 인천광역시 화수동 성당( 인천교구), 수원시 서둔동 성당( 수원교구), 전주시 다가동 복자 성당( 전주교구), 창원시 상남동 성당( 마산교구), 태백시 황지 성당( 원주교구) 등이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이다.
가톨릭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의 노래'가 이때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추모곡이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도 잠깐 나온다.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2]
훗날 손자
의친왕(이강 비오)과
영친왕(이은
요셉), 손자며느리
김덕수(
마리아)와
이방자(마리아)도
세례성사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3]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4]
실제로 1860년대 당시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 정복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5]
훗날
월남전 당시에
월남 정부는 개종한
천주교인이 중심인 세력이었는데, 독립한 베트남에서 가장 잘 교육받고 재산도 많았던 계층이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대다수가 불교도였던 베트남인들에게 매국노들이라는 반감을 사고 있었으며,
틱꽝득 승려의 소신공양에서 볼 수 있듯이 월남의 불교교단도 내내 천대받고 핍박받았던지라 차라리
공산주의
월맹 정부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6]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
엔도 슈사쿠의 「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다.
[7]
그림 속 뒤돌아보는 아이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으로, 이 그림을 그린 샤를 쿠베르탱의 아들이다.
[8]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Siméon-François Berneux),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
[A]
새남터에서 순교
[10]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Marie-Nicolas-Antoine Daveluy).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블뤼 주교를 처형할 때 집행하던 망나니들이 주교의 목에 치명상만 내고 숨만 붙여둔 채로 관리에게 임금을 올려달라고 임금 협상을 했다고 한다. 협상이 이루어져서 사형이 마저 집행되긴 했지만, 다블뤼 주교는 망나니들이 협상하는 동안 죽지도 못하고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B]
갈매못에서 순교
[12]
뤼크는 루카의 프랑스어 발음이다.
[B]
[B]
[A]
[A]
[17]
리슐리외 추기경이 교구장으로 있었던
프랑스 뤼송교구 출신. 헨리코를 프랑스어로 읽으면 앙리다.
[18]
루이 볼리외(Louis Beaulieu)
[A]
[20]
장 앙투안 샤를 푸르티에(Jean Antoine Charles Pourthié). 프랑스어로 요한을 장이라 부른다.
[A]
[22]
미셸 알렉상드르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er Petitnicolas)
[A]
[24]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이 두 신부의 시복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두 신부가 전교 현장에 있지 않았고, 체포되어 신문을 받을 때, 신앙을 드러내지 못한 점이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당시 두 신부는
배론에 위치한 신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신부가 체포되었을 당시,
고종과
민 규수의 국혼(國婚)이 예정되어 있어 속전속결로 사형에 처하였다.
[25]
프랑스 이름은 스타니슬라스 페롱.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공범.
[26]
프랑스 이름은 니콜라 칼레.
[27]
순교한 다블뤼 주교의 후임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에 오르며,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이라는 책을 남겼다.
[2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한국식 이름은 민덕효. 그래서 흔히 '민 주교'라고도 불렸다.
[29]
정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고국인
프랑스에 협력하는 모순을 보임.
[30]
그나마 남한(
대한민국)은 해방 및 정부수립 후 천주교 교세가 나름 자리잡았지만,
북한에선 북한정권 수립 후 계속된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순교와 월남 등으로 전멸해서
공소예절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31]
불교의 경우
자신들을 탄압한
조선 왕조에 대한 반발로 적극적인 친일을 하여
한용운도 이를 개탄할 정도였으며,
천도교(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종교 수장이었던
두
교령이
월북한 대형 사건 때문에 교세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다만 오익제 교령의 경우는 2008년
납북으로 밝혀진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종교 등 민족종교는 일제 이전부터 조선 조정에 잔인하게 탄압받고 일제강점기에도 가혹한 탄압 대상이 되어 교세 확장에 한계가 있었으며, 무속신앙은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일시적 위로는 되었을지 몰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다.
유교는 사실상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으로 인식되어 종교로서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 빈 자리를 결국
개신교, 특히
미국식 개신교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32]
다만 해방 직후, 한반도 전체 인구 중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고작 2%에 불과했고,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급격히 성장한 때는 1950년 벌어진
6.25 전쟁을 겪은 후이다. 전쟁으로 초토화가 된 국토에서 각종 구제 역할의 창구가 교회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개신교의 성장은 교세가 제일 강했던
평양에서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남하한 교인들이 전국에 퍼지고, 이를 기반한 적극적인 전도활동이 맞물린 영향이 크다. 그나마 현대에 들어서는 전세계적인 탈종교 성향에 더해 "
개독"으로 대변되는 이미지 악화로 인해 개신교 신자는 전체적으로 감소 추세이나, 인구 비율상으로는 계속 1위를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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