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잠비룡포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나이만(천잠비룡포) 문서 참고하십시오.
몽골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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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이만" 또는 "내망"(Найман, Naiman)은 중세 시대 몽골 서부에 살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다.2. 역사
신장 서북부 이르티시강 상류 지역과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할거하고 있던 유목민 집단이다. 원사에서는 한자 표기는 내만(乃蠻)[1], 집사의 페르시아어 표기는 나이이만(페르시아어: نايمان)이다.동쪽으로는 카라코룸 산맥을 경계로 케레이트와 인접했다.
10세기 말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복속되기도 했으며, 요나라 멸망 후 요나라 황족 야율대석이 나이만의 영토를 거쳐 서요를 건국하기도 했다. 1175년까지 서요의 속국이였다.
1204년 카마그 몽골의 테무진 칸에게 패배하고 흡수되었다. 일부는 타이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를 따라 서요로 도망가기도 했다.
타이양 칸(Таян хан, 太陽汗, 1134년 ~ 1204년)은 나이만족의 마지막 칸이었는데 12세기 후반, 아버지인 이난차 빌게 칸[2]이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제4대 칸으로 즉위했다.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에 분노한 이복동생 부이룩이 알타이 산맥을 거점으로 서쪽에서 스스로 칸을 칭했으므로 나이만은 동•서로 나뉘어졌다.
1203년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옹 칸)과 카마그 몽골의 테무진 칸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토오릴 칸과 힘을 합쳐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 대항하자는 방침을 세웠지만, 토오릴 칸이 제지르 운두르산 전투에서 테무진에게 참패하면서 몽골 고원의 유일무이한 패권을 놓고 테무진과 맞서게 되었다.
1204년 타이양 칸은 메르키트부와 오이라트부, 그리고 망명자인 자다란부의 자무카 등과 연합을 맺고 테무진과 싸웠으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동나이만부는 괴멸당했다. 타이양 칸은 마침 상처가 도져 병사하게 되었고, 그의 모친인 구르베수는 테무진에게 범해졌다.
하지만 아들인 쿠츨루크가 도망치는데 성공해서 서나이만의 칸인 숙부 부이룩 칸에게 의탁했으나 다시 몽골에게 패배했다. 이에 서요(카라 키타이)로 또 다시 도망쳐 나이만의 잔당을 결집하려고 시도했다. 쿠츨루크는 서요의 황제였던 야율직로고의 부마가 될 정도로 크게 환영받았고, 쿠츨루크 본인도 나이만의 종교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할 만큼 복종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을 배신하고 그를 폐위시킨 뒤 스스로 서요의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1218년 그의 폭정에 시달리던 거란족과 탄압받던 이슬람교도들에다가[3] 쿠츨루크의 개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기독교도 나이만인들이 그를 배신하면서 몽골은 거의 싸우지 않고 서요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쿠츨루크의 세력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서요의 멸망 이후 모든 세력을 잃은 쿠츨루크는 곧장 남부의 파미르 고원 쪽으로 도망갔으나 바다흐샨 주에서 몽골의 원정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3. 현재
오늘날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시에 나이만기가 행정구역으로 남아있다.카자흐인의 족보 역할인 주즈 중 중주즈에 동명의 계파가 있다.
4. 기타
나이만이 몽골에게 멸망하면서 나이만의 재상이자 학자인 타타통가가 칭기스칸의 신하가 되었는데 이 타타통가와 칭기스칸은 문자가 없던 몽골에 나이만어 등을 조합하여 몽골 문자를 만든다.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8권에서 나이만 군대가 등장하는데 유럽 기사들이 입는 갑옷과 비슷한 갑옷을 입고있다. 그러나 이는 고증에 맞춰서 그려진 갑옷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