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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1:24:34

대창원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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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창원 전투
大昌原 戰鬪
<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 시기 1229년 (금 애종 6년)
장소

대창원 (현 중국 간쑤성 칭양시)
교전국 <rowcolor=black>
(수세)
몽골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금나라|
大金
]] 완안진화상
지휘관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치라군
병력 금나라군: 400명 몽골군: 기병 8,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기병 궤멸
결과 금나라의 대승
- 금나라가 거둔 몽골-금 전쟁에서의 최초의 승전
1. 개요2. 전투 서막3. 전투 경과4. 전투의 영향

[clearfix]

1. 개요

1229년 금나라의 완안진화상이 대창원(현 간쑤성 칭양시 닝현)에서 치라군이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로, 도회곡 전투와 같이 몇 안되는 금나라의 승전이다.

2. 전투 서막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금나라 북부를 초토화시키고 마침내 중도(현 베이징시)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이후 무칼리 가 이끄는 몽골군은 카이펑 북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고, 이로써 현재의 간쑤성, 허난성 일대만 금나라의 영토로 남았다.

오고타이 칸은 화평을 청했으나 금나라는 사신을 죽이는 것으로 화답했고, 결국 제3차 금나라-몽골 전쟁이 벌어졌다.

한편 이때 몽골이 금나라를 침공하는 루트는 총 두 개가 있었는데,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 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하였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나라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중에서 오고타이 칸은 두번째 루트로 침공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창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3. 전투 경과

4. 전투의 영향

몽골-금 전쟁에서의 금나라의 최초의 승전으로 이로써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