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하시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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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C224><colbgcolor=#010131> 고려 문하시중 이자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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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장화공(章和公)[1] |
작위 |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
출신지 | 양광도 수주 소성현 |
사망지 | 묘각사(妙覺寺) 법우(法宇) |
묘지 | 개경 개성부 임진현(臨津縣) 경내(境內) |
본관 | 인천 이씨(仁川 李氏)[2] |
이름 | 자연(子淵) |
자 | 약충(若冲) |
부모 |
부친 상서우복야
이한 (尙書右僕射 李翰) 모친 낙랑군대부인 최씨[3] (樂浪郡大夫人 崔氏) |
형제자매 |
|
배우자 |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 김씨[4] |
자녀 | |
생몰연도 | 1003년 ~ 1061년 음력 8월 30일 |
[clearfix]
1. 개요
고려 문종 대의 문관.제8대 현종 대부터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한 신라계 인천 이씨 가문 출신이다.[5] 이자연은 준수한 배경과 뛰어난 능력으로 명군이었던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신뢰를 얻었고,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문벌귀족 가문들과 종교계를 휘어잡는데 성공했다. 그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도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났을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왕실과 연결을 맺었는데, 이자연의 등장으로 인해 인천 이씨는 고려 중기를 집어삼키는 최대의 외척 가문이 되었다. 이자연에 대한 기록은 《 고려사》, 《이자연 묘지명》, 그의 자손들의 묘지 비문에서 볼 수 있다.
2. 생애
현종 대의 외척 가문은 안산 김씨였는데 안산 김씨와 먼저 인연을 맺고 있던 가문은 인천 이씨였다. 안산 김씨가 여요전쟁의 혼란을 틈타 줄을 잘 섰고, 인천 이씨는 덩달아 같이 지위가 올라갔다. 공주 절도사 김은부는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사위였는데 김은부가 몽진 중인 현종을 극진히 모셨고, 그의 세 딸을 모두 현종에게 시집보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자연은 현종 대에 치러진 과거 시험에서 2등으로 통과했고, 화려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본인의 묘지 비문에 따르면 이자연이 과거 급제 후 양온령(良醞令) 직위를 받았다가 승진해서 감문위(監門衛) 녹사참군사(錄事叅軍事)가 되었다고 한다. 감문위는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하나이며, 녹사창군사는 정8품 직위이므로 이자연에게는 정8품 하급 무관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6]『파한집』 《권중》 기록에 따르면 이자연이 북송에 사신으로 파견된 뒤 북송의 감로사를 구경했다고 한다. 멋진 관경에 감동받은 이자연은 자신도 이런 사찰을 세우겠다고 다짐했고 뱃사공을 시켜 북송의 감로사와 똑같은 풍경을 가진 곳을 찾게 했다. 뱃사공은 6년을 찾았고, 결국 개경 개성부 서쪽 호수 근처에 비슷한 장소를 찾았는데 이자연은 이 곳에 이름도 같은 감로사를 지었는데 이 고려 감로사가 후대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묘지 비문에는 이자연이 거쳐간 수많은 관직이 나열되는데 당시 이자연의 재능과 정치적 수완의 합작으로 보인다. 단순히 야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능력도 있었기에 이자연이 크게 성공한 것이다. 이자연은 자식도 많이 두었는데 자식들의 혼인을 통해 당시 정계의 유력 가문들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여 이자연의 세력을 불리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묘지 비문 기록으로 이자연이 마지막으로 받은 관작은 다음과 같다:
<colcolor=#FFC224><colbgcolor=#010131> 관작 | ||
공신호 | 추성좌운보사공신(推誠佐運保社功臣) | 문종이 봉한 보사공신호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종 1품 최고위 정식 품계 |
향직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 1품 1등위 최고위 명예 품계 |
직위 | 중서령(中書令) |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최고위 직위[7] |
문하시중(門下侍中) | 중서문하성의 실질적 최고위 직위 | |
상서이부삼사사(判尙書吏部三司事) | 각각 이부(吏部)와 삼사(三司)의 장관[8] | |
감수국사(監修國史) | 문하시중이 겸하던 직위 [9] | |
수직 | 수 태사(守太師) | 태사는 정 1품, 이자연은 종 1품이다.[10]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공신을 치하하기 위한 명예직. 최고위 훈위이다. |
시호 | 장화공(章和公) | 문종의 배향공신으로서의 시호 |
그야말로 최상위 관직, 품계, 칭호는 전부 다 받았다고 보면 된다. 묘지 비문에 따르면 이자연은 고려의 묘각사에서 졸(卒)하였고, 성황(聖皇)이 국척원신(國戚元臣)을 크게 예우하여 기념했다고 한다.[11][12]
이자연은 고려 중기에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자의나 이자겸 같은 인천 이씨 문벌귀족들의 시조이지만 막상 본인은 성군 문종의 우수한 신하이면서 성품도 좋았다. 이런 이자연의 처지는 조선 왕조의 김조순과 비슷한데 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열었다지만 막상 본인은 성군 정조의 충직한 신하이면서 인품도 훌륭했다. 그러나 후손들은 그렇지 못하고 국정을 농단하며 전횡을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다.[13] 이자연의 자손들은 현 인천광역시 지명의 유래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인천은 원래 신라 율진군 소성현(栗津郡 邵城縣)이었는데 현종이 고려 양광도 수주 소성현(兩江道 樹州 邵城縣)으로 고쳤다.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 덕분에 경원군(慶源郡)[14]으로 승격되었고, 손녀인 문경왕후 때 인주(仁州)로 승격해 수주(樹州)와 떨어진다. 이후 조선 태종이 전국에 주(州)로 끝나는 지명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일부는 바꾸게 했고 그래서 지금의 지명인 인천이 되었다.
3. 가족관계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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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가문 | ||||
경주 김씨 순경태후家 |
정안 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 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 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 홍씨 명덕태후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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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가문 | |||||
언양 김씨 김취려家 |
철원 최씨 최유청家 |
해주 최씨 최충家 |
공암 허씨 허재家 |
평강 채씨 채송년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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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고려사』 《이자연 열전》에선 이자연의 선조를 신라 대관(新羅大官)[15] 출신이라고 서술했다. 선조가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이주하였고, 이허겸(李許謙)이 소성현 개국백(邵城縣 開國伯)에 봉해지면서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했다. 이허겸은 사후 소성현 개국후(邵城縣 開國侯)로 추증되었고, 아들 이한(李翰)을 두었다.[16] 이한은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최씨와 혼인해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이씨와 이자연과 이자상을 두었다.
이자연은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 김씨[18]와 혼인해 아들 8명, 딸 3명을 낳았다. 딸 3명은 각각 맏이 인예왕후, 차녀 인경현비, 3녀 인절현비다. 6남 이호가 권신 이자겸을 낳았다. 이자연의 손자들은 '자'(資)를 돌림자로 인의, 충효, 현덕, 겸양과 같은 단어를 한 글자씩 떼어 이름으로 사용했다. 고려 중기에 등장하는 사숙태후는 이자연의 손녀, 문경태후는 이자겸의 딸로 이자연의 증손녀다.
허나 오늘날 이자연의 후손은 여러차례 혼란기를 거치며 쇠퇴하고, 현재 인천 이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공도공파[19]나 이인로의 쌍명재파 경우 이자연의 형제인 이자상의 직계후손이다.
이자연의 후손들도 자녀를 많이 낳았다. 아래 가족관계에는 사료에 이름 외에 다른 행적이 있는 경우만 기록했다.
- 이자연
- 부인: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 김씨[20]
이자연의 묘지명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수원 최씨(水原 崔氏) 최유항(崔褎抗)[25]의 묘지명을 보면 최유항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장화공(章和公) 이자연의 손녀이자 좌사낭중(左司郞中) 이자예(李資禮)의 딸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출처
4. 문하생
《 보한집》에 따르면 다음 인물들이 이자연의 문생이었다.모두 문종 5년인 1051년 4월 신묘방 을과 급제자들로, 위에서부터 장원부터 6등 순이다. 최석과 김양감은 평장, 최사훈과 박인량은 참정, 최택과 위재만은 학사까지 오른다. 문생 중 김양감( 광산 김씨), 박인량(평산 박씨) 등은 이자연 사후에도 인천 이씨 문벌과 혼인관계를 유지했다.
5. 외부 링크
6. 관련 문서
[1]
《파한집》엔 '창화공'(昌華公)이라 되어 있다.
[2]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
[3]
경주 최씨
[4]
경주 김씨
김인위의 딸
[5]
인천 이씨는
김해 김씨의 분파인
김해 허씨에서 갈라져 왔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신라계라기보다는
가야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가 멸망한지 워낙 오래 전이고, 신라에 귀부하였으므로 가야 출신 신라계라고 정리 할 수 있다.
[6]
척준경도 비슷하게 천우위 녹사참군사 출신이다.
[7]
고위 왕족이나 공신만 봉해졌다.
[8]
두 직위를 붙여 부른 것이다.
[9]
사관(史館)의 장관이다. 사관은
실록을 작성하는
사관(史官)들의 기관이다.
[10]
수직은 이처럼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태사는 '천자의 스승'이란 명예직으로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최고로 명예로운 칭호이다.
[11]
'국척'은 나라의 친척, '원신'은 공신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자연을 가르킨다.
[12]
비슷하게
해주 최씨 가문의
최윤의는 사직원신(社稷元臣)으로 표현됐다.
[13]
다만
신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 이후에도 제법 관직을 차지했고 능력만큼은 있었다.
[14]
경사의 근원지라는 의미다.
[15]
신라의 고위 관리
[16]
이한의 누나 안효국태부인(安孝國太夫人) 이씨는 안산군 개국후
김은부의 아내로
원성왕후,
원혜왕후의 어머니이다.
[17]
경주 최씨
[18]
경주 김씨
김인위의 딸
[19]
조선
세조비
정희왕후의 외조부 이문화
[20]
본관은
경주 김씨.
김인위의 딸로 현종의 후궁
원순숙비와
김원충과 형제간이다.
덕종의 제1비
경성왕후와
정종의 후궁 용절덕비, 문종의 후궁 인목덕비의 이모이다.
[21]
선종의 후궁
[22]
선종의 제2비
[23]
광양 김씨(光陽 金氏)
김의원의 부인
[24]
아버지인 이자연보다 먼저 죽었다.
[25]
최충공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