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역대 태묘 배향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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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191970> 사공 정헌공 이몽유 |
|
시호 | 정헌공(貞憲公) |
삼사 | 사공(司空) |
성씨 | 이(李) |
이름 | 몽유(夢有) |
생몰연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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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시대의 문관. 대다수 고려 초기 인물처럼 생몰연도가 불확실하며 단편적인 기록만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최소 광종, 경종, 성종 삼대를 섬겼다.2. 상세
가장 연대가 오래된 기록은 '문경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이다. 광종 대에 조성된 비석으로 이몽유가 비문의 내용을 작성했다. 비석의 뜻은 '문경에 있는 봉암사에 세워진 정진대사를 기리는 탑인 원오탑의 탑비'이다. 이몽유는 당시 임금 광종을 '오황(吾皇)', 즉 '우리 황제'라고 불렀으며 태조의 가마를 '구천지승가(九天之鼎駕)', 고려의 왕위를 '구천지위(九天之位)'라고 불렀다. 정종의 즉위를 통천(統天)을 이었다고 표현했다. 만월대를 천구(天衢), 천문(天門)이라 칭했다. 광종의 연호인 광덕을 사용했으며 그의 명령을 ' 칙(勅)', ' 성지(聖旨)'로 불렀고 자국 고려를 달리 불러 '성조(聖朝)'라 했다.탑비에 기록된 이몽유의 관작은 다음과 같다:
- 문산계 품계: 봉의랑(奉議郎). 종 6품 상위 품계.
- 향직 품계: 정위(正衛). 7품 2등위 품계.
- 직위: 한림학사(翰林學士). 임금의 명령을 글로 써 문서화 하는 직위.
- 수직: 수병부경(守兵部卿).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붙힌다. 병부경은 정 3품이며 이몽유의 품계는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병부경보다 한참 낮다. 병부경은 병부의 차관이다.[1]
- 하사된 어대: 단금어대(丹金魚袋). 광종이 신하의 의복에 제한을 두면서 신분증을 넣고 다니는 어대에도 제한을 두었다. 이몽유는 단금색 어대를 받은 것이다.
이후의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다시 등장할 때는 성종 때이다. 좌집정 직위를 받고 두 차례의 과거 시험에서 지공거를 맡아 시험을 주도했다.[2] 또한 성종의 명으로 공문서 양식을 정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무신정권의 최이 집권 시기에 제작된 서적 보한집에도 등장하는데, 광종 시기에 문(文)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탑비나 보한집의 글을 보면 당대에 글로 유명했었던 듯 하다. 작문 능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가 되었고 시험 출제자가 되어 평가를 맡았고, 공문서 제도 확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맡은 임무를 준수하게 끝내니 사후 성과를 인정받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