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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2:41:35

계유정난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계유정난
癸酉靖難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453년 (단종 원년) 10월 10일 ( 음력)[1]
장소

조선 한성부 경복궁 및 인근
원인 수양대군의 왕위 탐욕
- 단종 즉위 이후 왕권 불안정
-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과 수양대군 일파의 갈등
교전국 <rowcolor=black> 수양대군 세력
(반란군)
조선 조정
(진압군)
주요 인물
지휘관

수양대군
지휘관

단종 (국왕)
김종서 (좌의정)
참가자

권람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양정
홍윤성
홍달손
황수신
양녕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임어을운
참가자

황보인 (영의정)
조극관 †
이양 †
허후 †
민신
안평대군[2]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 조정의 진압 실패, 수양대군 일파 반란군의 승리
- 김종서를 위시한 고명대신 숙청
영향 수양대군 세력의 정권 장악 및 수양대군의 왕위 계승
- 사육신, 생육신 등의 반발
- 단종의 유배 및 사형

1. 개요2. 계기3. 당시 상황4. 경과5. 영향6. 관련 영상7. 매체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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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좌의정 영의정 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단종 실록 8권,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 기사[3]
계유정난()은 1453년(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장자 승계 원칙을 무시한 채 정통성과 능력도 부족하고 업적도 없는 막내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게 문제였던지라 어느 정도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있었던 무인정사,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된다는 아주 확실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던 중종반정, 적어도 반정 당시에는 폐모 살제 실정을 일삼은 광해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던 인조반정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단종이 정통성이 완벽하고 잠재력도 있었으며 폭정이나 실정을 일삼은 적도 없었는데다가 어쨌든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도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 때문에 반정을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명분이 있었다면 세조반정이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인조가 한때 앙숙이었지만 폐위된 광해군을 끝까지 보호해준 이유가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압박과 연이은 반역 시도에 제주도로 보내기도 했지만 끝내 죽이지는 않았다.

특히 당시는 조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후였기 때문에 많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조의 정통성은 이후 조선의 기득권을 잡게 되는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걸린 조의제문도 결국 이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정난'은 政亂(정계의 혼란)이 아닌 靖難(난리를 안정시킴)인데, 일단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세조가 역쿠데타로 수습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더 확실한 의미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세조의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고까지 미화되지 않은 것은, 중종반정 직전의 연산군과 인조반정 직전의 광해군이 곧바로 끌어내려진 것과는 달리 단종은 후일 사육신의 실패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기는 하였어도 쿠데타 직후에는 끌어내려지지 않고 임금으로서 세조에게 양위했기 때문이다.

2. 계기

계유정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수양대군의 권력욕과 왕위 찬탈에 대한 야심이다. 상술되어 있듯이 이 사건은 단종의 정통성과 행적을 고려했을 때 정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문종의 이른 승하, 수렴청정 체제의 미비와 주요 신하들의 존재는 부가적인 원인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원인 중 그 어떤 것도 수양대군의 군사행동과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것은 찬탈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에 기반하여 아래의 세부적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일단, 비극은 1차적으로는 문종이 미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사실에 있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할 경우 보통 대왕대비 또는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통해 왕이 장성하기 전까지 정치적인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숙종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쪽도 본인이 수렴청정을 거부해서 그렇지, 증조모 장렬왕후와 어머니 명성왕후가 살아있었다. 실제로 숙종 대에 위협이 되는 종친은 소현세자의 손자들과 인평대군의 아들들 뿐이었는데 소현세자의 손자들은 당시 숨죽이며 아무것도 안하며 조용히 살았기에 자연스레 남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정치에 사실상 끼게된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현종의 왕비이면서 국왕인 숙종의 친어머니이자 서인 집안의 왕대비인 명성왕후와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결국 이는 경신환국으로 이어졌는데 사실상 숙종 본인의 의사 100%로 일어난 기사환국, 갑술환국과 달리 경신환국은 명성왕후의 의사가 상당히 반영되어있었다.

숙종 대와 계유정난 당시를 서로 비교해보면 계유정난의 선례로 인해 관직에 있지 못했던 숙종 대의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달리 세종-문종-단종 대에는 세종-문종이 살아생전 종친을 휘어잡아 안심했기 때문인지 종친들은 세종과 문종의 비호 아래 능력 좋고, 행실에 문제가 없으면 관직에 나갈수 있었다.

따라서 사실 엄밀히 말해서 만약에 단종의 친어머니이자 문종의 세자빈인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이후와 문종 사후에도 계속 살아서 왕대비가 되어 동시에 왕실 및 종친의 최고 웃어른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했더라도 외척을 혐오하는 태종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대신들과 세력이 커진 종친들 사이에서 종친들보다 나이가 많은 대왕대비도 아니고, 명문가 간택 후궁 출신이라 정통성이나 기반이 마냥 빈약하지 않다지만 왕대비의 자격만으로 보호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조선은 이전 왕조들이나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 달리 유교이념과 예법들을 초창기부터 국가의 이념으로 명확하게 내세우고 정실부인의 권위와 권한을 높였기에 왕 대비의 권한도 매우 강하다는 점, 현덕왕후의 친정가문은 현덕왕후의 세자빈 책봉 이후와 생전에도 특별히 견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남동생인 권자신이 관직을 자연스럽게 차지할정도로 명문가 집안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한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계유정난의 주요 원인이자 명분이 되었던 고명대신과 종친의 대립은 현덕왕후가 살아서 왕대비가 되기만 했어도 충분히 커버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태종의 외척 숙청 사례와 조선 후기 세도 정치로 인해서 조선 왕실이 외척에 휘둘리다가 멸망한 것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데 조선은 애초에 설립부터 유교 이념과 예법을 중심으로 세워진 왕조 국가이기 때문에 외척의 중심이면서 정실부인의 최고서열이자 최강자라 할 수 있는 (대)왕대비의 권한은 필연적으로 강할 수 밖에 없었다.[4] 따라서 태종의 경우에는 이것을 왕비 본인과 여성들을 제외하고 친정 가문의 남성들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커버하여 혹시나 본인이 급사하고, 아들인 세종마저 요절하여 당시까지는 어렸던 적장손 문종이 왕위에 오르고 원경왕후 소헌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더라도 국왕과 신하들을 위협할정도로 큰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태생적으로 강한 왕대비의 권한으로 어린 국왕의 후견인 역할만 가능하도록 사전 작업을 한 것이다.

문제는 세종과 문종은 태종과는 다른 의미로 한술 더떠서 소헌왕후 현덕왕후의 사망 이후에도 분명 작정하면 채울수 있던 왕비의 자리를 아예 비워둔채 권한대행만 맡겼고, 이렇게 왕비의 공석으로 권한대행으로만 형식적으로 굴러가서 통제에서 벗어나있던 당시 내명부는 구성원인 세종-문종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인 왕자들의 상당수가 수양대군에게 포섭되어 계유정난에 큰 일조를 했다. 그런데 짧은 명줄부터 해서 온갖 운이 전부 없던 듯한 문종은 아내복도 없었는지 세 명의 세자빈을 들였지만 모두 이혼하거나 죽어버렸다. 즉,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왕후 자체가 없었다.

그 외에도 세종의 비이자 단종의 조모인 소헌왕후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어린 단종을 돌봐주었으나, 그녀는 안타깝게도 정실이 아닌 후궁이라서 수렴청정의 자격이 없었다. 세종까지 승하한 이후에는 내명부의 권한대행과 역할도 현 왕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가 완전히 맡게되었다.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성종의 사례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문종이 배우자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 아들의 왕권을 지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문종은 재위 시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다. 유난히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여복이 없었던 왕이었다. 그 유명한 ' 레즈비언' 세자빈 순빈 봉씨가 둘째 세자빈. 그러나 왕 스스로가 여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자빈들의 운명이 불행해진 면도 있다.

한편 세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하였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세종의 재위기간에 사망하지 않고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손자에 대한 수렴청정을 했더라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친모에게 칼을 겨누었다가는 부모와 자녀간의 효를 중요시하던 유교 성리학이 강성했던 조선이었으니 당연히 온 나라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끝장날 때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가 바로 당시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위라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인목왕후는 법적 모친이었을 뿐, 친모도 아니었고 나이도 광해군보다 어렸는데도 저런 반발이 일어났는데, 친모에게 칼을 겨눈다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태에서 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문종은 대신들과 신료들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해 줄 것을 많이 부탁했다고 한다. 심지어 세종 집현전 학사 성삼문 신숙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말도 알려져 있다. 다만, 세종이 단종을 부탁했다는 일화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 승하 당시 문종은 만 36세의 한창인 나이였고 왕세자의 보좌를 부탁하면 모를까 손자를 부탁할 리는 없다. 손자는 현 왕세자이자 차대 왕 문종이 아비로서 어련히 돌볼 일. 살아있는 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을 언급한다는 것은 예법에도 어긋나고 불길한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성삼문과 신숙주라는 2명의 변절을 대비시키기 위해, 특히 신숙주가 고명대신임에도 성삼문과는 다르게 세종의 정통성을 이은 단종을 배반한 배신자라는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극적대비를 노린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정말 그랬다면 재밌긴 했겠지만.

특히 문종은 재위 시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5],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6][7] 결국 단종 초기에는 의정부와 군권을 장악한 당시 좌의정 김종서[8]를 중심으로 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노신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 왕의 숙부들은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능력있고 야심만만한 왕자들이었으며 부왕의 통치기에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않게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적차남 수양대군과 적삼남 안평대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서, 사실상 왕실은 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종 치세 후반기에 의정부 서사제 등을 실시하여 대신들과 신료들의 권력이 강해진 상황에서도 태종이 다진 왕실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하였으며,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국정을 맡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실록 같은 매체에서는 권신 김종서 등을 처단한 '구국의 결단' 비슷하게 기록을 해놓았는데, 이들이 전왕 세종과 문종의 충신들임을 생각하면 승자의 입맛대로 가공되었을 공산이 농후하다.

이런 분위기에 김종서나 황보인, 정분 같은 고명 대신들은 강력한 종친의 존재가 자칫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을 했는지, 일단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포섭한다.

하지만, 사실 이 또한 여러 매체에서 다뤄지듯 강력하게 수양을 견제했다기보다는 이이제이의 수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수양대군을 명나라로 보내는데 사실 교통 수단이 발달한 지금에야 하루에도 중국을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중국으로 간다는 것은 왕가의 일원이었던 수양대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나, 따라가는 노비나 역관, 의관들에게는 목숨이 걸려있을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의 세력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에 얼마나 털려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김종서나 황보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스스로 명나라까지 갔다올 정도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 당시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나 황보인에게 있던 권력이라면 아마도 수양대군이 여러 매체에서 보여준 모습을 본 순간 곧바로 숙청을 해버렸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물론, 수양대군이라고 이런 사태를 가만히 넋놓고 지켜볼 리가 만무했다. 그는 최대한 조용히 수하에 권람, 한명회 같은 재능이 있으나 과거급제를 하고도 출세길이 험난한 혹은 과거급제도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두뇌가 되어줄 사람들을 포섭하고 모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권력 강화에 불만을 느끼고 있고 수양대군과도 세종 치세 한글 관련 문화 사업 등으로 친하게 지내던 집현전 학사 출신 소장 관료인 신숙주[9]이나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은 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 그리고 실제 충돌이 발생했을 때 수족이 되어 줄 홍윤성, 홍달손, 양정, 이징규, 이징석[10] 등의 무관 등을 끌어모아 세력을 키웠고 심지어 천민 출신인 임어을운까지도 끌어들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측근들을 자세히 보면 대체적으로 신숙주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앞길이 훤한 사람이 없다. 그나마 권람은 과거에 장원 급제했음에도 사교력이 부족해 생각만큼 출세 가도를 달리지 못했고 한명회는 과거 급제조차 못한 학사였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도 과거에 급제했으나 변변치 못한 한직을 전전하거나 급제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던 형편이었다. 출세길이 막혀있으나 야심은 가득해 현행 문종-단종 집권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언더독 계층을 수양대군이 얼마나 포섭하려고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정은 왕을 보필하는 전통적인 유명 대신들과 이들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젊고 급진적인 수양대군 세력으로 양분된다.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의 부재가 계유정난의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하거나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왕을 제외하고 왕실최고어른이자 종친과 내외명부의 공식 최고서열인 대비가 있었다면 이러한 정국을 중재하여 국정의 중심을 잡아 균형을 이룰수 있고, 설사 대비 본인이 그런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동서고금 살아있는 왕대비(태후)의 권위 자체는 무시할수 없기 때문에 그런 대비의 친정인 소위 외척이 제 3세력으로 등장하여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국왕과 외척의 가장 큰 공동 정적인 종친을 견제할수 있었을 것이다.

종친 중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 영응대군, 신빈 김씨[11]의 아들 계양군 등도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그 외에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남편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도 계유정난에 참여했다.

종로구의 법정동인 재동(가회동 지역의 일부)의 이름이 이 사건에서 기인한다는 설화가 있다. 재동의 옛 이름은 '잿골'인데, 계유정난 때 많은 사람이 살해당해서 길거리에 피가 흥건하자, 백성들이 재를 뿌려서 핏자국을 지웠고 이 때문에 잿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다.

3. 당시 상황

단종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 등의 조언을 받아서 후일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사전 쿠데타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시작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원래 안평대군이 이현로의 조언으로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을 했던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때의 실록에 보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 때 코끼리가 수양대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절을 했다거나 중국인들이 수양대군을 부처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특히 간경도감에서 우리 글로 된 불경을 상당량 간행하는 등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이렇게 수양대군을 대놓고 지지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게 당시의 실록이니, 특히 이 부분은 실록 중에서 원문 그대로 읽고 덥석 믿어버리면 안 되는 몇 대목 중의 하나이다.

이 사행길을 통해서 수양대군은 상국인 명나라에 자신이 조선의 유력한 왕자임을 알리고 인맥을 얻었으며, 후일 사후 승인 등에 도움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점에서는 할아버지 태종의 왕자 시절 사신 행보와 비슷하다.

그러나 태종은 홍무제가 왜구들이 자신들은 조선인이라 거짓자백하여 외교적 불화가 생기자 너희 왕자 한 명이 와서 해명하라 하였을 때 그 왕자 중에서 능력이 가장 뛰어나던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이 파견되어 외교적 불화를 해결했던 것이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주변을 방심시켜서 명나라로 간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하고는 다르다.

또한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수하 세력들과 함께 방해가 되는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싹쓸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의 살생부이다. 이 살생부의 첫머리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반대파의 거두였던 좌의정 김종서였다.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수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하고 있던 병력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마침 이 날 단종은 궁을 나와 누나 경혜공주의 사저에서 묵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궁의 경비 상태는 평소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느슨해져 있어서 이 날을 쿠데타의 거사일로 결정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날 거병을 준비하면서 수하들을 통해 소집시킨 무리들 앞에서 정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듣자마자 역모라고 판단, 기겁하여 대열에서 이탈, 북문으로 도주한 이들이 꽤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 앞에서 수양대군은 "혼자라도 결행한다"며 몇몇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사실, 이미 알아채고 쿠데타의 계획에 이탈한 자들이 있는 상황이라 쿠데타 계획이 유출되는 건 시간 문제였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잘 지른 셈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수양대군파인 신숙주, 최항의 방문을 연이어 받았고[12] 계유정난 당시 거사 당일엔 아예 핵심 세력인 권람의 방문을 받았지만 설마하니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왕자의 신분인 수양대군을 공손히 대접하려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면서 서찰 한 장을 김종서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리고 김종서가 서찰을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곧이어 양정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주변 하인들을 칼로 베어버리면서 정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수양대군은 서둘러 단종이 머무르고 있던 경혜공주 저택을 비롯한 도성 4대문과 주요 군사시설, 요충지를 확보한 뒤 이미 장악한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동부승지[13] 최항이며, 수양대군은 최항에게 단종의 접견을 요청한다. 최항의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국왕의 접견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시간만 끌어줬다면 계유정난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겠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는 법이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신숙주의 후임인 최항을 당연히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겠지만, 최항은 스스로를 수양대군파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엄연한 쿠데타로 인식했다. 수양대군은 최항에게 조정 신료들의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했다. 최항은 처음에 말을 돌리며 넘기기를 주저했지만, 수양대군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명부를 넘기고 만다. 그리고 이 명부는 살생부가 되면서 바로 빨간 줄이 그어지고 반대파들은...

수양대군은 국왕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하였으며 한명회와 홍윤성, 홍달손을 시켜서 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하도록 명령한다.

이제 정난의 최종 단계에서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하였고 당시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공조 판서 정인지, 참판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히 살아남으면서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 병조 판서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몸이 으스러진 채 죽게되었다.

또한 심한 부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살아서 며느리의 친정으로 피신한 이후 다시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김종서도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참수당하는 등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심지어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현릉에서 참살하고 문종의 고명 대신인 우의정 정분은 일단 유배시켰다가 그의 처남인 정인지를 통한 회유가 먹히지 않자 결국 교형에 처했다. 사실, 누군가의 묘소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은 현대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것과 훗날 사육신의 난이 있었을 때 문종의 무덤을 파내어 합장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낸 사건 등으로 짐작해볼 때 수양대군이 친형 문종에게 열등감이 심해서 패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이로써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사를 주도하던 세력은 모조리 살해되면서 세종이 꿈꾸던 조선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4. 경과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 김종서,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14], 민신, 이양 등의 신료들은 함께 역모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되었고 이후 형제인 안평대군마저 역모로 몰아서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키고 공신이 된 이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는 비정한 행보가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작업들은 조선이 아닌 어느 나라 왕조 시대에도 초기 정변이나 반란이 일어난 이후에 전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장면이다.

또한, 수양대군은 정난 공신 1등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인지 좌의정에 임명했고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사돈 관계)이었던 한확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 병마 도통사온갖 직위를 모두 겸직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수양대군은 사실상 단종을 따르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하면서 실질적인 왕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일파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으며 집현전에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는 등[15] 단종을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 2년만에 숙부의 힘과 야욕을 견디지 못한 어린 조카가 숙부에게 양위를 함으로써 끝끝내 권좌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결국, 단종은 강제로 권좌에서 끌려내려오게 되었고 실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왕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기서, 정난 공신으로 책봉된 42명[16]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실제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에 뛰어드는 집현전 학자들이나 왕실의 인물 등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히 포섭용으로 보기에는 그 지위가 상당히 높고 실권을 포함한 직책들이 분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난 공신과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임명한 좌익 공신을 비교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계유정난의 참여 세력에 대한 이견도 나타나고 있다.
계유정난의 파장은 상당해서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후일 난을 일으키는 등 민심이 매우 혼란해졌으며, 난이 평정되면서 또 다른 공신을 만드는 바람에 훈구파의 세력으로 신권이 강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이 시절의 전설이나 야사를 살펴보면 민심이 단종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동시에 세조 측에 정2품송이 세조를 위해 가지를 들어주었다거나 문수보살이 세조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설화도 존재해서 상당히 이중적이다. 세조 정권이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기 때문에 조정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여러가지 미담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이 이런 관점을 취한다. 현재까지도 세조의 인면수심 이미지를 매우 확실하게 심어준 사건이기도 하고.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이야기들의 경우는 후대에 더해진 경우가 상당해서 어디까지가 당시의 관점이고 어디까지가 후대에 더해졌는지 알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숙주나물 드립은 신숙주 문서에서 알 수 있지만 명백히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당대에는 없던 단어였고, 사육신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효온[17]의 육신전은 전기 소설이며, 순수하게 평가하기에는 남효온이 김종직의 직전 제자라서 초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과정이 상당부분 걸린다. 단적으로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것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남효온과 사형제인 김굉필이 실록에 넣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조선 중반 이후를 지배하는 사림은 이 문제를 상당히 강조했던 것도 있다. 때문에 후대에 민간 설화가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므로 여러모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적으로 조선 초기의 일화인 함흥차사 황희와 연결되는 두문동 72현, 문익점과 목화씨 드립 등은 모조리 후대의 가필이다. 당대에 없는 일화가 후대에 가필되고, 이게 민간 설화처럼 퍼지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한때 성삼문이 정난 공신에 포함되고,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훗날의 단종 근왕파들이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싫어한 소장파들이 권신을 몰아낸 계유정난은 찬성했지만 훗날 단종을 아예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반대했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성삼문을 비롯한 소장파들은 계유정난을 축소하고 정난 공신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 사건으로 죽은 이들은 이후 숙종 대에 다시 복권되었고, 장릉배식록 명단에 포함된다.

5. 영향

단 한명의 욕심으로 인해 태조와 정도전, 조준, 남재 등 개국공신들과 정몽주와 이복동생들을 죽이며 오명을 뒤집어쓴 태종과 명군 세종, 문종이 꿈꾸던 조선은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18]

또 계유정난과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조선 전기에 문무를 상징하던 기관인 집현전 총통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정난을 이끈 공신들에 의해 관학파 훈구파로 변질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며 조선의 정치계에 혼란을 일으키자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사림파를 등용하게 된다.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계유정난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장손 왕위 계승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42명이나 되는 공신들의 세력이 생겨났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나마 비슷한 사례로 비교되는 고려 숙종의 사례는 최소한 조카가 워낙 병약하다보니 후계자도 숙종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던데다 이자의가 선공을 가했다는 명분을 제시했으며, 실제로 헌종은 양위 이후에도 내내 자리보전만 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사망했음에도 별 의혹이 제기되지 않아 숙종은 이후 정통성에 대한 큰 시비 없이 의욕적으로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계유정난은 그런 게 하나도 없이 실록에서조차 그냥 세조가 대신들이 맘에 안든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선공을 가했음을 부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한창 팔팔하고 건강한 왕(15세)이 윗세대(39세)에게 양위하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심지어 공신 세력들이 왕권을 등에 업고 반대 세력들 축출에 앞장서는 등 부정부패와 전횡으로 인해 세조가 여러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은 오히려 나빠졌다.[19] 게다가 세조 본인이 신하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과는 별개로 공신들의 전횡에 손을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결과적으로 관료들의 전횡이 심각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세조가 왕권이 강한 것처럼 보인 건 세조를 지지한 공신들의 기반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세조는 자신에게 대놓고 반항한 이들 정도를 제외하면 공신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건 처벌하지 않았다. 시각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못 했다고 봐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단, 실제로 쿠데타를 수행한 세력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치지 않는게 훨씬 일반적이다. 태종이 특이한것 처럼 보이지만, 태종 또한, 진짜 문제성있는 본인 아내 집안과, 이숙번 같은 왕권에 진짜 위협될만한 존재들만 쳤을 뿐 그외 나머지 쿠데타를 실행한 자들은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멀리 갈 것 없이 박정희, 전두환 사례만 봐도, 웬만하면 공신들을 내치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20]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앞세워 고려를 멸망시키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까지 그렇게 없애고자 했던 권문세족들의 특권이 다시 훈구파들이 득세하면서 부활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의 왕권 그리고 재정에 계속해서 해악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왕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왕 자리가 찬탈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자신의 보호막 역할을 할 공신들을 많이 세우게 되었는데, 이 공신들과 반대편 대신들 그리고 공신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들 간의 갈등은 조선 전체의 정국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왕실어른의 부재로 인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성공이 가능했던 정난이었기 때문에 후대 자손들인 조선 왕들은 이를 교훈 삼아서 왕비가 죽으면 무조건 계비를 맞게 되었다. 사실 정비가 죽고나서 계비를 맞이하는건 전통적으로 대부분 왕조 국가에서는 이상한 게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문종과 세종처럼 정비가 죽고나서 계비를 안 맞아들이는 사례도 의외로 흔했다. 단지, 조선 뿐만 아니라 왕실의 권위 및 위계질서가 중요한 다른 국가들도 계유정난 같이 왕실어른의 부재로 인해 어린 왕이 왕위를 찬탈 당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조선에서는 15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고 백성들의 입이나 사림파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 없었으므로 세조의 후손들도 조상인 세조의 찬탈과정이나 배경을 알게모르게 배웠을 것이므로 자기 자손들도 단종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계비를 맞이하여 더욱 왕실의 중심을 세우게 된 것이다.

사실 문종처럼 오히려 아내가 없는 경우가 다른 의미로 안 좋은데 조선에서 왕비란 단순히 왕의 아내의 위치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 궁중 여인들의 품계의 총칭인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위치에도 있기 때문이다. 즉 왕비가 없다는건 내명부의 수장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세자빈의 사후부터 왕실에 줄초상이 났는데 1441년 현덕왕후(당시엔 세자빈) 사망을 시작으로 3년 뒤에 광평대군(1444년 12월 7일)이, 불과 한 달 뒤에는 평원대군(1445년 1월 16일)이 사망했고, 또 1년 뒤에는 소헌왕후가 사망했으며 4년 뒤에는 세종대왕이 사망했다. 문종이 재혼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이 전혀 조성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장례기간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제외이며 부모의 장례는 보통 삼년상이므로 소헌왕후가 사망한 이후나 세종대왕이 사망한 후는 당연히 안 되며 심지어 장례 치르느라 몸이 상했다. 기회라고 한다면 1441년(현덕왕후 사망)과 1444년 광평대군이 죽기 전 사이의 시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정부인이 죽으면 상기 자체는 기년(1년)이지만 몇 년 정도 재혼하지 않는게 원칙이었던터라 하필이면 현덕왕후의 탈상과 광평대군의 사망은 3년정도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애매했다. 그 다음 기회로는 평원대군 사망과 소헌왕후 사망 사이 기간(약 14개월)를 들 수 있겠으나 세자빈 간택 절차가 통상 6개월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절차를 밟다가 중단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조차 소헌왕후의 3년상을 마친 직후이자 세종대왕 사망까지의 1449~1450년은 약 10개월 정도로 두 번째 기회보다도 짧다. 물론 이 때 앞선 줄초상들로 인해 세자빈을 다시 못 뽑은걸 감안해서 서둘렀다면 가능은 했고, 이 시점에서 더 확실한 것은 오히려 세종이 계비를 들이는 방법도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세종 기준으로 본다면 소헌왕후의 장례는 부인의 상으로 기년(1년)이었고 실제로 소헌왕후 승하 직후 세종은 15개월만에 담제 절차를 마쳤다. 즉 상복을 벗었다는 의미로 세종 기준으로 볼 때 정말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 때 계비를 세우려면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종이나 세자(문종)이나 재혼하려고 했는데 운이 나빴는지는 아니면 마음이 없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양쪽 다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서양조차도 왕이 죽기 전에 왕비 자리가 비어있는 건 그리 좋지 않았는데 왕비란 자리는 왕의 유고시 및 대비가 될시 동서고금 막론하고 종친, 즉, 왕족들의 최고 웃어른이기도 해서 왕위 다툼을 방지하거나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관련 영상

7. 매체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를 잃고, 왕으로 즉위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걸었던 단종과 권좌를 호시탐탐 노리는 수양대군. 그리고 실세(수양대군)와 대의 명분(단종) 사이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즉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는 시기이기 때문인지, 사극의 단골로 다뤄지는 소재 중의 하나인 사건이다. 다만 실세(수양대군)와 대의 명분(단종) 사이에서 선택한다는 관점은 계유정난 이후 세조 즉위 시기 즈음해서 등장한다. 정작 계유정난 시기에는 수양대군의 세력이 안평대군 세력마저 흡수한 노 대신들에게 한참 밀렸다. 애초에 그러니까 판을 엎은 거지만.

재미있는 것은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드라마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따라 관련 인물들의 캐릭터가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이다. 가령 김종서를 보면 단종의 비극에 초점을 둔 사극에서는 그야말로 충신으로 묘사되지만 '고뇌하는 수양대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에서는 권력을 탐하는 권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대로 세조는 의외로 '국가를 위해 결단을 내린 영웅호걸'이자 '살육 속에 고뇌하는' 인간형으로 미화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주로 독재정권 당시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이런 경향이 심했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집권자들도 쿠데타 세력이기에 그렇다 볼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역사 자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열리자 세조는 계유정난 뿐만 아니라 그의 군주로서 능력적인 부분도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후 관상에서처럼 '권력에 미친 악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세조의 일생도 평생동안 권력에 미쳤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8. 기타



[1] 양력으로는 단종1년, 1453년 11월 19일이다. [2] 유배 직후 사형. [3] 종사니, 사직이니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왕이 되어 권력을 잡고 싶다는 말임에 유의. [4] 유교 이념과 예법을 떠나서 왕권 중심의 위계질서를 세울려면 왕의 적모이자 선왕의 정실왕비인 대비의 권한이 현 왕비의 권한보다는 약할지언정 최소한 종친보다는 강해야한다. 왕도, 왕비도 아닌 종친들이 대비나 왕비보다 권한이 막강하면 왕이 갑작스럽게 죽을때의 정식적인 승계원칙이 무시당하며 끝없는 권력다툼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다음 왕도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어서 신하들에게 정무를 수행하도록 해야하니 왕권이 약해지고 그런 와중에도 왕권도 잡으려하면 나라가 제대로 안돌아간다. 즉, 외척이란건 위계질서가 확립된 군주제 국가인이상 기본적으로 존재 자체는 할 수 밖에 없는 세력이고 현대 입헌군주국에서도 형식적으로는 남아있지만 현대 입헌군주국들은 모든 국민이 평등한 민주주의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므로 왕비의 친정이라는 형식적이고 명예적인 대우만 있을 뿐이다. [5] 병으로 사직했기 때문에 참극을 피했다. [6] 다른 말로 ' 고명 대신' [7] 세 사람 중 남지는 얼마 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유지를 받들게 된다. [8] 병조판서도 역임했었다. [9] 위에 언급한 명나라 사절단을 갔다오면서 신숙주를 얻을 수 있었다. [10] 아이러니하게도 이징규, 이징석은 김종서의 측근 무관이자 후에 세조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이징옥의 형제들이다. 훗날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정난의 일로 이미 형제가 의절한 상황이었고 이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목숨을 부지 했다고 한다. [11]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아 세종의 막내 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 [12] 최항은 신숙주의 후임이자 2인자였을 뿐 이 시점에서 수양대군파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묘한 상태였다. [13] 승지 중 최하위직이며 공조에 대응된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정도 된다. 하지만 동부승지도 승정원 소속인지라 왕실과 관련된 사안을 다루고 대소 신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하긴 했었다. [14] 김종서와 황보인 이상으로 집안이 큰 피해를 보았다. 훗날 경종실록에는 조극관의 자손을 김종서와 황보인의 자손처럼 후히 대우하자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조극관의 아들 조정서는 귀양 가서 죽고 동생 조수량도 사사되었다. 본인의 후손은 끊어져서 없고 조수량의 후손만 있다. [15] 이 시기까지 집현전 같은 소장 세력들은 황보인보다는 세조 측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을 추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이탈하는 것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즉위하는 시기부터이다. [16] 훈구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세조의 즉위 이후 책봉된 소수의 좌익공신들이다. 성삼문이 포함되었다가 사육신 문제로 제외되는 것 역시 좌익공신 이야기. [17] 생육신의 일인이지만, 사육신 사건 때는 5세였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단종 폐위 때 3세였던 남효온을 생육신에 포함하는 것도 논란이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남효온이 김장생, 김굉필 등 초기 사림 관련 인물로 사화 때 타격을 입은 것 때문에 포함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18] 한편으로 이는 왕정국가에서 왕 유고시 왕실의 위계질서를 바로잡을 왕비-대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며 외척이 왕정국가에서 왜 거의 필연적으로 생겨나는지를 알려주는 세계사적 사례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은 분명 권력욕이 가득한 왕족 한명이 어거지 무력행사로 판도를 뒤집은것이긴하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결국 찬탈할수 있었던건 왕실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왕족이 매우 많았다는 것에 기인한다. 혜빈 양씨와 한남군 같은 예외는 바로 눈에 띄었기에 꼼짝없이 사형당했고 양녕대군은 원래 대부분 사람들이 질색하는 개차반이라 예외라쳐도 세종과 문종이 생전 믿고 가까이 지냈던 상당수의 대군과 왕자들조차 난을 일으킬때부터 현재 왕위에 있는 적법하고 정당한 단종이 아니라 수양대군을 지지한건 왕의 공식 후견인이자 왕족 최고서열인 왕대비가 없어서 이들을 사전부터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종의 왕비 대행을 한 숙빈 홍씨도 권한 대행에다 후궁에 불과했기에 왕위 찬탈 이전부터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약 현덕왕후와 소헌왕후가 죽었더라도 세종이나 문종이 계비를 들여서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살아서 단종의 정식 후견인이자 왕실 최고 어른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했다면 왕족들이 왕위를 찬탈하는 수양대군을 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19] 세조의 손자 성종이 민생을 개선하긴 했다. [20] 박정희는 나중에 채명신, 김종필, 이후락을 내치긴 했다. [21] 다만 속과정은 꽤 많은 차이가 난다. 먼저 권력욕이 미치도록 강한건 양쪽 다 똑같지만 세조는 왕 유고시 가장 윗서열이자 수렴청정할 왕대비가 없는 것을 노린것이지만 리처드 3세는 형수이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섭정으로 지명되었다가 찬탈한 것이다.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이자 왕대비인 엘리자베스가 동서양 막론하고 드문 평민 출신 왕비라서 권력 기반이 정실 왕비치고 매우 약했다는 것과 서양은 외척인 왕비가 내국인이 아니라 외국 왕실의 왕족인 경우가 많아서 이른시기부터 외척을 배제하기 시작했기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찬탈을 한 것이다. 다만 결국 가장 왕족의 윗서열인 대비가 살아있는 가운데 에드워드 5세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아예 대비까지 제거하려는 무리수까지 둔탓에 결국 탈출한 대비와 반대세력들에 의해 제거 당했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된 세조와는 결과와 그 최후가 아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