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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17:14:19

생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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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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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3. 남효온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쟁4. 기타

1. 개요

생육신()은 세조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를 말한다. 세조의 찬위 사건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냈다.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생육신과 기타 세조 찬위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한 사람들을 통칭하여 청담파로도 분류하고, 사림에 넣기도 하는 등 학자에 따라 이견이 존재한다.

2. 행적

生六臣
생육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3. 남효온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쟁

역시 태어난 시기 때문에 생육신에 넣기가 애매한 것도 사실이며, 당대의 절의의 주요도로서는 권절[4]이 더 높다. 그러나 육신전, 추강냉화, 사우명행록을 짓는 등 기록을 남겼으며, 또 김시습을 제외하면 제일 유명한 것도 사실이다.[5]

4. 기타

사육신이라는 말부터 남효온이 지은 "『 육신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생육신 또한 나라에서 정한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생육신 역시 사육신보다 훨씬 더 짜맞추어진 감이 있다. 김시습, 성담수, 원호, 남효온은 정조 때 모두 이조 판서로 추증되고 봉향되었으며, 일찌기 숙종 때인 1706년 이들 6명이 조려가 배향된 서산 서원에 봉향되었다.[6] 이것이 생육신의 유래로 추정되며, 그런 만큼 조려에게도 여러 야담이나 행장이 따라 붙어있다.

훗날 육신전을 읽은 선조가 육신전의 팩트적 오류도 그렇지만 ‘왕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당장 그만두거나 자결하거나 했어야지 그 밑에서 녹 받고 승진도 해 가며 섬기다가 반란 일으킨 건 뭐하는 경우냐’ 라는 논리[7]로 사육신을 디스하였는데, 그런 기준에서는 오히려 이 생육신들이야말로 흠 잡을 데 없이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양이 불의를 행할 때 즉시 갖가지 핑계를 대어 물러나 버렸다. 물론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이 오히려 생육신들에게 공감과 존경을 받은 건 세조의 찬탈이 그만큼 부도덕했고 의분을 일으킬만 했다는 것이다.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세조의 처벌과 추후의 단종에 대한 냉혹한 처분도 그에 한몫 했을 것이다.

그 외 앞서 거론된 이수형[8]이나, 단종을 묻은 호장 엄흥도 등도 절의를 지킨 주요 인사로 거론된다.

[1] 다만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2] 이들은 치악산에 올라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이름을 나란히 새기기도 했다. [3] 일부 야사에서는 세상을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예 평생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했으며, 9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눈을 뜨기 전까지는 가족들조차 그게 진짜인 줄 알았다고 한다. [4] 權節, 1422년 ~ 1494년. 문무를 두루 겸비하여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전부터 그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찬탈 이후에도 여러번 당상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평생을 귀먹고 정신이 이상해진 척 하며 살다 갔다. [5] 실제로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 포함해서 7기가 있다 [6] 위에 남효온과 함께 거론된 권절도 숙종 시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7] 이 부분의 치명적 약점을 최대한 커버치기 위해 육신전에서 신하 신이 아닌 클 거를 썼다느니, 녹을 받기만 하고 안 먹었다느니 하는 말장난 내지는 말꼬리 잡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핵심은 이들이 어쨌든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모신 기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극에서는 고문 장면에서는 육신전의 내용을 반영해 나리나 녹 드립까지 다 나오지만 그 전에는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고 자신의 2인칭을 신이라고 하는 장면을 안 넣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고문당하며 세조를 도둑이라고 매도하는 장면에서도 ‘신’ 을 쓴다. 일을 도모하기 위해 참으며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걸 위해서 어쨌든 세조 밑에서 한 행위들이 선비로서는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8]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교랑(宣敎郞) 전생서령(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경상북도 영천군 도촌리로 은거하였다.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녘으로 문이 있는 집(공북헌)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북.. 북향집! 21살에 은거해 73년간을 단종을 추모하며 상경하지 않다가 중종 23년이 돼서야 죽었다. 철종 때 돼서야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