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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22:18:06

사육신


死六臣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하위지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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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방영된 남북합작 드라마에 대한 내용은 사육신(드라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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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단종 복위 모의와 실패4. 심문 과정5. 사형과 후일담
5.1. 육신사(六臣祠)
6. 평가와 논란
6.1. 역사성 논란6.2. 조선 전기의 미복권6.3. 사육신의 신원6.4. 또 하나의 충신, 박심문(朴審問)6.5. 김문기 포함 논란
7. 관련 문서

1. 개요

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성삼문[1]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까마귀 눈비 맞아>
사육신()은 ‘죽은 여섯 신하’라는 뜻으로,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고문받기 전 자살한 유성원을 일컫는다. 김문기 포함 여부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관련 내용은 아래 후술.

덧붙여서 사육신처럼 세조를 몰아내려고 하진 않았으나, 평생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들로 생육신이 있다.

2. 상세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2] 가운데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육신 6명은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개인이 제작한 도서의 주인공 급으로 선택된 것일 뿐, 당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 당한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70여 명이다.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 중에서 주요 인물 6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해당 도서에서 지정된 사육신은 본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를 일컫는 말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선정한 ' 장릉배식록'을 편정할 때, 아래와 같은 인물을 수록하였다.

3. 단종 복위 모의와 실패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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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주도 세력
2차 왕자의 난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조사의의 난 조사의, 이성계
이징옥의 난 이징옥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
김처의의 난 김처의
이시애의 난 이시애
임꺽정의 난 임꺽정
정여립의 난 정여립
송유진의 난 송유진
이몽학의 난 이몽학
이괄의 난 이괄
이인거의 난 이인거
삼수의 옥 정인중 등 노론
이인좌의 난 이인좌
나주 괘서 사건 윤지
정유역변 홍상범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
홍경래의 난 홍경래
임술농민봉기 유계춘 등 진주 사람
이필제의 난 이필제
이재선 추대 사건 안기영 등, 이하응
임오군란 김장손, 유춘만 오군영의 일원
갑신정변 김옥균 급진 개화파
1차 이준용 옹립 사건 이하응, 위안스카이
이재면 추대 사건 이하응, 위안스카이
동학 농민 혁명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
2차 이준용 옹립 사건 이하응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이두황 조선군 훈련대
갑오의병 김원교, 서상철 등
을미의병 유인석 등 조선 의병
춘생문 사건 임최수, 이도철 친러파, 친미파
신축민란 이재수
을사의병 최익현 등 조선 의병
정미의병 이인영 13도 창의군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5]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연회장이 좁다며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 때 윤영손이 노하여 신숙주를 죽이려 했으나 성삼문 등이 말리고 거사를 연기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하여[6]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 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7]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8]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9]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신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4. 심문 과정

4.1. 성삼문

4.2. 박팽년

4.3. 이개

4.4. 하위지

4.5. 유응부

5. 사형과 후일담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15]·불덕[16]은 낙형[17]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18]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개박살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 예외적으로 사육신은 아니지만 그들과 동조했던 권자신과 현덕왕후의 어머니는 당시 기준으로 (현재 기준으로는 중년이다.)고령에다 남편인 권전도 이미 죽은 미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덕왕후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라는 사실 자체가 세조와 공신들에게 눈엣가시여서 그런지 사형을 피하지 못했다.[19] 그래도 사실 이 정도에서 끝난 것도 다행일지도 모른다. 갑자사화 때는 아예 8촌까지 싸그리 몰살당한 집안도 있다. 특히 친자식이나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 심지어 시집가 있던 딸들의 집안까지 모조리, 문자 그대로 박살(撲殺)을 냈다. 이는 정말 끔찍한건데 진짜 반역을 저지른 사람도 그 친척 중 여자는 일단 목숨만은 건지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잔혹한 처벌이다. 실제로 사육신의 경우에는 직계 후손만 끊긴 경우가 있다면 이쪽은 직계를 비롯한 다른 친족들도 대가 끊겼다. 그 갑자사화의 주된 피해자들이 조상이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승승장구한 정난공신가문이었음을 감안하면 정난공신들의 업보인 셈이다.

시집간 딸들은 화를 면했으므로, 황보인이나 박팽년의 외손들은 성종대가 되면 고위관직에 올랐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다.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 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 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 직계를 제외한다면 여기에 성삼문의 사촌들과 유성원의 조카 몇 명 정도가 더 살아남았지만 이들 중에서는 하위지 집안처럼 양자로 입적한 사람이 없었다.

박일산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진짜로 복중태아였다면 그 아이가 죽을 일은 없다. 위와 아래에서도 보이지만 유아는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 노비 분배기에도 언급되지만 박순의 아내는 옥덕이라는 이름으로 구치관에게 노비로 주어진다. 해당 일화는 이덕무 청장관전서에 등장하는데, 이 기록은 한참 후대의 일로 말 그대로 전설일뿐이다.

하위지의 가문은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하분은 일찍 죽어 화를 입지 않은 형 하강지, 하포, 하원은 동생 하기지의 아들이다. 하기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으므로 하포는 생부인 하기지의 대를 잇고 하원은 사형 직전에 하위지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지명되어 그의 친필 유언장을 받고 세조 말년에 방면되어 성인이 된 후 하위지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게 되었다. 앞서 언급된 유언장은 하씨 집안에서 대대로 보전하다가 안동에 있는 한국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조선 전기 고문서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 타버려 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귀중한 유물이기도 한 셈.

성삼문의 경우를 보면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 당해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다. 세조의 후궁이었던 근빈 박씨는 박팽년과의 누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근빈 박씨는 선산 박씨, 박팽년은 순천 박씨로 본관부터 다르다. 한국의 박씨들이 신라 왕가였던 경주 박씨를 공통의 대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두 본관은 전혀 접점이 없는 남남 사이나 마찬가지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공신의 한 사람인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의 종으로 분배되었다. 사육신은 절개를 지키다 죽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공신들에게 하사되어 공신의 첩이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하사받은 공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봉석주의 첩이 되기를 자처한 것 등만 문제시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계유정난 등 세조 등극 과정에서 살해당한 대신들의 가족들과 사육신 가족들 거취다.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7일 갑술 4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딸 가구지(加仇之)·말비(末非)·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주고,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
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딸 불덕(佛德)·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딸 요문(要文)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판서(吏曹判書) 권람(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주고,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
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딸 산비(山非)는 병조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딸 금정(金正)·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이의영(李義英)의 아내 효생(孝生), 조극관(趙克寬)의 아내 현이(現伊)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주고,
박순(朴詢)의 아내 옥덕(玉德), 박헌(朴憲)의 아내 경비(敬非)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구치관(具致寬)에게 주고,
송창(宋昌)의 아내 소앙지(召央知), 황보석(皇甫錫)의 아내 소사(召史)는 전 예문제학(藝文提學) 윤사윤(尹士昀)에게 주고,
이말생(李末生)의 아내 관저(關雎)·딸 경비(敬非), 김문기(金文起)의 아내 봉비(奉非)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유수(柳洙)에게 주고,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정수(貞守),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봉석주(奉石柱)에게 주고,
김승규(金承珪)의 딸 숙희(叔熙), 권저(權著)의 어미 보음미(甫音未)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강곤(康袞)에게 주고,
박계우(朴季愚)의 아내 소비(小非), 김승벽(金承壁)의 아내 효의(孝義)는 예조참판(禮曹參判) 홍윤성(洪允成)에게 주고,
류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아내 복중(福中)·딸 덕비(德非)는 우승지(右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주고,
이호(李昊)의 아내 개질지(介叱知)·딸 목금(木今)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유하(柳河)에게 주고,
윤처공(尹處恭)의 딸 숙비(叔非), 정원석(鄭元碩)의 아내 만금(萬今)은 이조참의(吏曹參議) 원효연(元孝然)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미치(未致), 최윤석(崔閏石)의 아내 봉비(奉非)는 단천군수(端川郡守) 최유(崔濡)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누이 소사(召史), 이유기(李裕基)의 딸 소근소사(小斤召史)는 형조참의(刑曹參議) 황효원(黃孝源)에게 주고,
조번(趙蕃)의 아내 소사(召史)·딸 의정(義貞), 황의헌(黃義軒)의 아내 복비(卜非)는 병조참의(兵曹參議) 한종손(韓終孫)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누이 심이(心伊), 조완규(趙完圭)의 딸 가이(加伊)는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자운(尹子雲)에게 주고,
윤위(尹渭)의 아내 소사(召史), 정관(鄭冠)의 아내 신경(信敬)은 우부승지(右副承旨) 한계미(韓繼美)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딸 소사(召史)·막금(莫今)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효문(曺孝門)에게 주고,
이정상(李禎祥)의 아내 삼비(三非)·딸 현비(現非)·정비(貞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마배(磨杯)는 겸 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 이극배(李克培)에게 주고,
윤경(尹涇)의 아내 소사(召史), 성삼빙(成三聘)의 아내 의정(義貞)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에게 주고,
봉여해(奉汝諧)의 어미 소비(小非)·아내 정순(丁順)은 상호군(上護軍) 유서(柳溆)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아내 자근(者斤), 하위지(河緯地)의 아내 귀금(貴今)·딸 목금(木今)은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에게 주고,
이보인(李保仁)의 아내 물재(勿才)·딸 옥석(玉石)은 성균 사성(成均司成) 정수충(鄭守忠)에게 주고,
조완규(趙完圭)의 누이 정정(精正), 최사우(崔斯友)의 어미 소사(召史)는 상호군(上護軍) 유사(柳泗)에게 주고,
식배(植培)의 딸 귀비(貴非)·귀장(貴莊)·귀금(貴今)·소근비(小斤非), 유응부(兪應孚)의 아내 약비(若非)는 예빈시 윤(禮賓寺尹) 권반(權攀)에게 주고,
민신(閔伸)의 아내 우비(禹非)·딸 산비(山非)는 대호군(大護軍) 안경손(安慶孫)에게 주고,
이지영(李智英)의 어미 석을금(石乙今)·아내 종비(終非)·딸 은비(銀非)는 대호군(大護軍) 홍순로(洪純老)에게 주고,
송녕(宋寧)의 아내 소사(召史), 권저(權著)의 첩 복가이(卜加伊)는 대호군(大護軍) 조득림(趙得琳)에게 주고,
김감(金堪)의 첩 귀덕(貴德)·딸 소비(小非), 이양(李穰)의 아내 월비(月非)는 대호군(大護軍) 이극감(李克堪)에게 주고,
중은(仲銀)의 누이 귀덕(貴德)·딸 귀비(貴非),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말비(末非)는 직예문관(直藝文館) 유자황(柳子滉)에게 주고,
정분(鄭笨)의 아내 순비(順非), 이석정(李石貞)의 첩 말생(末生)·딸 감물(甘勿)은 대호군(大護軍) 임자번(林自蕃)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어미 내은이(內隱伊), 김감(金堪)의 아내 소사(召史)·딸 복금(卜今)·말금(末今)·아지(阿只)는 전 호군(護軍) 김처의(金處義)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어미 소사(召史)·아내 점물아지(占勿阿只)·딸 부허비(夫虛非)는 사복 소윤(司僕少尹) 한서귀(韓瑞龜)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덕비(德非)·딸 백이(白伊)는 전농 소윤(典農少尹) 송익손(宋益孫)에게 주고,
이승로(李承老)의 아내 효정(孝貞)·딸 숙화(叔和), 이오(李午)의 아내 소질지(少叱知)는 군기 부정(軍器副正) 설계조(薛繼祖)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아내 참군(參軍)·딸 아을금(阿乙今)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권경(權擎)에게 주고,
정관(鄭冠)의 어미 소사(召史),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학비(鶴非)는 군기부정(軍器副正) 홍순손(洪順孫)에게 주고,
허조(許慥)의 어미 화산(花山)·누이 소근소사(小斤召史)는 겸 군기부정(兼軍器副正) 곽연성(郭連城)에게 주고,
권저(權著)의 아내 계비(季非)·딸 순비(順非)는 호군(護軍) 최윤(崔閏)에게 주고,
조순생(趙順生)의 아내 가질비(加叱非), 김선지(金善之)의 아내 내은이(內隱伊)·딸 가야지(加也之)는 전 부사직(副司直) 이몽가(李蒙哥)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딸 감상(甘尙), 최면(崔沔)의 누이 막비(莫非)는 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주라.

하였다.

5.1. 육신사(六臣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묘리 640)에 있는 사당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박팽년의 후손이 세운 곳이라 초기에는 박팽년만 배향되었으나, 그의 현손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1691년 낙빈 서원[20]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사가 낙빈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충효위인 유적 정화 사업에 따라 현재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사우 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숭절당, 외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1979년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육각 기념비가 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실역에서[21] 성서2번을 타면 갈 수 있다. 하루 9회 운행하지만 성서 2번이 모두 육신사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면 LED하빈 육신사 방면이라고 적혀 있거나 행선판에 묘리 or 묘골 or 육신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잘 보고 타야 된다. 아니면 대구 시내버스 홈페이지나 성서 2번 항목에 있는 시간표를 참조하고 가는 것도 좋다.

낙빈서원의 경우 달성삼가헌고택[22] 뒷편에 있는데 마을 입구 묘1리파회 정류장에 성서2번 육신사행[23]과 칠곡군 농어촌버스 7번, 9번, 20번이 다닌다. 칠곡군 농어촌버스는 환승할인이 불가능하므로 주의. 전반적으로 미비해서, 자가용을 타고 육신사, 달성삼가헌고택, 낙빈서원을 패키지로 이용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6. 평가와 논란

6.1. 역사성 논란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도 않고 연구도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 육신전의 영향이며 오늘날 한국사 주요 키워드로 사육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육신전 문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굉장히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사림의 일파인 김종직, 김굉필, 남효온 등으로 이어지는 학파적 정당성 문제가 있다. 사림의 학맥의 큰 줄기 중 하나인 김종직 조의제문이 문묘 배향 18현에도 포함된 김굉필의 활동으로 실록에 실리면서 일어난 일이 무오사화였다. 조선 왕실은 세조의 후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사림들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의 정통성을 복원하면서도 세조의 후손이 왕으로 있는 조선 왕실에 출사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모순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조의 정통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하는 대신에 사육신의 충성심만 강조한다라는 편법이었다. 이는 정몽주와 같은 조선 건국 반대파를 띄운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관계 역시 문제가 된다. 세조는 대표적인 왕권 지상주의자였고, 대간들은 딱 그 반대였다. 때문에 세조 직계가 왕위를 계승해 나가고 명분상 중흥의 군주로 대우받음에도 유학자인 신하들 입장에선 마냥 긍정하긴 껄끄러운 군주였다. 당대에도 마찬가지라서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상당수는 세조 즉위 후 왕권주의 일변도로 나가 때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거나 정계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부류들이다.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통성의 문제도 있다. 사림 내부나 명분상으로는 대표적 간판이고 현재로서도 이 부분이 가장 강조되긴 하는데, 정작 조선 시대에는 대놓고 언급하기도 뭐하고 진짜로 깊게 파고들수도 없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단종이 정통성이 있고, 세조는 없다"라고 하면 간편해보이지만,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조선의 왕실은 세조의 직계로 이어졌고 단종의 후대는 끊어졌다. 사림도 관직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어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나 그 제자인 김굉필만 해도 세조 당대나 예종, 성종 시기에는 관직에 나서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없는 왕 밑에서 일하는 것이 되므로 완벽한 모순을 이룬다.

게다가 관련된 인사들이 소속된 가문의 지위 문제 역시 빠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유명 인사의 몇 대손도 그 조상의 이득을 봤고, 역적이나 반역자로 찍히면 그 가문은 몇 대가 지나가도 그로 인한 피해를 봤다. 주요 관련자의 직손들이야 대부분 죽었다고 하지만 엮여있는 가문들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육신전에는 이런 다양한 문제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육신전은 성리학적 명분론 관점에서 긍정되어서 조선 후기를 풍미하였고 이 이데올로기는 민간까지 퍼져서 특정 인물이 지은 소설이 야사처럼 전해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당 분야는 굉장히 조심해서 봐야 한다. 배경이 소설이고 이게 이미지화된 경우에는 이들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는 작업이 주의깊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실제 생애는 '당에서 인정받은 천재가 국가적 한계에 의해서 좌절하게 되는' 최고운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소설 임경업전 속의 조선 후기 최대의 명장은 역사 인물 임경업과는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다. 소설 동의보감에 묘사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심의는 실제 역사 기록 속의 허준의 생애와 차이가 크다. 임진록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 사명당이 실제 조선 승려 유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전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고전소설 운영전에서 묘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적 인물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육신전 속 안평대군과도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육신전 속 사육신은 어떨까? 고민할 대목이다. 단적으로 학계에서 계유정난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 속에서 사육신의 상당수는 계유정난에 협조, 동조, 적어도 방관했던 인물들로 평가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실 동조 안 하면 "날 죽여라!"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기는 했다.(박시백 등의 평가)

우선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은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인데다, 계유정난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지라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아닌 밤중에 날벼락 격이였다.

또한 현대에는 사자명예훼손죄라는 법이 존재하고 사육신 관련 문중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다. 어디까지나 직계 친족들이 화를 당한 것이지 관련 집안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개만 하더라도 이개 직속 친족들만 죽었지 정작 이개의 일부 친인척들은 세조에게 부역한 공신이라서 잘 나갔다. 물론 이들 후손도 당연히 이개에 대해서 자랑스러운 자신들 집안의 선조로 모시는 중. 박팽년, 하위지는 아예 직계 후손들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한국 현실에서 이런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들이 양지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당장 아래의 사칠신 논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문중의 호전성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

사육신들이 죽기 전에 썼다는 일종의 절명시들이 구전되는데, 일단 죽기 전에 시나 읊고 있을 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이 아닌만큼[24] 절명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시의 저자가 해당 인물인지도 의심을 받고 있다. 죽음과 연관이 조금 적은 시들로 저자가 시에 조예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나마 연결 고리를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대에 저자 불명인 시들을 해당 인물과 엮은 결과물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6.2. 조선 전기의 미복권

사육신은 단종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난 이래 수백년간 신원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여겨져 단종보다도 더욱 나쁜 대접을 받았다.

남효온 육신전은 위에 언급된 심문 과정 등이 모두 실려 있어서 사육신의 행장에 연결될 정도이나,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기 문학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런 책은 임금이 유학자들과 토론하는 경연에서 강의가 될 수가 없다. 헌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연관, 판서 박계현[25]이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호기심이 동한 선조는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성삼문 등의 행적이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 주 내용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된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자결을 하거나 했어야지, 세조 밑에서 녹봉은 받아먹으며 섬기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말도 안 된다"는 논리였다. 성리학적 입장에서만 보면 틀린 논리가 아니다. 나으리니 신하 신 대신 클 거를 썼느니 하면서 육신전에서 실드를 중점적으로 치고 있는 부분도 이 대목으로, 세조의 정통성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야 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뭔가를 해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원래 성리학의 명분론은 그렇게 융통성이 있는 체제가 아니다.[26] 선조는 이런 논리로 "책을 찾아서 모조리 불사르고,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까지 치죄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선조 자신은 " 노산군(단종) 묘에 망주석과 상석, 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무조건 세조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육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때 논리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차이가 있다. 자세한 건 육신전 문서 참조.

6.3. 사육신의 신원

하지만 조선 중후반이 되면 상황이 180도 바뀐다.

계유정난 공신들과 공신들의 후손들이 판을 치며 처놀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반에는 이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조선의 지식인과 지배층을 이루고 정국을 주도한다. 바로 사림들.[27]

사림들에게 있어 사육신과 이들이 당한 숱한 고초들은 어디까지나 훈구 세력들의 추악한 만행들이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하고자 한 이들의 입장에서 볼때 사육신들이야말로 신하로서 단종(조선)에 대한 충의를 지킨, 지조있는 선비들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양반 사대부들에게 있어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들이었다.

결국 사림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 노론에서 사육신의 신원 복구에 나서게 된다.

효종 대에 노론의 핵심 인사인 송준길이나 송시열,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 했다. 효종은 이에 대해서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긴 하였으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이런 추증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순탄하게 세자가 되고 이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 면에서는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 경종)를 두었기에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이라는 여론이 이미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세손 - 세자 - 왕 단계를 거친 아버지 현종은 사육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나, 왕권은 강했으나 기반이 약한 후계자(순조)를 둔 점에서 숙종과 유사한 정조가 아예 배식단까지 만들어 단종과 연루되어 죽은 사람들을 전부 복권시켜준 걸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28]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 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숙종조가 되면 육신전이 사실상 정식 사서처럼 다뤄진다. 김문기의 문중인 김녕 김씨는 이들보다 40년 뒤인 1731년에 복관되었다.

숙종 이전까지 노산군으로 불리던 단종도 숙종 년간에 노산대군을 거쳐 단종으로 신원되고 묘가 정비되었다.

6.4. 또 하나의 충신, 박심문(朴審問)

1804년, 순조 대에 사육신이 사형당한 당시 질정관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박심문이 본래 사육신과 동지로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귀국 당시 사육신이 이미 사망한 사실을 알고 음독자살한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추서하고 1828년에는 영월 창절사(현 창절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에도 철종 때인 1856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871년 고종이 '충정' 시호를 내리는 등 조선 시대에는 사육신의 동지로 인정받았다. 후손으로는 박지원이 있다. https://www.facebook.com/jwp615/posts/647303728706288 이 게시글에 따르면 전라남도와 경상북도[29]로 후손이 흩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에 배향되어 있다.

6.5. 김문기 포함 논란

박정희 정부에서 사육신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결국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조판서이자 삼군도진무 김문기가 새롭게 헌창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 편찬 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헌창'하고, 사육신 묘에도 김문기의 자리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1982년에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한 사항이 없다"고 발표했고, 또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최초의 6인이 맞다고 재확인하였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사육신에 김문기는 포함되지 않는다.

김문기 문중에서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세조실록에서 언급된 6인에 김문기가 속하기 때문이나, 애초에 사육신의 유래는 남효온이 쓴 육신전이란 전기이기 때문에 세조실록과는 관계가 없다.

문제가 된 것은 이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라는 주장 때문인데, 김문기의 후손이었던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를 높이려는 생각에 학계에 압력을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웃긴 것은 금녕 김씨 문중에서조차 구한말인 19세기 말까지 조상 어르신인 김문기를 그저 '사육신에 연좌되어 화를 입은 이들 중 한 사람'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인식은 김문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 터에 세워진 서원 경내 추모비의 내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략) "공의 이름은 문기(文起)이고 금녕(金寧) 사람으로, 백촌은 호이다. 선덕(宣德) 병오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 왕을 모셨다. 관직은 판서까지 올랐다. 세조 병자년 사육신과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사람이 30여 명이었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들 현석도 같은 날 목숨을 잃었다." (후략) - 김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소재 백촌김선생원허비(白村金先生院墟碑) 중
정조 실록에서 보듯 권자신, 송현수 등과 함께 김문기가 있었으므로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공로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탓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문기의 경우 조선 정부에서도 인정할 만큼 사료 자체는 충분히 뒷받침되니,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지만 사육신에 들어가기에는 논란이 있다. 그래서 헌창이라는 방식으로 추가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벌어졌는데, 사단법인 한국학연구회가 아래의 합작 드라마 #s-2의 상영회에서 김문기가 군 동원을 맡았고, 또 문초에 불복했음을 집어넣지 않은 왜곡 드라마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아무튼 문중이 개입한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분명히 김문기가 사육신이 아닌 삼중신(三重臣)에 따로 있었는데도 사육신에 넣으라는 압력을 넣는 것은 문중이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유응부·김문기… 사육신 제사 불발, 금녕 김씨와 격돌
‘사육신’ 시사회장서 고함·욕설 오간 까닭
사육신 제사상 엎은 후손에 '벌금형' 확정…

7. 관련 문서


[1] 가장 유명한 말이지만, 이것은 조선 후기에 쓰인 소설의 일부다. 참고로 '우리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리의 신하가 아니다.' 운운하는 것은 육신전에도 없던 표현으로 한참 후대의 소설, 드라마, 영화 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비슷하게 존재하는 표현으로 교체한 것이 이것이다. 실제로 있었다면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의 찬탈로 상왕이 된 것이니 '상왕'이 아니라 그냥 '전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단종을 '상왕'으로 부른다는 것은 결국 저 '나리'를 '금상(지금의 임금)'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2] 문종의 고명 운운도 있었는데, 문종은 고명은커녕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사망했다. [3] 다만 송현수의 경우 역모가 일어난 직후에는 세조가 직접 불러 옛 친구였기에 깊게 의심하지 않았다며 위로하긴 했다. (음력 6월 13일 기사) 다만 정치적인 죽음이었던 모양으로, 그 뒤 아들 송거(琚)가 과거를 보려고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송영(瑛)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4] 김문기는 애초 삼중신에 배향되어 있으나, 사육신에 비해 유명하지 않은 삼중신보다는 사육신에 넣어지기를 바라는 세력이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는 경우 유응부를 제외하고 있기 때문에 김문기 사육신 배향 건 관련해서는 육신 세력 중 유응부 후손들이 가장 반발하고 있다. [5] 실록에 따르면 이들의 계획이 세워진 시점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 역시 이 문제를 성변(星變)이라고 표현한다. ( 남이의 옥에서도 혜성은 중요한 떡밥거리가 되는데 흥미롭다.) [6] 단 정창손은 계유정난에 가담한 인물인 만큼, 이 음모를 고변해야 할 입장이기는 했지만, 자기 사위가 저 혼자 살려고 자기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비겁함에 기가 막혀 '이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7] 이때 연계된 함경도 온성 절제사 유사지(유성원의 삼촌)와 그 아내는 연좌에서 빠져나온다. 양성지는 첫날부터 혐의에서 제외된 케이스. [8] 그 날 아침, 상왕이 직접 긴 칼을 내려주었다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성삼문의 입으로 언급되면서 1년 뒤 단종이 상왕의 지위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가게 되는 결정적 단초가 된다. [9] 전 집현전 부수찬. 이개의 매부, 스스로 목을 맴. [10] 실제로 성삼문 계유정난 이전에는 정4품 사강원이었는데, 이후 3년간 꽤 꾸준히 승진해서 사육신 사건 때는 정3품 승정원 좌부승지의 직위에 있었다. 중간에 단종 비를 들이는 문제를 반대했다가 6개월 정도 좌천된 적이 있으나, 이후 바로 집현전 부제학 정3품 당상관 직으로 복귀시켰고, 이후에는 왕 직속인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이 직책은 계유정난 이후 한명회가 거친 직책들이다. [11] 상술했지만 육신전 소설이다. [12] 문헌에 따라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이런 형벌을 안 쓴다고 하오." 라는 버전도 있다. [13] 《추강집》, 《해동야언》 [14] 성삼문의 아버지. 유응보와 별운검으로 함께 뽑혔다. [15] 단종의 유모가 데리고 있던 하녀. [16] 권자신의 어머니가 데리고 있던 하녀. [17]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 [18] 혹은 성삼문의 사위 박임경. [19] 그래도 권람 같이 안동 권씨임에도 세조의 협력자인 경우도 있고 해서 그런지, 권자신은 처형은 당했어도 누나인 현덕왕후와 달리 직계자손이 겨우 살아남아서 대를 잇는데 성공했다. 사실 조카인 경혜공주만 해도 정미수를 낳아서 문종과 현덕왕후의 직계가 모계로나마 남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나 정작 정미수는 인생의 고난 때문인지 끝내 자식을 한 명도 남기지 못한채 사망하였고 그대로 문종과 현덕왕후의 후손은 직계, 방계, 모계 할 것 없이 모두 통틀어 단절되고 말았다. [20]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묘리 산15)에 있으며 육신사 서남측에 있는데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달성삼가헌 고택 뒤로 가야 된다. [21] 문양역에서 타도 되지만 성서2번이 전부 문양역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22]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15(묘리 800)에 있는 조선시대의 한옥으로 중요 민속 자료 제104호이다. 이 집은 현 소유자의 7대조 박광석이 1747년 건축한 것이다. [23] 원래는 성서2번 육신사행이 이 곳에 운행하지 않다가 언젠가부터 이 곳에 운행하게 되었으며 이 노선이 이 곳으로 운행하기 전에는 환승할인이 불가능한 칠곡군 농어촌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했다. [24] 박팽년의 경우는 애초에 정식으로 처형되기 전에 고문으로 죽었다. [25] 이 사람 아버지는 중종 시기 영월군수로 부임한 후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바 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중종 연간에 이미 영월 지역에 단종에 대한 설화가 만들어져 있었고 사대부와 백성들 사이에 단종에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6] 아이러니하게도 성종이 등용한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성종이 지적한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스승으로 조의제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인데, 그가 출사한 시기의 왕이 세조다. 세조 아래에서 벼슬은 벼슬대로 하고 뒤로는 조의제문으로 계유정난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허균이 김종직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 [27] 물론 훈구 세력이 사림 중 서인에 흡수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사림(서인)에 흡수된 시점에서 훈구 세력의 후손들은 더 이상 조상들마냥 적극적으로 사육신을 폄하할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28] 숙종과 정조의 입장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옹호한다는 건 본인 및 후계자의 정통성을 다른 의미에서 부정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조상인 세조의 왕위 찬탈을 옹호하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든 간에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의 정통성에 흠결이 생기기는 마찬가지라서, 둘 중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한 게 단종 및 사육신을 복권시킴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을 간접적으로나마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9] 영천시 화산면 일대에 후손들이 세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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