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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8:41:46

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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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cc,#000> 노론
老論
형성 1680년 경신환국
해체 1788년~ 1795년[1]
종주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수장 김수항 (조정 영수) / 권상하 (재야 영수)
노론 사대신
(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정호 (강경파)
민진원 (강경파)
홍치중 (온건파)
김재로 (통일된 노론의 마지막 영수)
주요 인물 김만기
이간[2] (낙론의 영수)
유척기
홍봉한 (북당(탕평당)의 수장)
김귀주 (남당(청명당)의 수장)
홍인한
김상복
김종수
송덕상
분당 벽파, 시파[3]
집권 기간 39년 (단독 집권 기간)
112년 (탕평 및 공동 집권 기간 합산)
1. 개요2. 역사
2.1. 집권 기간2.2. 서인의 분열(노론과 소론)2.3. 경종 시기2.4. 노론의 분열(시파와 벽파)
2.4.1. 영조 ~ 정조 시기2.4.2. 세도정치 시기
3. 파벌
3.1. 영조 이전
3.1.1. 산당 출신3.1.2. 한당 출신
3.2. 영조 이후
3.2.1. 탕평당-시파3.2.2. 청명당-벽파3.2.3. 북학파
4. 노론의 역대 영수5. 노론의 핵심 인물들6. 노론 음모론7. 같이보기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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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신환국 이후 재집권한 서인 중에서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한 강경파이다. 후에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다시 시파[4] 벽파로 갈라졌다. 역설적으로 수장을 제외한 당파원들이 젊은 사람들이다.

2. 역사

2.1. 집권 기간

2.2. 서인의 분열(노론과 소론)

2.2.1. 경신환국

숙종 시기에 있었던 잦은 환국으로 인해 서인 남인의 처지는 자주 바뀌었다. 일단 예송논쟁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났고 숙종 초까지는 조선시대에 단 한 번 있었던 남인 천하였다. 이 시기 서인과 남인은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암수를 주고 받았다. 숙종이 즉위한 1674년, 서인인 숙종의 외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홍수의 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반죄율을 적용당할뻔 했으나 흐지부지 끝났다. 1679년, 서인 세력을 모함하는 흉서가 강화도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사건 또한 해를 넘겨 흐지부지 끝을 맺었다.

흉서 사건이 끝날 즈음 숙종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들은 내치고 그 자리에 서인들을 배치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사촌이자,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김석주[6] '(탁남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남인과 친한) 왕족들과 함께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다. 고변의 내용은 별 것 아니었으나 남인들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이 일을 삼복의 변이라고 하는데 조선 4대 환국 중 첫 번째 환국인 경신환국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정권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고 다시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헌데 정권을 잡은 후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경파는 송시열, 김수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온건파는 윤증, 박세채, 남구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남인들의 처리 문제뿐만 아니라 강경파는 민생과 명분을 중시하고, 온건파는 북방 개척과 실용을 중시하는 등 관심을 가진 분야도 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론이 압도적인 우세였는데 이유인고 하니 김석주의 친구이자 서인의 거두인 김장생의 손자 훈련대장 김익훈이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거짓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는데, 당시 자신을 구원해준 정치적 구세주 김석주의 비위를 맞춰주던 송시열이 "김익훈이가 내 스승의 손자인데 내가 못 도와주고 있으니 부끄럽다."라고 김익훈에 대한 공세를 멈추라는 지시를 은유적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그의 태도에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김석주의 독주를 저지하며 강력 처벌을 요구한 박세채 등의 태도에 반하여 소론으로 갈피를 잡았고 남구만, 윤증 등도 소론을 지지하였다.

2.2.2. 회니시비(懷尼是非)

이러한 분열 경향을 정치적 분야까지 확대시킨 게 회니시비 사건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송시열의 벗 윤선거이다. 그가 1669년에 사망하자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에 쓸 묘갈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송시열에게 주면서 문제가 터졌다.

윤선거가 아직 생존 중이던 시절에 윤휴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선거가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겠다고 해서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남긴 편지글을 보니 윤휴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자 묘갈명을 성의없이 써서 내줬다. 어떻게 썼는가 하면 "박세채가 이미 잘 써줬는데 내가 또 써 줄 거나 있냐 ? 복붙." 농담이 아니라 '그의 말을 인용할 뿐, 딱히 더 써주진 않음' 이라고 했다.

윤증이 묘갈명을 받아보고는 '스승님이 무언가 잘못 알고 쓰신 것이다.'고 생각해 다시 부탁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게다가 송시열의 측근들이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비겁하게 살아 돌아왔다고 하며 윤선거를 욕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윤증은 격분하여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681년에 윤증은 신유의서 (辛酉擬書)를 통해 '송시열은 주자를 높이 받들고 평생 따랐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송시열의 학문을 통렬하게 까버리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편지는 박세채가 윤증을 말려서 송시열에게 부치진 않았으나,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였던 송순석이 몰래 필사해서 송시열에게 전해지게 된다. 송순석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를 맹비난하는 글이니 그냥 넘기기는 어려웠었던 듯. 송시열은 즉각 과거 자신의 수제자였던 윤증을 크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증도 지지않고 편지를 보내 반박하니 극도로 예절을 차리면서도 상대를 비난하는 문장으로 가득찬 편지 공방이 이어졌고, 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너님과는 절교!" 라는 편지를 서로에게 보내게 된다.

2.3. 경종 시기

숙종 말기의 조정은 노론이 완전히 장악한 시기였다. 장희빈의 죽음 이후에 남인에 대한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의 인기가 아주 바닥을 친 것이다. 노론의 영수이긴 해도 서인의 거물인 송시열, 김수항 등이 죽음을 당하고 갖은 수모를 당한 노론은 물론 소론까지도 분노에 휩싸여 있었는데, 소론의 영수 남구만 장희재 등에게 자비를 내리는 한편 정작 같은 서인이자 인현왕후의 복위를 꾀했던 소론 한중혁 일당은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 빌미가 되어 수많은 소론들이 노론으로 전향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소론의 재야 영수인 박세채마저도 "장희재를 처벌하고 남구만은 부끄러운 줄 알라!" 고 주장하면서 소론이지만 노론에게도 평가가 좋았던 박세채의 문하생들이 대거 노론으로 전향함으로써 노론이 절대 다수가 되었다.

그나마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윤지완, 윤지선 등 소론계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점차 노론계가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 도승지, 대사헌, 대사간 등 핵심 지위와 의금부, 포도청, 5군영 등의 무관직을 장악하고 연이어 대제학, 육조 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시작으로 좌우참찬, 판의금부사조차도 노론계에서 차지하더니 삼정승 중에서도 좌의정과 우의정을 노론계에서 차지하기 시작하여, 결국 영의정까지 노론계에서 차지하게 되며 집권 여당으로써 우위를 굳혀나갔고, 계속해 세자(후일의 경종)가 마음에 안들었던 숙종이 세자 지지파인 소론을 병신처분으로 개발살내면서 소론은 수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열세에 몰리게 된다. 반면에 노론은 김창집, 이이명, 권상하 등이 삼 정승을 차지했고 당시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론이 지지했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 유지를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역관광당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신임옥사 목호룡의 변으로 인해 개박살나고 말았다.

2.4. 노론의 분열(시파와 벽파)

영조는 노론이 지지한 임금이었으나 영조 자신은 탕평을 기치로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소위 완론 탕평이라고도 불리는 쌍거호대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소론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노론이 정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는 이인좌의 난 항목을 참조. 그러다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임오화변이 터지게 되면서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지는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면서 의리를 내세워 노론만이 충신이라고 주장하는 벽파와 왕의 탕평에 동의하는 시파로 분당된다.

벽파, 시파 분당 시기를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처음으로 벽파와 시파가 언급되는 건 정조가 즉위한지 좀 지나서 '의리에 매달리는 편벽한 무리인 벽파'와 '시류에 영합하는 무리인 시파'가 근래에 생겼다는 상소가 확인된다. 그런데 사실 이 벽파와 시파의 구분은 소론 대신 서명선에 의해 생기게 되었다. 서명선이 조정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이 서명선에 동의하는 세력이 시파, 그 반대 세력이 자신들을 궁벽한 처지라 칭하면서 벽파가 된 것이다.

벽파가 과거에 척신 홍봉한 등에 맞서던 청명당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영조 말엽 기준으로) 젊은 선비들이 주도층이 된 반면에 시파는 노론 외에도 소론, 남인 등도 참여한 당파였다. 이 당시에 소론, 남인은 사실상 괴멸한 당파였기 때문에 왕의 정책에 무조건 찬성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이상하게 벽파가 정조에 맞선 당파라는 얘기가 많이 퍼져 있다. 주로 이덕일이 이런 류의 책을 내면서 벽파 = 만악의 근원, 그 전에 벽파의 모태인 서인과 노론 = 만악의 근원임을 주장한다. 벽파의 전신인 청명당은 정조의 왕위 즉위를 적극적으로 도운 당파였고 훗날 벽파의 수장이 되는 김종수는 정조의 스승이자 심복이기도 했다. 정조는 척신들의 방해 공작을 저지하고 본인의 왕위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최측근 네 명을 동덕회(同德會)라 이름붙이고 매년 이를 기념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 구성원은 홍국영(척신파), 서명선(소론), 정민시(노론 시파), 그리고 김종수(노론 벽파)였다. 또 정조 본인도 학문적으론 벽파에 가까웠다. 탕평 정책 또한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만 포용하는 영조의 정책과 달리 의리를 중시하는 준론까지 파트너로 만들려고 했다. 이는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서도 드러난다.

정후겸, 홍인한이 숙청되고 경주 김씨, 풍산 홍씨가 쓸려나간 자리는 한때 청명당이라 불리며 척신 정치 청산을 외쳤던 벽파들이 차지한다. 영의정으로 권력을 잡은 소론 서명선도 자신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인정하는 쪽이 시파 거부하는 쪽이 벽파였으나 정작 그는 벽파와 행동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정조도 성향은 벽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조는 사도 세자 추숭을 꾀하면서 왕의 말에 고분고분한 예스맨 시파 세력을 육성했고 준론 탕평을 내세우며 벽파와 시파의 공존을 꾀했지만 정치적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벽파는 반역 정당으로 낙인 찍힌 소론, 남인과 한 조정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정조 말년에는 김종수 등이 채제공 같은 역적과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수 없다고 선언하는 등 막장까지 치닫게 된다.

김종수 사후에는 김종수보다도 더 강경파인 심환지가 벽파의 수장이 되었는데 그나마 사도 세자 추숭을 꾀하는 정조를 이해하는 빛이라도 내보였던 김종수와는 달리 심환지는 같은 벽파에 우호적이었던 서명선조차도 소론이라는 이유로 탄핵하는 골수 강경파라서 여러번 정조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고 거기에 남인은 수장인 채제공 사후에 이가환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성장하지 못해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 이에 매우 초조해진 정조는 죽기 전에 5.30 하교(일명 오회연교)를 비롯한 격한 하교를 내놓으며 심환지 보고 왜이리 고집불통이냐면서 꾸짖기도 했다. 결국 벽파에게 의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을 실패한 정조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궁여지책으로 시파의 김조순을 끌어들이게 되니 이것이 세도정치의 서막이다.

2.4.1. 영조 ~ 정조 시기

벽파와 시파의 근간을 보려면 영조 말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숙종 말 택군현상으로 경종을 지지한 소론 영조를 지지한 노론의 싸움은 경종의 승하와 영조의 즉위로 인해 노론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나 영조는 완론 탕평을 펼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가 되는 홍봉한[7]을 비롯한 노론계 척신 가문을 대대적으로 정사에 끌어들여서 탕평당(척신당)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후 당파성은 희미해져 사실상 노론은 정치적 의리를 내세운 당파라기보단 왕의 뜻에 충실히 영합하는 척신과 그리고 그 척신들에게 아부하는 탕평당 무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제동을 거는 무리가 있었으니 김종수, 심환지, 윤시동으로 구성된 청명당의 무리였다. 이들은 " 소론, 남인은 역당"이라는 병신처분정치적 의리를 추종하는 세력이었고, 예로부터 폐단으로 지목되던 척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었다. 따라서 홍봉한을 축출하기 위한 행보를 밟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이들은 진정한 노론 사대부임을 자처하던 김귀주[8] 경주 김씨와 손을 잡았다. 경주 김씨도 중전인 정순왕후 쪽의 척신이니까 어찌보면 자기 부정이지만, 김귀주는 자신이 反 홍봉한의 기치를 든 의리의 사대부임을 주장했고 세력이 절실했던 청명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홍봉한은 빠르게 성장하는 경주 김씨의 세력에 위기를 느끼고, 경주 김씨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의미에서 영조에게 아뢰어 경주 김씨를 중용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영조는 " 내 마누라가 어질어서, 그러면 안 되다더라."라면서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너무 많이 해서 짜증난다는 이유로(…) 파직당한다.

이에 홍봉한은 이를 영조를 옆에서 꼬드긴 경주 김씨의 소행으로 보았고, 얼마 후에 안국동에 사는 홍봉한을 빈정대며 한유 망국동 망정승 상소가 올라온다. 영조는 짐짓 홍봉한의 편을 들어 한유를 흑산도로 유배보냈다가, 얼마 후에 입장을 돌변하여 홍봉한을 죄주고 한유를 석방한다. 그런데 돌아온 한유는 신이 나서 홍봉한을 까대다가 실수로 사도세자 문제를 꺼냈고, 격노한 영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풍산 홍씨 경주 김씨는 각각 삼왕손과 정조를 등에 업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원래는 풍산 홍씨가 정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입장이었지만, 정조가 노골적으로 외가에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을 중심으로 "아무래도 세손에 줄대는것은 위험하니"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은전군, 은신군 삼왕손 쪽에 줄을 대게 되었다. 그러자 경주 김씨 측에서 맹공을 가해 "왕손들이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무엄하게 굴었다!!"고 탄핵했고, 분노한 영조는 삼왕손들을 모조리 귀양보내고 홍봉한과 홍봉한의 눈치를 보던 삼정승까지 잘라버렸다. 이에 고무된 김귀주는 홍봉한의 여러가지 비행을 담아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게 역풍이 되고 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눈치를 챈 영조는 "이것들이 내가 믿는 건 세손 중전밖에 없는데 이따위 짓을 해?"라고 양비론으로 김귀주 홍봉한 양쪽을 모두 죄주었다.

둘이 모두 나가떨어진 자리를 화완옹주의 양자, 즉 영조의 수양 손자인 정후겸과 손을 잡은 홍인한[9]이 차지하여 둘의 연립 정권이 영조 말엽의 조정을 장악한다. 홍인한은 명백히 反 정조의 입장이었는데, 그렇다고 조선 왕조의 특성상 대놓고 세손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지극히 지엽적인 의리를 들고 오면서 정조의 대리 청정을 방해하는 식으로 세손의 영향력 확대를 방해했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서명선과 연합하여 청명당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홍인한의 무리를 공격하는 소를 올렸고 이에 분노한 영조가 대리 청정을 강행함으로 정조의 대리 청정이 시작된다. 3개월 후에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 정후겸을 처형했고 화완옹주를 내쳤다. 그리고 영조의 완론 탕평책보다 강화된 준론 탕평을 시행한다.[10] 하지만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청명당의 무리는 탕평을 원하는 정조의 기대와는 반대로 "역적[11]과는 놀지 못하겠다!!"고 번번이 조정을 파토냈고, 정조의 신임을 받던 남인 채제공은 그들의 주 공격 대상이었다. 청명당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심환지는 자신들의 동지이자 입장을 같이하는 서명선조차도 소론이란 이유로 공격했고, 분노한 정조가 이조 판서 김종수를 불러 "일을 어떻게 하길래 조정이 이렇게 개판이냐?"라고 혹독하게 질책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사건 중 하나인 김하재 사건이 터진다. 김하재는 전 영의정 김양택의 아들로, 이조 참판을 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열린 제사에서 김하재는 예방승지에게 쪽지를 건냈는데, 그 쪽지가 왕을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정조는 쪽지를 보고 "이 나라가 그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가 이런 짓을 하는가?"하고 분노했고, 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도 "이런 글은 여러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니 불태우는 것이 좋다!!"고 태웠다. 잡혀온 김하재는 "역적 김일경이 죽은 해가 갑진년인데, 올해가 갑진년입니다. 저도 김일경처럼 악명을 떨치면서 죽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였고, 소원대로 김하재는 물론 그의 직계들까지 죄다 처형되고 그의 집터는 파헤쳐져서 연못이 된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의 아버지 김양택은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5대손이고 노론이였고 정조를 보호한 중신이였으며 최측근 대신이였다. 노론의 자제가 소론의 역적인 김일경을 본받아 역적으로 죽고 싶다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김일경과 같은 광산 김씨의 종씨이다.

그런데 몇년 후에 정조의 준론 탕평에 동의하는 신료들을 "시의에 영합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온다. 그러자 정조는 "헐, 이거 그 역적 김하재 놈이 했던 말인데 이게 무슨 망발이냐?"라고 꾸짖었으나, 이때를 즈음해서 구 청명당 계열은 '편벽한 무리'란 뜻의 '벽파'로, 정조 치세의 탕평당 계열은 '시의에 영합하는 비루한 무리'란 뜻인 '시파'로 부르게 된다.

정리하자면 홍봉한의 몰락 이후과 정조즉위 초에는 정조를 도운 벽파가 우세했으나, 정조의 준론 탕평책으로 다른 당파에도 손을 내밀어 조정에는 역적으로 찍힌 소론, 남인이 대거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김종수의 벽파 계열 중에서도 왕에게 충성하는 신료들과 동덕회 멤버인 공신 정민시 그리고 규장각 출신의 소장파를 합쳐 이를 시파가 되었다.

2.4.2. 세도정치 시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벽파인 김한구의 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벽파가 시파를 몰아내고 명실상부하게 집권 정당이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정조가 등용했던 남인 세력이 개박살나고 이시수, 이병모를 비롯한 소론 세력은 납작 업드려 벽파 2중대 노릇을 하니 조정은 벽파의 뜻대로 굴러갔다. 그러나 1805년 정순왕후 김씨가 죽자 초조해진 벽파의 김달순 등이 자살 골을 넣고 김치묵 등이 안동 김씨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탓에 약점을 잡힌 벽파는 시파의 대공세에 밀려 실각했고 김관주 등 핵심 인물들이 죽으면서 사라진다.

동시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같은 시파에 속해있던 소론 남인이 이미 쓸려나간 상황이었으며 살아남은 소론 대신들도 후계자 양성엔 실패, 내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신유박해에서 살아남았던 소수의 노론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었고 붕당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뭐 시파란 계파 자체가 이미 과거의 붕당에 연연하지 않는 판국이고 세도 정치 시작 전에 남인과 벽파가 사이좋게 사라진 이후부턴 붕당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또 아닌게 안동 김씨고 풍양 조씨고 일단은 서인 계열이고 그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성균관 유생들이 서인 위인들의 배묘 등을 청하는 등 지속적인 아부가 있었다.

3. 파벌

3.1. 영조 이전

3.1.1. 산당 출신

수장인 송시열- 송준길을 필두로, 김수항, 김수흥, 송규렴, 권상하, 민유중,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단하, 이숙, 이익, 이민서, 권상하, 송상기, 이만성, 권상유, 민진후, 민진원, 민진장, 민진주, 안세정, 윤비경, 정호, 이여, 이유, 김기하, 이희조 등이 속했으며 노론의 핵심 축이었다. 호서 지역을 거점으로 했다.

3.1.2. 한당 출신

주로 김석주, 정지화가 이에 속했다. 그 외에 이징명, 정재숭, 조사석도 여기에 속했다. 경기 지역을 거점으로 했다.

3.2. 영조 이후

3.2.1. 탕평당-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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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일부에 소론 남인(주로 신서파. 이칭 남인 시파.)이 합쳐진 당파이다.

탕평당은 북당이나 외척당 또는 척신당으로도 불리는데, 숙종, 영조의 외척, 주로 인경왕후의 친정으로 허주 김반의 후손들[12], 인현왕후의 친정 여흥민씨 민정중, 민유중 가문, 경종 선의왕후의 친정이지만 노론을 지지했던 어유구, 어유봉 가문[13],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서종제 가문,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김한구, 김귀주, 김관주 가문[14], 사도세자의 처가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홍봉한, 홍인한 가문이 해당된다. 이중 정성왕후의 친정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주로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김한구 가문, 혜경궁 홍씨의 친정 가문인 홍봉한, 홍인한 가문, 인현왕후의 친정 가문이 주로 입김이 강했다.

탕평당(외척당, 척신당) 같은 경우에는 혜경궁 홍씨 홍봉한 풍산 홍씨가 청명당과 대립했으며 그 세력 중 일부는 시파로 이어졌고 정순왕후 김귀주같은 경주 김씨는 청명당-벽파와 행보를 같이 했으며 후에 벽파로 분류된다.

3.2.2. 청명당-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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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당이 벽파로 계보가 이어졌으며 탕평당의 일부[15]는 벽파와 어느정도 중복된다.

청명당은 남당이나 청명파 또는 청류파로도 불리는데, 노론 내의 원칙주의자, 원리주의자 그룹으로 정조의 정통성 옹호[16], 반외척, 군신공치[17]에 대한 강조 등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사고를 가진 파벌이다. 노론 벽파에 속했던 김상로, 김양로의 사촌인 김재로와 그의 아들 김치인. 노론이면서도 사도세자 보호에 앞장선 유척기, 김종수 등이 여기에 속했다[18].

김종수와 유척기는 사도세자의 세자시강원 관원으로 세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청명당은 벽파와도 갈등하고 외척당과도 갈등하는 한편, 탕평책에도 반대하여 탕평당과도 크게 갈등, 대립하였다. 이들은 숙종 이후 거의 소외된 재야의 산림 노론 학자들하고도 줄이 닿았다. 정조가 노론을 무조건 배격할수 없었던 것도 노론내 청명당/청명파라고 부르는 파벌의 적극적인 지지도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아니 애초에 정조 본인부터가 친 벽파 성향이니, 이들을 배격하지않는게 당연했다.

기호지역의 산림과도 연계되었기에 위정척사파의 뿌리 내지는 위정척사파의 선배격인 인물들과 상당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송시열- 권상하와 권상하의 뒤를 이은 이간, 한원진 등은 호락논쟁 이후 외척이나 벽파들에게 밀려 비주류가 되고, 이후 다시 산림, 재야화되어 이들의 학통이 정조~순조대의 송능상, 김종후 등을 거쳐서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 등을 거쳐서 최익현, 김평묵으로 이어지므로 후대의 위정척사파와 간접적으로 연계된다고 볼 수도 있다.

위정척사파로 계승된 뒤에는 윤휴, 허목, 갈암 이현일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여 무산시켰고, 정도전, 목내선, 한효순 등의 복권까지도 줄기차게 반대해서 무산시켰다. 그러나 1907년에 가서 이들은 복권. 윤휴는 고종 초에 복권되었다가 이들 위정척사파의 딴지로 무산됐지만 결국 1907년에 가서 최종 복권된다.

3.2.3. 북학파

북학파는 노론 내의 최고 비주류로, 효종 이후의 서인과 서인에서 분파된 노론, 소론의 당론이지만 비현실적인 북벌론 추구를 그만두고[19] 청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것과 서자, 서얼, 중인들도 능력에 따라 등용하자는 것이 이들의 강령이다. 즉 반청을 지청, 그러니까 청나라에 수치를 당한 과거를 잊지는 않지만 청나라의 앞선 점은 배우겠다는 청나라 지향 성향으로 바꾸고 송시열의 여러 사회 개혁적 정책을 사회 전반으로 일반화해 많이 급진화시킨 것이 북학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시파도 아니고 벽파도 아니라서, 노론 내에서도 사도세자 관련 문제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파벌이다. 이념적으로는 호락논쟁에서 낙론으로서 호론(훗날의 벽파)과 키배를 벌이는 등 시파에 더 가까웠지만 일반적인 시파와 다르게 벽파처럼 벼슬을 거부했다. 물론, 다 거부한 건 아니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처럼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도 일부 있다[20].

연암 박지원이 구성한 파벌로 고종 때까지 노론의 비주류 파벌이었다. 청나라를 다녀온 수행원, 통역관, 하급 문무관료, 서자나 서얼 가계의 노론 관원들이 주로 가담했고, 박지원의 문하생들로 구성되었다. 노론이 여당이었는데도 여당내 비주류라 하여 별로 빛을 보지 못한 그룹이다.

고종(대한제국)때에 가서는 개화파로 이어져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최한기, 이동인 등을 지도자로 하였다.

4. 노론의 역대 영수

본 항목에 나온 인물들은 암묵적으로 노론의 대표자격인 인물로 꼽히기는 하나, 조선의 붕당은 근현대의 정치 정당과는 다른 개념이므로 이들이 공식적인 '당수'라고 할 수는 없다.

5. 노론의 핵심 인물들

6. 노론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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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을 필두로 하는 몇몇 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대중 매체의 영향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조선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만악의 근원이란 인식이 강하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오늘날 우리나라 권력 지형이 조선 후기 노론의 전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노론 = 영남 = 친일파 = 현재의 기득권층 설. 조선 후기 기득권 층은 영남 노론이었고, 일제 시대는 친일을, 해방 후에는 반공을 내세우며 경상도 위주의 나라를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노론의 주 근거지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와 대전(회덕과 은진), 니성(논산시 노성에 편입), 연산(역시 논산에 편입), 옥천, 보은, 영동, 괴산, 충주, 청주 등 충청도 일대이다. 노론은 소론과 함께 원류라 할 수 있는 서인이 주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바로 충청도와 경기도, 한양으로 그 기반은 당연히 기호 사림과 경화사족이다. 그래서 기호학파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 기호학파, 영남학파라는 명칭 자체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생긴 것임을 감안하면 결국 당시에는 사대문 안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정약용이 후손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한양을 벗어나지 말고, 사대문 십리 안 밖에서 버텨라"는 말을 괜히 남긴게 아니다.

그리고 상술된 경상도 = 노론 설은 노론의 지역 기반을 생각할 때 명백히 잘못된 분석이다. 노론의 주요 지역 기반은 충청도, 경기도, 한양이었다.[22] 조선 후기 이후 경상도 지역의 대다수 사대부, 양반들은 남인에 속해 있었다. 특히나 낙동강 서쪽은 북인 대북(중북), 소북( 청소북) 가문이 제법 있었다. 경상도 = 노론 설이 퍼지게 된 주 원인은 조선 말기 영남을 본관으로 하는 (新) 안동 김씨 같은 노론 가문이 세도정치로 이름을 날린 때문이나, 본관과 출신지(지역 기반, 세거지로도 부름)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안동 김씨도 이름만 같은 두개가 있고, 서로 혈연적으로 아무 연관도 없는데, 노론에 속한건 (新) 안동 김씨 즉 장동 김씨로, 오랫동안 한양에 터를 잡고 살아서 한양 양반 즉 경반으로 분류된다. 장안동에 살아서 장동 김씨라고도 불렸는데 스스로도 장동 김씨라고 칭했다.

해당 가문의 양반들은 이미 노론 세도가로서 정계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인 18세기 ~ 19세기보다 수백년 전인 15세기 ~ 16세기, 혹은 그 이전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위해 한양으로 상경한 이들로, 북촌[23] 등 한양에 주로 거주하여 스스로를 한양 출신들로 여기던 이들이었으며 흔히 경화사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이는 반남 박씨[24] 광산 김씨[25], 연안 이씨[26] 기호 지방 이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타 한양 노론 명문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개념이다.

세간에서 조선을 말아먹은 악의 축으로 찍혀 있는 서인 집권 세력 전체에 공통되는 사항이지만, 이들의 주요 활동 기간인 경종, 영조, 정조 시기를 보면 이들과 각 군주들과의 관계, 펼치거나 지지한 정책 및 발휘한 영향력이나 남긴 업적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서인과 그 후계 붕당인 노론과 벽파 등이 무조건 보수 성향인 것도 아니고[27], 남인이나 소론 계열이라고 전부 진보 성향도 아니다. 이는 실학에 대한 대중들의 환상과 이에 대한 학계의 비판과도 직결되는 부분이다. 실학자들 중에서도 정말로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박지원, 홍대용 등 몇 사람 안됐다[28]. 애초에 조선의 붕당은 정치적 성향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인맥으로 결속된 파벌에 더 가깝다[29]. 선거제도 없던 시절의 정당이니 만큼, 정치 성향에 따라 파벌이 갈린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무리수다[30]. 만약 이래도 이해가 안된다면 19세기 미국의 정치구도를 생각해보자. 19세기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 진보파와 보수파가 공존했고 서로 당의 주도권을 잡으려 싸웠다. 반면 두 당이 대립한 원인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닌 중앙 정부의 권한 증대를 옹호하냐 지방 정부의 자치를 옹호하냐와 같이 진보-보수 패러다임에서 동떨어진 의제들[31]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붕당도 개혁적이냐 보수적이냐랑 별개의 현실정치적 의제에 대한 입장에 따라 갈린 것이기에 서인-노론 계열에서 북학파처럼 많이 개혁적인 인물과 벽파처럼 꼰대라 느껴질 정도로 강경한 이들이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남인 내에서도 수구적인 이들과 개혁적인 이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와 개혁군주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벽파가 연계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열어 조선을 망쳤고, 이것이 현대 한국의 보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소리는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안동 김씨부터가 벽파가 아니다. 정순왕후 김씨가 죽은 후 병인갱화 벽파는 몰락하고 정조의 편이었던 시파 김조순이 시작한게 세도정치고[32], 벽파의 가계나 후계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몰락했다. 오히려 비주류였던 북학파- 개화파 계열의 후손들이 이승만의 측근이 되거나, 윤보선, 윤치호 가문[33], 유길준 가문으로 이어지면서, 현대 한국 보수정치세력으로 이어진다.

그나마 이 가문들이 현대 대한민국 정치계의 보수세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 보수 세력의 중진과 거물급들은 출신이 여럿으로 갈린다. 대충 따져봐도 운동권 출신에서 전향한 우파 인사들이나[34][35], 경영인[36], 법조인[37] 등으로 위 가문 중에 현대까지 살아남은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다시 얘기하지만, 노론계 기득권층은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박살났다. 애초에 조선이 망한데다 일본처럼 세습정치로 이어지는 경향도 없는 한국에서 조선 때 정치세력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다.

7. 같이보기

8. 둘러보기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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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권력자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정도전 이방원 정사공신
( 하륜, 조영무 등)
관학파, 종친
( 황희, 맹사성 등)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안평대군, 고명대신 정난공신
( 수양대군)
훈구파
( 한명회, 신숙주 등)
성종 연산군 중종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파
( 임사홍, 신수근)
반정공신
( 3훈)
사림파
( 조광조)
反김안로계
(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김안로
인종 명종 선조
대윤
( 윤임)
소윤
( 윤원형)
윤원형 vs. 이량 사림파 동인 vs. 서인 서인
( 이이, 성혼, 정철)
동인
( 류성룡, 이산해)
선조 광해군 인조
연립 ( 서인, 남인)
( 윤두수, 류성룡 등)
북인
( 이산해 등)
탁소북
( 류영경)
청소북, 대북
( 3창)
대북
( 이이첨)
반정공신
( 이귀, 김류)
공서
( 김류, 최명길 등)
낙당, 원당
( 김자점, 원두표)
효종 현종 숙종
산당
( 송시열, 송준길)
서인 vs. 남인 남인
( 허적, 윤휴)
일부 서인
( 김석주)
산당
( 송시열)
남인
( 민암, 장희재 등)
숙종 경종 영조
소론
( 남구만 등)
노론
( 노론 4대신)
소론
( 소론 5대신)
노론
( 정호, 민진원 등)
온건 소론
( 이광좌)
노론
( 김재로 등)
영조 정조 순조
완론 탕평
( 탕평당, 청명당)
청명당 vs.
홍인한 정후겸
홍인한 정후겸 외척
( 홍국영)
소론
( 서명선 등)
준론 탕평
( 벽파, 시파)
벽파
( 심환지 등)
시파
( 김조순 등)
순조 헌종 철종
안동 김씨 세도가문
(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여흥 민씨
(+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


[1] 홍봉한의 북당(탕평당)과 김귀주 등의 남당(청명당)의 갈등에도 노론이란 통일된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벽파 시파로 나뉘면서 사라지게 된다. [2] 이간(李柬, 1677~1727). 본관은 예안. [3] 벽파는 서명선 형제 이외엔 사실상 노론 출신밖에 없었으나 시파에는 소론 남인도 섞여있었다. [4] 시파에는 소론 남인도 섞여 있었다. [5] 그래도 1710년 최석정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소론이 약간 정도나마 정치적으로 우세했지만, 1710년에 최석정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노론계 대신인 이여가 영의정으로 앉으면서 점차 노론에 유리한 정국으로 흘러간다. [6] 명성왕후는 김육의 차남 김우명의 딸이고 김석주는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아들이다. [7] 영조에게는 바깥사돈이 된다. [8] 정순왕후의 오라버니 [9] 홍봉한의 동생 [10] 영조의 완론 탕평은 기본적으로 노론이 집권하면서 근왕 탕평파(척신파)로 견제한 수준이지만 정조의 준론 탕평은 노론, 소론, 남인 3당에 일정한 지분을 주는 강화된 탕평책이었다. [11] 소론, 남인 [12] 광성부원군 김만기, 서포 김만중, 광남 김익훈, 김춘택 등이 김반의 후손들이다. 사계 김장생의 후손이면서 신독재 김집의 방계후손들이 된다. [13] 어유봉은 선의왕후의 친정 삼촌이면서 어유봉의 사위가 홍상한, 즉 홍봉한, 홍인한의 사촌 형이자 혜경궁 홍씨의 5촌 당숙이다. [14] 영조의 사위인 화협옹주의 부마 김한신이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김한구와 8촌간이다. 김한신의 자녀는 이들과 10촌 이상 넘어가는 원족. [15] 정순왕후 경주 김씨 세력 [16] 시파도 정조의 정통성을 옹호했지만 벽파는 시파와 달리 정조의 정통성 옹호 및 영조와의 의리 보존의 측면에서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했다. 무슨 소리냐면, 영조에게 비참하게 역적으로 지목받아 죽은 사도세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17] 나라는 군주 혼자서가 아닌 신하와 군주가 같이 다스리는 것이라는 사상. 사실상 조선의 건국이념이다. [18] 물론, 이 문서와 노론 음모론 문서를 쭉 봤으면 알겠지만, 원래 노론은 전부 사도세자를 보호하려는 입장이긴 했다. 벽파나 그 원류인 청명당은 그 중에서도 영조에게 직접 맞서가면서까지 세자의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선 세력을 말한다. [19] 북벌론 ‘배격’이 아니다! 북학파들도 근본은 노론인 만큼 병자년의 치욕에 대해선 ‘언젠간‘ 갚아야 한다고 보았고, 그 치욕을 갚는 방법이 중국을 배움으로서 자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일 뿐이었다 [20] 박규수 우의정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이었다. [21] 사실 이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에 대한 정말 어처구니 없는 모욕이다. [22] 소론의 지역 기반도 같은 지역으로, 두 당은 같은 서인에서 분리되었고, 자기 정당의 시조를 이이, 성혼으로 삼는 것 까지도 똑같다. 애당초 학맥상으로 동인과 서인을 구분하면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 및 추종=서인, 그 외=동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이황을 종주로 삼는 남인, 조식과 서경덕 등 통일된 종주 없는 북인으로 나뉠 수 있다. [23] 이 지역은 고관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특히 조선 후기 정계를 주도하던 노론 명문가들의 가옥이 많이 위치한 지역이다. [24] 전라남도 나주시가 본관. [25] 광주광역시가 본관. [26] 황해도 연안군이 본관. 장동 김씨처럼 이 집안 인물들이 동촌에 많이 거주했다고 하여 동촌 이씨라고 불렸다. [27] 서인 세력 중에서 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던 세력이 분리되어 나와서 소론이 되었고, 남은 이들이 노론이 되었다. 소론 측에서 영조를 지지하던 이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매도한데서 노론이라는 붕당 이름이 유래했으나, 정작 노론의 중진들만 봐도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28] 심지어 박지원 홍대용부터가 명백한 노론 소속이며, 둘 다 그 중에서도 명문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박지원은 그 손자인 박규수 영의정으로 등극하여 개화파 세력의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할 정도의 정치 거물이 되기도 했던 금수저 of 금수저였다. [29] 이해가 안된다면, 현대 일본 자민당을 생각하면 쉽다. [30] 북학파나 급진개화파처럼 진짜로 정치 성향에 따라 이루어진 붕당도 있었지만, 주류 계파가 아니었거나, 출신 지역도 가문도 무의미해진 구한말 시기의 붕당이다. 고종의 즉위 이전의 붕당들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전부 진보 성향 인사와 보수 성향 인사들이 함께 부대끼고 있는 포괄정당이었다. [31] 물론 21세기 미국 기준으로는 전자가 진보, 후자가 보수적인 의제인 경우가 많지만 당대에는 그거랑은 별개였다. [32] 그나마도 김조순 정조의 정책을 이어받고자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민생 개선에 나서는 등, 알려진 것보다 훨씬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33] 이쪽은 노론이라기보단 소론에 가깝다. [34] 김문수, 하태경 등이 그 예. [35] 모든 운동권은 아닌게, 대다수는 노무현, 문재인 등의 경우처럼 민주당계 정당으로 가거나, 노회찬, 심상정의 경우처럼 진보정당으로 갔다. [36] 이명박, 김무성, 안철수가 대표적이다. 그나마도 이명박은 자수성가한 경영인 출신이고, 김무성은 부농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며, 안철수는 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였던 부유한 의사 집안 출신이었다. [37] 나경원, 홍준표, 윤석열이 대표적. 이 경우도 홍준표는 자수성가했으나 나경원은 흥신학원 이사장의 딸로 금수저고, 윤석열도 아버지가 저명한 경제학자인 금수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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