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老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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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 | ||||||
숙종 (1674 ~ 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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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 | 한당 | ||||||
송시열 | 김수흥 | 민정중 | 김수항 | 김육 | |||
민유중 | 김만기 | 이세백 | 김만중 | 김우명 | |||
권상하 | 이여 | 이이명 | 민진원 | 김석주 | |||
경종 (1720 ~ 1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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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 민진원 | 이건명 | 이이명 | 정호 | |||
조태채 | 김용택 | 윤지술 | |||||
영조 (1724 ~ 1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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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론 | 완론 | ||||||
낙당 | 화당 | 탕평론 | |||||
정호 | 민진원 | 이병상 | 정언섭 | 홍치중 | |||
이관명 | 조관빈 | 이의현 | 원경하 | 홍계희 | |||
반탕평론 | 의리탕평론 | 조제탕평론 | |||||
남당 | 동당 | 중당 | 북당 | ||||
김상로 | 이천보 | 유척기 | 정휘량 | 홍봉한 | |||
홍계희 | 원경하 | 신만 | 홍인한 | ||||
공홍론 남당, 청명당 |
양척론 동당, 중당 |
부홍론 북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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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로 | 김귀주 | 유척기 | 정휘량 | 홍봉한 | |||
김치인 | 김종수 | 송명흠 | 김상복 | 홍인한 | |||
정조 -
순조 초기 (1776 ~ 1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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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 (청명당) |
북학파 |
시파 ( 탕평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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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 심환지 | 홍대용 | 서매수 | 한용구 | |||
김귀주 | 김관주 | 박지원 | 남공철 | 정민시 | |||
서용보 | 김달순 | 김조순 | 이조원 | ||||
순조 초기 -
철종 초 (1807 ~ 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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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척신파 (청명당) |
척신파 ( 안동 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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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경 | 김정희 | 김조순 | 김유근 | 김좌근 | |||
조인영 | 권돈인 | 김홍근 | 김흥근 | 정원용 | |||
이지연 | 김로 | 김병국 | 김병학 | 홍직필 | |||
세도 정치 | |||||||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친청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colbgcolor=white><colcolor=#000000> 강문팔학사 중 1인 문순공 한원진 韓元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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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 334호 | |
출생 | 1682년 ( 숙종 8년) |
사망 | 1751년 (향년 78세) |
본관 | 청주 한씨 [1] |
자 | 덕소(德昭) |
호 | 남당(南塘) |
부모 |
부친 - 한유기(韓有箕) 모친 - 함양 박씨 박숭부(朴崇阜)의 딸 |
시호 | 문순(文純) |
종교 | 유교 ( 성리학) |
붕당 | 붕당 노론 / 학파 호론 |
자녀 | 장남 - 한후천[2], 차남 - 한후민[3], 삼남 - 한후현[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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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에, 『남당집』, 『주자언론동이고』 등을 저술하였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2. 생애
한유기(韓有箕)의 차남이자,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이고 일찍이 서인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3. 호락논쟁
호락논쟁에서 한원진은 인물성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의 동(同)을 주장하였고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그러나 권상하는 더 이상의 논변은 무익하다고 생각, 한원진에게 중지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는 두 차례의 왕복 논변을 끝으로 직접적인 논변은 없었지만 서로의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4. 저서
저서로는 『남당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임시취고』·『경의기문록』·『퇴계집소석』·『의례경전통해보』·『장자변해』·『선학통변』·『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춘추별전』·『근사록주설』·『이락연원록』·『가례소의의록』·『가례원류의록』·『고사편람』 등이 있다. 한원진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는 송시열과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5. 초상화
한원진 초상 초초본[5] | 한원진초상초본 재본본 | 한원진초상초본 당옹본 |
한원진반신상 | 한원진전신좌상 | 한원진 초상[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