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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 |
출생 | 1360년( 공민왕 9) |
사망 |
1423년
4월 26일[1] (향년 62 ~ 63세) (음력 세종 5년 3월 7일)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두산백과 한상경묘 |
재임기간 | 제16대 영의정부사 |
1418년
7월 17일[2] ~
1418년
10월 11일[3] (음력 태종 18년 6월 5일 ~ 세종 즉위년 9월 3일) |
|
봉호 |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
시호 | 문간(文簡) |
본관 | 청주 한씨 |
자 | 숙경(叔敬) |
호 | 신재(信齋) |
부모 |
부친 - 한수(韓脩, 1333 ~ 1384) 모친 - 안동 권씨 권적(權適)의 딸 |
부인 | 해주 오씨 오준량(吳俊良)의 딸 |
자녀 | 장남 - 한혜(韓惠, 1403 ~ 1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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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정승이다.2. 생애
1382년( 우왕 8) 문과에서 3등으로 급제했다. 1392년( 태조 1) 조선이 건국될 때는 밀직사 우부대언으로서 정비 안씨가 내린 공양왕 폐위 교서를 공양왕 앞에서 낭독했다. 이후 보새를 태조에게 바치는 과정에 참여했다고 하여, 개국공신 추가 책봉 때 3등 공신이 되었다.이후 중추원 도승지, 공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416년( 태종 16) 우의정이 되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태종이 세자를 폐하고 원손[4]을 세손으로 세우려 할 때 적극 찬동하였다.
1418년(태종 18) 영의정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세종이 즉위하자 심온이 영의정이 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특별한 직임을 맡지 않고 공신 예우를 받으며 살다가 1423년(세종 5)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