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2:31:58

김우명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태조 정종 태종
안천부원군 한경 상산부원군 강윤성 김천서 여흥부원군 민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청천부원군 심온 화산부원군 권전 여량부원군 송현수 파평부원군 윤번
예종 예종, 성종 성종
청천부원군 한백륜 상당부원군 한명회 함안부원군 윤기견 영원부원군 윤호
연산군 중종
거창부원군 신승선 익창부원군 신수근 파원부원군 윤여필 파산부원군 윤지임
인종 명종 선조
금성부원군 박용 청릉부원군 심강 반성부원군 박응순 연흥부원군 김제남
선조 광해군 인조
해령부원군 김희철 문양부원군 류자신 서평부원군 한준겸 한원부원군 조창원
효종 현종 숙종
신풍부원군 장유 청풍부원군 김우명 광성부원군 김만기 여양부원군 민유중
숙종 경종 영조
경은부원군 김주신 청은부원군 심호 함원부원군 어유구 달성부원군 서종제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오흥부원군 김한구 청원부원군 김시묵 영안부원군 김조순 영흥부원군 김조근
헌종 철종 고종 순종
익풍부원군 홍재룡 영은부원군 김문근 여성부원군 민치록 여은부원군 민태호
순종
해풍부원군 윤택영
추존
{{{#!wiki style="margin: -16px -11px" 목조(이안사) 익조(이행리) 도조(이춘)
이숙(이공숙) 최기열 안변부원군 박광
환조(이자춘) 덕종(의경세자) 원종(정원군)
영흥백 최한기 서원부원군 한확 능안부원군 구사맹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
풍릉부원군 조문명 영풍부원군 홍봉한 풍은부원군 조만영 }}}
조선 왕비 · 조선 추존 왕비 · 대한제국의 국구 }}}}}}}}}
김우명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서인
西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선조
(1575 ~ 1608)
박순 윤두수 고경명 성혼 심의겸
이이 정철 황윤길 조헌 송상현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오윤겸 신흠 심지원 이경석 정태화
청서 공서
노서 소서
김장생 김상헌 김류 신경진 이귀
김집 이식 김자점 이시백 최명길
효종 - 현종
(1649 ~ 1674)
청서 소서 노서
산당 한당 낙당 원당
송준길 송시열 김육 김자점 원두표
숙종
(1674 ~ 1720)
강경파 온건파
송시열 민유중 김수항 윤증 남구만
김만기 김석주 김만중 박세채 최석정
노론 소론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노론
老論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서인
숙종
(1674 ~ 1720)
산당 한당
송시열 김수흥 민정중 김수항 김육
민유중 김만기 이세백 김만중 김우명
권상하 이여 이이명 민진원 김석주
경종
(1720 ~ 1724)
김창집 민진원 이건명 이이명 정호
조태채 김용택 윤지술
영조
(1724 ~ 1776)
청명론 (호론) 탕평론 (낙론)
정호 민진원 김재로 정언섭 홍치중
이의현 조도빈 이관명 원경하 홍계희
노론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이의현 유척기
정조 - 순조
(1776 ~ 1834)
벽파 (청명당) 시파 ( 탕평당) 실학파
( 중상학파)
김종수 심환지 서매수 한용구 홍대용
김귀주 김관주 남공철 정민시 박지원
서용보 김달순 김조순 이조원 박규수
세도 정치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조선 현종의 장인 | 명성왕후의 부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충익공(忠翼公)
김우명
金佑明
<nopad>파일:김우명 초상화.jpg
출생 1619년 3월 24일
(음력 광해군 11년 2월 9일)
사망 1675년 8월 9일 (향년 56세)
(음력 숙종 1년 6월 18일)
묘소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봉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시호 충익(忠翼)
본관 청풍 김씨
이정(以定)
붕당 노론 ( 한당)
가족 아버지 김육 / 어머니 파평 윤씨
아내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자녀 9남 4녀[1]

1. 개요2. 생애
2.1. 산당과의 갈등2.2. 숙종 즉위 후
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의 관료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현종 말기부터 숙종 초기까지 한당을 이끈 관리이다.

2. 생애

1619년 경기 가평군 잠곡 출생으로 아버지는 김육이다.

인조 20년인 1642년, 진사가 되었으며 7년 뒤엔 강릉 참봉과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로 관직을 시작했다. 1651년에 딸인 명성왕후가 당시 세자였던 현종의 빈으로 간택이 됐고, 그 뒤 부솔, 공조좌랑를 지내다 우부승지, 가주서로 승진했다. 평시서령(平市署令), 공조좌랑, 공조정랑, 장악원 첨정(僉正), 부평부사(富平府使),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예빈시정(禮賓寺正)과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김육이 죽자 삼년상을 마친 뒤, 한당의 영수가 되었다.

2.1. 산당과의 갈등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책봉과 동시에 당연 겸직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제수되었다. 의원(尙衣院), 사도시(司導寺), 장악원(掌樂院), 빙고(氷庫)의 도제조직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도 겸임했다.

산당 한당의 관계만큼 영수였던 송시열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674년에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2]가 부상하고 남인 서인의 대립 때 허적의 의견에 동조해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을 불러왔다.

사실,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은 자신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대동법을 반대해 김육과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김육의 장례식 때 국왕만 쓸 수 있는 수도(隧道) 사용에 대해 지적하자, 민유중이 탄핵을 했다. 이 사건들을 거치며 김우명의 반송시열, 반산림 이념은 강해졌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다시 제수됐고, 예송논쟁 남인 측을 지지하며 탁남 허적과 협력하여 송시열과 산당을 공격했다.[3]

2.2. 숙종 즉위 후

숙종 즉위 후, 숙종은 아버지 현종과 비슷한 산당에 대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어 외척이자 외조부인 김우명을 포함한 청풍 김씨는 신뢰를 받았다.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른바 삼복)은 그와 그의 가문만큼이나 신뢰를 받았으나, 그의 딸이자 대비인 명성왕후는 역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아버지인 그에게[4] 부탁을 한다. 그해 2월 삼복 중 복창군과 복평군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으나, 관련자들이 모두 부인해 어영부영 넘어갔다. 이를 홍수의 변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허적 윤휴와 갈등이 생긴다.

결국 김우명은 종친들을 무고한 사람이 되어 남인으로부터 지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모든 관직을 사임한 뒤 홧김에 술만 마시다 2개월 뒤 사망했다. 무덤은 당시 춘성군, 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산25-1에 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 충익이 추서되었다. 숙종이 내린 시호 증시 교지는 후일 청풍부원군김우명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와 김우명영정과 함께 그의 12세손 김성구가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서는 명성왕후 외에도 정조 효의왕후가 또 한번 배출되었는데, 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은 그의 아들 김석연의 4대손이었다. 그의 또다른 후손들 중 일부는 몰락하여 강원도 춘성에 정착했는데 후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3. 가족 관계


* 정부인 :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 송국태(宋國澤)의 딸
[1] 적자녀 4남 2녀+서자녀 5남 2녀 [2] 아버지가 실성했을 때 그 아들이 상주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지금와선 예송논쟁과 비슷하게 보여 굉장히 쓸데없게 보이지만, 그땐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었기에 유자들은 이런 것에 목숨을 걸었다. [3] 여기선 숨겨진 사정이 있다. 송시열은 한당 계열이면서 능력 있고, 왕의 신임도 받는 그의 형 김좌명과 손잡으려 했으나, 때맞춰 그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했다. [4] 그 역시 송시열을 밀어내는데 앞장섰지만, 종친들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5] 허견의 처 [6] 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