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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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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 제3대 궁주
조선 인조의 손자
복녕군 | 福寧君
봉호 복녕군(福寧君)[1]
시호 효헌(孝獻)
본관 전주(全州)
이름 [2](栯)
생부 인평대군
생모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부인 군부인 양천 허씨
(郡夫人 陽川 許氏, ? ~ 1688)
자녀 2남 5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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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양원군 이환(陽原君 李煥, 1658 ~ 1724)
차남 - 의원군 이혁(義原君 李爀, 1661 ~ 1722)[3]
장녀 - 김석달(金錫達)[4]의 처
차녀 - 심종한(沈宗漢)의 처
3녀 - 최현제(崔賢齊)의 처
4녀 - 심일회(沈一會)의 처
5녀 - 최수온(崔守溫)의 처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생몰
기간
음력 1639년 2월 9일 ~ 1670년 10월 15일
양력 1639년 3월 13일 ~ 1670년 11월 27일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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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왕족. 인평대군의 장남으로, 대궁의 3대 종주이다.

2. 생애

1651년( 효종 2년) 8월 5일에[5] 복녕군으로 봉해졌다. # 3년 뒤에 효종이 종친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를 때, 회원군 이윤[6]과 함께 합격해서 가자[7]받았다. # 1662년( 현종 3년)에는 소덕대부로 가자받았고 #, 현종과 명성왕후 온양행궁에 갈 때 수행하기도 했다. # 1670년( 현종 11년)에 사망했다.

3. 사후

5촌 당조카 숙종 재위 시절에 복녕군의 동생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삼복(三福)'이라 불렸는데[8] 이들은 이후 정계에 몰아치는 폭풍 속에 휘말렸고, 복평군을 제외한 두 명은 사형당했다. 자세한 것은 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고종 즉위 후인 1864년(고종 1년)에 시호 '효헌(孝獻)'을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고종은 실제 혈통 상 복녕군의 7대손이다.

묘는 처음에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후손들이 인평대군 묘가 있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로 이장했다.

4. 가족과 후손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양원군陽原君 이환李煥[9][10]에게는 아들 여흥군 이해, 손자 이정석이 있었지만 여흥군이 죄를 짓고 주살당하는 바람에 대가 끊겼고, 수백 년 뒤인 1864년(고종 1년)에 이병연이 이정석의 양자로 처리되었다.

차남 의원군 인평대군 봉사손 지위를 물려받았다. 의원군의 현손 이채중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양자로 입적해 남연군으로 봉해졌다. 남연군의 4남이 흥선대원군, 그 막내아들이 고종이다. 즉, 조선 최후의 왕통은 복녕군의 후손으로 이어진다.

1녀는 명성왕후의 남동생인 김석달과 혼인했는데, 자녀가 없어 김도협을 양자로 들였다.[11][12] 김도협의 딸은 박문수의 첫째 부인이다.

《숙종실록》 1712년 7월 8일 자 기사를 보면 류혁연의 외손이 복녕군의 사위라고 했다.

[1] 봉호는 어머니의 본관지인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유래했다. [2] 은 '산앵두 ', '나무이름 '의 두 가지 음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법원이 지정한 인명용 한자에서는 후자의 독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실은 조선시대와 전혀 무관하지만, 당시에 복녕군의 이름을 어떻게 읽었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사례를 과거로 소급 적용한다. [3] 고종의 6대조. [4]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남동생. [5] 음력 6월 20일. [6] 선조의 막내아들 영성군의 아들. 인조 사촌이다. [7] 加資.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 또는 그 품계. [8] 장남 복녕군은 이미 현종 시절인 1670년 32세로 단명했다. [9] 1658~1724(효종 9년~경종 4년). 양원군이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인 경완군 이석린의 양자로 출계했다는 가짜 뉴스가 위키백과 해당 문서에 수년간 존재했었다. 이석린의 대를 이은 자는 양원군이 아니고, 1872년(고종 9년) 12월에 학생 이의저( 성종의 14남 영산군의 7대손)를 임녕군으로 봉하면서 이석린의 양자로 지명하였다. [10] 소현세자 후손들과 동생 삼복에 밀려 존재감이 없지만 사실 삼복의 변 직후 복녕군 일가는 중요한 왕실의 자손이었다. 특히 숙종이 삼복의 난 3년 뒤인 1683년(재위 9년째)) 천연두에 걸려 생사가 위험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 경종(1688년생)이 태어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삼복의 난에 화를 입지 않은 복녕군 일가가 승계 순위가 높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1] 친부는 명성왕후의 오빠인 김석연이다. [12] 이렇게되면 복녕군과 명성왕후는 사촌형수인 동시에 사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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