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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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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충익공(忠翼公) 원두표 元斗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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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3년( 선조 26) |
사망 | 1664년( 현종 5) |
봉호 |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
시호 | 충익(忠翼) |
본관 | 원주 원씨 (시중공파) |
자 | 자건(子建) |
호 | 탄수(灘叟), 탄옹(灘翁) |
붕당 | 서인 ( 원당) |
부모 |
부친 - 원유남(元裕男, 1561 ~ 1631) 모친 - 한극심(韓克諶)의 딸 청주 한씨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장남 |
부인 | 최동식(崔東式)의 딸 삭녕 최씨 |
자녀 | 7남 1녀 |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로 인조조에 낙당, 한당, 산당과 함께 서인 4당의 한 축을 담당했던 원당의 영수였다.임진왜란 때 김화현 전투에서 순절한 원호의 손자이다.
2. 생애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던 집안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 원유남(元裕男)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그는 인조반정에 참여했고, 공을 인정 받아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평군에 책봉되었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전주 부윤이 된 뒤, 나주 목사와 전라도 관찰사로 계속해서 승진했다. 병자호란 때는 어영부사로써 남한산성 방어의 담당자이기도 했다. 6년 뒤엔 형조판서로 승진한 뒤 강화부 유수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공신인 만큼 공서(功西)의 일원으로서 청음 김상헌- 김장생의 청서와 다투다 김자점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 분당해서 각각 김자점은 낙당(洛黨)의 영수, 원두표는 원당의 영수가 되었다.[3]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인조가 죽은 직후 상소를 올려 권간의 죄를 논하는데, 사관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김자점을 지목하는 것이며, 나중에 김자점이 역모를 꾸미다 죽은 것도 실제로는 원두표가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4] 이 시기에 임경업의 국문을 주창하기도 했다.
1649년엔 호조판서로 있다 파직당하고 2년 뒤 좌참찬과 좌찬성으로 다시 복귀하고 3년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김육의 대동법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김육이 역시나 밀었던 화폐(특히 동전) 사용에는 적극 찬성했다. 김자점이 죽고, 훨씬 그전에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낙향을 택해서 이시백과 함께 구신으로서 요직을 맡았다. 우의정과 좌의정에도 올랐다. 한편, 현종 즉위년에 터진 1차 예송논쟁 때 판중추부사로써 대신 중 한 명의 자격으로 허목의 입장을 지지했다.
효종 승하 당시에 내의원 최고책임자인 도제조였기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이 그 동안의 공이 크다고 해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으며 계속 도제조를 겸하였다.[5] 1664년(현종 5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가[6] 얼마 못가 사망하였고[7] 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원두표의 봉록을 3년까지 그대로 지급하기로 명하는 등 예우를 후하게 해줬다.[8]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과 서인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 모두 전반적으로 평이 좋지 못한 편이다. 현종실록에서는 위에 링크된 졸기에서도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없고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많고 거칠고 등의 표현이 있는 게 결정적이지만, 그 외에도 호남의 세수 부담을 줄이자는 의견에 반대해서 무산시킨 것에 대한 일에서도 임금에게 아부나 하고 백성은 돌볼 줄 모르는 불인(不仁)한 자라는 평을 하기도 하고[9], 엉망인 인재가 아첨한다고 해서 왕에게 추천한다고 해서 사욕을 채우고 하늘을 속인다라는 평을 듣질 않나[10], 이시방[11]의 졸기에서 이시방이 그래도 원두표처럼 범람하고 교활한 수단은 안써서 칭찬받았다라는 비교 기사로도 까인다.[12] 이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뒤의 현종개수실록에서는 위의 기사들에서 까이는 부분이 삭제되는 등 그나마 덜 까이는 편이지만, 졸기에서는 역시나 성격이 거칠고 오만하며, 정승으로의 업적은 없으나 그래도 집에서는 괜찮았다...는 평으로 무마하고 있다.[13]
2.1. 효종과 원두표
병조판서 재임 때부터 이완, 유혁연과 함께 효종의 국방력 강화 정책에 크게 힘쓴 인물 중 한 명이다. 1654년 그의 건의 덕에 영장(營將) 제도가 부활되었는데, 각 도에 위치한 지방군대 담당인 진영(鎭營)의 장을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 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써 전국 8도에 46인+강화도에 5인, 합쳐서 총 51명이었으며 지방의 군비 확장 사업을 담당했다. 효종이 능 참배와 함께 열무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상께서 모든 유생들이 항상 답답하여 정사를 논할 사람이 없어 하시더니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중 오직 공만이 큰일을 책임질 만하다 하시고 마침내 군사의 일을 공에게 맡기고 도성의 보루마저 겸하여 관장토록 하시고는 때때로 혼자서 밀실에 불러 들여서 더러는 술을 권하시며 후원에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시며 사관에게 명하사 이를 기록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표범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패도를 하사하시니…”
원두표의 신도비문
원두표의 신도비문
3. 가계
- 5대조 원중륙(元仲稑)
4. 여담
- 실록에서 검색해보면 특이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1661년(현종 2년)에 현종이 아버지의 무덤인 영릉을 참배한 뒤 돌아오면서 돌곶(石串) 부근에서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게 됐는데, 갑작스런 명에 신하들이 다들 반대했으나 현종은 활쏘기를 강행시켰다. 그런데 이 화살 중 하나가 원두표의 옷에 맞아 팔에 상처를 입게 됐고, 결국 활쏘기는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16]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원두표에 대한 전설 두 개가 실려있다. #
- 인조반정 때의 야사가 맹꽁이 서당에 소개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오리정승 이원익을 찾아가 반정 사실을 알려야 해서 원두표가 찾아간다. 그러나 노정승을 역적으로 만드는지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날 밤 한방에서 자게 되는데 자기전 잠버릇이 고약하고 잠꼬대가 심함을 알리고 밤이 깊자 오리 정승의 몸에 발을 걸치고 정승이 잠들지 않은걸 알고 잠꼬대랍시고 반정 사실을 흘린다. 다음날 오리 정승은 원두표가 소생의 잠꼬대로 불편치 않았는지를 묻자 다른데 가서 그런 소리 말라고 하면서 찬동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비밀이 슬금슬금 샜고 결국 망우리 고개에서 잡혀 혹독한 국문을 받지만 동지들을 불지 않았고 결국 사형이 집행되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것인지 군관이 마지막 소원을 묻고 원두표는 내 손으로 술잔을 들고 마시고 싶다고 간청해 포박을 풀고 술을 마시다가 불시에 군졸들을 밀치고 강으로 뛰어들어 상류로 10리를 헤엄쳐 지금의 압구정에 이르러 어느 정자 밑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그 정자에 반정 동지들이 모여 그를 애도하는걸 듣고 동지들과 다시 합류한다.
[1]
장남은 원몽린(元夢鱗)으로,
효종의 6녀인
숙경공주의 부마가 되면서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
[2]
이관명(李觀命),
이건명의 모친.
[3]
이로 인해서 김자점이 아들인 김정, 김식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할 때 원두표와
산당을 죽이려 했다고 실토했다.
[4]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6월 24일 을묘 5번째기사
[5]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 5월 17일 정축 3번째기사
[6]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5월 1일 임술 3번째기사
[7]
현종실록 8권, 현종 5년 6월 24일 을묘 5번째기사
[8]
현종실록 9권, 현종 5년 10월 10일 무진 3번째기사
[9]
현종실록 6권, 현종 4년 2월 12일 신해 4번째기사
[10]
현종실록 6권, 현종 4년 1월 27일 병신 1번째기사
[11]
이귀의 아들이자
이시백의 동생이다.
[12]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1월 16일 임신 2번째기사
[13]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6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
[14]
증손녀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다.
[15]
숙종 말기에서 경종 초기까지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노른 4대신의 1인인 그 사람 맞다.
[16]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8월 28일 갑술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