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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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
화완옹주 | 和緩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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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 및 정치달 묘 전경[1] | |||
출생 | 1738년 3월 9일 | ||
조선
한성부 궁중 내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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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8년 5월 (향년 71세) | ||
조선
한성부 중부 경행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향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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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정치달 · 화완옹주 묘 | ||
재위기간 | 조선 화완옹주 | ||
1743년 3월 13일 ~ 177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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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용완(蓉婉) | ||
부모 |
부왕
영조 모친 소유영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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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2남 12녀 중 9녀 모친 기준 1남 6녀 중 6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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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일성위
정치달 (日城尉 鄭致達, 1732 ~ 1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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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봉호 | 화완옹주(和緩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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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서녀. 사도세자의 여동생으로 화평옹주가 죽고,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이었다. 정조, 순조 대부터는 화완옹주가 아닌 '정치달의 처'라는 의미에서 '정처(鄭妻)'로 불렸다.2. 생애
2.1. 아버지의 사랑받는 딸
1749년(영조 25) 화완옹주는 12세의 나이로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을 치렀다. 지난 해에 화평옹주가 요절한 뒤였으므로 당시의 화완옹주는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화완옹주보다 먼저 태어난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모두 세상을 떠났고, 영조의 편집증적인 증세와 고질병과 같은 편애로 화협옹주는 꺼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때마침 영조의 곁에 남아있었던 옹주가 화완옹주였던 것.혜경궁 홍씨도 《 한중록》에서 영조가 화평옹주의 상사로 슬픔이 지나치던 중, 마음 붙일 데 없다가 자연히 화완옹주에게 정이 옮겨졌다고 썼다. 더군다나 화완옹주는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애교가 있어서 영조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런데 화평옹주가 편애받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동생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중재하려고 했다면,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려고 들지 않았다. 그나마 간간이 남편 정치달이 화완옹주에게 조언하여 사도세자에게도 이득이 되도록 행동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정치달의 가문에서도 다음 보위에 오를 세자한테 잘 보여야 할 테니...
2.2. 과부가 되다
1756년(영조 32) 화완옹주는 딸을 낳았다. 이때 영조는 옹주의 해산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갔는데, 이듬해 1월에 화완옹주의 딸은 생후 5개월 만에 요절하고, 다음 달인 2월 15일에는 남편 정치달이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 날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도 사망했는데, 영조는 무려 국모인 본처의 죽음을 팽개치고 딸을 위로하겠다며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런 일화를 보면 영조의 그 유별난 딸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반대로 얼마나 정성왕후가 홀대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국모의 사망보다 살아있는 서녀의 슬픔을 더 중시하는 모양에 대간은 물론 각 대신들도 이건 아니다를 외쳤고 당시 반응을 보면 옷자락 부여잡고 늘어지는 수준으로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꿋꿋이 무시하고 행차를 강행했다.또한 영조는 관례를 깨고 남편과 어린 딸을 다 잃고 혼자 남은 화완옹주를 궁궐에서 살게 했는데 이는 대단한 특혜였다. 본래 왕세자가 아닌 이상은 중전이 낳은 적자인 대군도 혼인 이후 모두 궁 밖에 나가 살아야 했다. 그런데 화완옹주는 영조에게 공주가 없긴 했지만 후궁이 낳은 딸임에도 불구하고 궁 안에서 상당히 권세를 누리며 살았다.
2.3. 조카에게 집착하다
화완옹주는 오빠 사도세자의 아들인 조카 정조에게도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한다. 한중록을 보면 친모인 혜경궁 홍씨보다 더 세세하게 신경쓰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조카며느리인 세손빈( 효의왕후)에게도 자신이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면서 심하게 구박했다고. 이런 이유 때문에 효의왕후는 세손빈 시절에는 정조와 사이가 영 좋지 않았고, 부부의 불화는 정조 즉위 전후까지 이어지다 점차적으로 관계가 회복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화완옹주가 정조의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온갖 사람들과 심지어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다고 묘사하는데, 이런 고모에게 정조가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조카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은 당연히 남편과 사별한 혜경궁 홍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한중록을 보면 정조가 어릴 때 화완옹주가 세손을 끼고 돌면서 세손빈을 질투해 부부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내용까지 있다. 혜경궁 말로는 화완옹주가 세손이 좋아하는 책까지 질투할 정도로 조카에게 집착했고 세손빈하고는 잘 지내는 꼴을 못 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770년부터는 세손과 세손빈 사이가 말도 못하게 흉흉했고, 세손이 세손빈은 싫어해도 장인과 처남은 좋아하니까 세손의 처가까지 흉 봤다고 한다. 세손이 좋아하고 따르던 장인 김시묵이 죽고 슬퍼하는데 화완옹주는 세손이 아비 잃은 세손빈을 불쌍하게 생각해 잘 대해줄까봐 '장인 죽은 정도가 뭐 큰 일이냐'는 선 넘은 말까지 해대서 노한 혜경궁이 야단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은 혜경궁이 골 때리는 시누이 화완을 싫어해서 과장했을 수도 있지만, 전부 꾸며냈다고 하기엔 내용이 좀 심상찮은 게 사실이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사후 아직 어린 세손인 정조를 옆에 끼고 살면서 음식부터 입고 신고 노는 것까지 죄다 챙겼고, 정조가 고모랑 겸상까지 했다고 한다. 많이 알려지다시피 조선시대에는 독상이 보통이고 겸상을 하지 않았는데 엄연히 국본이 될 윗사람인 어린 조카와 겸상하며 밥도 같이 먹을 정도로 화완옹주가 조카에게 집착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나마 어머니 선희궁 이씨가 있을 땐 나았는데 선희궁이 간 뒤에는 거리낄 게 없어졌는지 더 끼고 살았고, 혹시나 화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그녀의 고자질로 영조한테까지 내리갈굼 당할까봐 친모인 혜경궁도 몸 사리고 나서질 못했다고 한다. 이런 집착증은 아버지 영조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서, 아버지로부터 편집증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청소년기 정조가 송사 편집한다고 초고를 쓰는 데 몰두하니 송사도 시샘하고[2] 세손이 궁녀 좀 맘에 들어한다 싶으면 꼭 껴서 훼방 놓고 효의왕후와도 이간질 하느라 화완은 사서 바쁘게 살았다. 한중록에서 혜경궁은 이 시누이를 되게 싫어해도 자기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를 언급할 때는 화평옹주가 중간에 껴서 고생했다고 언급하거나 화협옹주, 화순옹주 등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고
2.4. 유배
즉위 과정에서 정조와 척을 진 것은 사실이기에 정조 즉위 직후 화완옹주 역시 양자 정후겸, 비슷한 혐의를 받은 홍인한 등과 함께 죄인으로 몰려 탄핵당했다. 실제로 본인도 " 아바마마가 저렇게 정정한데 대리청정이 웬 말이냐?!"며 대리청정을 반대한 전력이 있으니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논의 끝에 옹주의 신분을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뭍으로 옮겨져 파주로 이배되었다. 물론 이 때도 섬에서 뭍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신하들의 수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귀양지에서 양자인 정후겸은 사약을 받았지만 화완옹주는 여러 차례 대신들의 처벌 요구에도 정조가 이를 듣지 않았기에 계속 유형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정조가 개인적으로 화완옹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지금에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배 중에도 여러가지 배려를 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정조 10년에는 화완옹주가 유배된 곳에 내시를 보내서 간병하도록 했다가 신하들에게 한 소리 들은 적도 있었다. #
그리고 정조 14년에는 아래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파주 목사가 장용영 상번군(上番軍)의 일로 상경(上京)하여 아직 임소(任所)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사목리(沙鶩里)의 죄인이 있는 처소를 수직(守直)하는 장교(將校) 장점동(張占同)과 김운봉(金云奉) 등이 와서 고하기를, ‘이달 1일 술시(戌時)쯤에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인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람이 교자(轎子)를 가지고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이르러서는 교자를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막고 들이지 않자 별제가 왕명을 받들었다고 하면서 장졸(將卒)을 꾸짖고 곧바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죄인을 교자에 태우고 즉시 상경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고양 군수 김사의의 첩정(牒呈)에는, ‘내수사 별제가 오늘 교자 하나를 거느리고 돌아가는 길에 본군(本郡)에 이르러서 고마(雇馬) 2필(疋)을 책립(責立)하였는데 그 행색을 살피니 매우 수상쩍었습니다. 그래서 고마는 내주지 않고 출발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 일성록 정조 14년 9월 2일
― 일성록 정조 14년 9월 2일
파주의 화완옹주가 유배된 곳에 내수사 별제가 가마를 들고 찾아와서 왕명이라며 화완옹주를 태우고 한양으로 가다가, 고양에서 말을 차출하려던 중 수상쩍게 생각한 고양 군수에 의해 길이 막히고 군수가 조정에 고하는 일이 발생한다. 내수사는 왕이 신하들의 통제를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이고, 내수사 별제는 내시가 맡았다. 즉 정조가 신하들 몰래 내시를 시켜서 화완옹주를 궁으로 부르려다가 발각된 것이다.[3][4]
이에 대해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한 파주 목사를 처벌하라는 장계가 올라왔지만, 정조는 파주 목사를 두둔하면서 오히려 왕명을 받들어 움직이는 내수사 별제를 감히 가로막은 고양 군수를 처벌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신하들이 항의하였으나, 정조는 신하들을 전부 무시하고 모르쇠로 일관한다. #
물론 신하들도 왕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으니, "멋대로 유배지에서 떠난 화완옹주를 처벌하라" 는 식으로 수 많은 항의를 했으나 정조는 듣지 않았다. 몇 년 뒤에 한 신하가 "전하께서는 요사하고 흉악한 정처(鄭妻 화완옹주)를 만나고 싶으시자 교자(轎子)를 가장(假粧)하여 보내 종적(蹤跡)을 속여 뜻밖에 궁중으로 맞이하여 들였고" 라고 하기도 한다. #
그리고 정조 19년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유배되어 있는 줄 알았던 화완옹주가 정조에 의해 이미 유배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5][6]
○ 삼사가 정처의 일을 말한 합계 중에서 ‘매번 자기도 모르게 섬뜩해진다.[每不覺懍然]’ 이하를 고쳐 말을 만들어 아뢰기를,
“지금 내리신 전교를 삼가 받들어 보건대, 죄인 정치달의 처가 쫓겨나 안치된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놀랍고 뼈에 사무치는 분통함이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신등이 이 역적과 아직도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다가 이렇게 더없이 상식을 벗어난 일이 있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신들이 성실하지 못한 죄이고 이러고서야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잠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출치(黜置)한 죄인 정치달의 처를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도로 배소로 돌려보내게 함으로써 통쾌히 전형을 바로잡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생략)
“정치달의 처가 지금 과연 유배되어 있는 것이며, 유성한(柳星漢)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인가. 정치달의 처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환히 알면서도 태연히 모르는 척하고, 유성한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한다. 그러고는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이, 태연히 귀가 먹은 듯이 하면서 예전의 계사를 그대로 베껴 내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으니, 예의와 염치가 땅을 쓴 듯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데도 줄곧 벙어리처럼 행동하면서 흐지부지 넘겨 버리기만 한다면, 이는 요즘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려 고심한 뜻에 어긋난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한 장의 전교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대체로 정치달의 처를 용서하여 돌려보낸 것은 나름대로 재량한 바도 있지만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뜻을 살핀 점도 있었다. 그래서 은택을 대대적으로 베푸는 이해를 당하여 배소에서 빼낸 다음 마음대로 가도록 해 주고 해마다 의복과 양식을 주면서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게 한 것이었다. 이는 사은(私恩)과 공법(公法)을 모두 병행하면서 어긋나지 않게끔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자꾸 바뀌어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망각 속에 묻어 두게 되었으니 허구한 날을 이런 식으로만 한다면 오히려 구차스럽게 될 듯하였다. 그러니 한번 분명하게 유시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와서 경들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번갈아 말하며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이 일이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저지할 일이겠는가. 더구나 결말을 낼 일이므로 반드시 이 밤을 넘기고 싶지 않다. 통쾌히 전형을 바로잡기를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고, 도로 배소로 돌려보내는 일은 여정(輿情)을 펴 주는 일이니, 아뢴 대로 하라.”
― 일성록 정조 19년 3월 11일
“지금 내리신 전교를 삼가 받들어 보건대, 죄인 정치달의 처가 쫓겨나 안치된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놀랍고 뼈에 사무치는 분통함이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신등이 이 역적과 아직도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다가 이렇게 더없이 상식을 벗어난 일이 있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신들이 성실하지 못한 죄이고 이러고서야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잠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출치(黜置)한 죄인 정치달의 처를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도로 배소로 돌려보내게 함으로써 통쾌히 전형을 바로잡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생략)
“정치달의 처가 지금 과연 유배되어 있는 것이며, 유성한(柳星漢)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인가. 정치달의 처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환히 알면서도 태연히 모르는 척하고, 유성한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한다. 그러고는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이, 태연히 귀가 먹은 듯이 하면서 예전의 계사를 그대로 베껴 내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으니, 예의와 염치가 땅을 쓴 듯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데도 줄곧 벙어리처럼 행동하면서 흐지부지 넘겨 버리기만 한다면, 이는 요즘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려 고심한 뜻에 어긋난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한 장의 전교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대체로 정치달의 처를 용서하여 돌려보낸 것은 나름대로 재량한 바도 있지만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뜻을 살핀 점도 있었다. 그래서 은택을 대대적으로 베푸는 이해를 당하여 배소에서 빼낸 다음 마음대로 가도록 해 주고 해마다 의복과 양식을 주면서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게 한 것이었다. 이는 사은(私恩)과 공법(公法)을 모두 병행하면서 어긋나지 않게끔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자꾸 바뀌어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망각 속에 묻어 두게 되었으니 허구한 날을 이런 식으로만 한다면 오히려 구차스럽게 될 듯하였다. 그러니 한번 분명하게 유시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와서 경들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번갈아 말하며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이 일이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저지할 일이겠는가. 더구나 결말을 낼 일이므로 반드시 이 밤을 넘기고 싶지 않다. 통쾌히 전형을 바로잡기를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고, 도로 배소로 돌려보내는 일은 여정(輿情)을 펴 주는 일이니, 아뢴 대로 하라.”
― 일성록 정조 19년 3월 11일
정조는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라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다가, 반대를 못 이기고 윤허하면서 대신 의금부의 초기(草記)에 답을 내리지 않으며 버티고, 초기(草記)에 답을 내린 이후에는 의금부가 도성 안팎을 수색했지만 화완옹주를 찾지 못하자 # 신하들이 정조에게 직접 화완옹주를 왕명으로 불러달라고 청하지만, 자신은 분명 윤허했으니 알아서 잡아서 유배지로 보내라는 태세로 버틴다. #
결국 일주일 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조는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라는 청을 윤허했던 것을 취소하고 공식적으로 화완옹주에게 원래대로 도성 밖에서 편한 대로 거주하라고 명을 내린다. # 물론 신하들은 계속 반대했고, 정조는 계속 이 일로 논쟁하면 완전히 석방할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나오며 결국 일단락된다.
그리고 이 도성 밖에서 편한 대로 거주하라는 것조차도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이 때 화완옹주가 살았던 곳은 도성의 성문 바로 근처였다(...) 사실상 "어쨌든 성 밖으로 내친 거 맞음" 수준이었던 것.[7] # 그리고 이것도 결국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시간이 조금 지나서 정조는 화완옹주를 한양의 집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석방될때까지 화완옹주는 도성 내의 본인의 집에서 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화완옹주는 비록 긴 유배 생활이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정조가 뒤에서 몰래 여러 편의를 봐주어서 역적죄라는 큰 죄에 비하면 알게 모르게 그리 나쁘지는 않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2.5. 말년
정조 23년에 정처[8]를 완전히 석방하도록 명을 내린다. # 물론 위의 유배 생활에서 보다시피 화완옹주는 이미 한양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정조도 이미 사실상 풀려난 것이나 다름 없었고 석방은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계속 얘기한다. 물론 이번에도 신하들은 반대하였고[9] 유생들의 상소도 이어졌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으면서 비로소 화완옹주는 완전히 석방된다.하지만 왕실 인물임에도 《졸기》가 없어서 끝까지 옹주의 신분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1808년 5월 17일자에 기록된 《 순조실록》에서 대신들이 "정처가 죽어 더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3. 평가
《한중록》에 사도세자는 화평옹주나 화협옹주와는 달리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한번은 세자가 화완옹주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내 말을 부왕이 들어주게 하라고 협박한 적도 있었고, 화완은 울며 불며 싹싹 빌고는 바로 영조에게 가서 세자가 시킨대로 완수했다. 세자로서는 이런 재주를 가지고도 자기 안위만 챙기는 화완이 꼴 보기 싫었던 듯.아버지와 남동생의 중재에 신경을 썼던 화평옹주나 아버지에게 무시당해서 서로 동병상련을 느끼던 화협옹주와 달리 아버지의 편애를 받기만 하며 다른 가족의 아픔에는 별 신경을 안 썼기에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사도세자가 화완옹주를 밉게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한중록에서는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만취할 정도로 술자리를 가졌던 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3.1. 묘사
흔히 각종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화완옹주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사도세자 사후에는 조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화완옹주의 시가(媤家)는 소론파[11]였으며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시누이 화완옹주를 정처[12]라 칭하며 싫어했던[13] 혜경궁 홍씨도 그 점만은 명확히 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정조의 왕위 계승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정조가 홍인한-정후겸의 연합 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홍인한과 정후겸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고, 화완옹주도 정조에게 "주상께서 정정하신데 마땅히 대리청정의 명을 사양하는 것이 옳다."고 옆에서 부추겼다. 주도적으로 정조를 공격했던건 홍인한과 정후겸이었고, 화완옹주는 정조에게 크게 척을 지지 않았지만 영조가 총애하는 적법한 후계자에게 반기를 든 것은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조는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홍인한과 정후겸은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화완옹주는 연관되어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4. 가족 관계
- 남편 : 일성위 정치달(日城尉 鄭致達, 1732 ~ 1757)
5. 창작물에서
정조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정후겸의 양모인 데다가 이덕일 식 노론 음모론의 영향으로 정조를 다루는 사극에서는 거의 악의 축으로 취급받는다. 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했던 관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찾기가 어렵다. 몇 안 되는 예가 《 대왕의 길》과 사도, 붉은 달이다. 여기서는 화완옹주와 세자의 한때나마 친밀한 관계가 자세히 구현되었다[17]. 노론 음모론의 영향이 사라진 2010년 중반 이후에도 이 부분만은 제대로 고증이 안 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 맹꽁이 서당》에서는 노론파와 함께 사약을 받고 죽는 걸로 묘사되었다.
- 황인경 작가의 소설 《 목민심서》에서는 사도세자의 광증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혈육으로 묘사된다.
-
이상숙 - 1988년 ~ 1989년
MBC 《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
《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 의 화완옹주
작 중 내내 아버지 영조( 김성원 분)와 사도세자( 최수종 분) 사이를 이간질하며,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세손이던 정조(전호진 분)의 일기장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내용이 있다고 일러바치는 등 정말 악랄하게 각색되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도세자가 침소로 쳐들어와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행동을 조심하라고 할 정도.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약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혜경궁 홍씨( 최명길 분)를 찾아가 정조를 설득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확답을 못 듣자 폭언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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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춘 - 1991년
KBS 《
왕도》
KBS 역사 드라마 《 왕도》에서는 이효춘이 배역을 맡았다. 등장 첫 장면에서 영조에게 혜경궁 홍씨와 세손를 출궁시키라는 말을 했다가 "너희 뜻대로 세자가 죽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냐?"는 일갈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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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리 - 2001년
MBC 《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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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 2007년 ~ 2008년
MBC 《
이산》
《 이산》의 화완옹주
정순왕후( 김여진 분)와 함께 왕실 내에서 정조( 이서진 분)를 음해하는 역할을 했다. 정후겸( 조연우 분)과 함께 정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정조 즉위 직후 귀양을 가며 하차하는데 마지막에 정후겸의 죽음 이후 꼭 복수해주겠다고 했지만 화완옹주가 돌아올 일은 없기에 사실상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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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
정조에게 끝까지 발악하다 귀양을 가는 역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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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담 - 2015년
KBS 드라마 스페셜 《
붉은 달》
극중에서 사도세자( 김대명 분)가 폭주할 경우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정도로 묘사된다.[18] 그예로 영빈 이씨(이항나 분)의 생일날 세자가 가마를 준비했는데, 그 가마가 중전만이 탈 수 있는 화려한 가마였다. 영빈은 중전만이 타는 가마라면서 신분에 맞지 않으므로 세자에게 탈 수 없다고 하자 세자가 폭발하여 칼을 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외에도 세자가 내관을 죽이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 시체를 자신의 침소에 넣어놨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을 처리해 주고 위로해주는 명백한 아군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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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희 - 2015년 영화 《
사도》
위의 《붉은 달》과는,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출간해 노론 음모론이 만연했던 창작 분위기에서 노론 음모론을 전격 배제한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 영화 역시 사도세자( 유아인 분)와 옹주의 관계가 나쁘지 않게 그려지는 작품. 처음에는 사도세자의 가례날 장난을 치거나, 할머니와 중전과 영빈, 세자빈( 문근영 분) 등, 궁중 여인들의 수다에서 주로 등장하며 잘 알려진 대로 영조( 송강호 분)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진지한 모습도 묘사된다.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을 못 이기고 옷을 찢어발기다 칼을 꺼내들어 내관의 목을 칠 정도로 폭주하자 세자빈마저 어린 세손의 눈을 가리고 모든 이들이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겁에 질려 넙죽 엎드릴 때, 화완옹주만이 나서서 '아바마마더러 경희궁으로 옮기라고 자신이 중재할테니 일단 진정해 달라'고 세자를 간곡히 설득하며 어떻게든 왕실 내 갈등을 수습하려는 모습이 나온다. 사도세자가 무리하게 우겨서 어머니 영빈 이씨( 전혜진 분)의 환갑을 중전의 예로 지내고 후원을 산책할 때도 함께 눈물짓는 등, 조카 정조( 이효제 분)만큼은 아니지만 세자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는 조연 캐릭터. 사도세자가 죽은 후 모두들 통곡하는 와중에 독기어린 태도로 상청에서 조카인 정조를 끌어내며, 세손은 이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니 상복을 벗겨 임금에게 보내야 한다고 세자빈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등, 조카의 앞길에 집착하는 모습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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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림 - 2021년 MBC 드라마 《
옷소매 붉은 끝동》
조카 산에게 매번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화완옹주가 오빠 사도세자를 질투했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노론 음모론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평범한 남매의 일반적인 질투심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어린 남매나 형제들 사이에서 자기 오빠나 형이 부모님에게 편애 받는다며 투정 부리는 수준. 하지만 아버지인 영조가 상상 이상으로 정신이 나간 인물이라서 자신의 질투 때문에 오빠가 아버지의 손에 참혹하게 살해당하자, 그가 죽은 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항변하는 자기부정까지 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조카인 이산과 대립하는 이유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원한을 가진 그에게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라고 나오는 등, 세세한 걸 제외하면[19] 전반적으로 실제 역사에 부합하는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대리청정을 맡게 된 이산에게 사실상 왕권이 넘어가면서 위기에 처하자, 양아들 정후겸이 '자신이 대신 죽겠으니, 어미인 화완옹주만은 살려달라'고 이산에게 애원하면서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하게 된다. 이산이 즉위한 이후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씨(정치달)의 처로 격하된 채, 정후겸이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이산에게 직접 듣고 충격을 받아 떠나는 것으로 등장 끝.
여기서 손위 올케인
혜경궁 홍씨에게 찻물을 뿌리며 모욕을 주는데 실제 역사 같았으면 듣도보도 못할
하극상이다.
세자빈은 공주나 옹주 따위가 하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혜경궁이 왕비나 왕대비가 될 가능성이 없다 하나, 옹주보다 높은 품계임은 자명하며, 홍씨는 후계자인
왕세손의 친어미이기도하다. 다만 이 장면은 그만큼 화완옹주가 아버지의 편애를 믿고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해서 제작진 측에서 오류를 감내하면서 의도적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 Why? 한국사 왕자와 공주 시리즈에서도 역시나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시간 여행물이라 어린 시절부터 강마루, 신천지, 장미소가 내시로 위장해 곁을 지켰는데 자기가 어린이였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도 그대로인 아이들에 나이 먹지도 않고 그대로라며 의심을 한 몇 안 되는 인물로 등장했는데[20] 무슨 병인가? 하면서 웃으면서 넘어가자 강마루는 커갈 수록 어쩜 저렇게 얄밉냐며 속으로 욕한다. 언니 화평옹주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으로 그려졌으며, 어린이 시절엔 다른 언니인 화협옹주를 유독 좋아하는 묘사를 보였다.[21]
6. 관련 문서
[1]
파주시 향토유적 제14호
[2]
여기서 송사는 중국의 정사
이십사사사 중 송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 송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도 아니고 서책을 시샘했다는 것.(...) 여담으로 송사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초고를 토대로 송사를 개정하게 했다.
[3]
은언군의 사례처럼 궁으로 몰래 불러서 잠깐 얼굴을 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몰래 풀어주려고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4]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파주 목사는 정조의 명으로 불려와서 한양에 있었는데, 파주 목사에게 관리 책임이 가지 않도록 일부러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뒤에서 파주 목사를 두둔하면서 한양에 불려와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았겠냐고 언급한다.
[5]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애매한데, 정조 본인의 언급으로는 일성록 정조 19년 기사에서 7, 8년 전부터 이미 유배지에서 나와서 살았다고 한다. 다만 위의 정조 14년에는 파주의 유배지에 있었다고 했으므로 확실치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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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완옹주가 이렇게 살고 있던 것을 신하들은 정말 몰랐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정조는 뒤에서 보다시피 이미 다들 알면서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던 공공연한 일이었는데 이제 와서 문제삼을 일이냐고 말한다. 단지 확실히 기록되지는 않은, 궁비(여종)가 일으킨 어떤 소란으로 인해 화완옹주의 현재 생활이 조정에 확실히 밝혀졌는데, 공식적으로 조정에 통보된 이상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런 것일수도 있다.
[7]
실제로 신하가 얘기하기를 "갑자기 며칠 후에 비상한 전교를 내려서 죄인을 내쫓지도 않고 유배하지도 않고 도성의 지척에 두라 하시고, 굳이 성 안과 성 밖을 나누어 이것도 내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얘기한다.
#
[8]
정씨, 즉 정치달의 아내라는 뜻.
[9]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조 말년 벽파의 영수
심환지였는데, 지난 2009년에 발견된
정조 어찰첩에서 이 부분을 다루면서 정조의 연출극임이 밝혀져 학계와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이 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번 일은 매우 난처하다. 실은 정처(화완옹주)를 도성에 들여놓은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니, 조정이 알았건 몰랐건 성실함이 매우 부족하다." 라고 얘기하는 부분도 있다.
#
[10]
근데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저게 진짜라 가정해도 은근히 말이 된다는 게 함정이다. 아무리 남매 지간이어도 남녀가 한 방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도
당시 엄격한 조선시대 분위기상 좀 이상하고, 사도세자, 화완옹주 둘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것도 그렇고, 화안옹주가 정조에게 집착했던 점 (자기 자식이라 생각했단 얘기) 등 영조 일가의 미스터리들이 어이없게도 전부 앞뒤가 들어 맞는다. 음란마귀 낀 희대의 개소리긴 하지만 되도 않게 뜬금없이 나온 주장은 아니란 얘기다. 헌데 왜 주류 학계가 이런 해석을 거부하느냐면, 정말로 저랬다고 보기엔
주변의 내시들과 궁녀들까지 다같이 나가떨어졌다는(...) 기록도 같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근친상간 운운하는 말을 개소리 취급하는 게 아니다.
[11]
흔히
노론파로 알려졌지만, 화완옹주의 시가는 엄연한
소론이었다.
[12]
鄭妻. '정씨의 처'라는 뜻으로
옹주에서 폐해진 뒤 이런 호칭으로 불렸다.
[13]
정확히는 이때 화완옹주는 이미 작위를 박탈당해 '정처'가 공식 명칭이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만 가지고는 혜경궁이 그를 싫어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화완에 대해 '괴이한 여편네', '흉악했다', '이간질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도 반복해서 썼다. 정리하자면 호칭은 저게 당시 공식적인 호칭이니까 그렇게 쓴 거고, 호칭과는 별개로 혜경궁이 화완을 싫어했던 건 맞다. 그래도 화완옹주를 나쁘게 쓰려면 좋지 않은 일만 쓸 수도 있었을 텐데, 화완이 사도세자에게 도움을 준 부분이 있었다고 쓰기도 한 걸 보면 혜경궁은 자기 나름대로는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려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공식 명칭인 '정처'라고 부른 것도 오히려 그 일환이었을 수 있다.
[14]
효령대군의 후손
[15]
정치달의 사후양자로 입적되었다.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이었으나 화완옹주 덕택에 출세한다.
[16]
정후겸 문서 참고.
[17]
다만, 이 작품은 너무 막 나가서 화완옹주가 오빠인
사도세자를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18]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아버지 영조(
김명곤 분)는 갈등의 대상이고 어머니
영빈 이씨(이항나 분)는 후궁 출신,
혜경궁 홍씨(
박하나 분)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부인일 뿐이지만, 화완옹주는 자신과 같은 왕족이자 모든것을 이해해주는 자기 편으로 인식하고 있다.
[19]
실제 역사의
사도세자와 화완옹주는 서로가 서로에게
시스콘이자
브라콘이었는데, 이런 게 하나도 고증되지않고 그냥저냥한 현실남매로만 묘사된다. 게다가 옹주의
정조에 대한 도를 넘은 조카바보 기질도 묘사되지 않았다.
[20]
보통 역사 속 인물들이 세 사람은 왜 나이를 안 먹냐며 이런 의심을 하면 시간 여행을 시켜주는 정령이나 요정들이 기억을 조작해 의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21]
이 때문에 당시 시간여행 담당자였던 하늘나라 선녀인 방울이가 저 아이가 나중에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식으로 미리 언급했는데 마루는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로 보는 등 전혀 앞서 말한 대로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