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需司
1. 개요
조선 시대 왕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을 관리하는 기구. 유력 지방 세력이었던 이성계의 재산이 그가 왕조를 세운 이후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독립하면서 생겼다. 초기엔 내수별좌라 불렸으나 1430년(세종 12년)에 내수소로 개칭되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내수사로 개칭되었다. 내수사는 왕의 사유 기구이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아니라 왕의 직속 하인인 내시들이 담당했다. 분명히 왕 아래 있는 기관이기는 하나, 내수사는 정규 정부 기구가 아닌 왕의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었으므로(쉽게 말해 대한민국 정부 예산과 대통령 사유 재산이 별개인 것과 같다. 물론 '왕실'이니 좀 다르긴 하지만.) 조정 신료들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왕권을 등에 업고 업무를 처리했다.또한 내수사전(내수사의 직할 전답)과 궁방전(왕실 일가의 직할 전답)은 그 성격이 유사하기에 보통 세트로 묶여 이야기된다. 궁방의 종류는 내수사(內需司), 수진궁(壽進宮), 어의궁(於義宮), 명례궁(明禮宮), 용동궁(龍洞宮), 육상궁(毓祥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의 1사7궁(一司七宮)을 필두로 68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2. 세부
조선 시대의 재산은 주로 토지와 노비였는데 내수사전 및 궁방전은 면세지였고 여기서 일하는 농민에게는 국역(國役)을 면제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지주나 무거운 세금 관리의 착취를 피하기 위해 농민들이 너나없이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려 했다. 이에서 나아가 아예 자신의 토지를 내수사에 헌납하고 그 대신 싼 세금을 내며 이런 저런 횡포에서 벗어나려 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우리가 전답의 소유권을 내수사의 양안에 올린 것은 지지난 봄부터였습니다. 물론 그게 불법이란 것은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오죽하면 그런 궁여지책을 발명해냈겠습니까?”
처음 일의 사단이 된 것은 지나친 세금 때문이었다. 나라에서 걷는 국세만도 무거운데, 탐오한 관리며, 간교한 향리들이 뜯어 가는 것이 생존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누군가 그럴 듯한 꾀를 냈다.
“우리 토지를 내수사 소속으로 양안에 올려놓자 그 말이여. 다른 고을 백성들도 모두 그런 방법으로 세금을 덜어내고 있단 말일세.”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수사전의 경작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 맡고 있었다. 가을에 소출이 끝나면 소작료로 생산량의 절반을 내놓은 병작반수(竝作半收 : 전주(田主)와 소작농민이 수익을 반분하는 것으로 한국 소작 제도의 대표적 유형이었다.)의 형태라 부담이 가볍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수사전을 경작하면 다른 국역(國役)을 면제받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때문에 과중한 세 부담을 털어 내려는 많은 농민들이 스스로 토지를 바치고 소작농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내수사 또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비록 전답을 내수사에 맡겨 놓긴 했지만 한번도 남의 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내수사 역시 어려운 백성의 처지를 살펴주겠노라 말했기 때문에 이를 철석같이 믿었던 거지요.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긴 것은 며칠 전이었습니다.”
내수사의 차인(差人 : 고용인)들이 이들 백성들의 토지를 고스란히 움켜쥐어 버렸던 것이다. 거기에다 한술 더 떠 내수사가 떠맡아야 할 각종 수세(收稅)마저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부담시키니, 애초에 토지를 맡기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대대로 내려오던 문권(文券)을 들고 땅을 돌려달라고 청했으나 이리 내팽개쳐진 것입니다. 양안에 기록된 것은 저들의 땅이 분명하니 이제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오직 믿었던 것은 성은(聖恩)뿐이었는데 이곳에서마저 내치면 모두 어디 가서 죽으란 말입니까?”
늙은 농부가 눈물을 훔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왕실이 살쪄야 백성도 튼튼, 『문화원형백과』, 한국콘텐츠진흥원, 2002.)
처음 일의 사단이 된 것은 지나친 세금 때문이었다. 나라에서 걷는 국세만도 무거운데, 탐오한 관리며, 간교한 향리들이 뜯어 가는 것이 생존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누군가 그럴 듯한 꾀를 냈다.
“우리 토지를 내수사 소속으로 양안에 올려놓자 그 말이여. 다른 고을 백성들도 모두 그런 방법으로 세금을 덜어내고 있단 말일세.”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수사전의 경작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 맡고 있었다. 가을에 소출이 끝나면 소작료로 생산량의 절반을 내놓은 병작반수(竝作半收 : 전주(田主)와 소작농민이 수익을 반분하는 것으로 한국 소작 제도의 대표적 유형이었다.)의 형태라 부담이 가볍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수사전을 경작하면 다른 국역(國役)을 면제받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때문에 과중한 세 부담을 털어 내려는 많은 농민들이 스스로 토지를 바치고 소작농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내수사 또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비록 전답을 내수사에 맡겨 놓긴 했지만 한번도 남의 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내수사 역시 어려운 백성의 처지를 살펴주겠노라 말했기 때문에 이를 철석같이 믿었던 거지요.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긴 것은 며칠 전이었습니다.”
내수사의 차인(差人 : 고용인)들이 이들 백성들의 토지를 고스란히 움켜쥐어 버렸던 것이다. 거기에다 한술 더 떠 내수사가 떠맡아야 할 각종 수세(收稅)마저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부담시키니, 애초에 토지를 맡기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대대로 내려오던 문권(文券)을 들고 땅을 돌려달라고 청했으나 이리 내팽개쳐진 것입니다. 양안에 기록된 것은 저들의 땅이 분명하니 이제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오직 믿었던 것은 성은(聖恩)뿐이었는데 이곳에서마저 내치면 모두 어디 가서 죽으란 말입니까?”
늙은 농부가 눈물을 훔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왕실이 살쪄야 백성도 튼튼, 『문화원형백과』, 한국콘텐츠진흥원, 2002.)
1685년(숙종 11)의 일로, 당시 수취 체계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화다. # 오죽했으면 자영농들이 내수사에 스스로 땅을 바치고 수확물의 50%를 소작료로 내는 소작농이 되려 했겠는가. 그러나 내수사전과 궁방전은 이런 까닭에 쉽게 증식을 거듭해 나간다.
또한 위 사료를 보면, 농민들은 자기 땅을 왕실에게 바치고 그 소작농이 된다는 개념보다는 명의만 왕실로 바꾸고 국역을 면해보자는 생각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당연히 왕실에서 적당히 봐줄때야 그러겠지만, 일단 법적으로 왕실 땅이니 소작료를 올리거나 아예 내쫓아도 불법이 아니었다. 명의이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례.
왕실의 권력을 바탕으로 민간의 전답을 겸병(兼倂)하여 대규모 사유지를 형성하는 등 여러 폐단이 생기자 간간히 내수사 폐지를 주장한 인물들도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조광조와 송시열. 그러나 같은 지주인 사대부들의 암묵적인 묵인 및 왕권의 비호 아래 계속 존속되었다.
한편 궁방전의 전체 규모는 18세기 정조 당시, 출세결수를 제외한 면세결수 기준으로 약 33,444결에서 37,500결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전국 총 토지면적의 약 2.5%정도였으며, 국가에서 세를 받아들이는 토지에 비한다면 약 4∼5%에 이르렀다. #
갑오개혁 시기에 정부기관 개편으로 '내장원(內藏院)'으로 승격되었다. 내장원의 장을 '내장원경(內藏院卿)'이라 했으며, 역임한 인물 중 유명한 인물로 이용익이 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광무개혁을 위한 자금을 내장원의 내탕금으로 조달한 덕에 조직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일본 세력권에 넘어가면서 광무개혁은 중단되었고, 일본은 고종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내장원의 힘을 빼다가 1907년에 완전히 해체하였다. 출처
3. 기타
성종 실록을 보면 내수사의 이자율은 30%라서, 사채 이자율 50% 보다 오히려 낮았다고 한다.[1] 성종이 내수사를 재설치하면서 나온 말이다.[2]그리고 내수사 자체가 왕실(사실상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일이다 보니, 어느 정도 돈을 굴리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소작료나 이자율을 낮게 잡은 것도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가 고리대로 폭리를 취하면 왕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렇게 되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되고, 대신들도 즉각 상소에 나서 왕에게 항의의 뜻을 올릴 것이다. 어차피 왕은 돈이 없어서 파산할 일도 없으니 일반 시중보다 이자를 싸게 받는 도량을 보여 백성들 앞에서 왕실의 체면을 세웠다.
거기다 군주 국가라면 예외없이 이러한 재산이 있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로마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 이집트를 일종의 황제의 직할령, 즉 사유지로 삼아 이집트에서 공급되는 밀의 유통을 직접 통제했고 관련 세수는 내탕금처럼 활용했다.[3] 또 개인적인 활동을 위해서도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유 재산은 엄청나서 여왕은 영국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여성이다. 영국 왕실은 공개된 재산만 3억 2000만 파운드이며, 국가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은 적(1993년까지)은 있으나 세금으로 왕실이 운영되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왕실 토지에서 나온 소득을 국가에 전부 내는 대신에 일정액의 예산을 받아서 썼지만, 최근에는 왕실 직영지 소득의 일부를 가져간다고 한다. 입헌군주국인 태국에도 왕실의 엄청난 사유 재산이 있다. 포브스에서는 한때 태국 국왕을 세계 모든 국왕 가운데 최대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 천황가의 경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긴 한다. 원래 일본 황족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부유한 황실[4]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주식자산은 정부에 전부 양도되었고, 토지 등 기타 자산도 천황에서 정부기관인 궁내청 명의로 이전되었다.
[1]
꼭 고리대금을 하지 않더라도 옛날의 이자율은 오늘날보다 높았다. 행정력과 교통망 및 통신망이 미비하고 제대로 된 금융기관이 없는 전근대에는 신용을 증빙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작정하고 떼먹은 후 잠적하면 추적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 이자율 20%로 곡식 빌려주는
환곡제도는 제대로 운영된다는 전제 하에,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저리 대출이었다.
[2]
성종실록 148권, 13년(1482년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11월 2일(병신) 4번째 기사 내수사의 장리를 다시 회복하게 하다.
[3]
동양에서도 왕토 사상이 주요 이념이라고 해도 군주가
백성에게 걷은 세금을 자기 임의대로 쓸 수는 없다. 다만 마음대로 안 쓴 나라는 조선 정도이고, 중국의 왕조나 일본의 막부 등은 마음대로 전용한 사례가 많다.
[4]
메이지유신 이후 국회의 예산통제를 싫어한
이와쿠라 도모미가 각종 주식이나 토지 등 국유재산 상당 부분을 천황의 사유재산으로 전환했다. 이 덕분에 일본 제국 황실은 다른 나라 왕실들 부럽지 않게 상당히 부유했다. 물론 다른 황실 종친들은 이런 부를 누리지 못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던 이왕가를 부러워해야 했다. 그래서 그시기 영친왕에게 시집가는
이방자 여사를 부러워하는 황족들이 많았다. 다만 이왕직이 관리하는 재산은 일제에 받는 돈은 껌값으로 여길 정도였고, 이왕직이 관리하는 황실 재산 가운데 전답은 동척이 소리소문 없이 가져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