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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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 - | - | 제2대 | |
은언군 | (상계군) | (이성득) | 익평군 | ||
제3대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덕안군 | 이언용 | 이완용 | 이해만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이택주) | (이우석) | (이성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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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궁 초대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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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장조의 왕자
은언군 | 恩彦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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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4년 2월 22일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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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1년 7월 9일 (향년 47세)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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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실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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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인(䄄) | ||
부모 |
부황
장조 의황제 모친 숙빈 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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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5남 3녀 중 3남 | ||
배우자 |
정실 상산군부인
송마리아 (常山郡夫人 宋馬利亞, 1753 ~ 1801) 측실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1] (全山郡夫人 全州 李氏, 1764 ~ 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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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작호 | 은언군(恩彦君)[2] | ||
시호 | 충정공(忠貞公)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으로, 이름은 인(䄄). 사도세자의 3남이자 서장자로 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전주 이씨 은언군파의 파시조다.일찍이 영조 말엽에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유배를 갔다가, 훗날 홍국영 일당의 잔당들의 반란에 그의 아들 상계군이 휘말리면서 역적의 아비라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구박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들들이 역모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등 일생 대부분을 불행하게 보냈다. 심지어 아내와 며느리마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물론 은언군 본인도 역적의 아비라고 신료들에게 탄핵당해 유배를 갔으며, 가족의 얼굴조차 못 보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의 동생들 사이에서는 물론, 조선 왕조 역사상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불행한 인생을 보낸 왕족은 몇 없다.
2. 생애
2.1. 출생
1754년 사도세자와 궁녀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는 궁녀를 건드린 걸로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는 사실을 들켜 영조에게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심지어 임씨의 아이를 낙태시키려고까지 해서 보다 못한 세자의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불쌍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너는 여자가 되어 가지고 투기도 안 하느냐?', '네가 남편(사도세자)의 편을 들면서 불충까지 저지르고 있다' 따위였다. 이것이 혜경궁이 평생 딱 한 번 들어본 영조의 꾸지람이다.[3]영조는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왕손을 본 점과, 혜경궁과의 사이에서도 이미 두 명의 아들을 낳았음에도 궁녀를 건드려 자식을 낳은 것을 굉장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 그리고 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더욱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영조는 혜경궁 소생의 적손들에 비해 후궁 소생인 서손들을 비교적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손주들의 생모들이 하나같이 다 양반가 규수 출신인 간택 후궁이 아닌 신분이 미천했던 궁녀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왕세자가 굳이 궁녀에게 승은을 내린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방탕한 행실에 대해서도 영조는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4]
2.2. 왕자군 책봉
아버지 사도세자가 임오화변 때 사망한 후 출궁되어 자라다가 10살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3년 후 송낙휴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항렬상 외조부인 홍봉한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았는데 김귀주한테 이를 탄핵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순회세자의 집이었던 용동궁을 사저로 하사받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1771년 외람되게 근수[5]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를 타고 다닌다 하여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고, 나중에는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된다.[6] 그 곳에서 은신군이 죽자 그 덕에(?) 유배간 지 3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서 한성으로 돌아와 한동안 학문에 주력하면서 살았다.
이복형 정조가 즉위했을때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복직했고 종친에게 주어지는 최고 품계인 홍록대부(興祿大夫)에 오르며 나중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도 오른다.[7] 이때 은언군은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챙기고 생일날 벌어지는 잔치를 주관하기도 했다. 다만 은언군은 그의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파는 물의를 일으켰고 대신들이 이를 탄핵했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했다.
2.3. 역적의 아비로 지목되다
그러나 당시 실세로 군림하던 홍국영이 은언군의 장남 이담을 이용하려고 하면서 이때부터 은언군은 위기에 처한다. 홍국영은 정조의 후궁이 된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상계군 이담을 그녀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8]에 봉하고 대통을 잇게끔 하려 했다. 은언군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나중에는 홍국영의 부탁과 설득에 넘어가 승낙한다.그런데 이는 미친 짓이었다. 정조가 병약하고 나이도 많으면 또 모르겠는데 아직 젊고 건강한 정조에게 "다 됐으니 너 애 낳지 말고 내가 지정해 준 애나 양자 삼아서 후계자 삼아라. 그래야 내가 내 양조카 덕을 보면서 권세를 누리지."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러니 이는 홍국영 실각에 결정타가 되었고, 이에 관련된 상계군과 은언군 모두 파면되고 작위를 몰수당하여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가 상계군이 한 각종 불온한 말을 고해 바치면서 대형 옥사로 번졌고, 상계군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면서 상계군이 유배지에서 자살하자 사태가 커지게 된다.[9] 이때 정순왕후 김씨가 연일 대신들과 함께[10] 은언군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에 정조는 증거가 불충분한데다 혈육을 죽일 수 없다고[11] 강력히 거부했으나 정순왕후와 대신들이 굽히지 않자 단식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순왕후도 단식을 하며 버텼고 이와중에 훈련대장 구선복 등이 홍국영과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꾀했음이 드러나서 사건은 더 커졌다. 하지만 왕의 단식에 굴복한 대신들은 은언군의 사형을 감해 제주도로 유배보내자고 했다가 정조가 크게 화를 내며 거부하자 할 수 없이 진도로 유배보내기로 했는데, 정조는 은근슬쩍 진도를 강화도로 바꾸어버렸다. 유배지가 멀면 멀수록 벌이 엄중하므로 이는 벌을 많이 경감시켜준 것이었고, 신하들은 반발했으나 정조는 이를 씹었다.
그 후 은언군은 끊임없이 노론과 정순왕후에게 역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세가 된다. 특히 노론은 은언군이 귀양간 뒤에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사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정조의 비호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2.3.1. 임금의 유일한 형제
정조는 은언군을 아꼈는지 수시로 이복동생을 유배지에서 몰래 불러내어 만났는데, 엄연히 죄인 신분이었던만큼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어찌 병가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하십니까?"라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벌여가며 만났다. 겨울밤에 미행을 나가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만나기도 했다고..그때마다 노론, 소론, 남인들까지[12] 정순왕후와 함께 이를 크게 규탄했지만 정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민심이 (이유야 어쨌건) 절절한 우애를 보이는 정조에게 쏠리면서, 처음에는 "사저에 나가서 살겠다!"라고까지 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던 정순왕후도 의례적인 반대에 그치게 되었다.
사실 형제간의 우애도 우애이지만, 당시 은언군은 정조를 제외하면 사도세자의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자식이었으므로 이런 정조의 행동은 곧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홍보하기 위한 정치적 쇼의 성격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실 단순히 은언군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면, 오히려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납득할 만한 곳(즉,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은언군을 유배시키고 조용히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정조가 이렇게 행동한건 굳이 은언군의 존재감을 키우는 부작용을 감수해서라도 할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였다는 뜻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호감이 아예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정순왕후가 한 발 물러선 이유도 민심도 민심이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효성'은 대단히 강력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민심이 정조에게 쏠린 다른 이유도 '전하께서 이복 형제를 저토록 아끼시니 참으로 효성스러운 분이다'라는 분위기로 흘러간 것. 정순왕후가 정조의 할머니이니 "아비에 대한 효만 하고 할미에 대한 효는 안 하시렵니까?"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정순왕후가 할머니라고 해도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니, 사도세자가 정순왕후보단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이는 은언군 이인의 존재를 정계에 강력히 각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은언군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했으나 정조가 거부하면서 은언군은 무사한다. 정조는 이후로도 은언군을 석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때마다 정순왕후와 노론의 강력한 반대로 모두 실패하고 만다.
2.4. 신유박해와 죽음
그러나 정조 사후 1800년 조카 순조가 즉위하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11살의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신유박해를 정순왕후의 숙청 및 반동 정치로 해석하는 움직임도 많지만, 사실 정조가 " 정학을 바로 펴면 사학은 절로 없어질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한 결과 교세가 줄어들긴커녕 오히려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천주교를 탄압해야 한다는 논리면 정순왕후가 칼을 뽑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신유박해에 따라오는 황사영 백서 사건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였다.[13] 자세한 이야기는 신유박해 문서 참조.하여튼 이 과정에서 양제궁의 어느 궁녀가 밀고하여 은언군의 아내 상산군부인 송씨(세례명: 마리아)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세례명: 마리아)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A]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게 밝혀진다.
이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사연을 보면, 과거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모반에 연루되어 사망하고 이로 인해 은언군과 전계군은 강화도로 안치되는사이,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상계군의 아내(즉, 은언군의 며느리) 신씨는 양제궁이라 불렸던 폐궁에 유폐되었다. 이때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던 강완숙(姜完淑)[15][A] 골롬바는 송씨와 신씨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들과 자주 접촉하였는데, 그동안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송씨와 신씨는 천주교 교리를 접하면서 크게 위로 받으며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얻고 정식으로 입교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17]
결국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사약을 받고 순교하자, 은언군은 서자 이철득과 함께 가시덤불 장벽 사이에 거적을 들이밀어 틈을 만들어 유배지를 탈출했다.[18]
하지만 얼마 도망가지 않아서 붙잡히고, 이 일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1801년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아들들 중 이당과 서자 이쾌득은 몇번의 위기를 넘긴 뒤 용케 살아남고 순조와 헌종의 비호 아래에 석방되어 관례도 올리고 장가도 들게 됐다.
첩 전산군부인 이씨에게서 얻은 9남이자 서자[19]인 이광은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첫째 이원경은 헌종 시기에 민진용 일당의 역모에 휘말려 죽었으나 서자들인 둘째 이욱과 셋째 이원범은 살아남았다. 훗날 헌종이 후사없이 죽으면서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한다. 철종 즉위 이후에 이광은 전계군으로 추봉되었다가 전계대원군에 추증된다.
3. 사후
그 후 손자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었으며, 순조비의 명으로 그와 상계군에 관한 기록을 대량으로 세초[20]하였다고 한다.고종황제 때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후손
후손 중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그 후손을 적지 않고 본인까지만 적었다. 왕실의 족보인 선원속보(자손록)에 기록된 인물은 진하게 처리하였다.- 처: 상산군부인 송씨(1753~1801)[21]
- 상계군 이담(1769~1786)
- 이창순(?~?): 조졸[22]
- 이창덕(?~?): 조졸
- 딸(1796~1872): 한각신(1795~1853)[23]에게 하가
- 한응국(1842~?): 큰아버지 한계신에게 입적. 병조참판
- 첩: 불명(?~1821)
- 첩: 전산군부인 이씨(1764~1819)[25]
- 조졸
-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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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현효대왕 | 도정궁 사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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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 소황제 | 장조 의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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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선황제 | 은언군 | 은신군 | 은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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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숙황제 | 상계군 | 전계대원군 | 남연군 | 풍계군 | 진안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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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익황제 |
철종 장황제 |
익평군 | 회평군 | 영평군 | 흥녕군 | 흥완군 | 흥인군 | 흥선헌의대원왕† | 완평군 | 완성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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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성황제 |
고종 태황제 |
덕안군† | 경은군 | 청안군 | 완림군† | 완순군 | 완영군† | 흥친왕 | 완은군† | 인양군† | 의양군 | 예양정 | 완창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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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효헌친왕† |
순종 효황제 |
의친왕 | 의민황태자 | 풍선군† | 영선군 | 경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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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군 | 창산군 | |||||||||||||||||||||||||||||||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1]
철종의 할머니.
[2]
봉호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인 은진(恩津)에서 유래했다.
[3]
조선시대에서 여자의 투기는
칠거지악 중 하나로 문제시했지만 투기를 안 하는 것도 역시 문제로 여겼다. 어쩌라는거야
성종이
폐비 윤씨를 처음 왕비 자리에서 폐하려고 할 때
임사홍이 "옛 부인들 중 투기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라고 설득하여 성종도 뜻을 거둔 걸 보면, 투기는 악덕이 맞지만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본능 일로 보았고 때문에 아내가 아예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본 듯하다.
[4]
사도세자와 혜경궁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면 참작받을 여지라도 있었겠지만, 이미 세손(훗날의
정조)이 태어나 후계구도도 든든해진지 오래였던지라 그것도 아니었다. 설령 혜경궁 홍씨가 적자녀를 낳지 못했더라도 배경이 번듯한 생모에게서 세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양반가 출신의 간택 후궁을 들이는 게 정상이었다.
[5]
관원의 시중을 드는 노비.
[6]
진짜 이유는 빚을 졌는데 갚지 않았던 이유이다. 은신군의 보모인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이 내시들과 결탁해 시전 상인들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이 고발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었는데 갚지 않았던 것이 들통났다. 나중에 영조가 이를 알게 되어 그의 분노를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
[7]
아버지
사도세자가 죄인 신분으로 죽어서 추존되지 못한데다 이복형 정조가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무품이 되지 못했다.
[8]
완풍군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며, 뒷날 이를 폐기하고 상계군으로 고친다.
[9]
게다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요절하고 문효세자의 생모이자 총애하던 후궁
의빈 성씨가 출산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사산하고 사망하자 이를 노론에서 은언군의 독살로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면서 은언군의 입지가 더욱 위태로워졌다.
[10]
특히 노론은 물론 정조의 지지세력이었던 남인까지 은언군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한 상황이었다.
[11]
이미 정조는 역모에 연루된 이복동생
은전군에게 사약을 내린 바 있었다. 다만 이건 정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12]
왕이 뭐라던 간에 어쨌든 은언군은 역적의 아비니 정조 덕에 명함 내밀게 된 남인들까지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13]
다만 황사영 백서 사건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이에 대한 반발로 벌어진 일이긴 하다.
[A]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
한국 124위 순교복자).
[15]
한국 가톨릭 첫 여성회장.
[A]
[17]
이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교리서를 읽었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강론을 경청하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지킬 모든 본분을 성실하게 지켰다. 강완숙과 송마리아, 신마리아의 교류는 매우 친밀하였으며, 대군의 부인들인 그들은 자신의 궁녀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만든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신심생활과 사회활동에도 은밀하게 참여하였다.
[18]
당시 강화도에는 이철득 외에도
이성득,
이당,
이쾌득 등 다른 아들들도 있었다.
[19]
소실인 전산군부인 이씨에게는 차남.
[20]
사초(실록을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기록들)를 없애는 것으로 세탁을 하여 먹물만 지우고 다시 사용했다.
[21]
1767년 혼인
[22]
은언군 신도비에 “二男昌順三男昌德皆早卒(둘째 아들 창순, 셋째 아들 창덕은 일찍 사망하였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23]
청주 한씨 문정공파 영흥공계 26세.
[24]
1817년까지는 생존
[25]
1779년 첩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