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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39:13

회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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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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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종의 증손
회평군 | 懷平君
봉호 회평군(懷平君)
시호 효민(孝愍)
본관 전주(全州)
이름 명(明)[1]
초명 원경(元慶)
조부 은언군
생부 전계대원군
생모 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
생몰
기간
음력 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양력 1827년 10월 30일 ~ 1844년 10월 17일

1. 개요2. 어린 시절3. 민진용의 난과 최후4. 사후5. 후손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큰형이다.

2. 어린 시절

1827년(순조 27년) 9월 11일 신시(申時)에[2] 강화도에서 은언군의 서6남 이광( 전계대원군)과 최씨( 완양부대부인)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이광은 가족의 역모 및 옥사에 연좌되어[3] 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다.

이원경이 태어나고 3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요절했다. 순조는 이대로 가다가는 왕실의 대가 끊길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 이광의 일가를 방면했다. 이후 이광의 가족들은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鄕校洞 慶幸坊)에 정착해 살았다.

1840년( 헌종 6년) 어머니가, 1841년(헌종 7년) 아버지가 연달아 사망했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계속 두 이복 동생들을 잘 보살피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3. 민진용의 난과 최후

그러나 3년상이 끝난 1844년(헌종 10년) 8월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몰락한 노론계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하여 역모를 일으키려다 적발된 사건(민진용의 옥사)에 엮인 것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이던 대사헌 민응수[4]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가담자 중 이원덕은 의원으로 이광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순조 말기부터 헌종 초기까지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주로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 7촌 조카 김홍근(金弘根)이 쌍두마차가 되어 좌지우지했는데, 1844년(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권력에 틈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를 노려 민진용 일파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이원경이 이 역모에서 임금으로 추대될 대상이었던 것.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다들 상당한 중형을 받았는데, 주동자를 비롯한 양반 6명이 능지처사를 받았고 단순 동조자도 귀양을 갈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실제로 참여는 안했다 해도 왕으로 선택된 대상이었던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5] 결국 삼사 의금부에게서 계속 탄핵을 당하다 같은 해 9월 6일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18세(만 16세).

연구자 김우철은 이 사건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주요 관련자들의 신분과 심문 기록을 통해 사건의 성격을 정리하자면, 일부 전직 조정 관리가 포함된 서울의 양반들이, 종친의 대접을 받지 못하며 불우하게 지내던 이원경에게 접근하여 후일을 기약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18세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이원경 본인도 은언군-전계대원군으로 이어지는 집안의 시련과 관련하여 품고 있던 불만을 경솔하게 드러내다가,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謀反’으로 몰릴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참여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義狀’이나 회평군 이원경이 써서 주었다는 ‘手標’ 등도 관련자들 사이에 진술이 엇갈리고 실체도 확인되지 않았다. 물론 사건의 성격상 이러한 실물 증거가 쉽게 확보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최소한 거사 계획이나 추대 계획과 같은 부분에 대한 진술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관련자들의 이 ‘모반’ 사건에 대한 접근 방식이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혹시 닥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험과 같은 성격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앞서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서 확인했던 것처럼, 죄인의 후손으로 몰락하여 상민과 다름없는 처지에 빠졌던 자가 혈통적으로는 왕실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모순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김우철, 「憲宗 10년(1844) 懷平君 李元慶 謀反 사건과 그 의미」, 『역사와 담론』 55, 2010

4. 사후

이원경이 역모로 몰려 죽자 그의 두 동생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갔다.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신원, 복권되었으며 1858년(철종 9년) 11월 9일 승지 서승보의 건의에 따라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되고 현록대부 및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6]

시신은 처음 경기도 양주군 하도면 중흥동 삼각산 서남쪽[7]에 안장했다가 다시 경기도 포천군 왕방산으로 이장되었으며, 뒤에 1856년(철종 7년) 4월 8일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 산11번지[8] 해룡산, 전계대원군 묘 동쪽 100m 지점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문은 1859년(철종 10년) 철종이 직접 짓고, 판서 김병학이 글씨를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처).
有明朝鮮 贈顯祿大夫懷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完山李公諱明墓
御製懷平君墓碣
我本生伯氏懷平君卒逝之六年己酉 予承太母命入纘大統首晰甲辰寃案 慈旨也 又九年戊午始擧封爵贈秩之典 嗚呼 尙忍言哉 伯氏初諱元慶 後改諱明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之曾孫 世子誕我正宗大王 正宗有弟三人 其長曰恩彦君諱䄄 良娣林氏出也 始恩信恩全俱夭圽 正宗憂先世血脉之單 危撫恩彦而曲保之 恩彦有五子 全溪大院君諱㼅序居第五 伯氏寔大院君之長子 母完陽府大夫人崔氏 學生秀昌女也 伯氏以純祖丁亥九月十一日申時生 儀容秀美稟性和粹 及長事父母柔婉無違 奉先極誠 敬處昆弟 盡友睦 平居無疾言遽色 雖僕隸之賤 必曲加恩意擧 莫不心悅誠 服其德器行治 殆未學謂學 而儼然若成人規度焉 憲宗甲辰秋亂言胥煽 奇禍猋發 伯氏實無少緇滓 而竟以時象孤疑 不克保有厥終 方其臨命之時 天忽大雷電以雨 嗚呼 寃鬱之氣 上干天和而然歟 尙忍言哉 尙忍言哉 予與伯氏 遭家多難崎嶇 艱棘於風濤 憂畏凡三世 而伯氏竟又遘未盡之慘殃 不能同享 今日之安富尊榮 是伯氏當其極否 而予小子獨受其泰矣 嗚呼 南面千乘亦復何心哉 伯氏之卒 在是年九月初六日 距其生甫十八 初葬楊州重興洞 慟霣蒼黃 殮穸不成禮 以丙辰四月初八日 改葬于抱川仙壇里枕甲之原 大院君兆左第五岡也 嗚吟 予小子銜恤茹痛十有五年于玆矣 今焉天道環復 九地之寃 白於日星 一品之秩榮及泉隧 始命樹石於墓 抆涕而書之 嗚呼 尙忍言哉
崇祿大夫行兵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春秋館成均館事 臣 金炳學 奉敎謹書
崇禎紀元後四己未 月 日 立

5. 후손

원래 회평군이 전계대원군의 유일한 적장자라 이후 가독(家督: 집안을 이어 갈 장자(長子)의 신분)을 이어야 했으나, 역모에 연루되어 일찍 죽고 뒤를 이을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종이 즉위한 후 생가( 누동궁)의 후사를, 회평군의 서출 이복동생이자 철종의 둘째 이복형인 영평군이 잇도록 했다. 그런 상황에 회평군의 양자를 들이면 누동궁 서열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인지 회평군의 친 후손은 물론 족보상 후손도 없다.

6. 대중매체에서


[1]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회평군 명(, + 月)), 둘째는 영평군 경응(( + 京)應, 초명은 욱(, + 立)), 셋째는 철종 변(, + 弁)인데 전부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는 이들 형제와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 + 大)'이며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 + 丙)'이었다가 '승응((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 + 告)'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 + 羲)'였으며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 창응((日 + 曰)應), 흥완군 정응((日 + 政)應), 흥선군 하응(( + 正)應)인데 흥인군 최응((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갈 왈(曰)이지만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 [2] 오후 3시 ~ 5시 사이다. [3] 이광의 적모(嫡母) 송씨와 형수 신씨( 상계군의 아내)의 천주교 순교사건, 형 상계군 추대 사건 등. [4]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시중의 손자. [5] 참고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 일이 있은 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바로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 [6] 작호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와 보은군 일부에 있었던 회인군(懷仁郡)에서 유래했다. [7]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일대 [8]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