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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03:24:29

완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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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숙황제 상계군 전계대원군 남연군 풍계군 진안군
 
 
 
 
 
 
 
 
 
 
 
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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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평군 회평군 영평군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헌의대원왕† 완평군 완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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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효헌친왕† 순종
효황제
의친왕 영친왕 풍선군† 영선군 경원군
 
 
청풍군 창산군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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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 제2대 -
은전군 풍계군 완평군 인양군
제3대 -
이헌용 이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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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궁 2대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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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장조의 증손
완평군 | 完平君
봉호 <colbgcolor=#fff,#2d2f34>완평군(完平君)
이름 이신덕(李愼德)[A] → 이병(李昺) → 이승응(李昇應)
시호 효헌(孝憲)
출생 1836년 7월 21일
사망 1909년 10월 3일 (향년 73세)
양부 풍계군(豊溪君, 1783 ~ 1826)
양모 광산군부인 광산 김씨
(光山郡夫人 光山 金氏, 1803 ~ 1864)
생부 이도식(李道植)[2]
부인 진주 류씨(1832 ~ ?)
자녀 슬하 4남
장남 인양군 이재근(仁陽君 李載覲, 1857 ~ 1896)
차남 이재현(李載現, 1870 ~ ?)
3남 의양군 이재각(義陽君 李載覺, 1874 ~ 1935)
4남(서자) 예양정 이재규(禮陽正 李載規, 1877 ~ ?)
1. 개요2. 생애3. 사망과 이후4. 후손5.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왕족 대한제국 황족 관료.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 양자[3] 은전군가의 2대 종주이다.

2. 생애

1836년( 헌종 2년) 경기도 안산에서 조선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인 참판 이도식(李道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신덕(李愼德).[A]

원래 조선 왕실 직계와는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200여 년 ~ 300여 년이 지난 당시에 그의 일가는 왕족이 아니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선조 이연 - 경창군 이주 - 창림군 이일 - 영평군 이완 - 하계군 이거 - 이정렬 - 이정 - 이유일 - 이병초 - 이도식 - 완평군 이승응
그러나 25살인 1860년( 철종 11년) 11월에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 양자였던 경평군 이호[5] 안동 김씨 세도가들을 비판했다가 그들의 눈 밖에 나 파양당하자 그 대신 입적하여 종친이 되었다. 처음에는 완평도정(完平都正) 작호를 받았다가 2달 뒤 완평군(完平君)으로 봉해졌고 이름도 항렬에 맞추어 이병(李昺)으로 고쳤다.

왕실 족보를 감수하는 일과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 그리고 사옹원 제조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 철종 사망 후에는 종척집사(宗戚執事) 및 을 지키는 수릉관이 되었으며 이후 치른 여러 국상 때도 같은 직을 맡아 활동했다.

고종 즉위 초 연간에 음직으로 참판을 지냈으며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자 이승응(李昇應)으로 다시 개명했다.

그 후에도 진하사 및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종묘제례 때 인의인헌관(引儀引獻官)과 영릉 제조 및 판돈녕원사, 책비시정사(冊妃時正使)를 지냈으며 잔치가 있을 때마다 대표로써 술잔을 올리는 등 왕실 행사마다 종친 큰 어른으로 왕성히 활동했다.[6]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명성황후 완화군 황후 · 친왕 추봉 등에도 큰 역할을 했다.

1899년( 광무 3년)에는 장산회사 사장으로 추대받았다. 장산회사는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뒤의 산맥을 판 뒤 바닷물을 통하게 해서 선박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게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회사였다.[7]

교육 활동도 활발히 했다. 1908년( 융희 2년) 1월에는 교육, 산업발달을 주 목적으로 세워진 애국계몽단체 ‘기호흥학회’에 특별찬성회원(特別贊成會員)으로 참가했다. 그해 5월에는 집에 사숙(私塾)을 세웠고[8], 9월에는 영선군 이준용이 세운 돈명학교에 만원을 기부했다.[9]

3. 사망과 이후

1909년( 융희 3년) 초부터 지병을 앓다가 그해 10월 3일 밤에 한성부 자택에서 별세했다. 당시 태상황이었던 고종이 직접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시호 효헌(孝憲)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 영종정경부사 직위를 추증받았다. 《 황성신문》에 따르면, 발인은 같은달 11일 오후 6시에 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당시 《 승정원일기》에서 그를 ' 저하(邸下)'라 칭하고, 그의 죽음을 ' 훙서(薨逝)'라 표현했다. # 고종의 직계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의 경칭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의 묘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 67번지에 있다. 한동안 잊힌 채 위치를 몰랐는데 2013년 경 안산향토사연구소에서 발견했다. 후손들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는지 봉분 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정도라고.(...) #

4. 후손

19세에 진주 류씨 류원기의 딸(1832 ~ ?)과 혼인했다. 류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 3명을, 측실에게서 아들 1명을 두었다.

장남은 인양군 이재근(1857년 ~ 1896년)이고 차남은 이재현(1870년 ~ ?)인데 완평군의 생가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해 종친 자격을 잃어[10] 봉군되지 못했다.[11] 3남은 의양군 이재각(1874년 ~ 1935년), 막내 아들이자 첩실 소생은 예양정 이재규(1877년 ~ ?)이다. 인양군, 의양군, 예양정에 대한 내용은 각 문서 참조.

5. 매체에서


[A] 위키백과에서는 ' 자(字)'로 소개한다. # [2]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 [3] 단, 풍계군 역시 은전군의 양자이다. 생부는 은전군의 형 은언군. [A] [5]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 [6]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완평군 이승 흥선대원군 이하과 같은 항렬이다. 즉 임금(고종)에겐 아저씨뻘인 서열 높은 종친이었다. [7] 출처: 1899년(광무 3년) 09월 14일 자 《 독립신문》, 1899년 12월 16일 자 《 황성신문》. [8] 출처: 1908년(융희 2년) 5월 8일 자 《 대한매일신보》. [9] 출처: 1908년(융희 2년) 9월 4일 자 《 황성신문》. [10] 완평군의 생가는 언급했듯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11] 다만, 1899년( 광무 3년) 9월 22일 자 《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이재현도 봉군하려 했으나 완평군이 사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