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노론 송시열과 소론 윤증 간 1681년에 있었던 회니시비에 대해 1716년 병신년(숙종42) 국왕인 숙종이 판정을 내린 처분이다.2. 회니시비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은 그 어미가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가지고 거업(擧業) 을 폐하고 장수(藏修) 하였으나, 윤선거의 명으로 젊었을 때부터 송시열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송시열이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일찍이 빙소(聘召) 를 받았으니, 사망(士望)이 성(盛)하여서 도통(道統)을 전승(傳承)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윤선거가 죽자,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청하고 이어 소맷속에서 그 아비가 기해년 사이에 일찍이 송시열에게 보내려 하였던 편지를[1] 꺼내어 보였다. 글 속에 윤휴·허목·조경·홍우원 등을 써야만 하고 버릴 수 없음을 성칭(盛稱)하였으므로, 송시열은 더욱 윤선거에 대하여 의심이 없을 수 없어서 갈문(碣文)을 지음에 있어 스스로 입언(立言) 하려 들지 않고 다만 박세채가 지은 행장(行狀)의 말을 인용하여서 이를 맺었다. 윤증이 고쳐 주기를 청한 곳이 서너 군데 있었으나 송시열은 오히려 하나도 그 뜻에 따르지 않았으니, 윤증이 비로소 이를 원망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경신년에 미쳐 송시열이 해상(海上)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니, 상하(上下)가 모두 존신(尊信)하기를 시귀(蓍龜) 같이 하였다. 이때에 대옥(大獄) 이 비로소 끝나서 사류(士類)가 대거 진출(進出)하였다. 그런데 훈귀(勳貴)의 여러 신하가 하는 행동이 왕왕(往往) 사람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함이 많았으니, 나이 젊은 후진(後進)이 스스로 청의(淸議)라고 칭탁(稱托)하여 공격하고 배척하였으나, 음(陰)으로 다른 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하여 송시열의 무리가 혹시 그 안의 좌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은밀한 곳에서 비방하여 말하였다. 윤증은 본래 송시열에게 원한을 쌓은 것이 있는데다가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송시열의 고제(高弟)로서 진작 스스로 배반하지 않았다가 훗날에 송시열이 패(敗)하면 화(禍)가 반드시 몸에 미칠까 두렵게 여겨, 소배(少輩)에게 몸을 던져 영합(迎合)하고 문호(門戶)를 분립(分立)하여서 논의(論議)를 주장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이 본래 엄준(嚴峻)하여 남의 안색(顔色)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로써 격동(激動)하기 쉬움을 알므로, 그 부질(婦姪)로서 송시열의 외손(外孫) 되는 자를 대하여 송시열의 과실(過失)을 차례로 세어서 이를 송시열에게 들리게 하고, 이어 박세채에게 글을 보내어 왕패(王霸)·의리(義利)·기관(機關) 등의 설(說)을 가지고 송시열을 힘써 저훼(詆毁)하였다.[2] 송시열의 손자에 박세채의 사위 되는 자가 있어 그 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송시열에게 말하자, 송시열이 자제(子弟)들에게 경계하여 누설되지 말게 하였으나, 문하생(門下生)이 차츰 이 말을 듣게 되었으니, 최신(崔愼)이 맨먼저 상소하여 그 일을 발설(發說)하였었다.
숙종 10년(1684년) 5월 13일, 숙종실록
윤선거가 죽자,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청하고 이어 소맷속에서 그 아비가 기해년 사이에 일찍이 송시열에게 보내려 하였던 편지를[1] 꺼내어 보였다. 글 속에 윤휴·허목·조경·홍우원 등을 써야만 하고 버릴 수 없음을 성칭(盛稱)하였으므로, 송시열은 더욱 윤선거에 대하여 의심이 없을 수 없어서 갈문(碣文)을 지음에 있어 스스로 입언(立言) 하려 들지 않고 다만 박세채가 지은 행장(行狀)의 말을 인용하여서 이를 맺었다. 윤증이 고쳐 주기를 청한 곳이 서너 군데 있었으나 송시열은 오히려 하나도 그 뜻에 따르지 않았으니, 윤증이 비로소 이를 원망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경신년에 미쳐 송시열이 해상(海上)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니, 상하(上下)가 모두 존신(尊信)하기를 시귀(蓍龜) 같이 하였다. 이때에 대옥(大獄) 이 비로소 끝나서 사류(士類)가 대거 진출(進出)하였다. 그런데 훈귀(勳貴)의 여러 신하가 하는 행동이 왕왕(往往) 사람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함이 많았으니, 나이 젊은 후진(後進)이 스스로 청의(淸議)라고 칭탁(稱托)하여 공격하고 배척하였으나, 음(陰)으로 다른 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하여 송시열의 무리가 혹시 그 안의 좌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은밀한 곳에서 비방하여 말하였다. 윤증은 본래 송시열에게 원한을 쌓은 것이 있는데다가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송시열의 고제(高弟)로서 진작 스스로 배반하지 않았다가 훗날에 송시열이 패(敗)하면 화(禍)가 반드시 몸에 미칠까 두렵게 여겨, 소배(少輩)에게 몸을 던져 영합(迎合)하고 문호(門戶)를 분립(分立)하여서 논의(論議)를 주장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이 본래 엄준(嚴峻)하여 남의 안색(顔色)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로써 격동(激動)하기 쉬움을 알므로, 그 부질(婦姪)로서 송시열의 외손(外孫) 되는 자를 대하여 송시열의 과실(過失)을 차례로 세어서 이를 송시열에게 들리게 하고, 이어 박세채에게 글을 보내어 왕패(王霸)·의리(義利)·기관(機關) 등의 설(說)을 가지고 송시열을 힘써 저훼(詆毁)하였다.[2] 송시열의 손자에 박세채의 사위 되는 자가 있어 그 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송시열에게 말하자, 송시열이 자제(子弟)들에게 경계하여 누설되지 말게 하였으나, 문하생(門下生)이 차츰 이 말을 듣게 되었으니, 최신(崔愼)이 맨먼저 상소하여 그 일을 발설(發說)하였었다.
숙종 10년(1684년) 5월 13일, 숙종실록
"처음에 윤증이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겨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훗날 도(道)를 전하는 것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비문(碑文)의 일에 미쳐 송시열이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고, 또 목천(木川)의 부로(俘虜)의 설(說)로 인하여 윤증이 또한 송시열의 문하(門下)됨에 의심이 없지 않아 서 늘 통박(痛迫)의 뜻을 품어 반드시 글을 만들어 〈사제(師弟)의 의(義)〉를 끊음을 고히고자 하였으나, 박세채(朴世采)가 그 옳지 않음을 극진히 말하였다. 뒤에 윤증이 내질(內姪)인 권생(權生)이라는 자와 더불어 말한 바가 있었는데, 권생이 또한 송시열의 외손(外孫)이 되므로 곧 이 말을 송시열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그리하여 사림(士林)이 떠들썩하게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윤증이 그 스승을 끊었다고 하였으니, 박세채가 이를 듣고 여러 번 글을 보내어 묻고 이어 속히 나아가 사과(謝過)하게 하였다. 윤증이 드디어 정의(情義)가 간격을 두어 막히게 된 까닭을 서술하여 글을 만들어서 박세채에게 보내고, 박세채는 글을 받았으나 비밀로 하여 발설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손자에 박세채의 사위되는 자가 있어, 이를 박세채의 상자 속에서 얻고 이어 중외에 전파하였으니, 드디어 한 세상의 큰 시비거리가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과 간찰(簡札)을 왕래한 후에 이르러, 송시열은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도적 윤휴(尹鑴)를 끊지 않은 것을 가지고 지론(持論)이 매우 긴박(緊迫)하였고, 또 윤증의 어미의 죽음이 윤선거에게서 말미암은 것을 말하여서 투부(妬婦) 의 비명(非命)의 죽음에 비기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있어 사류(士流)가 모두 송시열의 말에 불평하였다. ......
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숙종실록보궐정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살던 충청도
회덕(懷德)[3], 그리고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4] 두 지명의 앞글자를 따서 명명된 논쟁으로,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 때문에 그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을 말한다.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5] 남인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송시열은 한때 윤휴의 학문의 깊이를 높게 평가했으나, 윤휴가 주자의 책에 대해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다. 또한 윤선거는 송시열이 현종 때 윤휴와 예송 문제로 불화를 빚자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윤선거는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둘 사이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669년, 윤선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며 박세채가 찬한 행장과 함께 기유의서를 동봉하여 보내자, 송시열은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짓고,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돌아왔다는 식으로 폄하했다. 이에 윤증은 여러 번 묘갈문의 내용에 대한 개정을 요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약간의 자구만을 수정할 뿐 그 내용의 개정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결국 윤증은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등을 돌렸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의 편지를 보내려다 박세채의 만류로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몰래 베끼어 송시열에게 전했다.
1684년 4월 최신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스승을 배반한 죄로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됐다. 윤증의 친우 나양좌와 친구 박세채 등은 그를 옹호했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했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신(臣)의 스승인 봉조하(奉朝賀) 신(臣) 송시열(宋時烈)은 학문이 순정(純正)하고 도덕이 광대(光大)하여 팔방의 선비가 태산북두처럼 바라보아 왔습니다. ...... 전 대사헌(大司憲) 윤증(尹拯)은 산림(山林)에 발붙여 선비라 자처하면서 속으로는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송시열을 헐뜯는 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내어 방자하게 송시열을 욕하였는데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하고 흰 것을 가리켜 검다 하였는데, 그 글이 온 세상에 가득히 전파되었습니다. ......
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 숙종실록
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 숙종실록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최신(崔愼)이 상소(上疏)하여 윤증(尹拯)을 공격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로 이에 답하였다. 송윤(宋尹)[6] 의 득실(得失)은 이미 피차(彼此)의 서(書)와 소(疏)가 있으니, 공정(公正)한 눈을 가진 자는 스스로 마땅히 이를 알게 마련이다. 유문(儒門)에서 그 학도(學徒)를 조종(操縱)하여 분연(紛然)히 투소(投疏)하여 사람을 헐뜯어 욕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풍습(風習)이 아닌데도 송시열이 이를 금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괴이한 무리가 걸핏 하면 스승을 소송한다고 일컬어 소장(疏章)을 공거(公事)에 바쳐서 한판의 싸움을 이루었으니 군자(君子)가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0년(1684년) 4월 29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중앙 정계에서는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된 가운데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며 정국을 주도하다가, 1701년 이른바 무고의 옥으로 장희빈의 처벌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는데, 숙종의 강력한 탕평 의지로 정국이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후 1710년, 소론 최석정의 예기유편(禮記類編)을 놓고 노론이 '이는 주자를 경시하고 주자의 학설에 어긋난 것'이라며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 노론-소론 대립이 격화됐다. 이는 최석정이 예기의 구절들과 편들을 일부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데에 이어 예기를 대학에서 독립된 경전으로 뺐던 주자와 달리 예기를 다시 대학의 한 편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는 거의 트집에 가까운 논리로, 예기유편에 의한 이 공박은 학문적 문제보다는 사실상 정치적 문제에 가까웠다. 어쨌든 여기서 예기유편의 판각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는 것으로 정리되면서, 노론 세력에게 점차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3. 서인 내부의 대립 격화와 병신처분
노론과 소론은 1711년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으로 다시 대립했다. 가례원류는 병자호란 직후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가례에 관한 글들을 정리한 것인데,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간행을 주도하고, 노론의 권상하가 서문을, 정호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에 논란이 일자, 숙종은 책을 확인한 뒤 정호가 윤증을 비난한 것은 잘못이라 판정하고 정호를 파직시킨 한편 발문을 쓰지 못하게 했다.이 즈음하여 회니시비가 조정 내 노론-소론 대립으로 확대되자, 숙종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중하고 스승은 경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윤증을 옹호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노론을 처벌하는 등 소론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힘입어 소론의 공격이 심해졌다. 그러자 1716년(병신년), 김창집을 필두로 한 노론의 공격이 지속되며 숙종은 윤증의 신유의서와 송시열의 묘갈명 등을 검토한 후, "윤증의 말이 송시열을 억누르는 것이 너무 많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동시에 앞서 빼도록 지시한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도록 했고, 윤증에 대해서는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하도록 했다. 이를 병신처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윤선거 문집의 훼판[7]까지 주도한 김창집은 소론의 계속된 공격을 받게 되었으나, 동생 김창흡은 그에게 편지하여 행적을 옹호하고 적극적인 출사를 권유하였다. [8]
송시열과 윤증이 절연하게 된 전말을 아뢰고 스승인 윤증을 옹호한 최석문 등의 상소문
비문(碑文)을 지을 때에 평생을 두루 서술하였으나 총론(總論)하는 말에 있어서는 평소에 칭찬하던 것으로 하지 않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단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의 말을 빌려서는 박화숙(朴和叔)이 말하였다고 끝맺었습니다. 화숙은 박세채의 자(字)입니다. 명(銘)에 있어서는 다시 구설(舊說)을 전하여 기술할 뿐이고 새로 짓지 않은 채 질질 끌었습니다. 진실로 그 마음에 불평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소략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여러 번 왕복하여 고쳐주기를 바랐더니 송시열은 단지 두세 자를 점철(點綴)하고 말 뿐이었으므로, 신의 스승이 비로소 다시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숙종 42년(1716년) 3월 3일, 숙종실록
비문(碑文)을 지을 때에 평생을 두루 서술하였으나 총론(總論)하는 말에 있어서는 평소에 칭찬하던 것으로 하지 않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단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의 말을 빌려서는 박화숙(朴和叔)이 말하였다고 끝맺었습니다. 화숙은 박세채의 자(字)입니다. 명(銘)에 있어서는 다시 구설(舊說)을 전하여 기술할 뿐이고 새로 짓지 않은 채 질질 끌었습니다. 진실로 그 마음에 불평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소략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여러 번 왕복하여 고쳐주기를 바랐더니 송시열은 단지 두세 자를 점철(點綴)하고 말 뿐이었으므로, 신의 스승이 비로소 다시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숙종 42년(1716년) 3월 3일, 숙종실록
윤증의 문인인 전 세마 최석문의 상소에 대한 논평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운운 【위에 보인다.】 하였다. 최석문 등이 제 스승이 무함받는 것을 목격하고 망극(罔極)하여 임금에게 신리(伸理)를 호소한 것은 비록 고도(古道)가 아니기는 하나 근세의 관례를 따라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만을 말하지 않고 신유년의 의서(擬書)를 곧바로 발론한 것은 제 스승의 마음과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어서 윤증은 스승·제자의 본분을 아직 끊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은 혈기(血氣)의 흠이 점점 심술(心術)의 병통이 되어 도(道)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으면서도 다만 범하지 않는다는 의리만 지켰고, 또 그가 쓴 묘문(墓文)에서 조종(操縱)한 것도 하나의 음양(陰陽)의 수단이므로 중간의 곡절이 상정(常情)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윤증이 이미 경험으로 겪어서 깨달은 것이 더욱이 몸소 간절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더욱 심하여졌고, 그래서 진실로 차마 그가 속여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의서(擬書)를 지어서 충고(忠告)하고 스스로 비간(比干) 이 간쟁(諫諍)하다가 죽은 일을 좇아 따랐다. 비록 그 처지로서는 경계하는 듯한 혐의가 있고 그 입설(立說)은 절박한 흠이 있기는 하나, 원래 그 뜻은 또한 아닌게 아니라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니, 정녕 반복하여 다행히 한 번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을 도의(道義)의 교분에서 헤아려 생각하면서 그 시의(時義)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무명 상자 가운데에 숨겨둔 채 일찍이 자제나 문생에게 널리 퍼뜨리지 않았으니, 윤증의 뜻을 또한 알 만하다.
최석문으로서는 변명하여야 할 무함만을 변명하고 이것에까지는 소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우리를 편들고 저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를 타서 이 글을 드러내서 임금이 송시열의 병폐를 환히 알게는 하였으나 그것이 제 스승이 평소에 숨겨둔 깊은 뜻에 어그러짐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침내는 임금의 마음이 따라서 변하게 되고 국시(國是)가 전도되어 장래의 화(禍)가 저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일을 헤아리는 것이 사정(事情)에 어둡고 말을 내는 것이 망령됨이 심하구나. 아! 이 글을 소 가운데에 베껴서 아뢴 것이 본디 큰 잘못이거니와, 그 남겨 간직했던 것을 드러내어 끝내 숨기지 않은 것은 또한 윤가(尹家) 자제의 허물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숙종 42년(1716년) 3월 3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운운 【위에 보인다.】 하였다. 최석문 등이 제 스승이 무함받는 것을 목격하고 망극(罔極)하여 임금에게 신리(伸理)를 호소한 것은 비록 고도(古道)가 아니기는 하나 근세의 관례를 따라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만을 말하지 않고 신유년의 의서(擬書)를 곧바로 발론한 것은 제 스승의 마음과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어서 윤증은 스승·제자의 본분을 아직 끊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은 혈기(血氣)의 흠이 점점 심술(心術)의 병통이 되어 도(道)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으면서도 다만 범하지 않는다는 의리만 지켰고, 또 그가 쓴 묘문(墓文)에서 조종(操縱)한 것도 하나의 음양(陰陽)의 수단이므로 중간의 곡절이 상정(常情)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윤증이 이미 경험으로 겪어서 깨달은 것이 더욱이 몸소 간절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더욱 심하여졌고, 그래서 진실로 차마 그가 속여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의서(擬書)를 지어서 충고(忠告)하고 스스로 비간(比干) 이 간쟁(諫諍)하다가 죽은 일을 좇아 따랐다. 비록 그 처지로서는 경계하는 듯한 혐의가 있고 그 입설(立說)은 절박한 흠이 있기는 하나, 원래 그 뜻은 또한 아닌게 아니라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니, 정녕 반복하여 다행히 한 번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을 도의(道義)의 교분에서 헤아려 생각하면서 그 시의(時義)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무명 상자 가운데에 숨겨둔 채 일찍이 자제나 문생에게 널리 퍼뜨리지 않았으니, 윤증의 뜻을 또한 알 만하다.
최석문으로서는 변명하여야 할 무함만을 변명하고 이것에까지는 소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우리를 편들고 저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를 타서 이 글을 드러내서 임금이 송시열의 병폐를 환히 알게는 하였으나 그것이 제 스승이 평소에 숨겨둔 깊은 뜻에 어그러짐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침내는 임금의 마음이 따라서 변하게 되고 국시(國是)가 전도되어 장래의 화(禍)가 저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일을 헤아리는 것이 사정(事情)에 어둡고 말을 내는 것이 망령됨이 심하구나. 아! 이 글을 소 가운데에 베껴서 아뢴 것이 본디 큰 잘못이거니와, 그 남겨 간직했던 것을 드러내어 끝내 숨기지 않은 것은 또한 윤가(尹家) 자제의 허물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숙종 42년(1716년) 3월 3일, 숙종실록보궐정오
4. 결과와 평가
1684년 최신이 신유의서를 가지고 윤증을 처벌할 것을 간한 이래 32년 간 지속된 회니시비는 사제 간의 사사로운 분쟁이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병신처분은 극에 달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 국왕이 직접 관여하여 노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국왕의 판정으로 소론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위축되었다. 한편 사문의 시비에까지 국왕이 판정했다는 점에서,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강조하기도 했던 군사(君師)로서의 숙종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1]
기해의서를 말한다.
[2]
신유의서를 말한다.
[3]
회덕현 외남면 소제리, 現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
[4]
이성현 장구동면 유봉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5]
논산(연산)의 광산 김씨, 논산 노성(이산)의 파평 윤씨, 회덕의 은진 송씨를 일컬어 호서 3대족이라 했는데, 연산의 광산 김씨는
김장생,
김집 부자를 배출한 서인의 유력가문이었고 (김장생, 김집의 제자가 송시열), 회덕의 은진 송씨는 노론 거두
송시열,
송준길, 이산의 파평 윤씨는
윤선거와 송시열과
회니시비를 다툰 소론
윤증 부자등을 배출한 서인 명문가였다. 이 일대 호서지방은 전통적으로 서인 유력가문의 세가 강한 지역으로 김장생으로부터 이어진 학맥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6]
송시열과 윤증
[7]
인쇄에 쓰는 활자판을 훼손하는 것.
[8]
훗날의 이야기지만 이 권유를 적극 수용한 형 김창집은
신축환국에서 사약을 받고 만다. 어찌보면 김창집 만이 아니라 동생 김창흡도 아버지의 유언을 형제가 모두 무시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