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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6:53:52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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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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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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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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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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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박탈]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윤치호
尹致昊 | Tchi Ho Yun[2]
'Baron Yun'이었다고 한다.]
파일:1510_500.jpg
이름 <colbgcolor=#fff,#1f2023>윤치호 (尹致昊, Tchi Ho Yun)[3]
이토 치코 ([ruby(伊, ruby=い)][ruby(東, ruby=とう)][ruby(致, ruby=ち)][ruby(昊, ruby=こう)])
출생 1865년 1월 23일
( 음력 1864년 12월 26일)
충청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
(現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신촌[4])
사망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경 (향년 80세)
경기도 개성부 고려정[5]
(現 개성시 고려동)
뇌일혈 중풍, 노환으로 인한 사망
직업 교육자, 정치가 등
주요 경력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제2대 사장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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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2861><colcolor=#fff> 본관 해평 윤씨(海平)
성흠(聖欽 또는 成欽)
좌옹(佐翁)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교)
학력 중서서원[6]
밴더빌트 칼리지
에모리 대학교 신학과
소속
[[독립협회|]]
작위 조선귀족 남작[박탈]
가족관계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 이씨
3처 2첩
슬하 6남 9녀
저서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파일:external/photohs.co.kr/PIC195.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교회 소재 초상화

1. 개요2. 소개3. 생애4. 가계5. 저서6. 어록7. 사상적 측면8. 애국가 작사자 논란
8.1. 부정론8.2. 긍정론
9. 기타10. 미디어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양면을 너무 많이 보니까요.
–1884~1905년, 유길준과 교류하며 나눈 대화.[8]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교육자, 정치가, 번역가, 개신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자(字)는 성흠(聖欽), 호는 좌옹(佐翁), 본관은 해평(海平).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2. 소개

개화파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중 한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된다. 그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독립한 것을 보게된 같은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필립 제이슨, 안창호, 유길준 등의 계몽론자와 맥을 같이하였으나 잔혹한 국제정세와 대중들의 무질서와 무지, 부패한 관료, 감정적인 행동과 파벌싸움, 사농공상, 문존무비 사상에 염증을 느껴 서서히 계몽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비슷한 시대의 흑화한 계몽론자였던 박중양, 이규완과도 다소 달랐다. 그와 성향이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길 기도했다. 반면 윤치호는 오래 묵은 풍습이 잘못됐을 뿐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언론 계몽 활동 등으로 조선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현실의 벽에 막혀 일제 말기에는 일본의 악의적인 지배를 통해서라도 바뀌길 기도할수 밖에 없다고 타협하게 된다. 이규완은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측면에서 윤치호는 이규완의 실력 양성론과는 유사했지만 현 세대의 조선인 스스로 참정권과 자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윤치호의 삶은 양면성을 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외무협판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중추원 참의 자리를 회피하거나 사양하는 등 일제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한국의 구습을 혐오하고 자기식 합리주의를 유지하면서 어리석은 일반 백성들을 비웃었지만 동시에 안타깝게 여기고 동정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한국의 식자층을 혐오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친분을 쌓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내용과 존재를 누설하지도 않았지만 협조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강력한 힘과 일제 식민 통치의 악랄함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청년 시절 당한 인종차별 백인 혐오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판단을 상실하고 일제에게 협조하였다. 민중과 국본을 수탈한 일제의 통치를 꺼리면서도 말년엔 일제의 위협에 어느 정도 굴복하였고, 서구의 합리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서구를 적대시했다. 독립운동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행보를 같이했고, 사후에는 이러한 이중적 행적을 근거로 독립유공자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동시에 올랐다.[9]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살려 번역가로도 활동했는데 '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본'[10]과 1908년 ' 걸리버 여행기', 아이소포스의 ' 이솝 우화'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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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가계

파일:yoon_tree.jpg

본래 윤치호의 9대조 윤두수가 선조 시절 영의정을 역임한 이후 그 후대들은 관직에서 점차 멀어졌으나 증조부 윤득실과 조부 윤취동 대에서 가문의 부흥이 성공하였고 본인과 형제들, 사촌들이 조부 때 일어선 가업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등 교육을 이수받아 의사, 교수 같은 전문직이나 정치가가 되었다. 허나 당대 유력가문이었다는 것 자체가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3처 2첩[11]을 두었으며 자녀가 많아서 6남 9녀를 뒀다. 자녀들에게는 저마다 영어식 별칭을 함께 지어주었다.[12] 이걸 보면 가계도가 굉장히 복잡하게 나온다.

5. 저서

5.1. 윤치호 일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 일기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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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尹致昊日記》.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중 1905년 1월 1일부터 1912년까지의 일기는 105인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에 압수된 뒤 실전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다가 영어를 배운 직후에는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일기를 영어로 썼다.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국어로 영어를 번역해 봤자 비슷한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영어로 일기를 썼다.[15] 그의 일기에서 윤치호는 민족 계몽을 위해 필요에 따라 찬송가나 이야기 등을 조선어로 번역하면서도, 영어의 훌륭한 표현을 잘못된 조선어(bad Corean)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우 불만스러워하는 기록을 여러 차례 남겼다. 특히 노래를 번역하면서 그랬는데, 윤치호는 본인이 그렇게 시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간중간 수감 생활이라든지 국내외에서 터진 대형 사건들로 인해 글을 쓸 정황이 아니었던지 등의 이유로 일기가 끊긴 적이 있지만 윤치호는 무려 60년의 세월 동안 죽기 직전까지의 꾸준히 일기를 작성했다. 그의 일기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인간 됨됨이가 어찌되었던 간에 < 윤치호 일기>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일기가 죄다 영어 아니면 한자라는 것. 거기다가 영어로 저술한 부분은 필기체로 날려썼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그의 일기를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번역상의 난해함, 분량 덕분에 윤치호 일기는 국내에 완역이 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한글로 번역된 전문을 모두 읽어보거나 내용을 인덱싱할 수 있다.

5.2. 번역서

윤치호는 1908년 번역서로 처음 이솝 우화의 첫 한글 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하여 찬미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6.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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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상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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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애국가 작사자 논란

윤치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오랜 논쟁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이다. 이전부터 작자 미상으로 분류되던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는 했다.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인물 중 1명이다. 윤치호 작사설에는 여러 문헌적 근거가 있지만 본인의 친일 행적에 발목이 잡힌다. 반대로 안창호가 작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안창호 스스로가 애국가 보급에 힘썼다는 점은 있으나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안창호 설은 후대에나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애국가 작사되었다고 추정되는 당시 안창호가 윤치호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에 대한 의견이 갈려 토론하는 것을 봤다는 증언, 대성학교의 원장과 실무자 관계였다는 점, 변절 이후에도 안창호에 대한 우정과 협력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어 ‘공동작사이나 당시 상황 때문에 윤치호의 이름으로 공개했으며 이후 서로가 처한 상황 때문에 원작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침묵하게 되었다’는 공동작사설도 있다. 독립운동 당시에도 원작자가 누구인지 논란이 있었으나 서로 누가 원작사자인지 침묵했다.

8.1. 부정론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가 맞다는 주장의 대표적인 증거로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보유한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와 1908년 발행한 찬미가라는 책이 제시된다. 친필 애국가 가사에는 1907년 작사했다고 나오며 본인이 쓴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작성 연도가 1945년 9월이라는 점이다. 이 시점은 윤치호가 친일파로 극딜을 당하던 시점이라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찬미가는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역술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윤치호 작사자 설을 지지하는 측은 역술도 폭넓게 저작자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주장하나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에도 본인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 것을 역술로 표기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찬미가에 수록된 노래 가사들은 대부분 의역한 미국 찬송가들이 수록되어 있는만큼 애국가 작사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면 방대한 《 윤치호 일기》 속에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도 상당히 수상한 대목이다. 윤치호 자신이 친필로 적은 시점으로 주장한 1907년은 물론이고 어느 시점에서도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3.1 운동에 대해서 윤치호는 철없는 것들이 독립운동한다고 난리친다고만 적었을뿐 정작 당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것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 과연 자기가 작사한 노래라면 아무 감흥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다 못해 "내가 왜 저런 노래 가사를 써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선동당하게 만들었나?"라는 식으로 태클이라도 넣어야 정상적일 것인데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 측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말도 못 꺼낸 것이라 반박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제가 자기네들에게 협조하던 윤치호의 일기까지 검열할 정도는 아니었다.[17]

찬성 측에서는 미주 지역에서 애국가에 대해 '윤치호가 작사하고 안창호가 크게 개선했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였다'라는 자료를 제시하고 1950년대 한국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명기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기도 하나 이것 역시 의문의 대상이 된다. 애국가의 정확한 작사자를 알지 못해서 가장 인지하기 쉬운 윤치호를 작사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 정부가 윤치호 작사로 명기한 자료가 있기는 하나 수십 년 동안 작자 미상으로 정부가 공식 입장을 정한걸 생각해보면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윤치호 작사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 보급 운동에 참여했던게 와전된게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윤치호가 말한 1907년이라는 시점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교육 활동을 하던 시점인데 안창호는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윤치호가 1908년 발간된 찬미가에 애국가를 수록한 것도 해명이 될 수 있다.

8.2. 긍정론

1908년 발간된 찬미가(찬송가)[18]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뿐만 아니라 여러 증거가 있다. 일정 시기 소위 무궁화 곡[19]이 수록된 창가집에서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으며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다. # 미국에서 발견된 무궁화 노래집을 보면 무궁화 곡의 작사자는 윤치호로 되어 있다.[20]

애국가 창작 열풍도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을 시작으로 있었고 이 결과물로 1902년 나온 것이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실제로 널리 퍼진 것은 대한제국 애국가 이전 창작된 곡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애국가는 그렇게 불린 곡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곡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유명했던 1880년대 배재학당 버전 무궁화가 등은 황제 황실을 찬양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었는데 공화주의를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식으로 선택된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최초로 가창한 이후 120여 년[21],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은 1940년으로부터 기나긴 세월 동안 불려져왔고 또 한국 정부가 인증한 시기만 따져도 사용 기한이 100년을 향해 달려가는 안익태ㆍ윤치호 애국가를 바꾸는 사안도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인데 윤치호는 정부가 공인하고 낙인을 찍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가사의 공모 비용과 보급, 국민들을 향한 재교육, 새 작사가의 사상 검증 건도 만만치 않으며 접수받은 신 버전 애국가 중 특정 하나를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도 너무나 고단한 일이다.[22]

이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광복한 직후 1950년대부터 나오던 논란인데 당시에도 있었던 논란을 반 세기가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직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은 이러한 속사정이 있던 것이다.[23] 그래서 정부, 학계의 주류 사학자들, 근현대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애국가의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둔 채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9. 기타

10. 미디어

11. 둘러보기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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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가 박탈되었다. [2] 개정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Yun Chiho. J. E. Fisher에 따르면 영문 이름은 [3] 본인이 일기장이나 외국인에게 보내는 서한 등에 이렇게 표기했다. 연희전문 교수 였고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J. E. Fisher에 의하면 한국 이름의 발음이 불편한 외국인들을 위해 윤치호가 사용한 영문 이름은 '배론 윤(Baron Yun)'이었다고 한다. [4] 新村, 새말 [5]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은 이 행정구역에서 부(행정구역) 시(행정구역)/대한민국로, 정(町) 동(행정구역)으로 변경한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이다. [6] Anglo-Chinese School. 감리회 계열 미션스쿨이며, 오늘날까지도 ACS International로 명맥을 잇고 있다. [박탈] [8] Kenneth M. Wells, New God, New Nation : Protestants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 1896-1937,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p. 69 [9] 이후 독립유공자 목록에서는 빠졌다. [10] 찬송가의 처음 번역된 이름은 찬미가였다. [11] 본처인 전주 강씨, 청나라 출신인 마애방, 백매려. 2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의 출생 순서를 고려할 때 재혼은 없다. [12] 윤치호 본인의 은사나 주변 지인들의 이름에서 따서 짓는 경우가 많았다. [13] 원 명칭은 우순 소리이다. 이솝 우화의 내용 중 일부를 실었다. [14] 윤치호가 손수 번역한 문법용어들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주어/술어’를 ‘주장사/설명사’로, ‘타동사/자동사’를 ‘월과동사/불월과동사’로, ‘조동사/본동사’를 ‘보조동사/원동사’로, ‘1/2/3인칭’을 ‘아인/미인/피인’으로, ‘가정법’을 ‘만약법’, ‘accent’를 ‘고성점’, ‘apostrophe’를 ‘소유점’으로 부르고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는 1~3형식까지만 인정하며, 4형식과 5형식은 인정하지 않고 1~3형식의 응용형으로만 본다. 문장의 통사론적 구조를 시각화해서 보여주기 위해, Tree Diagram이 나오기 전 영미권 언어학계에서 자주 쓰였던 Reed-Kellogg 다이어그램을 일부 개량한 형태로 곁들여서 설명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책의 예문에는 윤치호의 성향상 기독교적 예문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일부 반일적으로 보이는 예문들도 들어가 있는데, "I am a Korean and you are a Japanese.", "Korea, and not the Koreans, is what they want." 등이 그 예시다. 이 책은 교과서로 인가받지는 못했으나 민간에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 [15] 윤치호는 영어 사전까지 만들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 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1911년 저술한 적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고 한다. [16] 단, 최남선이 최초 번역자라는 설도 있다. [17] 그러나, 자기 집안 치부에서는 침묵 그 자체이었던 수준이다보니, 찾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18] 총 15곡이 수록됐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번역곡들이였으나 애국가와 가사가 거의 동일한 무궁화 곡 및 애국가 계열 3곡만 고유명사가 사용된 번역곡이 아니었다. [19] 가사가 현 애국가와 거의 같다 [20] 무궁화 노래집에는 안창호의 ' 한반도가'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21] 심지어 이 때는 안익태의 작곡 대신 올드 랭 사인의 곡조와 윤치호의 가사만 있던 시절이었다. [22] 주소지를 바꾸는 도로명주소 하나만으로도 2014년 시행 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진통을 앓고 있는 것이 현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국가의 작사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의 공표와 교체는 후폭풍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조차 힘들다. [23] 한편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논란에 3.1 운동이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시작했으니 작사자는 문제될 것 없다고 발언했다. [24] 이완용이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이고 이 만민공동회 역시 관민 공동회에 관원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다. 애초에 독립협회도 정부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고종과 대립하던 시기 등을 쪼개서 봐야하며 그 배경 역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25] 순종황제의 아내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한일 합방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옥새를 치마에 숨겼는데, 이걸 삼촌인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 뒤로 윤덕영은 시종원경과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26] 일각에서는 윤치호를 반공주의 자유주의자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무엇보다 전체주의 국가에 충성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로 절대 볼 수 없으며, 그의 동양주의 사고관은 다이쇼 로망이나 아시아주의에서 근거한 것이 아닌 철저한 인종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생전 민중 혐오와 우생학에 가까운 인종 혐오 발언과 서술을 쏟아냈으며, 이러한 것은 결국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당시의 편협한 사고관에 갇힌 근대 시기 인텔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27] 이 부분은 박중양의 친일적 사고관과 비슷하다. [2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속. [29] 이밖에도 윤치호가 직접 참여하거나 개인의 소회를 저술한 영역은 스포츠, 양의학, 유학, 장례문화 등 워낙에 방대하기 때문에 사학자들이 아닌 문학, 사회학, 기독교계, 예체능계 등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다만 열거한 분야들에 전문성이 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한때는 민권 운동을 하였던 그였기 때문에 인텔리 계층의 근대 개념 인식에 대해 탐구하는 방향으로 연구된다. # [30] 다만 이는 윤치호 개인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처사가 아닐 수가 없는 게, 적어도 윤치호는 민중 혐오 발언을 남겼지만 대부분이 남들이 볼 일이 없는 일기에 남긴 것이며 이는 즉 그러한 혐오감을 공개적으로 분출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반증이다. 그가 교육과 계몽 운동에 힘쓴 공적과 함께 생각해보면 이는 자국에 대한 애증에 가까운 것으로, 일방적이고 극단적인 혐오 및 매국 성향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일기내 그의 사상과 일진회에 대한 관점을 보면 보면 알다싶이 윤치호에게 자국 혐오 성향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숨어서 감정섞인 비방을 밖으로 표출하는 소인배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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