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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21:43:43

윤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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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2929><colcolor=#fff> 조선 중추부지사
윤취동
尹取東
출생 1798년 7월 18일
사망 1863년 12월 21일 (향년 65세)
본관 해평 윤씨[1]
조상 7대조 윤두수
부모 윤득실 (1768 ~ 1805)
남양 홍씨 (1765 ~ 1816)
형제 큰형 윤교동 (1786 ~ 1829)
작은형 윤우동 (1788 ~ 1827)
여동생 해평 윤씨
배우자 고령 신씨 (1797 ~ 1827)
안동 김씨[2] (1810 ~ 1900)
자녀 장녀 해평 윤씨
차녀 해평 윤씨 (1835 ~ 1920)
장남 윤웅렬 (1840 ~ 1911)
차남 윤영렬 (1854 ~ 1939)
손자 장손 윤치호 (1864 ~ 1945)
차손 윤치왕 (1895 ~ 1982)
삼손 윤치창 (1899 ~ 1973)
장손 윤치오 (1869 ~ 1950)
차손 윤치소 (1871 ~ 1944)
삼손 윤치성 (1875 ~ 1936)
사손 윤치병 (1880 ~ 1940)
장손녀 윤활란 (1884 ~ 1969)
오손 윤치명 (1885 ~ 1944)
육손 윤치영 (1898 ~ 1996)
[clearfix]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향년 65세)

조선 말기의 인물. 본관은 해평(海平). 관직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찬정에 추증되었다. 윤두수의 7대손으로 그의 둘째 아들 윤흔(尹昕)의 6대손이며 윤득실(尹得實)의 아들이다. 윤치호, 윤보선, 윤치왕, 윤치영은 모두 윤취동의 후손이다. 거의 몰락한 윤치호 윤보선 가문이 일어설 토대, 배경을 만든 인물.

윤흔의 아들 윤취지의 5대손으로, 윤세겸(1668~1749)은 본부인에게서 윤옥(1694~1767), 윤학(1710~1770)을 낳고, 소실인 김해김씨에게서 6세에 서자 윤발(1728~1798), 윤침(1729~1785)을 얻었다. 본부인 해주정씨는 1739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윤발의 넷째 아들 윤득실이 그의 아버지.

2. 생애

경기도 수원에 살던 윤발과 윤득실은 그들의 집이 수원성에 편입되면서 보상을 받아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왔다. 그의 할아버지 윤발은 이 일로 잠깐 낭청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윤득실은 통덕랑에 올랐지만 술을 좋아하여 병으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차남이자 윤득실의 손자인 윤영렬은 자기 자손들에게 술을 경계하라 했다고. 이는 윤보선의 회고록이나 윤치영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대목.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 윤교동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한다. 그는 아산군 둔포면으로 분가해서 나가 살았고, 돈을 모아서 땅을 마련하였다. 언제쯤 땅을 마련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대에 그가 마련한 땅이 자손들의 성공의 밑천이 된 것은 확실하다.

본부인 고령신씨에게서 자녀가 없고, 후처 혹은 첩인 안동김씨에게서 두 명의 딸과 아들 윤웅렬, 윤영렬을 두는데 윤웅렬이 윤치호와, 한국의 초기 산부인과의사의 한사람인 윤치왕의 아버지이고, 윤영렬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의 아버지이자 윤보선,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이며 서울대학교 부총장과 총장을 지낸 윤일선의 할아버지가 된다.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아산 염수대에 기도를 드리고 아들이 태어났다 하는데, 43세에 첫 아들 윤웅렬을 얻고 57세에 둘째 아들 윤영렬이 태어났다. 그러나 일설에는 윤영렬은 윤웅렬이 태어나고 3년만에 태어난 3년 터울이라고도 한다.

3. 기타

130년쯤 뒤에 태어나, 당대에 성공한 현대그룹 정주영과 비교되는 인물로, 다만 윤취동은 고아로 자라나서 돈을 모아 땅을 마련하고, 그 땅을 밑천삼아 후손들이 출세하는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서서히 집안을 명문반열로 올려놓은 것이, 당대에 한번에 집안을 일으킨 정주영과 차이점이라면 차이점.
[1] 도제공파(陶齊公派) 19세손 ○동(○東) 항렬이다.( 족보) [2] 김기건(金驥健)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