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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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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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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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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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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초대 국왕
고왕 | 高王
파일:external/www.newscj.com/161127_122262_1648.jpg
고왕 대조영 표준영정[1]
<colbgcolor=#2531a2><colcolor=#fbe673> 출생
(음력)
미상[2]
고구려
사망
(음력)
719년 4월 2일[3]
발해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발해 초대 국왕
698년 12월 ~ 719년 4월 2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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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be673> 성씨 대(大)
조영(祚榮)
부모 부친 걸걸중상
왕비 임씨[4]
형제 동생 대야발
자녀 대무예, 대문예, 대술예, 대호아, 대림, 대보방, 대창발가, 대낭아, 대번
작위 좌효위원외대장군 홀한주도독 발해군왕(渤海郡王) (713년)
묘호 미상
존호 진국왕(震國王, 振國王)[5]
시호 고왕(高王)[6][7][8]
연호 미상[9][10] }}}}}}}}}

1. 개요2. 생애3. 관련 기록
3.1. 《오대회요》3.2. 《구당서》3.3. 《신당서》3.4. 《신오대사》
4. 가족 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발해를 건국한 발해 왕조 창업군주.

2. 생애

출신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조영이 어디 출신인지는 물론 어떤 가문 출신인지조차 파악이 안되고 있다. 흔히 걸걸중상과 부자지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조차 알 길이 없을 지경이다. 일단 사서에 대중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은 2020년대까지는 전혀 없어서, 대조영의 아버지 시절에 대씨라는 성씨를 썼는지도 불분명하다. 이 부분은 가장 골치 아픈 발해의 출신 문제로 대조영이 고구려계인가 혹은 말갈계인가와도 맞닿아 있다. 한 나라의 창업 군주라는 인물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실해서 오늘날 알려진 그의 출신 배경 대부분은 추측의 영역에 불과한 것이 현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에서 다루고 있다. 다만 속말말갈 항목에 따르면 고고학적으로 속말말갈은 숙신계와 예맥계가 혼재한 양상을 보이는데, 대조영은 그중 고구려화된 부여계 속말말갈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영주(營州) 지역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다.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로 거란인들이 봉기하여 영주 일대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가 전사한 후 말갈과 고구려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무주[11]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향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다.[12]

국가의 기틀을 3년 만에 잡았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잡았는지 기록이 전무한 탓에 알 수가 없다. 학계에서는 천문령 전투의 승리와 군사력을 통해서 그 시기까지 무주공산으로 존재하던 고구려의 영역과 여전히 엄존했을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면서 급속히 성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은 나당전쟁 패배, 토번과의 사투, 보장왕의 반란 등 악재가 겹쳐 옛 고구려 영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고, 대조영이 자리잡은 동모산과 거리가 먼 만주 서부만 간신히 걸치는 상황이었다. 신라 역시 삼국 통일로 얻은 영토를 추스려서 당과의 대립 과정 속에서도 최초로 약속한 대동강 ~ 원산만 라인을 넘어가지 않았고 이 시점에는 겨우 개성 정도에나 행정력을 관철하는 수준이었다.

676년 나당전쟁 종료 이후 바로 대동강 ~ 원산만 이남을 통치했을 거라는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수도 경주시는 동남쪽에 너무 치우쳐 있어 패서 일대 행정력 구축과 패강진 개척은 무려 1세기 이상을 끈 지리멸렬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특히 이 시점에는 당나라와의 전면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신라는 당나라의 재침을 염려해 옛 고구려령 회복에 있어서 다소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고구려 고토 내에서 지리멸렬한 권력 공백 상황이 지속되는 긴장 속에 대조영이 리더십을 발휘해 유민들을 수습하고 동만주에 고구려를 재건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다른 설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기록들을 토대로 발해를 건국한 자는 대조영이 아니라 아버지 걸걸중상이고 건국 시기도 678년 혹은 684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대조영이 3년만에 국가 기틀을 잡았다는 기록의 의문점이 해결된다.

중국의 기록 외에는 신라 최치원[13]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 대조영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는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당시 신라는 효소왕의 재위기였다.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5품 관등 대아찬을 주었다.[14]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만 받을 수 있는 관등인데 신라가 외부인에게 진골 대우를 한 것이 기록상 남아있는 건 금관가야 왕족 구형왕, 고구려 왕족 안승 둘뿐이었다. 이걸 준 건 발해가 신라보다 아래라는 정치적 제스처긴 하지만, 어쨌든 신라 측에서 신생국가 발해와 대조영을 새로운 한 나라의 군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원과의 관계는 건국부터 악연이었지만,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대조영의 기세가 강해지자 무주에서도 일단 유화적으로 나와 먼저 대조영에게 장행급을 사신으로 파견해 좌효위원외대장군 홀한주 도독 발해군왕 등의 칭호를 주기도 했다. 대조영도 화답해 다시 복원된 당나라에 아들을 숙위로 보내 충돌보다는 화친을 택했다. 당과 관계가 다시 나빠지는 건 흑수말갈 등 주변세력을 공격해 적극적으로 세력확장을 한 2대 무왕 때부터였다.

698년 진(震 / 振)이라는 국호를 정했다가 무주가 대조영을 발해만 지명에서 딴 발해군왕에 봉하면서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무주가 발해라는 이름을 내리고 나서 발해 역시 외교적 효율성을 위해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처음부터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 발해는 발해만이 아닌 홀한해, 즉 경박호라 본다. 이후 문왕 같은 경우는 당과 관계없는 일본과 외교할 때는 국호를 고려로 사용하기도 했다.[15]

21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는 실정이다. 한 나라의 건국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매우 빈약한 데다 능의 소재조차 확실하지 않은 건 덤. 정효공주묘, 정혜공주묘, 무왕릉,[16] 룽터우 고분군의 발해 황후묘들만이 확인된 발해 시대의 무덤이다. 이는 발해의 사서라고 할 만한 기록들이 대부분 멸망 과정에서 소실되었기 때문.[17]

3. 관련 기록

대조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탓에 남아 있는 《오대회요》, 《 구당서》, 《 신당서》, 《 신오대사》에 실려 있는 대조영 기사의 전문을 수록한다.

3.1. 《오대회요》

발해말갈은 본래 고려의 종족이다.
당나라 총장 연간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그 무리들을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면서 요(遼) 바깥에 두었으며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통솔하였다.
만세통천 중에 거란 이, 만영[18]이 반란하여 영부를 함락시켰는데, 고려의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있었다.[19]
걸걸중상은 말갈의 반역자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요동을 지키면서 고려의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을 하였다.
측천이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대사리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거절하였다.
측천이 장군 이해고로 하여금 진을 무너뜨리고 참수하게 하였다.
걸걸중상이 죽자 그 아들 대조영이 이어 즉위하고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다.
승병 정호(勝兵丁戶)가 40여만이었으니[20] 등이 읍루의 고지에 웅거하여 지켰다
ㅡ五代會要 卷三十 渤海
ㅡ 《오대회요》 30권 <발해>

3.2.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既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려(高麗)[21]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가족을 데리고 영주(營州)로 이주했다.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保阻以自固. 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만세통천년[22]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則天)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물리쳐 목을 베고, 이어서 대조영을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모아서 이해고에 대항하자 무후가 보낸 병력(王師)[23]은 대패했고, 이해고는 겨우 탈출해서 돌아왔다.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為振國王, 遣使通於突厥.
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에 뛰어났기 때문에 말갈 무리 및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698년∼699년) 중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고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연락했다.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越熹靺鞨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 編戶十余萬, 勝兵數萬人. 風俗瑟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
영토는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맞닿았다. 월희말갈(越熹靺鞨)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렀고, 영토가 사방 2000리에 편제된 가구(編戶)가 10여만 호, 강군(勝兵)이 수만 명이었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거의 같았으며, 제법 문자를 쓰고 기록을 할 줄 안다.
中宗即位, 遣侍御史張行岌往招慰之. 祚榮遣子入侍, 將加冊立, 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 使命不達. 睿宗先天二年, 遣郎將崔昕往冊拜祚榮為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為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
중종(中宗)이 즉위하자(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내자(入侍), 책립을 내리려고 했지만 거란과 돌궐이 함께 계속해서 변경을 약탈하는 바람에 명을 받든 사신이 도달하지 못했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2년(713년)에 낭장(郎將) 최흔(崔昕)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만들어 홀한주도독(都督)의 벼슬을 추가하자, 그때부터 매해 조공 사절을 보내게 되었다.

開元七年, 祚榮死, 玄宗遣使弔祭.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大武藝襲父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
개원(開元) 7년(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현종(玄宗)이 조문 사절을 보냈다. 또한 그 맏아들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로 하여금 아버지 뒤를 잇게 해서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립했다.
ㅡ舊唐書』卷212下「列傳」第149下 ‘北狄'
ㅡ 《구당서》 권212 하 <열전> 제149하 -북적-

3.3. 《신당서》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爲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 씨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武后封乞四比羽爲許國公,乞乞仲象爲震國公,赦其罪。比羽不受命,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象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於是契丹附突厥,王師道絕,不克討。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측천무후[武后]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고 그 죄를 사면했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中郎將) 삭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리니, 공격해서 목을 베었다. 그때 걸걸중상이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잔당을 이끌고 달아나자, 이해고가 추격해서 천문령을 넘게 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대로써 이해고에게 대항하자, 이해고는 패해서 돌아왔다. 그때 거란이 돌궐에 붙어 길이 막히게 되어서 당군이 토벌할 수 없었다.

祚榮即並比羽之衆,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다. 제법 글을 쓸 줄 알았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24],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中宗時,使侍御史張行岌招慰,祚榮遣子入侍。睿宗先天中,遣使拜祚榮爲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以所統爲忽汗州,領忽汗州都督。自是始去靺鞨號,專稱渤海。
중종 때 시어사 장행급을 사신으로 보내서 회유하자, 대조영이 아들을 황제에게 보냈다. 예종 선천 중에 사신을 보내서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의 벼슬을 내리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로 만들어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그때 처음으로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칭하게 되었다.

玄宗開元七年,祚榮死,其國私諡爲高王。
현종 개원 7년 대조영이 죽자 그 나라가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했다.
ㅡ『新唐書』卷219「列傳」第144 ‘北狄’
ㅡ 《신당서》 권219 <열전> 제144 -북적-

3.4. 《신오대사》

渤海,本號靺鞨,高麗之別種也。唐高宗滅高麗,徙其人散處中國,置安東都護府於平壤以統治之。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구려의 별종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사람들을 이주시켜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다.

武后時,契丹攻北邊,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分王高麗故地,武后遣將擊殺乞四比羽,而乞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并有比羽之眾,其眾四十萬人,據挹婁,臣于唐。
측천무후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至中宗時,置忽汗州,以祚榮為都督,封渤海郡王,其後世遂號渤海。其貴族姓大氏,開平元年,國王大諲撰遣使者來,訖顯德常來朝貢。其國土物產,與高麗同。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홀한주를 설치하여 조영을 도독으로 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니, 그 후세에 마침내 발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귀족의 성은 대씨이다. 개평 원년(907년)부터 국왕 대인선이 사신을 파견해와, 현덕(顯德) 연간이 끝날 때까지[25] 항상 와서 조공하였다. 나라의 토산물은 고구려와 같았다.

諲撰世次、立卒,史失其紀。
인선(諲譔)의 세차(世次)와 즉위년(即位年)·졸년(卒年)[26] 등은 사관이 그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ㅡ 新五代史·卷七十四 四夷附錄 第三
ㅡ 《신오대사》 권74 <사이부록> 제3

4. 가족 관계


이 외에도 발해 무왕의 사촌형으로 기록된 대일하, 족제로 기록된 대원의의 존재로 볼 때, 대야발 외에도 다른 형이나 동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1] 대조영의 후손인 태씨 집성촌에 남아있는 태씨 남성들의 얼굴을 조사한 다음 공통적인 특징을 모아서 그린 그림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금관은 용두산 고분군 M14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관장식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2] 단, 아들인 대무예, 대문예가 680년대 생으로 추정되므로 빠르게 잡으면 660년대 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1차 고당전쟁 와중인 645년생으로 설정한 바 있다. [3] 음력 3월 정유(8일). 구당서 권8 현종본기의 개원 7년 3월 정유(8일) 조에서 왕모중에게 특진 벼슬을 더해준 기사 바로 뒤에 "발해말갈군왕 대조영이 죽고 그 아들 대무예가 자리를 이었다."라고 서술하였다. 같은 내용을 자치통감 권212에서는 개원 7년 3월 을묘(26일) 기사 뒤에 놓았고, 이어 이튿날인 병진(27일)에 "그 아들 대무예에게 자리를 잇도록 명하였다."라고 적었다. 흔히 인터넷에서 대조영의 사망 시점으로 기록되어 있는 719년 음력 6월은 책부원귀의 동년 6월 정묘(10일) 기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나라에서 오사겸(吳思謙)을 보내 조문한 시점이다. [4] 임아가 무왕의 외숙이 맞을 경우 [5] 내외부적으로 칭제를 하는 경우에는 국호나 시호를 1글자로 선택하는 것이 예법상 맞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발해국이라 불렸을지라도 국내에서는 계속 진국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6] 내외부적으로 칭제를 하는 경우에는 국호와 군주의 대표 시호를 1글자(예: 고황제, 문황제, 인황제)로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도 '문황제'라는 1글자의 시호로 불린 바 있다. 명실상부한 황제국인 당나라와 달리, 황제국과 제후국의 중간 단계에 있었던 발해는 국왕의 시호는 황제국의 예를 따라 1글자인 대신, 존호는 제후국의 예를 따라 '왕'으로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정식으로 칭제했다면 고왕이 아닌 '고황제', '고제'가 되어야 했을 것이며, 물론 발해 내부에서는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7] 물론 발해 또한 당나라처럼 정식 묘호가 존재하여 시호가 고왕이 아닌 '고조'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당나라에서 참람하다고 판단하여 묘호를 제거하고 '고왕'이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 또한 있다. 이것이 맞다면 당나라 고조가 본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각각 태조와 세조로 추존했듯이 발해 고왕 역시 자신의 아버지 걸걸중상을 태조(태왕) 내지 세조(세왕)로 추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8] 발해는 대부분의 제도에서 당나라를 본땄기에 정식 묘호 또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의 왕들도 대부분 묘호를 썼지만 중국 측에서 기록할 때는 고려 국왕의 묘호를 제거하고 '광왕', '경왕', '성왕' 등의 방식으로 본국 사서에 기록한 바 있다. 다만 발해 자체의 금석문에서도 '문왕', '간왕' 등의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칭제는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9] "천통(天統)"이 언급되지만 근거 기록이 20세기 이전으로 소급되지 않아 신뢰성이 떨어진다. 다만 정명호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천통십년동제여래입상이라는 발해 유물이 있는데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가 소장 중이라고 한다. [10] 물론 천통이 대이진 이후로 연호가 밝혀지지 않은 4명의 발해 국왕(대건황,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중 1명의 연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11] 이 당시 당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했고, 측천무후가 통치하는 대주(大周) 치세였다. [12] 많은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부분이지만, 이는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같은 민족들이 일으켰던 백제부흥운동이나 고구려부흥운동도 내분으로 인해 실패한 것을 생각해보자. 엄연히 다른 민족에 심지어 각자의 지도자가 따로 있던 말갈과 고구려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고 건국까지 해낸 것이다! [13] 최치원은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 말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들어갔다고 하고 다른 글에서는 고구려의 잔당(高句麗殘孽)으로 표현해 발해의 모체가 고구려의 일부였음도 밝히는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14] 신라의 괴뢰국 보덕국 안승조차 3등급 관직인 잡찬을 받았는데, 대조영이 겨우 5등급 관직인 대아찬을 하사받았다는 데에서 건국 직후 발해의 약소한 위상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실제 세력비를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안승은 신라 못잖게 뼈대있는 고구려 왕가 출신이지만 대조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15] 고려가 정식 국명이고 당나라와 신라에서 발해라고 불렀다는 설, 진국(震國 / 振國), 진단(震旦) 등이 동국(東國)과 동의어라는 설, 발해의 건국자가 대조영이 아닌 걸걸중상이라는 설 등이 있다. 물론 건국자가 걸걸중상이란 설은 진국공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주장한 것일 수도 있다. [16] 정확하지는 않다. [17] 어쩐 일인지 발해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지나칠 정도로 부실하다. 발해 정도의 지역 강국이 역사서를 만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역사서가 현존하지 않는 이 상황은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1. 치열한 전쟁 과정 중에 남김없이 불에 타버렸다. 2. 발해의 일부 사람들이 멸망 이후 챙겨 도망가다 소실되었다. 3. 거란의 전쟁 명분 자체가 발해에 대한 적개심이었던 만큼 역사서도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4.백두산 폭발로 인해 전부 불탔다. 물론 이 4가지 말고도 많은 설들이 존재할 수 있다. 애초에 무엇이 맞는지는 새로운 사실이 나오지 않는 한 미제에 빠질 수밖에 없다. [18] 이진충과 손만영을 뜻한다. [19] 대는 성이고 사리는 벼슬이며 걸걸중상은 이름이라는 주석이 붙는다. [20] 신오대사에는 무리(衆)가 40만이라고 되어 있다. 무리(衆)라는 것은 보통 '적군'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한자이니 어찌되었든 장정(丁) 혹은 군사(兵)가 40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1] 고구려를 뜻한다. 흔히 고구려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장수왕 재위기 때 정식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 [22] 萬歲通天年, 696년. [23] 왕사라는 말은 본래 '왕이 직접 이끌고 온 병력'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무후가 직접 병력을 이끌었을리는 만무하기에 무후가 보낸 토벌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4] 여기서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삼한 문서에서 설명되어 있듯 삼국시대 후반기쯤 가면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각각 대입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옛 변한으로 간주해 봉국으로 붙었다. [25] 현덕 연호는 954년에 시작되어 후주가 멸망한 960년 1월까지 사용되었다. [26] 재위 906년 ~ 926년으로 추정 [27]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장산해 역. [28] 안시성주 문서에 나오듯이 실제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드라마에서는 익히 알려진 양만춘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