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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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 왕건의 역성혁명 | 왕건 | 고려 | |
1217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실패 |
말갈족 추장 乞四比羽 | 걸사비우 |
|
작위 | 허국공(許國公) |
성씨 | 걸사(乞四)(?) |
휘 | 비우(比羽) |
생몰연도 | ? ~ 698년 |
재위 |
말갈족 추장 696년 ~ 698년 |
1. 개요
말갈의 추장.2. 생애
696년 여름 5월에 조문홰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거란인들이 영주에서 봉기하면서 대조영, 걸걸중상과 함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를 건너 오루하에 성을 쌓고 머물러 견고하게 지켰는데, 당나라는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해서 사면하려고 했지만 걸사비우는 이를 거절했고 698년에 이해고의 추격을 받아 격파된 후에 참수되었다.3. 기타
-
북송 말 관료 서긍의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걸걸중상의 아버지
걸곤우는 걸사비우의 오기로 추정된다.
- 발해의 불상 유물에서 조문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허왕부참군(許王府參軍) 기도위(騎都尉)'라는 벼슬을 역임했다고 쓰여있다. 허왕부(許王府)란 발해 국왕의 산하인 허왕이 관할하는 관청이란 의미이기에, 마침 당나라에서 같은 허국공이라는 직위를 받았던 발해의 주요 개국공신 걸사비우의 후손들이 발해 건국 이후 대대로 승작된 작위인 허왕에 봉해져 귀족으로 대접받았다고 추측된다.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대조영
매일경제에 연재된 소설 대조영에서는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대조영의 군사와 싸우다가 생포되면서 대조영에게 굽히지 않아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대조영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대조영, 흑수돌과 함께 결의형제를 맺는다.4.2. 드라마 대조영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전형적인 삼국지의 관우이며 처음에는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수하 말갈족 장수로 등장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국때 대조영, 흑수돌과 결의형제를 맺었으며[1]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을 도우며 고구려 부흥 운동에 힘썼고 초린을 구하려고 백수성에 초린을 구하려다가 설인귀의 부하들( 사부구)을 공격하던 도중 지쳐 포로가 되어 잠시 설인귀의 부하가 되었다가 이해고에게 공격당했던 대조영이 살아 있던 걸 알고 그렇게 되돌아가며[2]나중엔 그가 포로로 잡혀 가자 귀부산 수용소로 직접 들어가서 당나라 장수들이 몰래 수용된 다른 죄인들을 이용해 대조영을 없애려던 걸 수포로 해버리고 대조영을 포함해 다른 노예들을 전부 인간 사냥 하려던 이문의 당나라 군에 저항해 같이 싸우기도 했다.[3]
후반부에는 거란과 동맹 때 성질이 급한 장수들을 조절하는 역할로 신홍이 대조영을 암살하려고 하거나 모함해서 죽이려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조영 휘하의 장수들이 영주성을 뒤집자는 이야기를 하자 말조심하라고 호통치는 모습을 보였다. 대조영 다음가는 서열답게 무장들중에서는 그나마 흑수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에게 딴지를 걸지 못한다. 거기다가 무력으로는 서로 진검으로 칼을 섞은 적은 없지만, 대조영과 자웅을 겨룰만한 실력으로 추정된다.
막판 미모사의 부하 금란과 사랑을 했지만 당군과의 전투에서 금란이 부상을 입자 등에 업고 싸웠는데 결국 금란은 화살을 맞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여 이뤄지지 못한다.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아예 발해 건국 이후까지 살아 남아서 발해의 개국공신이 되는 등 이름만 걸사비우이지 행적이나 포지션이 사실상 친동생 대야발에 가깝다. 오히려 흑수돌이 이해고군에게 잡혀 처형당해 실제 걸사비우 포지션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