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역관( 譯 官)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통역과 번역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리를 말한다.역관은 사대교린, 즉 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역학 또는 역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역관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역관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엔 한문을 이용해서 필담을 나눌 수도 있었지만 필담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으므로 외국어 전문가인 역관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한국사에서는 고대부터 중국,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통역이 가능한 사람을 고용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 여행을 떠날 때 신라인 김정남을 통역관으로 고용한 기록이 있다. 일본인이 중국을 여행하는데 신라어 통역관을 데려간 것은 여행 목적지가 신라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신라 해안을 거치며 표착할 수도 있었던 데다 당나라에 도착해서도 9세기 중국 해안지대에는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방 커뮤니티가 깔려 있었는데 이들이 현대의 여행사처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통역관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최초로 확인되는 기록은 태봉의 궁예가 904년에 설치한 사대(史臺)다. 그런데 904년 궁예의 관직 설치는 신라의 제도를 따르고 용어만 바꾼 것이라고 돼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역으로 해석하면 적어도 통일신라 때부터 역관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국가 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전문 관청 영객전(領客典)이나 일본 사신을 영접하는 전문 관청 왜전(倭典)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영객전과 왜전의 구체적인 업무와 시스템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기관의 역할을 감안하면 여기서 일하는 관리가 역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통문관과 사역원을 통해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서민 출신이 임명되었으나 후기에는 양반 계급의 사람들도 통문관을 통해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일종의 출세 지름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증조부 조인규도 몽골어 열풍에 편승해 재상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원나라가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었고 그에 빌붙은 부원배, 권문세족 등이 잘나갔으니 몽골어 아는 사람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조인규는 영세한 집안의 후예로 사실상 그의 대에서 가문이 다시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각고의 노력으로 몽골어 실력을 완벽하게 만들었는데 사신으로 온 그를 보고 쿠빌라이 칸이 "몽골어 잘한다. 굳이 중간에 통역(몽골어-중국어, 중국어-고려말 통역)을 둘 필요도 없겠네."라고 했다고 한다. 원나라 신하가 속국 고려의 풍속을 아예 몽골식으로 바꾸자며 칸에게 상주한 적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조인규가 조리 있게 반박해 '불개토풍(不改土風, 기존의 풍습을 바꾸지 않는다)'이 유지됐다. 원나라에 30회나 사신으로 가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역원과 승문원을 통해 외국어 학습을 장려하였다. 잡과 중의 하나로 역과가 있었는데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 청학)의 네 종류가 있었다. 대부분의 합격자가 한학이었지만 소수어 직렬에서도 각각 2명 정도는 합격하였다. 합격자는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받았고 후에 정3품 당하관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무역을 자주 행해서 품계보다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거부 변씨의 모델이 된 변승업도 역관으로 있으면서 사무역으로 치부를 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상대국에도 한국어를 습득한 통역관들이 있는 경우가 있었으며 선교를 목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서양인들이 있었다. 서양인과의 통역은 초기에는 당나라 역관을 불러와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기록에 모두 당나라의 역관을 이용해 통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무역이 발달한 당나라가 통역에도 발달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희빈 장씨는 역관 집안 출신이다. 친아버지인 장형이 역관 출신이었고 장형이 일찍 죽은 뒤 후견인이 된 5촌 당숙 장현도 역관으로 활동하며 효종에게 큰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으며 장씨의 외할머니인 변씨도 젼술한 변승업 가문 출신이다.
한국 사극에서는 주인공과 외국인 인물이 통역 없이도 곧잘 대화를 나누곤 해서[1] 자주 존재가 생략되는 비운의 존재다.
2. 외국어 학습
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인 한학, 왜학, 청학, 몽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제 1외국어는 한학이었다. 우어청이라는 곳을 두어 이곳에서는 조선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하루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하였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영어마을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구르어도 중요시되어서 가르치기도 했다.역관은 추천에 의해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바로 역관이 되지는 않았다. 미친 듯이 외국어를 공부하여야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외국어를 공부하고 매달 2일과 26일에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를 쳤다. 수련을 거친 뒤에는 잡과의 역과[2]에 응시해야 했다. 초시와 복시에 통과한 후에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유명한 중국어 외국어 학습교재로는 ' 노걸대'가 있었다. 고려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는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노걸대의 내용은 세 명의 고려 상인이 중국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어 학습을 꾀한 책이다.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되어있다.
노걸대는 다른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번역된 책은 청어노걸대, 몽어노걸대 등으로 불렀다.
노걸대 다음으로 유명한 중국어학습서로는 '박통사'(박씨 성을 가진 역관)가 있었다. 노걸대가 상인 중심의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걸대보다 고급 단계의 중국어를 다루고 있다.
일본어 학습교재로는 ' 첩해신어'('새로운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교재')나 인어대방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강우성이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어를 다루지 않다가 나중에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역과시험 답안지를 살펴보면 첩해신어를 거의 다 외워서 그대로 쓸 수 있어야 합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최고의 어학달인으로 인정받는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가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류큐어, 위구르어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구전으로 배우는 경로가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숙주뿐만 아니라 당시 고위지식계층은 중국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이전의 삼국시대 때는 많은 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까지 가서 당나라에서 급제하여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이 높았다.
3. 유명한 역관
- 김근행
- 김지남 - 김지남이 속한 우봉 김씨 집안은 조선 후기 역과 합격자를 92명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유명한 역관 가문이었다. 김지남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화약 성능 향상법을 기록한 신전자초방을 작성하였고, 1712년에는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정한 백두산 정계비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 김홍륙
- 변승업
- 어숙권 - 『 패관잡기』의 저자.
- 오경석
- 이상적 -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뛰어난 역관으로서 평생 13번이나 청을 다녀왔으며, 철종 대에 책이나 문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수정하기 위해 떠나는 사절인 변무사로 참가해 종계변무를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 이하영 - 첫 시작은 선교사 알렌의 통역이였다.
- 장유성
- 장현
- 정명수 - 병자호란으로 유명해진 조선 출신 역관
- 최세진 - 『이문집람』, 『 훈몽자회』, 『사성통해』 등의 저자이자 『 노걸대』와 『박통사』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한 인물.
- 하세국
- 홍순언 - 선조 대 종계변무를 해결한 역관.
- 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