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정( 反 正)은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명분상) 실정을 하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 왕을 세우는 일이다. 즉 오늘날로 치면 쿠데타이다.2. 조선에서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 |||
무인정사 | 계유정난 | 중종반정 | 인조반정 |
고려 시대에는 무신정권과 몽골의 압력으로 왕을 갈아치우는 일이 꽤나 흔했지만, 유교 윤리가 강했던 조선 시대에는 분명한 명분 없이 왕을 축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특정한 명분을 붙여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는 쿠데타를 '반정'이라 칭했다. 여기서의 '반'( 反)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성공한 쿠데타는 무인정사(1398년), 계유정난(1453년), 중종반정(1506년), 인조반정(1623년), 이렇게 총 4번인데, 뒤의 두 개만 반정이라 부른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대놓고 기존 왕의 폐위를 명분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무인정사와 계유정난은, 오히려 정적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고, 사세가 급박하여 왕의 재가를 받을 틈이 없이 적들을 죽였다는 소위 친위 쿠데타가 명분이므로, 반정이 아닌 '정사', '정난'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1] 중종반정에서는 연산군, 인조반정에서는 광해군이 축출되었다. 반정이 아닌 정사나 정난도 결국은 왕이 양위하는 형식으로 축출되었는데, 정안군 이방원( 태종)이 일으킨 무인정사의 경우에는 후계자로 정해져있던 왕세자 이방석이 살해됨과 동시에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수양대군(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서는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축출되었다.[2]
2.1. 축출된 왕의 대우 문제
반정에서 축출된 왕은 묘호를 추숭받지 못해 '군(君)'으로 남았고 무덤도 ' 능(陵)' 대신 ' 묘(墓)'라고 칭해졌으며 실록도 일기로 격하되었다. 반면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역들은 새 정권에서 공신으로 칭해졌는데 무인정사의 주동자들은 정사공신(定社功臣), 계유정난은 정난공신(靖難功臣), 중종반정은 정국공신(靖國功臣), 인조반정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는 직위가 내려졌다.다만 노산군(단종)은 후에 복위되었기에, 노산군에서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받고 무덤은 장릉, 실록은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바뀌어 불린다. 무인정사의 경우엔 양위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묘호를 받지 못하고 '공정왕(恭靖王)'이라 불리던 정종도 후에 추숭되었다.[3] 모두 숙종 때 한 일이다.
3. 기타
문체반정 또한 반정이 붙는 일련의 사건이었으나, 위와 같은 왕의 교체가 아닌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문체를 바로잡기 위해 정조가 일으킨 정책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체반정 문서 참고.反正은 일본어에서는 올바른 상태가 된다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며 고전문학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단어이다. 중국어에서 反正은 어차피, 아무튼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1]
'정사'는 "사직을 안정시켰다", '정난'은 "난국을 수습하였다"는 뜻이다. 무인정사는
정도전 일파가 대군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어 진압했다는 것이 명분이었고, 계유정난은
김종서 일파와
안평대군의 역모를 진압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2]
태조의 경우는 태종의 아버지이자 건국군주이므로, 시해당하거나 지나치게 격하되면 태종 본인도 결국 그 아들인 상황에서 제 살 깎아먹기가 되는 것이라 축출 이상의 위해는 가하지 못했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사육신의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상왕에서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즉, 반정 때 '
폭군'이라고 단죄받은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달리, 단종은 계유정난 때가 아니라 그 뒤인 세조 치세에 '
역적'으로 단죄받았다는 것이 계유정난과 이후 반정과의 차이점이다.
[3]
그래도 정종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동생인 태종이 태상왕으로서의 대우를 해줬고, 묘호는 없었지만 그가 잠시 왕으로 있던 2년 정도의 시기의 기록을 일기가 아닌 실록으로 호칭했다. 일단 무인정사의 명분대로 왕위에 오르기도 했고 후세에 축출된 왕들처럼 강제적으로 폐위되어 격하되지 않고 스스로 태종에게 왕위를 승계하고 물러났다. 게다가 사후 조카인
세종이 직접 정종의 묘호를 정해서 올려보려고 신하들에게 묻기도 했다. 물론 신하들의 반대로 숙종 대까지 공정왕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