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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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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 元敬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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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조 왕태비
후덕왕태비 | 厚德王太妃 |
|
조선 세종조 왕태후
원경왕태후 | 元敬王太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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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능침. 오른쪽 봉분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 |||
출생 | 1365년 8월 6일( 음력 7월 11일) | ||
고려
개경 철동 사저 (現 북한 개성시 수창동) |
|||
사망 |
1420년
8월 27일(
음력
7월 10일) (향년 55세) |
||
조선
한성부
수강궁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헌릉(獻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400년 4월 7일 ~ 1401년 2월 2일 | |||
조선 왕비 | |||
1401년 2월 2일 ~ 1418년 9월 18일 | |||
조선 왕태비 | |||
1418년 9월 18일 ~ 1420년 8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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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여흥 민씨 | |
부모 |
부친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1339 ~ 1408) 모친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1342 ~ 1424) |
||
형제자매 | |||
배우자 | 태종 (1382년 혼인) | ||
자녀 | 4남 4녀 (8남 4녀) | ||
종교 | 불교 | ||
봉작 |
정녕옹주(靖寧翁主) → 정빈(貞嬪) → 정비(靜妃) → 후덕왕태비(厚德王太妃) → 왕태후(王太后) |
||
전호 | 광효전(廣孝殿) | ||
존호 | 후덕(厚德) | ||
휘호 | 창덕소열(彰德昭烈) | ||
시호 |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 → 원경왕후(元敬王后)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3대 국왕인 태종의 왕비로 4대 국왕 세종의 어머니이다.2. 생애
2.1. 어린 시절
1365년(공민왕 14년),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고려 최고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이였던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2녀로 개성에서 태어났다.[5] 재색을 겸비했던지, 변계량의 헌릉지(獻陵誌)에 따르면 민씨는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라는 그녀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있을 정도였다.아버지 민제는 성균관에서 사성을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중 민씨보다 두 살 연하였던 훗날의 태종 이방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방원은 16세였던 1382년(우왕 8년)에 진사시를 통과해 성균관에 거의 수재급으로 입학했고, 민제는 그를 사윗감으로 눈여겨 봤다. 물론 가문의 급을 비교하자면 이방원은 일개 변방(동북면) 무사 집안의 아들로 권문세족의 영애였던 민씨와 혼인하기엔 다소 뒤떨어졌지만, 그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던 아버지 이성계를 배출한 신흥 무인 가문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2.2. 이방원과의 혼인
그렇게 1382년(우왕 8년),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16세의 이방원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민씨의 친정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된 이방원은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숙한 민씨를 매우 사랑했으며, 민씨 역시 남편이 나이가 어리고 가문의 급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았고 존중했기 때문에 부부금슬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혼인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에는 이방원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고 두 사람 사이의 첫 아이였던 정순공주까지 태어난다. 이렇듯 장인어른과 아내(원경왕후)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은 이방원은 훗날 “내가 어렸을 때, 민씨에게 자라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방원과 친정에서 함께 보낸 10여년이 민씨의 결혼생활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1392년(태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남편인 이방원이 정안군으로 봉해지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6] 뒤이어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이 남편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고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원경왕후는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담대해서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할 때는 이방원과 왕자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7]를 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 일을 빌미로 이방원은 반정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2차 왕자의 난 때도 자신의 사가의 말이 홀로 집으로 오자[8]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걱정되어 창을 가지고서 말을 타고 가려다가 시녀들이 말린 일도 있었다. 정종 2년 1월 28일
2.3. 조선의 왕비가 되다
아주버님인 정종의 즉위 이후 세자[9]가 된 남편 이방원과 함께 세자빈이 되었고 결국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여, 마침내 왕비가 되면서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지만 여기서부터 인생이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2.4. 후궁 문제
"부부(夫婦)는 사람의 대륜(大倫)인데, 지금 정비(靜妃)가
민무구(閔無咎) 등의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에
내가 창병(瘡病)이 몹시 크게 났을 때에
민무구(閔無咎) 등이 가만히
여시(女侍)와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드디어 이무(李茂)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음모(陰謀)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민씨의 죄였다. 정비(靜妃)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으니, 내가
폐출(廢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粗糠之妻)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
< 태종실록> 태종 11년( 1411) 9월 4일, 민무구, 민무질 사사 후 여러 차례 부부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
왕이 된 남편 태종은
공신들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특히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무구와
민무질[10]을 심하게 경계했다. 더군다나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11] 친했기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외척이 되어 권세를 휘두를 것이라 생각한 태종은 이들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뒤이어 그들의 아랫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역시 세자의 외숙[12]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태종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부모(민제 부부)의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없어서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을 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다만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결단나고 딸 원경왕후까지 죽는 걸 본 것도 모자라 밉살스럽고도 무서웠을 사위
태종 이방원보다도 오래 살아서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13][14][15][16]< 태종실록> 태종 11년( 1411) 9월 4일, 민무구, 민무질 사사 후 여러 차례 부부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
2.5. 후궁 간택
성균 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이었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가 정비(靜妃)에게 말하기를,
"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하였는데, 정비(靜妃)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別宮)에 맞아들였다. 정비(靜妃)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 < 태종실록> 태종 2년( 1402) 3월 7일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하였는데, 정비(靜妃)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別宮)에 맞아들였다. 정비(靜妃)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 < 태종실록> 태종 2년( 1402) 3월 7일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여자 문제로 다투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태종은 외척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데다,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여 원경왕후의 투기에 질색하며 다투는 날이 많았고 원경왕후는 태종의 여색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자식을 낳는 것은 왕의 중요한 의무인데다 수명이 짧고 영아 사망률도 높은 시기였기에 왕실의 일원이라면 많은 자식을 낳을 필요가 있었다. 원경왕후와 다툼이 심해지자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치고 원경왕후를 중궁전에 유폐하였다. 더 나아가 원경왕후를 폐비할 생각까지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상왕인 정종의 충고를 듣고 취소하였다. 사실 태종도 진심으로 원경왕후를 폐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비를 새로 들이면 다시 외척이 생겨나고 재차 숙청해야 한다. 이미 자신이 숙청한 원경왕후의 가문도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숙청한 일이 되는데다 원경왕후를 폐비시키면 원경왕후와 이방원의 자식들은 폐비의 자식이 되고, 그 와중에 새로운 왕비가 자식을 낳으면 세자를 비롯한 폐비의 자식들은 입지가 추락하고 조정이 분열될 가능성이 올라간다.[17] 태종이 간택 절차를 거쳐서 정식으로 후궁인 숙의를 뽑으려고 하자,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서 오열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에 조정이 어수선 해지자 태종의 행보에 일절 관여하지 않던 상왕이자 형인 정종까지 나서서 "나는 적자를 못 낳은 처와도 소싯적의 정으로 사는데 주상은 아들도 많이 낳은 중전에게 대체 왜 그러는 게요?"라고 질타하였다. 결국 태종은 형의 충고에 따라 거창한 가례색을 행하지 않고 조용하게 후궁을 들이는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동생에게 양위한 이후 정사에 간섭하지 않은 정종이지만 왕과 왕비의 갈등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방관할 수 없던 것이다. 형의 충고를 듣고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다.
2.6. 폐비 언급
계모와 이복 형제들에 의해 왕위 계승 논의에 밀려나 그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지독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이 후계 구도를 꼬아 정통성을 훼손해 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폐비라는 선택을 할리가 있겠냐며 중전에 대한 일종의 강짜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18][19]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자식이라는 점은 왕의 혈통이라는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고 사실상 제일 중요한 정통성이 후궁이 아닌 왕후의 자식이라는 점이다.[20] 둘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단 것 역시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원경왕후는 나이 40세를 넘긴 이후로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3명이나 더 낳았다는 점이다. 정선공주( 1404년생), 아들 성녕대군( 1405년생), 요절한 공주( 1412년생)[21]가 그 주인공들.나아가 살펴봐야 할 부분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이후의 조선 왕과 왕비들처럼 일방적인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22]라는 점이다. 원경왕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후기 급부상한 권문세족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재상지종으로 분류된 15가문 중 하나였다.
공민왕대에야 고려에 귀부한 전주 이씨보다 훨씬 고려의 권력 중심에 가까웠고, 이성계가 넷째, 다섯째를 여흥 민씨 집안 여식과 혼인시킨 것도 혼맥을 정계 안착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의 사돈이자 이방원의 처가로서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 막대한 지원 사격을 퍼부었고 원경왕후 민씨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의 권력 획득에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다. 원경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대드는 등의 행태도 이런 강력한 근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처남 4명을 모조리 도륙하는 등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처가를 박살내고 원경왕후를 찍어 누른 태종의 극단적인 행보도 원경왕후의 이러한 막강한 힘이 고착화된 권력으로 뿌리내려 왕권을 깎아 먹는 것을 예견한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극약 처방이 아니면 도저히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원경왕후 민씨였기 때문이다.
2.7.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1418년(태종 18년)에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명망 있고 왕의 재목이 있는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원경왕후는 매우 슬퍼하였다. 폐세자가 된 맏아들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원경왕후는 장자 상속제를 들어 양녕대군의 아들인 원손을 후계로 책봉하라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양녕대군을 멀리 내치려 하자 원경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라 하여서 결국은 경기도 광주목로 보내졌다. 두달 후 세자 충녕대군이 주상으로 즉위했으나 맏아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원경왕후는 눈물로 세종의 즉위를 맞이했다. 그리고 주상이 된 셋째 아들에게 폐세자가 된 큰 형의 목숨만은 제발 부지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사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대군[23]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원경왕후에게 있어 양녕대군은 자신이 18살에 결혼해서 10여 년간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다가 30살 때 낳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양녕대군 이후 3년 내로 낳은 아들들인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는 하지만, 양녕대군을 향한 개인적 애정과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24]
2.8. 세종 즉위, 왕대비가 되다
새로운 세자 이도가 즉위하여 주상( 세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25] 2년 후인 1420년(세종 2년), 수강궁( 창경궁)에서 56세에 학질(瘧疾)[26]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상왕 태종은 절차를 간소화하자며 주상인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는데[27] 세종은 다른건 상왕 뜻을 따라도 이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후덕대비(원경왕후)를 헌릉(獻陵)에 안장할 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 이후 대비의 능이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근처에 능을 수호할 사찰을 지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같이 묻힐 사람이 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인물이라는걸 생각하면,[28] 그리고 그걸 모를리 없는 세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어머니에게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나마 사찰을 짓는 건 아버지 태종이 격렬하게 반대해서 없던 일이 됐다. 2년 후인 1422년(세종 4년), 남편인 태종도 죽어서[29]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에 함께 '쌍릉'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글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였을 부부였지만 결국 죽어서는 아들에 의해 함께 묻혔다. 특히 조선왕릉 중 쌍릉 형태의 봉분 중에서 병풍석과 난간석이 붙어 있는 능은 헌릉이 유일한데, 이것은 세종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바란 지극한 효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며느리인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 또한 태종의 외척 숙청 리스트에 올라 며느리의 친정마저 박살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심지어 남편이 이복동생과의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을 벌인 것처럼 둘째 손자인 세조에 의해 골육상쟁의 피바람이 훨씬 최악의 상태로 재현되었다.3. 가계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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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가문 | ||||
경주 김씨 순경태후家 |
정안 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 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 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 홍씨 명덕태후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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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가문 | |||||
언양 김씨 김취려家 |
철원 최씨 최유청家 |
해주 최씨 최충家 |
공암 허씨 허재家 |
평강 채씨 채송년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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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 친정
- 배우자 / 자녀
- 남편: 태종대왕(太宗大王) 이방원(李芳遠)
- 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 사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 외손녀: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
- 2녀: 경정공주(慶貞公主)
- 사위: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
- 외손자: 조무영(趙武英)
- 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 사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규(權跬)
- 외손자: 군부사(軍府事) 권담(權聃)
- 외손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총(權聰)
- 1남: 폐세자 양녕대군(廢世子 讓寧大君) 이제(李禔)
- 며느리: 수성부부인 김씨(隨城府夫人 金氏)
- 손자: 순성군(順成君) 이개(李豈)
- 손자: 함양군(咸陽君) 이포(李布)
- 손자: 서산군(瑞山君) 이혜(李暳)
- 손녀: 영천군주(永川郡主)
- 손녀: 영평현주(永平縣主)
- 손녀: 재령군주(載寧郡主)
- 2남: 효령대군 이호/이보(李祜/李補)
- 며느리: 예성부부인 정씨(蘂城府夫人 鄭氏)
- 손자: 의성군(宜城君) 이채(李寀)
- 손자: 서원군(瑞原君) 이친(李櫬)
- 손자: 보성군(寶城君) 이갑(李韐)
- 손자: 낙안군(樂安君) 이밀(李樒)
- 손자: 영천군(永川君) 이정(李靜)
- 손녀: 비인현주(庇仁縣主)
- 3남: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裪)
-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30]
- 사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 외손자: 군수(郡守) 남빈(南份)
- 외증손자: 충무공 남이 장군(忠武公 南怡 將軍)
- 4남: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 며느리: 삼한국대부인 성씨(三韓國大府人 成氏)
- 양손자: 원천군(原川君) 이의(李宜)
- 5남: ?[31]
4. 평가
원경왕후는 조선 왕비 중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준 여장부이자 조선 최고의 여걸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남편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킹메이커였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어머니란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성격 또한 당대의 대 여걸(大女傑)답게 굉장히 호쾌하고 괄괄했다.자칫 친정까지 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 기꺼이 모든 걸 걸고 남편 이방원을 지원해 결국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본인 남편에 의해 수족이 잘리고, 집안이 몰락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사로 명성황후, 인현왕후와 함께 가장 유명한 조선의 왕비라 할 수 있다.[32]
원경왕후 친정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자신의 아버지인 민제는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기 때문에 원경왕후 본인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경왕후는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아름다웠으며 총명했고, 지혜롭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경왕후가 정말 똑똑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세종대왕이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더 총명했을 가능성이 높다.[33]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지만 정작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왕비로만 기억될 뿐 세종의 어머니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태종의 아내다운 괄괄한 성격에 남편을 옥좌에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가 바로 본인 남편에 의해 형제들을 모두 잃고 가문이 몰락하는 장면이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34] 자세한 가족관계는 태종(조선)/가족 관계 참고.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손꼽히는 괄괄한 여장부로 꼽을 수 있다. 흔히 여장부로 평가받는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적어도 개인적인 성품은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었다. 또한 상당히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왕비였던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이 왕이 되자마자 일차적으로 원경왕후의 가족을 개박살냈기에 이들 부부의 사이가 마냥 좋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조선 왕실에서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이기도 하다.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자식까지 포함하면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 아이가 태어난 해는 1412년(태종 12년).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이 죽은 지 2년여 뒤인 47세에 낳았다.[35][36] 지지고 볶고 물고 뜯고 하는 와중에도 금슬이 유지되었다. 불같은 성격의 태종도 아들인 양녕대군과 성녕대군을 끔찍이 아껴서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 원경왕후와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볼 때 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이 부부가 처음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 해대던 사이가 아닌데 상기됐지만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첫눈에 반하였고, 2차 왕자의 난까지도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등 금술좋은 천생연분의 모습이 더 강했다.
즉, 이들 부부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증이다.[37] 사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왕족이라는 신분, 그리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건국 초반기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공적으로는 권력위계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던 것.
딸 정선공주를 토대로 하여 신사임당과 율곡이이의 모계 혈연이 된다.[38][39]
5. 대중매체에서
- 1996년 KBS의 〈 용의 눈물〉에서는 최명길이 연기하였다. 포스있고 강단있는 여인으로 나오며 초반에는 이방원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사풍의 이미지로 나온다.[42] 왕비가 된 이후에는 태종에게 대들다가 뒤이은 결과가 신통치 않은 어찌보면 불쌍한 여인으로 나온다. 상왕이 된 태종이 사돈댁( 소헌왕후의 친정) 박살내는 것을 보며 "또 못할 짓 한다"고 하면서도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왕권을 지키려는 태종이 딱해 보인다"고 한다. 사망씬에서는 묘하게도 대비후의 임종을 태종이 혼자 지키며 태종과 대비가 화해하면서 대비가 사망한다. 〈용의 눈물〉 촬영 후반부에 최명길은 만삭이었으며[43] 태종 앞에서 상을 엎고 바닥을 기는 연기들을 했는데 나중에 유동근이 회고하기를 엄청 무서웠다고 한다.[44]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의 며느리이자 이방원의 부인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는데 문서 참고.
- 2008년 KBS 드라마 〈 대왕 세종〉에서도 배우 최명길[45]이 연기했다. 그러나 용의 눈물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아들 세종이 주인공이니만큼 원경왕후는 비중이 좀 낮아지고 대신 세종대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더 부각시켰다. 남편 태종에 의해 친정이 박살나게 생기자 스스로 궐을 떠나려다 태종이 막고 아우들은 죽지 않으며 세자의 저위가 흔들리다는 말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며느리 소헌왕후의 친정이 남편에 손에 박살나자 차라리 폐위시키는 게 낫다고 하지만 새 왕비를 들이며 또 피를 보겠지라며 말한다.
- 2013년에 개봉한 영화 《 관상》에서는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라 둘째 손자인 수양대군이 주인공인 김내경에게 "내 어릴적 조모에게 귀가 잘생겼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는데,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한가?"라고 묻는 것으로 언급만 된다.
-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배우 강세정[46]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도 포스는 여전해서 '킬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작중 활약도 많은데, 이방원을 순금부로 끌고 가려는 정도전에게 직접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목숨을 구하고 여러 번 대화를 통해, 이방원을 각성시키는가 하면 무인정사가 일어나자 손수 조준을 찾아가 겁박하고 이지란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내조의 여왕다운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방원 부부가 왕과 왕비가 된 장면이 짧게 나오는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궁궐 주위를 둘러보는 원경왕후를 태종이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묘한 장면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훗날 태종이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하는 걸 암시한다고 이해했다. 문서 참고.
- 2015년 SBS 드라마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공승연이 연기했다. 민다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방원의 여인 중에서는 분이에 밀리는 감도 있지만, 역사를 반영해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진다.
- 2021년 KBS 드라마 〈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박진희가 연기했다. 원경왕후(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 만화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익히 알려진 세종의 상상화를 닮은 용모로 그려졌다.
- 웹소설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에서 잠깐 등장하고 언급이 간간히 나오는데, 실제 역사처럼 화통하고 괄괄한 성격을 자랑한다. 거사를 대비해 군사와 무기를 숨기고, 남편인 이방원과 매일 투닥투닥한다며 시숙인 방원의 형들이 증언했다.
-
카카오페이지 웹소설 〈신녕궁주전〉에서도 실제 역사와 같은 성격으로 나온다. 남편 태종의 왕자의 난을 직접 도왔다고 언급되었고, 남편의 아이를 가졌던 약방이라는 이름의 노비가
정식 후궁이 된 후에도 괴롭히며, 지밀나인 금영이 대전의 나인들과 내관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기어이 태종의 승은을 입자 불같이 화낸다. 그 와중에 태종이 자신의 새 지밀나인 신아지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소식에 아지를 태종에게 보낸다. 이후로도 아지와는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이면서도 후궁들과는 미묘하게 대립한다.
6. 관련 문서
[1]
이천우(李天祐)의 정부인.
[2]
노사신의 할머니.
[3]
태종이 정안군이였던 시절, 양녕대군 위로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4]
봉호는 충녕대군(忠寧大君).
[5]
언니는 평양 조씨 문하부 참찬
조박, 여동생은 교하 노씨 노한과 혼인하는 등 가문의 혼맥도 대단했다. 자녀 중 노물재의 부인은
청송 심씨, 심온의 딸이자 소헌왕후의 여동생이다. 이는
노사신의 문서에서도 설명되어 있다. 민제의 외조부인 문정공 허백은 송빈(분)의 외손이고 어머니 송씨부인의 증조부인 송염은 송빈(분)과 형제간이므로 민제와 대부인 송씨 부부는 서로 9촌이 되고 항렬도 부인이 하나 위가 된다
[6]
왕의 딸도 아닌데
옹주로 봉해진 것은 아직
조선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 당시는 왕의
후궁과 종친,
신하의 아내들까지 싹다 옹주 작위를 주었다. 훗날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해진 후로 따지면 대군의 부인이니 부부인(府夫人)이라 불린다.
[7]
당시 그녀는
충녕대군, 즉 세종을
임신 중이었다.
[8]
훗날
조대림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목인해가 이방원의 말을 타고 전투를 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았는데 이때 낙마를 했는지 말이 전쟁터에서 홀로 도망치다가 제 집 마구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9]
정안군은 정종의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명목상 왕위 계승을 위해 형의 양자가 된 것이다.
[10]
민무구와
민무질은 태종의 처남이자, 태종 비 원경왕후의 바로 밑 동복동생들이다. 이 둘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거나 위험할 때 아버지
민제와 함께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나 정안군이 태종으로 즉위할 때는 자기 권력에 방해되고 추후
여흥 민씨 집안인
민제 대감의 집에서 어릴 때부터 자란
어린 세자가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권력을 남용하여 왕권을 위협할까 봐 태종이 미리 그 낌새를 알고 처남들을 아예 싹을 자른 것이다.
[11]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외가가 멸문될 때 태종의 처가에 대한 의심병을 돋구면서 외가의 멸문을 거들게 된다. 훗날의
문정왕후와 외척의 국정 농단을
예견한 듯 싶다.
[12]
세종이나 양녕대군이나
정순공주 등과 같은 자식들에게는 외가가 되는 민씨 집안을 설명하자면 위로는
조박과
이천우에게
시집간 언니 2명과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노한(盧閈)(
공양왕의 왕비인
순비 노씨의 친조카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개성 왕씨(開城 王氏)는
고려 왕실인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왕수(王琇)의 딸이다.
#)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더 있었다.
[13]
훗날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선위한 후 본인의 바깥사돈이자 국구인
심온도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다가
의주에서 군을 왕명없이 함부로 움직였다는 것을 구실삼아
사약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왕 내외의 끈질긴 설득으로 왕비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계급을 강등시키는 데에 그쳤고 이들은 태종 사후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숙청은 결과적으로
세종 치세 때
외척의 간섭이 없는 결과를 만들었고 세종 이후 한동안의 왕들은
수렴청정의 경우를 빼고는 비교적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친위 세력이 되어줄 외척이 없는 상태에서
세종은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만들어 낸다.
[14]
하지만
세종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당장 외척이나 신하들보다는 아들들이 가장 안전한데다가 설마 건강한 아들
문종이 일찍 죽을 걸 생각치도 못했을 테고,
아들이
조카를 때려잡고 왕이 될 것은 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어찌 됐든 결국 이러한 사태들은 왕실 일가간 벌어진 권력 싸움이지 외척에게 휘둘린 건 아니긴 하다.
[15]
거기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까지 일찍 죽어서 왕실에 수양대군을 견제할 어른이 사실상 없다시피했다.
[16]
이것도 사실 세종이나 세자인 문종이 소헌왕후 3년상이 끝나는대로 새로운 왕비나 세자빈을 맞이했어야 했던 일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외척 경계의 성향 때문인지 그러지를 않았다. 문제는 조선의 왕비라는 자리는 외척이기 이전에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기에 비어있는 이상 무조건 정식으로 채우긴 했어야 됐는데, 세종과 문종은 숙빈 홍씨 등의 후궁들에게 권한 대행만 시킨 채 사실상 방치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헌왕후 사망 이후 통제에서 벗어난 내명부 후궁들과 그 자식들인 왕자와 옹주들은 이후 혜빈 양씨와 그 아들인 한남군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상당수가 세종과 문종 사망 이후 수양대군의 친위세력이 되어 계유정난 때 적극 세조의 편에 붙어서 이미 죽은 세종과 문종, 소헌왕후의 뒤통수를 치는 패륜과 배반을 저지른다.
[17]
당장
1차 왕자의 난이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원경왕후가 실제로 폐출될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
[18]
비슷한 사례로
사마의 역시 정실이 역사상 기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춘화였는데 백부인을 비롯한
첩을 들이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장춘화에게 늙다리라고 욕을 하고 이에 장춘화는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식음을 전폐하며 사마의에게
시위한 적이 있었다. 결국
사마의는 사과하기는 했는데 이후 무안했는지 '내가 뭐하러 늙다리 따위를 신경쓰겠냐. 다만 내 금쪽같은 아들들의 몸이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아무리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적자를 잔뜩 낳은 정실부인을 내치는 일은 가주가 제정신이라면
동아시아 역사에 거의 없었다.
[19]
심지어 정실부인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한 서양에서도 그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헨리 8세는 정실부인이자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 밖에 못 낳은 것을 사실상 구실삼아(공식적 및 대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당시에도 딸 하나 밖에 못 낳은 것이 이유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영국 국내외 가리지 않고 다들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하려고 했고 이는 동아시아의 왕들이나 가주들에서도 은근 써먹는 래퍼토리였지만 딸 하나 밖에 못 낳았다는 이유로 그 외 결격사유가 외국인이라는 점 밖에 없고, 어찌됐건 딸 하나라도 건재하게 낳아 기르고 관계하던 정실 왕비와 이혼한다는게 당시 기준으로도 쉴드치기가 어려운 억지이다보니 국내 신하들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헨리 8세는 특유의 꼬장꼬장함으로 신하들을 무시하고, 영국 성공회까지 만들어가며 억지로 이혼하고 쫓아냈다. 만약 캐서린 왕비가 아들까지 낳았거나, 애초에 메리 공주가 딸이 아닌 아들이었거나 하다못해 딸들뿐이라도 적녀라도 무수히 낳았다면 천하의 꼬장꼬장한 헨리 8세라도 캐서린 왕비를 쫓아내기는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서양조차도 이 정도이니 정실 부인이나 왕비의 영향력과 권위가 막강한 동아시아는 더욱 말이 필요 없는 것.
[20]
정실에게서 낳은 자식은 적통 원자이다.
숙종,
연산군 모두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적통 원자였기에 정통성을 기반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21]
태종실록에 보면
1414년(태종 14년)에 3살 난 왕녀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아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1412년 6월생으로 만 47세 출산. 이 아이는 원경왕후의 두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이 처형된 후에 태어났다. 당시 태종은 '중궁이
난산을 자주 하여 걱정했는데
의원들이 약을 잘 써 무사히 해산하여 기쁘다'며,
의원들에게 각각 쌀 10석, 쌀 5석을 내려주었다. 점쟁이(卜者)가 올해 낳은 아이의 (수명에) 한도가 있다고 하니 마땅히 딴 곳에서 양육하여야겠다'며 최종적으로
성비전에 맡기기로 하였다.
# 이 요절한 공주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맏이인
정순공주와 무려 27살 차이가 난다. 당시 혼인 적령기가 15살쯤이니 27살 차이면 할머니랑 손녀 나이 차이라고도 할수있다. 이복자매도 아닌 친자매가 그만큼의 나이 차이가 난 것.
[22]
사가(私家) 시절에 맺어진 인연
[23]
사실은 4남인데 3명의 형이 어릴 때 다 죽었고 그 때는
조선이 생기기 전
고려 시절이라 <
조선왕조실록> 자체에 자식으로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단지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왕이 되고 나서 양녕대군 이전에 죽었던 아들 3명에 대해 회고한 기록이 있을 뿐.
장자 계승의 압박이 있던 태종이 양녕대군의
장자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이전에 죽은 아들들을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양녕대군의 누나 3명은 양녕대군이 태어날 때도 살아 있었다.
[24]
먼저 태어난 세 아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키우면 낫지 않을까 하고 외가에 각각 맡긴 적이 있었다. 때문에 외숙들과 사이가 좋았을 것이고 이는 민씨 숙청의 한 이유가 된다.
[25]
조선에서 왕의 친어머니로 왕대비가 된 최초의 사례이면서 얼마 안되는 사례이다. 또한 정종의 비와 더불어 남편이 상왕으로 살아있는데 대비가 된 얼마 안되는 사례이다. 이후 조선 역사에서는 적자가 왕이 되더라도 그 적자의 어머니인 왕비가 대부분 단명하였기 때문에 친어머니+적모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왕대비가 별로 없었기 때문. 친어머니이면서 왕대비로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은 효종의 왕비인
효숙대비이다.
[26]
학질(瘧疾)로 불리는
말라리아인
전염병이다. 지금이야 주로
최빈국에서 일어나는
병이고
치료제도 많지만 그 시절에는 치료제도 없었다.
1979년에
한국에서 박멸되었으나
북한에는 잔존하여
1994년부터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다시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강원도
철원이나
연천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은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하는데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설사를 달고 산다고 한다.
[27]
아주 근거없는 건 아니고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에서 모친상은 3년상을 치르지 않고 12개월 동안 입을
상복을 1달을 하루로
계산한 역월지제에 따른
논리였다.(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종도
능묘에 모실 때까지만 입겠다고 타협을 봤다. 그리고 이후
왕들도 보통 졸곡이나 능묘에 모실 때까지 입었다.) 사실 태종은 이보다 1년 전, 노상왕이었던
정종이 사망했을 때 아들
세종이
고기를 먹지 않자 태종이 식겁해서 "
내가 죽었을 때는
주상이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을 정도다.
[28]
다만 딱 한번 재위 중에 대비가 위중한 병에 걸리자
회암사의 승려들을 불러놓아 불사를 벌이게 하면서 "니들 도에 효험이 있는지 보여봐라, 근데 없기만 해 봐라 이 나라에서 불교를 싹 뽑아버릴테다." 라는 협박을 하였고 이에 승려들은 이마와 팔을 지져대며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이후 병세가 어느정도 회복되어 태종은
양주
회암사에 상으로 땅과 곡식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29]
태종은 후덕대비와 같은 나이(56세)에 사망했다.
[30]
남이의 할머니이다. 즉, 남편인 의산군 남휘가 남이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태종은 남이의 외증조부할아버지가 되는 셈인 것이다.
[31]
실록
1412년
6월 23일
기사에 원경왕후의 출산 기록이 나온다. 무려 만 47세의 나이였다. 다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아기 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종이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아들의 수명이 짧다고 하여 마땅히 다른 곳에 맡겨 기르고자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점쟁이의 예언 대로 아이는 일찍 사망하였던 듯 하다.
[32]
공교롭게도 셋 다
여흥 민씨다.
[33]
아버지 이방원부터가 무신 가문을 무시하는
권문세족들 틈에서 최연소(17세)로 과거를 급제한 사람이다.
[34]
당시 태종으로서는 강해질지 모를
외척 세력으로
왕권이 약해질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단이지만 원경왕후 입장에서는 힘들 때 누구보다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돌아온 것은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죽음이었으니 뒤통수를 맞아도 너무 심하게 맞았다.
[35]
역대 조선시대 왕비들 중 최고령 출산 기록이다. 산모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노산이 많아진 현대 기준으로도 40대 후반에 출산하는 사례는 흔치 않은 것을 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후대 조선 중기에 이보다 약간 적은 나이지만 역시 40대에 막내 아들을 낳았던
인열왕후 한씨는 원경왕후와 달리 사산을 한것은 물론 본인마저 산욕열로 사망한걸 생각하면 사산도 하지 않고 무사히 건강하게 낳고, 몇 년을 더 살아 왕대비가 되어 세종의 즉위와 초반 치세까지 지켜본 원경왕후는 여러모로 대단한셈.
[36]
사족으로 우연찮게도
인열왕후 한씨는 원경왕후의 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와 똑같은
청주 한씨 집안이자 후손인데 신의왕후와 낳은 아들 숫자도 6남으로 똑같다. 또한 인열왕후가 산욕열로 갑작스럽게 4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병자호란이 다소 일찍 발생하고 호란 이후 인조의 억지로 인해 적장자-적장손인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이 왕위계승권이 어이없게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이후 크고 작은 조선 왕실 내부의 갈등과 비극들이 발생한걸 생각하면 역사 특유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37]
위에서
세종이 후덕대비 사후에
능 근처에 절을 짓는 문제에서 태종이 반대할 때도 "거긴 내가 죽으면 묻힐 곳인데 내가
불교 싫어하는거 알면서 절을 짓냐?!"라면서 반대한다. 일단 태종의 의견대로 절이 세워지진 않았지만
세종은 드물게도 "어머니 무덤이 쓸쓸해보여 절이라도 짓고자 한 겁니다." 라며 맞대응으로 나오기도 했다.
세종도 아버지 태종의 외척 정리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섭섭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보니 절을 지으려는 것을 통해 일종의 시위를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어쨌든 대비와 죽어서도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증오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
[38]
정선공주 - 남씨 - 신자승 - 신숙권 - 신명화 -
신사임당 -
율곡 이이 - 이경림, 이경정
[39]
공교롭게도
딸의
모계
후손들과
셋째 아들이 모두
대한민국
화폐의
주인공들이다.
[40]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과 원경왕후 때문에 말년에 비참한 신세가 된
신덕왕후 역.
[41]
〈역사의 라이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단막극 형식으로 재현하는 다큐라서 출연자들이 기억되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보면 그 캐스팅들이 상당히 후덜덜하다. 참고로 이 편에서 이성계는 배우
김성겸, 이방원은 배우
임영규, 정도전은 배우
변희봉이 연기했다.
[42]
2차 왕자의 난 때는
남장하고 남편이 있는 곳까지 말을 타고 찾아간다.
[43]
출산 경험이 있는 주부
시청자들은 최명길의 만삭을 눈치채고 너무 무리해서 연기하는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최명길은 이 때 29화 출연 분량을 9일만에 찍고 한꺼번에 찍은 분량만큼 출연료를 받은 후 출산을 준비했는데 출산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촬영하는 강행군을 했다고 한다. 물론
한복의 특성상 품이 넉넉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44]
최명길이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도 있지만 만삭인 임산부가 밥상을 뒤엎고 성인 남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등 큰 위험을 감수한 액션을 촬영하다보니 같이 연기하는 유동근이나 보조하는 스태프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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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역을 두번이나 맡게 된 최명길은 "자신이 원경왕후와 무슨 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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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은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나, 2017년 4월, 소속사를 옮기면서
본명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