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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23:45:06

인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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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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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조 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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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_태릉과_강릉_강릉_정자각 문화재청.jpg
강릉 전경
출생 1532년 7월 7일( 음력 5월 25일)
사망 1575년 2월 22일( 음력 1월 2일)
(향년 42세)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강릉(康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545년 8월 22일 ~ 1567년 8월 12일
조선 왕대비
1567년 8월 17일 ~ 1575년 2월 22일
조선 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1567년 8월 17일 ~ 1568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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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청송 심씨
부모 부친 청릉부원군 심강[1]
(靑陵府院君 沈鋼, 1514 ~ 1567)
모친 완산부부인 이희경[2][3]
(完山府夫人 李希慶, 1511 ~ 1559)
형제자매 8남 3녀 중 장녀
배우자 명종
자녀 1남 (양자 1남)
종교 유교 ( 성리학)
봉작 부부인(府夫人)
전호 경모전(敬慕殿)
휘호 선열의성(宣烈懿聖)
시호 인순왕후(仁順王后) }}}}}}}}}
1. 소개2. 생애3. 평가4. 가계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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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 왕비. 순회세자의 생모이자 선조의 양모.

본관은 청송 심씨. 세종의 국구( 장인)로 소헌왕후의 부친인 심온의 6대손이며, 영의정 심연원의 손녀이자 영돈녕부사 심강의 딸이다.

2. 생애

1532년(중종 27년)에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이희경[4] 사이에 큰딸로 태어났다.

1544년(중종 39년)에 당시 경원대군(慶原大君)이던 명종 혼인하여 부부인이 되었고 1545년(인종 2년), 명종이 후사가 없는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명종 6년)에 순회세자를 낳았다. 그러나 순회세자 1563년(명종 18년)에 요절하고 4년 뒤, 후사가 없던 남편 명종 승하하자 명종의 조카였던 서출 소생의 3남 하성군(河城君)을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선조이다. 하성군은 명종 생전에도 이미 암묵적인 후계자로 주목을 받았고 명종 본인 역시 하성군을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많지만, 정작 후계자로 공식 확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명종이 쓰러지고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당시 인순왕후의 밑으로 양자로 입적되어서 인순왕후가 명종 대신에 하성군을 후계자로 확정한 것.

1567년(명종 22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어 1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한 뒤 물러났고, 1569년(선조 2년) 의성(懿聖)의 존호를 받아 의성 왕대비가 되었으며, 1575년(선조 8년) 2월 12일( 음력 1월 2일) 앓고 있던 만성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으로, 남편인 명종과 함께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시어머니 문정왕후 태릉(泰陵)이 있다. 한편 선조 시기 동·서 붕당의 큰 원인을 제공한 심의겸과 심충겸은 인순왕후의 친 남동생들이다.

3. 평가

수렴청정을 한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에도 대신들과 사림들의 의견에 반하는 의사를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는 그녀가 한문을 몰랐기 때문에 섭정하는 동안은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린 선조를 보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 게다가 문정왕후와 같은 선례를 경계한 집권 사림의 압박도 있었던 모양, 수렴청정을 시작하고 6개월도 안 돼서 백인걸을 비롯한 사림들이 '대비는 정권을 주상에게 돌려줘야한다' 라는 의견을 비추었는데 인순왕후는 이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나마 남동생인 심의겸이 조선 후기까지 쭉 이어지고 정말로 본격적인 붕당 정치를 탄생(?)시켰으나 그 원인이었던 이조전랑 문제가 발생한지 불과 1년 뒤에 승하했기 때문에 서인들에게 힘이 되질 못했고 설사 더 오래 살았어도 문정왕후의 예를 생각하면 함부로 개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문정왕후이어서 시어머니의 권세 때문에 제대로 왕비 역할을 못했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 있는데 그녀가 20세 때 순회세자를 출산했지만, 워낙 순회세자가 병약해서 그런지 젊은 나이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남편 명종과 사별하고 양자 선조의 법적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인순왕후는 척신(외척)을 멀리하고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같은 도학정치(왕도정치)를 꿈꾸는 사림들에게 기회를 크게 주었다. 선조 초기 유능한 인재가 많았던 것은 인순왕후의 사심이 없던 공적인 처신에서 나왔다.[6] 심의겸이 인순왕후의 친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약했던 것도 인순왕후가 권력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7]

그러나 그녀의 인지도가 낮은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보다는 조선사 500년을 통틀어 최대의 빅 이벤트 선조 대에 크게 터져버려서 그런 탓도 있다. 당장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이덕형, 이원익, 이항복, 이산해, 정철, 류성룡 등 조선사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정치인들이 선조 치세에 숨막힐 정도로 들어차 있으며, 오성과 한음이나 신사임당과 같이 나름대로의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도 상당히 많으나 이들을 다 합쳐도 충무공 이순신 하나의 인지도에 한참 못 미칠 지경이니[8], 선조 = 임진왜란의 등식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며, 동시에 임진왜란과 추호도 상관없는(...) 인순왕후는 자연스럽게 인지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남동생인 심의겸도 붕당정치의 시초격이 된 사람치고도 그닥 유명하지 않은 탓도 있다.

가계에 대한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된다. 인순왕후의 모친, 완산부부인 이씨를 보면 본관부터 심상치 않은데[9] 실제로 인순왕후의 외가쪽 5대조가 다름아닌 효령대군이며, 6대조가 태종이다.[10] 세종 효령대군이 동복 형제임과 동시에 거슬러 내려오면 완산부부인 이씨는 사돈인 중종과는 11촌이라는 의미이다. 각각 그 자녀들인 명종 인순왕후 심씨는 조선 왕실 기준으로 13촌으로서, 8촌이 넘어가기에 남남에 가깝지만 친인척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명종의 5대 조모, 세종 왕비 소헌왕후 심씨인데 소헌왕후의 친정 동생인 심회의 4대손이 바로 명종 장인 심강이다. 즉, 태종의 후손과 심온의 후손들은 6대에 걸쳐 3차례나 혼인관계를 형성한 셈이다.[11][12]

4. 가계

5. 대중매체에서

파일:풍란 인순왕후1.png
《풍란》의 인순왕후
파일:여인천하 인순왕후.png
《여인천하》의 인순왕후
파일:불멸의 이순신 인순왕후.png
《불멸의 이순신》의 인순왕후
파일:마녀보감 인순왕후.png
《마녀보감》의 인순왕후

6. 참고 문서


[1]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5대손이다. [2] 태종의 2남인 효령대군의 직계 5대손이다. [3] 효령대군 → 보성군 → 율원군 → 여양군 → 전성군 → 이희경 [4]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용강현령 증 영의정 전성군 이대'의 딸이다. [5] 다만 성종 수렴청정을 한 대왕대비 정희왕후 한문을 몰랐지만 정사를 이끄는데 별 문제는 없었다. [6] 실록의 내용을 보면 그녀의 섭정 8개월은 모두 인사등용과 문정왕후 시절 파직당한 사림들의 신원에 관한 것들이다. [7] 물론 붕당이 일어날 당시에 이미 인순왕후가 사망한 것도 분명 있었다. 인순왕후 본인이야 욕심이 없다지만 선조 입장에서는 방계인 자신을 국왕으로 만드는데 인순왕후의 역할이 컸으므로 인순왕후가 오래 살았다면 그녀의 눈치를 봐서 서인에게 힘을 더 실어줬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붕당 정치의 시초에 있어서 판도가 달라지거나 최소 늦춰졌을 가능성이 높다. [8] 저들을 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지간하면 충무공은 안다. [9] 완산은 전주의 이칭이다. 다시말해 전주 이씨라는 의미이다 [10] 전성군 이대-여양군 이자겸-율원군 이종-보성군 이합-효령대군 순 [11] 세종 - 소헌왕후 심씨, 심강 - 완산부부인 이씨, 명종 - 인순왕후 심씨 [12] 막연한 추측이지만 명종과 인순왕후의 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요절 요인에 이런 특정가문과 짧은 기간내 반복적이고 근친적인 혼인사유가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3] 인순왕후의 어머니인 완산부부인은 본관이 전주 이씨로 태종의 2남 효령대군의 5세손이고 더군다나 완산부부인의 남편인 청릉부원군의 5대조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라서 4대조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있어서 따지고 보면 남편과도 멀게 느껴지지만 효령대군 심온을 공통조상을 두는 먼 친인척이 될 수 있다. [14] 김효원과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대립을 하다가 붕당 정치의 원인을 크게 제공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조전랑 문제에 외척이냐 척신이냐를 두고 싸우는 것 때문에 결국엔 조선 후기가 붕당의 폐해로 맛탱이가 가게끔 얼룩지었다. [15] 역설적으로 인순왕후가 이때 당시까지도 살아있었다면 되려 심의겸에게 세력이 크게 쏠려서 붕당이 나누어질 일은 없었을것이다. 오히려 권력의 큰 기반인 누이이자 왕대비의 부재로 심의겸이 힘을 잃었기에 서로 붕당이 나누어져 싸움이 일어나는 구도가 발생한 것. [16] 실제로 1574년 당시에는 인순왕후가 살아있었음에도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었는데 정작 1년후 인순왕후의 사망 직후 후임으로 추천된 동생 심충겸은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전랑이 되지 못했고 이는 붕당이 나눠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7] 심충겸도 역시 붕당 정치에 있어서 형인 심의겸과 더불어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1572년(선조 5년)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발탁되려고 했으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외척이었던 권신 윤원형의 집에서 기숙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1574년(선조 7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고 이후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이 추천되었으나 김효원은 '직분(이조정랑)이 척신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결국 심의겸은 서인에 김효원은 동인으로 갈라지면서 결국 그렇게 붕당이 시작이 된다. 그리고 심충겸의 7세손이 바로 훗날의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이다. [18] 뽀뽀뽀》 3대 뽀미언니. [19]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정안왕후 김씨 역,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대주도금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