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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9:04

덕흥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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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왕자 | 조선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 德興大院君
파일:덕흥대원군묘.jpg
덕흥대원군묘 전경
출생 1530년 4월 2일
조선 한성부 안국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망 1559년 6월 14일 (향년 29세)
조선 한성부 사직동 도정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산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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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d1b43><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조(岹)
부모 부왕 중종
모친 창빈 안씨
형제자매 9남 11녀 중 8남[1]
배우자 하동부대부인
자녀
슬하 3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적장남 -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적차남 - 하릉군 이인(河陵君 李鏻)
적장녀 - 이명순(李明順)
적3남 - 선조(宣祖)
서장녀 - 이혜옥(李惠玉) 측실 순단(順單) 소생
종교 유교 ( 성리학)
아명 환수(歡壽)
경앙(景仰)
군호 덕흥군(德興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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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생애4. 사망과 이후5. 묘소6. 가족과 후손
6.1. 인물6.2. 후손들의 위상과 항렬
7. 작품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중종의 서7남이자 선조의 친아버지.[3]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명종의 이복형이다.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이다. 그리고 선조 이후 조선 왕실의 실질적인 중시조이며,[4]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의 파시조이다.

2. 이름

이름은 '조(岹)'이다. '산 높음'이란 뜻으로 다른 형제들의 이름과 같이 '뫼 산(山)'을 부수로 한 글자이다. '岧'로도 쓰며, '山'이 '召'의 왼쪽 변에 있느냐 머리에 있느냐의 차이만 있다.

'岹'의 현재 독음은 '초'이다. 그래서 덕흥대원군의 이름을 '이'로 알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을 '됴'(현대식으로 '조')라고 적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곁가지 조(條)'를 써두었다.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덕흥대원군의 이름을 '조'로 발음한다고 적은 이상, '초'보다는 '조'로 발음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5]

3. 생애

1530년(중종 25년) 4월 2일[6] 중종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졌으며, 13살 때 정인지 증손녀와 정식으로 가례를 올렸고, 그 사이에서 선조를 포함한 아들 3명과 딸 1명을, 첩 사이에서 딸 1명을 더 얻었다.

실록의 기록들로 볼 때 성품이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7]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破職)시킬 것을 건의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悖慮)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파직(破職)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하니, 상(上)이 답하기를,
“이초(李岧)가 연소하여 사체(事諦)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교계(敎戒)를 가하여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 1552년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을해) 2번째 기사
이상한 점은 명종이 오히려 4살이 어린데도 이복형인 덕흥군을 '어리다'라며 적극 감싸주고 있는 것. 이건 명종이 정궁 출신 적자이자 군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쨌든 다음은 그의 노비들이 장인인 하동 정씨 정세호의 노비들과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사관의 논평이다.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鬪濁)한 죄로 추고(墜告)할 것을 아뢰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덕흥군은 종실(宗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되지만(후략)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1554년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경오) 1번째 기사
손자들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보다는 덜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이나 수정을 할 수 없었기에[8]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에 적힌 덕흥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망나니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로울 수 있다. 총명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면, 신하들의 눈에 띄기 쉽고, 최악의 경우 역모 사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사고치면서 평판을 나쁘게 해야 신하들의 눈길과 왕의 의심을 피해 천수를 누릴 확률이 높아지므로, 덕흥군의 저런 행위는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9]

4. 사망과 이후

1559년(명종 14년) 6월 14일[10]에 사망했다. 향년 29세.

일찍 죽은 결과 자신의 3남 하성군이 왕이 되는 로또를 맞았다. 주색에 빠져 요절한 상황에다가 그 아내도 일찍 죽으면서 하성군이 최적의 왕위 계승자감이 된 것이었다. 하성군은 친부모도 일찍 여읜 데다가 할머니인 창빈 안씨도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명종 재위 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한테 매우 매력적인 양자감이었다.

제안대군같이 예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너무 어리거나, 대신들이 옹립시킨 성종, 철종, 고종 같은 왕들은 대부분 장남도 아니었고,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정통성이 떨어진데다 어린 왕이 대신들이 권력도 나눠 가질 수가 있었고, 다루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내내 대신들에게 휘둘리고 약한 왕권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선조는 실제 혈통으로는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명종 양자가 되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11]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아들을 낳지 못한 명종은 조카들을 종종 궁으로 불러 잔정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아버지를 일찍 잃은 덕흥군의 세 아들들에게 특히 관심을 많이 주었다. 순회세자 사후 명종의 건강도 안 좋아졌기 때문에 만약 그대로 명종이 후사 없이 죽는다면,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가 있다. 바로 누나 문정왕후를 뒷배로 두고 전횡을 일삼던 윤원형이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 중 한 명과 혼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도 원래 본부인 김씨 소생이 아니라 측실 출신이었던 정난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12] 차기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덕흥군의 아들을 사위로 삼는다면, 향후 자신이 부원군(국구)이 되어 권세를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정왕후가 승하했고, 끈 떨어진 윤원형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그러자 그동안 윤원형을 벼르고 있었던 사헌부 사간원에서 윤원형의 죄상을 26가지나 언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덕흥군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던 일이었다.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의 봉서
(전략)... 측실 소생을 사대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옹주(翁主)를 하가(下嫁)하는 예법입니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아들은 중종 대왕의 손자이고 벼슬이 정2품인데, 측실의 소생을 존귀한 사람과 혼인시키려고 도모했으니 명분을 범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과연 임금을 의식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후략)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1565년 을축 / 명 가정(嘉靖) 44년) 8월 14일(무인) 1번째 기사
어쨌든, 결국 명종은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이 보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선조이다.

덕흥군은 선조 즉위 2년 후인 1569년(선조 2년)에 대원군 작위를 추증받았다. 다만, 왕으로까지 추존되지는 못했다. 선조는 그러려고도 하지 않았고, 단지 덕흥대원군 봉사손[13]을 1품으로 세습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추존의 예는 왕이라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14][15] 하지만, 덕흥대원군의 증손자 인조는 얄짤없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자신 스스로 친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추존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도정궁 봉사손은 조선시대 내내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을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했던 도정궁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다가 1913년에 화재로 대부분 불탔고 직후 재건되었으나 후손들이 1950년대에 매각했다.

5.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옛 덕송리) 수락산에 묘가 있다. '덕릉(德陵)'으로 불리는데 원래는 잘못된 명칭으로 대원군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묘(墓)'로 일컫는다.

여기서 카더라성 일화 하나. 선조가 나무 도매상에게 "나무꾼이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 후한 값을 주라고 했고 '덕흥대원군'에서 왔다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말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카더라 이 일화가 반쯤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게 당고개역 인근의 덕흥대원군묘 근처를 지나가는 고개 이름은 '덕릉고개'이고, 해당 지역에 위치한 자연부락의 마을 또한 '덕릉마을'이다. 덕릉로라는 도로명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비슷한 일화는 영조에게도 존재한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은 후궁인 관계로 '소령'인데, 한 나무꾼이 암행 중인 영조에게 자기가 벌목한 나무를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왔다."라고 했더니 나무꾼에게 종3품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6. 가족과 후손

현재 법적, 생물학적으로 둘 다 덕흥대원군파인 사람들은 전부 하원군의 자손들이다. 하원군의 법적 자손들 중 일부는 다른 계통에서 입적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6.1. 인물

이해찬(前 국무총리, 정치인), 이해진(네이버 등기회사이자 라인 회장), 이봉주(마라토너), 이우영(만화가, 대표작:〈 검정고무신〉)이 있다.[17] 이해찬은 하원군의 6남(서3남)인 연성수의 12대손이고 이봉주는 하원군의 8남(서6남) 진성군의 13대손이다.

6.2. 후손들의 위상과 항렬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사실상 종친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이는 덕흥대원군의 3남이지만, 명종의 양자로 입적한 선조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왕으로부터 4대가 지난 뒤에는, 임금이 못 된 왕족들의 후손들은 일반 양반과 다를 게 없는 취급을 받았고, 덕흥대원군의 후손들도 마찬가지기는 했다.[18] 다만, 상술한 문장은 조선 전기에 왕족 대우가 끝난 다른 전주 이씨들에 비하면, 종실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 직계의 이 귀해지면서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이라면 파(派)를 가리지 않고 (대가 끊긴) 종친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실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덕흥대원군의 봉사손들은 순조 시기부터 경술국치까지 '대원군 적장손 세습제'라 하여 몇 대가 흘러가도 군 작위를 받는 정식 왕족으로 인정받았다.[19] 또한 1868년(고종 5년) 3월 5일에는 흥선대원군[20]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파(派)와 상관없이 전부 항렬자를 통일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같은 일가친척이란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21]
덕흥대원군을 시조로 하는 10여 파의 다른 항렬을 '응(應)' 이하 한가지로 정하여 이름을 고치는 것을 거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선파(璿派)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로 닦는 것은 한 뿌리에서 천 개 가지로 나누어지고 만 갈래가 근원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역대 조종(祖宗)들의 영혼도 반드시 굽어보고 기뻐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宣祖) 이후의 여러 계파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시조로 삼아 10여 파로 나뉘어졌는데, 모두 한 조상의 같은 핏줄이다. 항렬이 각 파가 같지 않은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족(九族)을 친애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난다. ‘응(應)’ 자 이하를 반드시 한 가지로 정하여 설사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벼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름을 고치도록 하는 일로 종친부(宗親府) 이조(吏曹)에 분부하라.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이 예에 따라 고쳐 정하는 것이 실로 또한 각 집안에서 돈독하게 하는 방도이니, 함께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했다.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1868년) 3월 2일(경술) 1번째 기사 #
항렬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본가인 인평대군파의 것을 기준으로 맞추었다. 흥선대원군의 항렬인 덕흥대원군 11세손 'O응(應)'[22]부터 통일하여 그 밑으로 '재(載)O',[23] 'O용(鎔)',[24] '해(海)O',[25]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26][27] 'O희(熙)', '교(敎)O' 순으로 제정했다.

다만, 조선왕조가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덕흥대원군 22세손 '교(敎)O' 이후부터는 파마다 항렬자가 다르다. 예를 들어 (좁은 의미의) 덕흥대원군파는,[28] 'O호(鎬)', '원(源)O', 'O근(根)', '병(炳)O'으로, 선조의 자손이지만 인조의 자손이 아닌 파들은,[29] 'O석(錫)', '윤(潤)O', 'O병(柄)', '영(榮)O'으로 정했다.

참고로 금원군파와 영양군[30]의 항렬은 덕흥대원군파의 항렬과 같다.[31] 금원군파의 경우 상술했듯 덕흥대원군의 둘째 아들 하릉군이 입적하여 뒤를 이었기에 사실상 덕흥대원군파로 봐야 하고, 영양군은 왕자들 중 덕흥대원군의 유일한 동복 형제여서인지 후에 선조의 후손들 중에서 양자들을 들여온 기록이 더러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양녕대군파, 광평대군파 다음으로 많은 후손 수를 자랑한다.

7. 작품

파일:덕흥대원군 한시.png
<colbgcolor=#6d1b43> 덕흥대원군이 지은 한시.
글씨는 후손인 서예가 일민 이해도가 예서로 쓴 것이다.[32]
《해동서첩》에 그가 쓴 한시(漢詩) 한 수가 남아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半世憂愁已作翁(반세우수이작옹)
반 평생 근심 속에 이미 늙고 말았는데

聖恩如海泣無窮(성은여해읍무궁)
바다 같은 성은이 눈물로도 끝이 없네.

人言可與人情近(인언가여인정근)
사람들 말과 같이 인정(人情)에 끌렸으니

父子君臣義亦同(부자군신의역동)
부자(父子)와 군신(君臣)도 의리도 같겠지.
덕흥대원군

8. 대중매체에서

파일:덕흥군01.jpg }}} ||
<colbgcolor=#6d1b43> 〈여인천하〉의 덕흥군
2001년 SBS 드라마 〈 여인천하〉에서는 조상진이 연기했다. 비중이 왕자 1 정도라 존재감은 없으나, 후대 임금(선조)의 아버지라는 것을 암시하듯 똑똑한 모습으로 나왔다.
파일:20161005_122545.png }}} ||
<colbgcolor=#6d1b43> 〈옥중화〉의 덕흥군
2016년 MBC 드라마 〈 옥중화〉에서는 정성운[33]이 연기했다. 큰 비중은 없지만 주인공 옥녀( 진세연 분)에게서 아들 중 하나 훗날 높은 자리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1] 단순히 나이 순으로 따지면 13대 임금 명종은 9남으로서 막내이지만 엄연히 중전의 친아들이라서 적장자인 12대 임금 인종에 이은 적차남이다. 덕흥대원군은 나이순으로 따지면 8남이지만 왕비의 아들들인 형 인종과 동생 명종, 이 2명을 제외한 7명의 서자들로만 따졌을땐 서7남이자 서자들 중 막내가 된다. [2] 봉호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별호인 '덕흥(德興)'에서 따왔다. [3] 중종의 서자들 중에서는 제일 막내이다. [4] 명종 사후 즉위한 조선의 국왕들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들이다. 이후의 대원군들인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모두 덕흥대원군의 직계후손이다. [5] 후술할 실록 기사에서 이름이 '이초'라고 적힌 것은 현대에 번역하다보니 그런 것이고, 실록 원문에는 발음이 나와있지 않다. [6] 음력 3월 5일. [7] 사실 조선 왕족, 종친들치고 덕 있고 인망 있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았다. 조선의 왕족들은 조금이라도 덕망이 있거나 유식하면 곧바로 역모에 엮이거나 역적으로 모함을 당해 죽거나 유배를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굳이 과거를 봐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아도 나라에서 땅과 녹봉을 주었기 때문에 굳이 공부에 열을 올릴 필요도, 정치력을 갖출 필요도 없었다. 도리어 양녕대군이나 제안대군처럼 적당히 사고도 쳐주면서 유유자적하며 노는 게 본인이 천수를 누리며 호강하는 데는 매우 도움이 되었고 왕실에서도 역모에 연루되거나, 왕에게 개기거나, 임해군, 순화군처럼 강력범죄를 수십 차례 저지르는 막장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8] 선조, 현종, 숙종, 경종의 경우는 개수실록 또는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본 실록 외에 다시 만든 실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당파 정치상 새로운 당이 집권하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시 만들었으므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다. [9] 당장 앞 세대의 제안대군만 생각해도 일부러 사고를 쳤다는 썰이 많았다. 다만 제안대군은 덕흥군과 그 후손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쪽은 가족 문제를 일으켰지 그 외의 남에게 피해주지는 않았으니. 300년 후 흥선대원군도 멍청이 행세로 안동 김씨 사이에서 살아남아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소설 《운현궁의 봄》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반박도 있으나, 해당 시기에 경원군 이하전이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말했다가 트집잡혀 결국 사사되었음을 생각하면, 이하응 또한 어느 정도는 몸을 숙이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10] 음력 5월 9일. [11] 예로 조선 9대 왕인 성종도 숙부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했다. 그리고 애당초 중종의 적통인 인종, 명종이 다 후사 없이 죽은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왕족이 중종의 서손들이란 것도 고려해야 한다. [12] 단, 저때 정난정은 정실이었다. 본처 김씨 부인을 몰아내고 차지한 건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정실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 부인을 독살했다. [13] 제사를 받드는 장손. 선조에게 두 형이 있었는데, 큰형 하원군의 자손들이 덕흥군 제사를 받들었기 때문에 그를 봉사손이라고 특정하는 것이다. [14] 성종이 추존시킨 덕종의 경우는 세자였다는 명분이 있어서 성종이 선왕의 양자로 들어가 족보상 아버지가 아님에도 추존할 명분이 있었지만, 덕흥군은 세자였던 적이 없는 일개 왕자여서 추존의 명분이 부족했다. 물론 선조가 즉위하기 50년 전쯤에 명나라에서 가정제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갈 여지가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엄청난 대립 끝에 아버지를 황제로 추존한 일이 있었으니, 만약 선조가 가정제의 사례를 빌미로 내세워 추존을 밀어붙였다면 덕흥군의 추존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으나 선조는 그러지 않았다. [15] 《선조수정실록》 3권 2년 11월 1일, 《선조실록》 203권 39년 9월 2일. [16] 정인지의 손자이자 정상조(鄭尙祖)의 아들, 세종의 외증손자 [17] 항렬로는 이해찬, 이해진이 이봉주의 아저씨뻘이고, 이봉주의 조카뻘이 이우영이다. [18] 조선의 법률상으로 대군의 경우 4대,군의 경우 3대가 넘어가면 양자로 입적되지 않는 한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리 이원익, 무의공 이순신 등은 왕족의 후손이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규제도 받지 않아 평범한 양반들처럼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19] 진안군 이언식, 완성군 이희, 완창군 이시인, 경원군 이하전, 창산군 이해창 [20] 당시 임금은 고종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이 전권을 쥐고 섭정을 하던 시기였다. [21] 비단 덕흥대원군파나 전주 이씨뿐만 아니라, 조선의 거의 대다수 씨족이 이 때 항렬자를 통일했다.(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 인구가 너무 많아 항렬자 통일이 어려운 씨족은 제외) [22] 1868년 이전의 항렬자는 'O섭(燮)', '신(愼)O', '세(世)O', ' 화(火)'변. '섭'자 돌림은 선조의 모든 자손들에서 경창군 인흥군을 제외한 모든 파와 소현세자파, '화(火)'변은 덕흥대원군파 또는 경평군파 일부, '신'자 돌림은 경창군파와 인흥군파, '세'자 돌림은 능원대군파에서 사용했다. [23] 1868년 이전에는 '시(時)O', 'O주(周)', '중(中)O', 'O수(壽)' '토(土)'변. '시'자와 '주'자 돌림은 덕흥대원군파, '중'자 돌림은 인흥군파, '수'자 돌림은 능원대군파, '토(土)'변은 경평군파 일부에서 썼다. [24] 1868년 이전에는 'O전(銓)'. 경원군 이하전이 이 항렬에 속한다. 이하전은 1862년에 사망해 바뀐 항렬자를 쓰지 못했으나 그의 서형 이우전은 나중에 이우용으로 개명한다. [25] 1868년 이전에는 'O영(永)'. [26] 소현세자파나 인평대군파에서 벌써 이 항렬을 쓰는 후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판 《 소현세자파보》와 1984년판 《 인평대군파보》를 보면, 이 항렬을 쓰는 후손들은 1970년대부터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부터 4-50년이 지난 2020년대 기준으로, 다음 항렬인 '희(熙)'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27] 숭선군파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소현세자파나 인평대군파보다 1세대나 빠르다. 1977년판 《숭선군파보》를 보면 '종'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60년이 다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교(敎)'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28] 선조 계열이 아닌 사람들. 즉, 임금들 중 가장 가까운 조상은 중종. [29] 인성군파, 경창군파 등. [30] 둘 다 중종의 서자들. [31] 완창대군(정확히는 태조의 이복형인 영성대군)의 종파(宗派)에서도 이 항렬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32] 사진 출처. [33]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소현세자, 〈 화정〉에서 청태종을 맡은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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