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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 恭惠王后 |
|||
|
|||
순릉 능침 | |||
출생 | 1456년 11월 17일( 음력 10월 11일) | ||
조선
한성부 동부
연화방 한명회 사저[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연건동) |
|||
사망 |
1474년
5월 9일(
음력
4월 15일) (향년 17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구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순릉(順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비 | ||
1470년 1월 10일 ~ 1474년 5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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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청주 한씨 | |
휘 | 송이(松伊) | ||
부모 |
부친 상당부원군
한명회 (上黨府院君 韓明澮, 1415 ~ 1487) 모친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 (黃驪府夫人 驪興 閔氏, ? ~ 1479) |
||
형제자매 | 1남 4녀 중 4녀[2] | ||
배우자 | 성종 | ||
봉작 |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 | ||
전호 | 소경전(昭敬殿) | ||
휘호 | 휘의신숙(徽懿愼肅) | ||
시호 | 공혜왕후(恭惠王后)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1번째 왕비(王妃).2. 생애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1456년(세조 2년), 한성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언니들 중 바로 위의 언니가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 한씨이다.1467년(세조 13년) 음 1월 12일, 세조의 둘째 손자이자 의경세자와 수빈 한씨의 차남인, 1살 연하의 잘산군(乽山君)[3]과 혼인했다.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세조 15년), 잘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성리학 윤리에 따라 철저하고 엄하게 교육했다.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녀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
한씨는 1473년(성종 4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4]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은 하루 걸러 처가에 들러 한씨의 상태를 살폈다.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병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한씨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성종 5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5]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직접 보살폈다.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 1474년(성종 5년) 음 4월 15일, 17세의 젊은 나이로 훙서[6](薨逝)하였다. 성종과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
성종은 공경(恭敬)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7],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연산군의 재위기때인 연산군 4년( 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종묘 정전(正殿)에 공혜왕후의 신위가 성종과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8] 내에 위치한 순릉(順陵)이다.
3. 가계
- 친정( 청주 한씨)
- 시가( 전주 이씨)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성종(成宗)
- 자녀 : '슬하에 자녀 없음'
4. 여담
- 남편 성종은 공혜왕후의 언니인 장순왕후와는 3촌 관계로 시조카이자, 동생인 공혜왕후의 남편이므로 성종은 장순왕후의 제부가 된다.
- 훗날 남편(성종)의 셋째 왕비가 되는 정현왕후는 본인의 7촌조카가 된다. 고모할머니(할아버지 한기의 누나) 근순택주가 윤곤과 혼인하였는데 윤곤의 증손녀가 바로 정현왕후이다.[9]
5. 대중매체에서
6. 참고 문서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의 연화방이거나 황해도 송화 일대의 연화방 둘 중 하나이다. 한명회가 계유정난 직전에 개경 경덕궁직을 맡았다가 계유정난 이후 한양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혜왕후가 한명회의 막내딸이자 세조 즉위 이후 출생했으니
종로의 연화방일 것이라 추측된다.
[2]
바로 위 언니가
장순왕후이다.
[3]
성종의 잠저 시절
봉호이다.
[4]
친정아버지가 있는
한명회의 집
[5]
三大妃,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6]
임금이나 후비(后妃) 따위의 왕공귀인(王公貴人)들의 죽음
[7]
나중에 순릉이 되었다
[8]
언니인
장순왕후의
공릉(恭陵)도 이 곳에 있다.
[9]
공혜왕후 한씨 ← 한명회 ← 한기 ← 한상질 → 근순택주 한씨 → 윤산삼 → 윤호 → 정현왕후 윤씨
[10]
소문난 칠공주의 땡칠이로 유명한 그
신지수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