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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4 22:34:32

오성과 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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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에피소드3. 애니메이션4. 비디오 게임

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승[1]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로 유명한 이항복 이덕형을 이르는 말.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2]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다.[3]

조선 최고의 개그 콤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얽힌 코믹한 에피소드가 민담, 전래동화, 어린이용 문고 등으로 워낙 많이 다뤄지면서 흔히 두 사람이 불알친구 수준의 어린이일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이 진짜로 처음 만났던 때는 선조 11년(1578년)으로, 두 사람이 어른이 되어 과거 시험을 봤을 때였다. 이때가 세는 나이 기준으로 이항복은 23세, 이덕형은 18세.[4] 또한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본인이 "내가 어렸을 때는 마치 짐승과 같아서 아무도 나를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어릴 적 스테레오타입 그대로의 말썽꾸러기가 맞았던 반면, 이덕형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크게 두드러지거나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가 없는 편이다.
만력 6년( 1578년), 이때 비로소 백사 이 상국 항복과 교분을 맺었다.
<한음문고>
신의 선조와 오성은 과거장에서 서로 사귀게 되었는데, 한 번 보고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이는 사적에 실려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로 사귀었다고 하는 것은 민간에서 속되게 전하는 바입니다. 나이는 오성이 신의 선조보다 다섯 살 많습니다.
이덕형의 후손인 참찬관 이병교(李炳敎)의 말.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년) 9월 14일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병교가 밝혔듯이 둘은 실제로도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고, 이항복이 이덕형보다 5살 형이다.[5][6] 이병교가 이렇게 밝히기 전에 고종은 이병교에게 "오성과 한음이 소꿉친구라는 게 정말인가? 그 사람들 장난친 일이 아직도 전설로 전해지니 매우 멋진 일인 듯. 나이는 누가 많고 적은지 모르겠네?"라고 물었다고 한다. 고종은 태어나서 12세의 나이에 즉위할 때까지 궐 밖에서 살았던 인물이었던만큼 거리의 이야기꾼이나 여러 야담집을 통해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접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오성과 한음이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이 때에도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조선 후기 백성들 중에서는 이항복의 본명이 '오성'인줄 알고 성을 오씨로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역사상의 이항복, 이덕형의 본모습보다 민담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가 더 유명해진 케이스[7]지만, 이 두 사람이 평생에 걸친 각별한 우정을 나눈 남다른 관계였던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를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兄)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8]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이덕형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 있지만,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물론 이덕형이 읽씹이나 당하는 그런 관계였던 건 아니고, 이덕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항복이 묘지명을 쓸 때 "내가 명보(이덕형의 )를 그르쳤구나. 한스럽다."는 식으로 애통해 하고 있으며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시에서도 "목소리 죽여 남몰래 한원군(이덕형)을 곡하노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이항복이 꽤 인간 관계가 폭넓었던 것에 비해 이덕형은 인간 관계가 협소한 편이었지만 벼슬도 짝을 이뤄 한 경우도 있었고 실록에서도 이항복과 이덕형이 서로를 배려하는 기록도 남아 있던 만큼 두 사람이 매우 특별한 우정을 나눴던 것 자체는 분명하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5살 차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죽을 때에도 5년 차이가 났다. 이덕형은 1613년 사망, 이항복은 1618년 사망.

포천시는 그들과 유서가 깊은 지역이기 때문에 마스코트 역시 오성과 한음이다.

2. 에피소드

2018년 오성의 묘지가 있는 경기도 포천시에서는 포천역사문화관에서 '백사 이항복 선생 서거 4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병찬 대진대 교수는 '백사 이항복의 캐릭터 연구'를 발표하였는데 흥미로운 통계가 실려 있다. 기지가 넘치고 해학의 대가였던 오성에 대한 '문헌'설화는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87편에 이른다. 이 중 오성과 한음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6편에 불과하다. 물론 그중에 죽마고우 시절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오성과 한음 '구비'설화는 180편 가까이 되고 그중 오성과 한음이 함께 등장하는 설화가 63편에 이른다. 상당수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일화다.

3. 애니메이션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으로, 사자성어 한자 공부용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사자성어를 알 수 있다. 투니버스 개국 초기인 1996년에 방영되기도 했다.

4. 비디오 게임

1993년 에이플러스(A+)[49]라는 교육 출판사 업체에서 만들고 금성 소프트(현재 LG그룹)에서 배급한 어드벤처 게임. 오성과 한음을 조종하여 여러가지 임무를 맡는 게임. 방식은 물론 캐릭터 등의 그래픽 스타일마저 프랑스 어드벤처 게임 고블린의 영향이 상당히 짙게 드러난다. 특히 몇몇 스프라이트는 그냥 베꼈다 할 수준. 이젠 레어가 된 정품 구성. 풀 플레이

고블린을 대놓고 베껴서 독창성은 떨어지는데다 퍼즐 판정이 상당히 짠 편이라 불편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래도 어드벤처 게임으로서 기본은 갖춘지라 어느정도 할만한 게임이라는게 중론.

Windows 환경에서는 도스박스로 실행해야 한다.


[1] 둘 다 최고위직인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항복은 89·91대 영의정을 지냈고 이덕형은 90·95·97대 영의정을 지냈다. [2] 오성은 이항복의 본관인 경주( 경주 이씨)를 의미한다. 이항복의 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항복의 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사(白沙)다. 젊은 시절에는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 문인들이 다 그렇듯 이항복은 그 외에도 호가 많았다. [3] 한음은 ' 한강(漢)의 남쪽(陰)'이란 뜻으로(그 반대가 바로 ' 한양(漢陽)')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 廣州)를 의미한다. 봉호인 '한원부원군'의 '한원(漢原)' 또한 광주의 별칭에서 딴 것. [4] 조선시대에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 18세였다. 둘은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둘 중 연하인 이덕형이 18세가 되기 전에는 만날 일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교 4학년생과 고등학교 2학년생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조선시대에는 15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 않으면 굳이 서열을 나누고 하지 않았다. 류성룡 이순신의 경우도 류성룡이 나이가 3살 더 많았고, 끝내 서로 앙숙이 되었지만 한때는 서로 친밀한 관계였던 송시열 윤휴도 송시열이 10살 연상이었지만, 송시열은 윤휴를 벗으로 대우했다. 해동역사를 저술한 한치윤(韓致奫)과 그 서문을 써준 유득공 역시 15세 이상 차이가 났지만 친구 관계였다. 정몽주 정도전도 정몽주가 5살이 더 많다. 사실 나이 한두 살 차이로 서열을 매기는 건 실제 조선시대 풍토와는 거리가 있다. 농촌 사회 특성상 한 마을에 동갑내기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보통은 나이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또래들과 막역하게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6] 오늘날에도 중년이나 노년층에서 나이 차이가 몇 년 나도 친구로 지내는 경우를 의외로 적잖이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이 세대가 출생했던 무렵은 전쟁이나 행정 체계의 미비, 영양 상태 등 여러 이유가 작용해 출생신고가 제때 안 된 경우가 많아서 호적상 나이와 진짜 나이가 불일치한 경우가 흔했던 통에 나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내는 것에 가깝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나이를 말할 때 실제 나이랑 주민등록증 나이를 구별해서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1, 2살 정도도 꼬치꼬치 따지는 건 기성세대보다도 요즘 청장년층에서 더 심해진 측면도 있다. [7] 비슷한 케이스를 들자면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있다. [8] 현대 한국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상황에 따라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같은 동네의 지인이라 할지라도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보통 성씨 관직을 붙여 부르는게 일반적이었다(ex 김 대감, 이 부사, 박 생원). 따라서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는 건 매우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이다. [9] 출전: 어우야담. [10]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이핵(李翮)의 3남 검교정승 이세기(李世基)의 3남 상서공 이과(李薖; 상서공파 파조)의 8대손이고, 이제현(李齊賢; 익재공파 파조)은 이핵의 차남 검교정승 이진(李瑱)의 차남이다. 즉 이제현은 이항복의 8대조 이과와 사촌지간이다. [11] 출전: 구비설화. [12] 대장장이나 그 식구가 노름에 빠지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았다는 버전도 있고, 아내가 바람이 나서 집안 재산을 전부 가로채 도망쳤다는 버전도 있다. 또는 전쟁으로 말편자를 박을 못을 기한 내에 많이 만들라 하였지만 아무리 잠자는 시간을 줄여도 그 절반밖에는 만들 수가 없었다. [13] 출전: 구비설화. 6세 무렵의 오성의 일화로 구전되나,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도 전한다. 그러나 오성과 한음은 각각 23세, 18세 때에 처음 만났다. [14] 출전: 백사집. [15] 출전: 백사집. [16] 출전: 백사집. [17] 물론 오성과 한음도 영감에게 작년에는 정말 죄송했다고 용서를 빌었지만, 오히려 영감이 두 분 덕에 반성 많이 했다면서 고마워했다. [18] 출전: 구비설화. 감나무가 아니라 배나무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19] 이 사람의 아들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이다. 참고로 버전에 따라서는 권철이 아닌 아들 권율로 변경돼서 나오기도 한다. [20] 판본에 따라서는 이 질문을 듣고 나서 '역시 보통 아이가 아니야!'라면서 감탄했다는 것도 삽입하기도 한다. [21] 이 부분을 권철이 "우리 집 하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한 짓이지 나는 몰랐다"라고 변명하자 오성이 "대감님 손이나 발이 잘못하면 그건 손발 잘못이지 대감님 잘못이 아니라고 하시렵니까?"라고 받아쳤다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22] 출전: 구비설화. [23] 판본에 따라서는 서당 친구로 나오기도 한다. [24] 출전: 동패락송. [25] 출전: 구비설화. [26] 출전: 계압만록. [27] 출전: 구비설화. [28] 장례를 주도하여 마침. [29] 출전: 계압만록. [30] 출전: 구비설화. 송편이 아니라 만둣국으로 전하기도 한다. [31] 허 서방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에 황 대감이 이 집의 황소를 탐냈으며, 이런 명령을 내린 사유도 참으로 어이가 없는데, 사유인 즉슨 천한 계집 주제에 감히 지체 높은 사람의 땅에 함부로 소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32] 출전: 공사문견록. [33] 삼이나 노 같은 것으로 짚신처럼 엮어 만든 신발이다. [34] 출전: 기문총화. [35] 출전: 공사문견록. [36] 출전: 연려실기술, 오백년기담. [37] 출전: 구비설화. [38] 출전: 구비설화. [39] 출전: 경판 임진록. [40] 출전: 송천필담. [41] 출전: 동패락송. [42] 출전: 구비설화. [43] 출전: 택당집, 송천필담. [44] 멍청이, 얼간이라는 뜻의 함경도 사투리. [45] 출전: 남계집. [46] 출전: 백사집. [47] 출전: 백사집. [48] 출전: 남계집. [49]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학습지 레이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