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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24:48

광해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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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세자 광해군3. 왕 광해군
3.1. 효종과의 비교
4. 현대의 평가
4.1. 긍정설4.2. 부정설4.3. 소결
5. 외교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
6. 북한에서의 평가

1. 개요

활동한 나이에 따라 장단점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자세한 것은 긍정설과 부정설에 후술한다. 물론 세자 시절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왕 시절은 대중의 평가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광해군, 인조 등 비슷한 시대의 두 임금은 현대 한국사학계에서 정치적인 평가를 걷어내고 동시에 긍정적인 면모가 재평가받기 시작했으나, 광해군은 일제강점기부터 정치적 필요성과 이권에 의한 재해석이 많았던 탓에 재평가의 기류에서 유독 불필요한 수준의 미화가 혼합되고 실제 왕의 역사가 왜곡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계승범 교수의 광해군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평가한 논문도 참고해 보면 좋다. 광해군, 두 개의 상반된 평가

2. 세자 광해군

10월 15일 주상께서 한양으로 환궁하던 날 비단옷을 입고 들어오셨지만,
동궁[1]은 베옷을 입고 눈물을 비와 같이 흘리며 행색이 초췌하여 감회를 떠올리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받들고, 기뻐하며 머리를 들고 말하기를, “과연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다.”라고 했다.
고대일록

26일 포시(晡時)에 전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가 영전(影殿)에 참배한 뒤 유민들에게 구휼미를 나누어 주었다.
고대일록

1일 주상께서 세자께 전위(傳位)하셨는데, 세자께서 극구 사양하셨다고 한다.
상께서는 국새를 봉하여 영상(領相)인 유성룡에게 맡겨 두고, 오랫동안 정사를 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께서 전위하신 일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전위(傳位)하심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말씀이 흡족하지 못함이 있다.
그러므로 국시(國是)가 흉흉하고 임금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가령 주상께서 정전에 임하시어,
세자를 불러 정하(庭下)에 서게 하시고 국보를 가지고서 간곡하게 당부하셨다면, 세자께서 무슨 말로 사양하셨겠는가.
고대일록
세자 임명 후 분조를 맡게 되는데, 이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본 고을이 조폐(凋弊)하여 음식물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니 내전이 이곳에 도착한 뒤에 세자는 이곳에 머물도록 하고, 대전(大殿)은 바로 박천(博川)으로 가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로 갈 것이니 모든 일을 즉시 예비하여 떠날 수 있도록 하라. 이런 뜻으로 즉시 시종(侍從)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여 준비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3번째기사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기사

이날 밤에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내선(內禪)033)[2] 할 뜻을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대신(大臣)들의 반대를 받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오늘 이후로는 세자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다스려 관작의 제배(除拜)나 상벌 등의 일을 다 편의(便宜)에 따라 스스로 처결할 일로 대신들에게 이르라."
하자, 대신들에게 중난한 일이어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니, 답하기를,
"내선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8번째기사
의역하자면, 선조 요동에 가겠다고 징징대는 것을 신하들이 애써 말리고 있었다. 심지어 선조는 왕위도 다 넘기고, 신하들도 안 따라와도 되니 자신이 요동에 가게 해달라고 한다... 이 와중에 광해군은 정권을 맡게 된 것이다.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광해군에게 국정 위임을 한 상황도 아니었다. 신하들이 반대해서 양위도, 국정 위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선조는 광해군에게 조정을 맡기겠다는 말만 하고, 그냥 영변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 어떠한 정확한 지침이나 계획 없이 그냥 선조는 의주를 향해 떠난 것이다.[3] 광해군은 조정을 선조의 명에 의해 받은 것이 아니다. 선조가 도망치며 내버려둔 조정을 떠맡게 된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구분을 쉽게하기 위해서 이를 분조라 칭하고 있다. 선조는 그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후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았다. 위에서 강계나 어디로 가라고 이야기를 했으나, 그냥 대충 둘러댄 내용일 뿐이었다. 즉, 광해군에 대해서 어떠한 지시도 지침도 내리지 않고 그냥 의주로 내뺀 것이다.

이 와중에 광해군은 남은 관료들을 이끌고 일본군을 뚫고 강원도 이천으로 향한다. 당시 강원도 이천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 곳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군 점령지를 지나야 했다. 아버지인 선조는 일본군이 두려워 요동으로 가겠다는 상황에 아들인 광해군은 적진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후 광해군의 조정은 전시 조정의 역할을 다한다. 백성을 위무하고, 흩어진 관리들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맞써 싸웠다. 사실상 임진왜란 중 전시 군주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광해군이다. 그러는 동안 선조는 의주에서 요동을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것을 말리던 신하들이 얼마나 빡쳤는지, 한 번은 "요동 가면 필부이니, 차라리 여기서 필부해!!!"라는 말을 듣는다. 요약하자면, "요동가면 너 왕 아님!!!"을 시전한 것이다.

정탁의 《피난행록》에는 이러한 점이 서술되어 있다. 7월 17일의 기록에는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 선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해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기재돼 있다. 7월 27일 기록에도 “경기도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퉈 적을 잡아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라고 해 분조가 의병 봉기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분조의 활동이 7개월의 짧은 기간이지만, 임진왜란 초반 전세 역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분조가 있었기에 조선은 명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조는 모든 국정을 내팽겨치고 의주에서 요동요동을 외치기만 하고 있었다.[4] 그 와중에 왕다운 역할을 한 것이 광해군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 대첩[5]에서 의병장 곽재우 최경희 등을 포함한 다른 의병장들과 의병 부대가 김시민 그리고 조선군을 지원하여 같이 싸워 승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의병들의 봉기를 적극적으로 독려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분조의 역할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 이성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 그리고 광해군 뿐이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선조의 도주로[6]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7] 광해군의 형제인 임해군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깽판치다 왜군에게 넘겨지던 시절에[8] 광해군만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는 꽤 컸다.[9]

그 때 광해군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조선에선 왕이 20살이 되지 않으면 아직 미성숙하다고 하여 수렴청정을 했다.[10] 그 와중에 갑자기 분조를 떠맡게 됐음에도 도주하기는커녕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항전을 지휘했다. 그래서 조선 신하들과 명에서는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광해군을 왕으로 즉위시켜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11] 문제는 이 논의로 인해서 선조는 양위 소동을 거의 밥 먹듯이 일으키는데, 그때마다 광해군은 선조의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했다.[12]

총평하자면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이견이 없는 사실상의 조선 전시 군주이자 백성들과 함께 적을 두려워 하지 않고 맞서고 성과까지 낸 비판의 여지가 거의 없는 명군이었다.

3. 왕 광해군

광해군의 폭군 이미지는 부모와 가족의 도리를 저버린 자라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이상으로 불필요한 죽음과 낭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폭군이란 악명을 얻었다. 물론 단순히 왕이 숙청을 많이 하였다고 해서 폭군이라 정의하기는 힘들다. 태종 때의 선례도 그렇고 중종 때도 옥사는 굉장히 많이 일어났으며 무엇보다 광해군이 숙청한 인물들 또한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광해군이 폭군이라 불리는 진정한 이유는 국가 운영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옥사만 죽어라 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왕이 누구를 죽이더라도 숙청 자체보다는,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어떤 정치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인데, 광해군은 불필요한 숙청을 제어하지도 못 했을뿐더러,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개인적인 심리적 요인에 물든 낭비를 자주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의 통치 상당수는 분명히 엇나간 형태의 낭비와 숙청이었고, 여러 모습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낭비이자 과잉이자 폭정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관료들에 의한 협력으로 쫓겨난 왕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어린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 소성대비를 유폐한 것(폐모살제)으로 악명을 얻었지만, 사실 이것은 방아쇠였을 뿐으로 쫓겨날 만한 짓을 지속적으로 저지른 왕이었다. 그리고 폐모살제는 인조반정의 표면적인 명분이 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명분을 제공받은 인물들도 그 당시에는 광해군에게 대항할 만큼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거나 정권을 등진 야인 상태였음을 감안하면, 광해군의 평가에 있어서 쓸모없는 곳에 국가의 힘을 낭비하다가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고 폐위당한 폭군이라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이 태어나자마자 세자 책봉 욕심을 내비쳤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는 등 도저히 광해군 입장에서는 좋게 볼 건덕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당시 조정 관료들도 학계의 정설도 폐모살제는 단순한 명분일 뿐이고, 실상은 15년간 궁궐 공사로 인한 민심이반이 직접적 계기라고 본다. 수많은 관료들이 광해군 폐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는데, 당시에는 폐모살제는 중요한 명분이었지만, 국가의 통치에서 본다면 광해군이 쫓겨날 만한 수많은 이유 중에서 당시 시대상으로 가장 정치적으로 유학자들에게 잘 먹히는 캐치프레이즈였을 뿐이다.

후대에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두 번 짓고는 나라 재정을 파탄시켰는데[13] 광해군이 지었던 궁궐은 무려 5개다.[14] 그야말로 나라 재정을 궁궐 공사에 갈아 넣은 것이다. 명의 만력제가 상이군인들에게 쓰라며 준 금도 상이군인에게 쓰지 않고 궁궐을 짓는데다가 썼으며, 심지어 군에서 쓸 화약까지 빼돌려 청기와를 구워다가 궁궐을 지었다. 후금이 발원하고 있고, 의 요청에 조선군 10,000명이 파병된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궁궐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폐위되는 그 순간에도 궁궐 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광해군의 궁궐 공사는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으며, 그 외의 문제는 거의 대신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이 관심이 있는 분야에만 신경을 썼다. 광해군의 궁궐에 대한 집착은 중독 수준이었으며, 나중에 광해군에 대하여 적당히 재평가를 해준 현대 학자들과 사관들의 기록에서도 광해군의 궁궐병에 대해서는 대놓고 정신병이라고 깠다. 그 밖에도, 상식적으로 사실 판단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점성술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여 숙청에도 풍수지리가 영향을 끼치는 미치광이 같은 정치를 종종 했는데,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세자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와 왕권 강화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궁궐 증축과 점성술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 지도자의 실정은 그런 사사로운 사유로는 쉴드가 안 되며, 이것 때문에 당연히 더 이상 왕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판단력이 매우 낮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기본적으로 상식적인 가치 판단과 기본 정책을 내팽겨친 인물이 왕 노릇을 계속 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는 일이었고, 광해군의 폐위에 많은 신하들이 동참 및 방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점성술 신봉이나 지속적이고 방향성 없는 인명 숙청처럼, 광해군은 온갖 불필요한 행위로 세자 시절의 높았던 인기를 깎아먹었지만, 특히 지나친 궁궐 공사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광해군의 통치에서 가장 혹독한 증오를 샀던 부분이다. 당연히 무리한 재정 속에서 궁궐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세 제도만으로 안 되니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데, 막대한 공명첩을 남발하고, 뇌물을 받았다. 계속되는 실정에 민심이 이반하고, 충성하던 세력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아예 궁궐 예산을 위해서 수탈을 위한 법과 제도와 기관을 만들어낼 정도였으니, 궁궐이 당장에 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이 규모의 집착만으로도 이미 정신나간 악행이나 다름없었다. 백성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는 왕이 수탈을 위한 전문관직과 탐관오리를 양산하니, 백성들도 신하들도 왕을 한탄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조가 세자 시절부터 괴롭힌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변호는 왕 노릇 잘하다 외국의 침략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선조의 의심병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할 수 있고, 그렇게 따지면 인조조차도 내치의 업적은 광해군보다는 훨씬 우월하므로 인조의 패전을 욕하면 안 된다는 논리와도 같다. 광해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즉위했고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에, 조선 역사 전체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즉위한 왕 중의 한 명이었다. 또 잘못 알려진 사실로 서인이 광해군을 경계해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것이 있는데, 광해군을 반대한 세력은 대북과 같은 북인이었던 소북이었으며 소북 중에서도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이 소속된 청소북은 광해군에 우호적이었다. 남은 반(反) 광해군파인 류영경의 탁소북조차 선조 사망 후에는 죄다 청소북을 자처하면서 자멸하는 등, 광해군의 즉위 초 상황은 정적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엄청난 기대감을 받고 있었다. 즉위 초의 인기만을 놓고 본다면, 조선에서 광해군처럼 전쟁 영웅 출신이면서 선조에 대한 비호감 덕분에 민중과 신하들에게서 모두 엄청난 인기를 받고 왕이 된 인물은 별로 없다. 그 엄청난 즉위 때의 인기와 전쟁 영웅의 역사적인 까방권을 고작 10여 년 만에 다 까먹고 쫓겨났다.

광해군이 숙청을 매우 효율적으로 잘 했거나, 조금이라도 숙청을 덜 하려고 했다면 폭군일지언정 암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불필요하게 많이 죽이면서 스스로 적을 만들었던 왕이다. 풍수지리 때문에 인조의 아버지까지 죽게 만들더니, 그 아들이었던 능양군이 빡쳐서 쿠데타를 했더니 곧장 그 조카 따위한테 왕 자리를 뺏긴 광해군의 자살골은 이미 전설에 가깝다. 게다가 광해군은 정치의 시작부터 중립 내지는 광해군 본인에게 동조해주었던 일부 서인 남인[15]을 내몰아 적으로 만들면서 조정을 박살내는 실수도 범했다.

대북파의 실세인 이이첨의 권력이 급격히 강해지자 광해군은 사사건건 이이첨과 대립하면서 정치가 개판이 되었다. 앞서 광해군을 "허풍쟁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이첨의 대북당이며, 아예 광해군은 이이첨더러 "네가 붓으로 한 번 싸워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 소북인 박승종이 이이첨의 뒷통수를 후려쳐[16] 이이첨이 소성대비를 죽이려 하면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즉, 같은 편이었던 대북파벌과 이이첨조차도 광해군과 서로 칼빵을 놓기 직전까지 바뀔 정도로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말년의 광해군은 그제서야 자신의 내치(內治)를 후회했는지 균형 잡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자신의 편으로서 육성한 대북당에게도 권력을 양립당했으며,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들은 이미 자기 손으로 죽여놨고, 다시 권력을 빼앗아 오려고 광해군이 뽑는 신하들은 모조리 무능한 간신 밖에 없는 혼탁한 정치가 벌어졌다. 이후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 윤휘였지만, 이 정도로는 대북당을 이길 수 없었다.[17] 이 모든 정치적인 실패는 광해군의 불필요하고 방향성도 모호한 숙청이 일으킨 자업자득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키운 이이첨의 반대 급부로 유배갔던 기자헌과 유몽인이 풀려나며 다시 한 번 중용되었으나 기자헌과 유몽인은 이이첨과 허균이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나 그것 말고는 제대로 업적을 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봉산옥사 계축옥사 시절에는 이이첨과 더불어 옥사를 주도해나가며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아무리 이이첨을 유배보내도, 결과적으로 다시 기자헌과 유몽인이 정권을 잡게되어 권력을 농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실록인 광해군일기의 사료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비록 광해군일기가 서인이 집필한 면이 있다 치더라도 그들도 사관인 만큼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쓰지는 않았다. 서인들의 기록에서도 광해군의 재평가와 인조에 대한 객관적인 욕이 종종 나오는데, 서인들의 기록이라고 광해군에게만 특별히 불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취합과 해석을 마친 결과물로 보더라도 막장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자신의 폐위를 자초한 원인은 광해군 본인이었다. 그런 막장 상태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궁궐 공사와 숙청만은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진행했으니, 국가 대다수가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조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집권당이었던 이이첨이나 북인 내부에서 광해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서 어차피 쫓겨났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18] 광해군의 과잉과 낭비로 점철된 무능한 통치의 결과물 때문에 누가 왕 자리를 먹느냐는 선착순 문제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3.1. 효종과의 비교

광해군과 효종은 의외로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을 겪은 바로 직후에 등극한 왕이라는 점, 그리고 심각한 정통성 컴플렉스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효종이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해군은 정통성 컴플렉스로 인해 죄없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지나치게 많은 숙청극을 벌여 스스로 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효종은 스스로를 절제하며 형인 소현세자를 지지하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산당과 손을 잡는 과감한 선택을 하였으며, 또한 자신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이첨의 전횡을 방치했던 광해와는 다르게 효종은 자신의 즉위를 지지했지만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던 신하인 김자점을 숙청하였다. 또한 무리한 궁궐공사로 국고를 낭비한 광해군과는 다르게 효종은 백성들의 상황과 조선의 현실적인 한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잘 알고 있었고 민생 안정을 위해 광해군의 반대로 확대되지 못했던 대동법을 본격적인 전국확대의 단계로 올려놓는데 성공하여 민생 안정에 기여하였다. 효종은 북벌론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인재들을 등용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결코 무리한 전쟁 준비로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효종은 서로의 완벽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두 왕 모두 정통성 컴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왕 스스로의 의지와 현명한 판단에 따라 충분히 치세를 이끌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현대의 평가

현대에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대동법을 시행해 공납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고, 명과 후금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 국가 안정을 꾀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긍정적인 평가는 광해군의 업적과 실책이 검토되고 그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 역사 인식을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19]의 이권 관철과 이념 투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국의 광복 이후 순수한 학술적인 의미에서 광해군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는 인조의 업적과 함께 묶여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광해군의 업적은 지나치게 부각되고 인조의 공로를 가로채어갔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 인조 시대에서 광해군 이후 전후 복구에 필수적인 정책을 순리대로 시행되도록 명신들의 행정 업무를 지원했던 인조에 비해 광해군은 초기에는 무난했으나 비판적인 신하들이 없어지자 국가적인 수탈을 저질러 당시의 국가 회복에 방해를 하고 외치와 내치 모두 기본적인 정치판을 혼란시켜 당대의 파국을 가중시켰으므로 실질적인 전후복구에서 큰 역할과 의미는 적은 편이다. 문제는 광해군의 역사적 실체에서 유독 인조의 성공적인 전후복구는 광해군이 가로채고, 후대의 재해석이 부각되어 전란 이후 3명의 왕 중에서 광해군만이 실제 역사에 있었던 사건보다는 이상론적인 재해석이 크게 부상하여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흐트러트렸다.

광해군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자체적이고 객관적인 재평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인조가 생각보다는 상식적이고 필수적인 정책을 많이 남겼다는 것으로써 전란 이후 조선 중기 사회상을 분석하기 위한 당시의 선조 → 광해군 → 인조라는 암군 3인에 대한 한국 학계의 학술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사학도들이 생각하는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와, 대중적인 정치 성향 쪽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쪽에서 주장하는 광해군 재평가는 다른 부분이 많다.

광해군을 접하는 일부 대중들의 욕구는 현실에서 있었던 역사를 알고 싶다는 태도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필요에 따라 각색되고 왜곡된 광해군의 이미지를 믿고 싶어하는 욕망이 더욱 강하다. 이는 광해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체적이고 객관적인 논의가 싹트기 시작했던 1980년대에 당시 운동권 세대가 상상한 광해군의 이미지를 인터넷 시대가 되자 널리 퍼뜨리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2000년대에 광해군의 이른바 중립외교, 등거리 외교 최강대국 미국을 혐오하는 좌파 운동권에서 높이 평가하였고, 아울러 미국과 냉랭하고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노무현 정부의 성향에 맞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교육시켰으며, 2010년대 이후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굴기가 맞물리자 " 병자호란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말고 광해군처럼 미국을 손절하고 '중립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친중 반미 운동권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광해군은 영웅이라는 민족주의를 가장한 좌파이념적 인식은 한국의 현대사를 비판하고 다른 정치 이념을 공격하기 위한 여론의 도구로써 자리잡았다. 그러나 현실의 광해군은 오히려 백성들을 불필요하게 수탈하고, 국가의 각종 산업과 농경을 내버려두어 국력 회복을 방해하는 등 여러면에서 무능한 지도자였다.

광해군에 대한 과도한 긍정적 재평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 역사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광해군으로부터 정치적인 도구를 찾고 싶어하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광해군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을 접한 사람들이 아직도 유행이 끝난 서인들의 역사왜곡 음모론[20]을 들이대면서 광해군이 저지른 실책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80년대 이후 줄곧 한국의 더러운 현대 정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광해군을 자신의 정치 이념과 동일시하면서, 광해군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정치 이념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가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자라는 신념 하에 광해군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도 있다.[21]

4.1. 긍정설

근대 이후 처음으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문헌은 1920년대 간행된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에 실린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의 논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 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다. 그러나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제의 만선 경영이 목적이며,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 싸움에 시달렸다는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이 주장은 식민사관과 만선 사관의 일환으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평가가 식민 사관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에도 식민 사관이 광해군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22]

1933년 이나바 이와키치의 《광해군 시기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 역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20 ~ 1930년대 국내에서도 광해군 치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 을지문덕이나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고,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 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

실증사학자 두계 이병도 박사도 1959년에 《광해군과 대후금정책》에서 긍정적으로 평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 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이려고 시도한 적은 있다.

4.2. 부정설

광해군은 세자 시절,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7개월 동안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왕이 나라이던 시기에 정작 선조는 명으로 튀려는 생각했음을 보면 이는 엄청난 구국의 공이다. 실제로 선조가 명으로 튀었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복구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단순한 국내에서 피난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되고나서 초창기에는 모든 정치 상황이 광해군에게 몹시 유리했으므로, 삽질을 줄였다면 국가 통합을 이끌 수도 있었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비현실적인 강경파 유교 선비들을 정치깡패로 이용하며 정치 상황을 후퇴시킨 결과 인조정권의 탄생에 기여하는 등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정권 초기에는 내치와 외치 모두 업적이 있으나 위처럼 폐모살제, 불필요한 숙청과 궁궐공사, 강경파 유림에 부여한 정치권력으로 인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광해군이 주도한 정치적 분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신하들이 침묵하며 건전한 국가 사업의 진행이 망실되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토목 공사로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다. 이 부분은 후대의 흥선대원군과도 겹치는데, 흥선대원군은 상당한 개혁으로 민심을 얻었음에도 궁궐공사 한 번에 곧장 민심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광해군의 궁궐공사는 흥선대원군의 2개를 뛰어넘는 무려 5개의 궁궐을 동시에 지었으며, 흥선대원군처럼 민중과 신하들의 마음을 잡는 개혁이 우선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매관매직, 공명첩처럼 사회질서를 돈벌이에 내다파는 수탈 방식으로 돈 뽑아먹는 왕이 탐관오리들을 발탁하여 궁궐 예산을 국가 전반에서 강제로 뽑아냈다. 당연히 백성들은 물론이고 정치싸움과는 동떨어진 뛰어난 신하들이 이렇게 불필요한 낭비가 심하고 국가의 근본 산업(농경)이 버려지는 통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광해군은 궁궐 건축과 군용화약까지 빼돌려서 청기와 굽는 데 혼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국가 재정의 15% ~ 25% 가까운 자원을 소비했으며, 관련 비리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민중들에 대한 갖가지 수탈로 이어졌다. 광해군은 대중들의 생각과는 달리 통치 후기에는 민중에게서도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광해군 정권이 궁궐공사 예산 착취를 위해서 매관매직으로 늘려놓은 탐관오리들과 모리배들은 백성들에게서 내장이 뽑혀 죽었다는 흉흉한 야사와 민중담도 있다. 최소한 통치 후기에는 당대 중립적이었던 영웅과 실무자들도 매우 깠던 왕이라, 그나마 좋은 평가는 통치 이전 혹은 초창기에 평가가 국한된다.

광해군은 막대한 물량과 인구를 책임지는 통치 행위에 있어서, 합리성이 아닌 다른 방향(왕권강화)에 기묘할 정도의 집착을 쏟으며 시간과 예산을 낭비했고 더 중요한 정책들을 축소하였고, 그 수단과 정치는 무능했다. 광해군이 통치기간 동안 가장 집착하고 중요시했던 행적은 지나친 숙청과 궁궐 공사였고, 경제와 군대가 허술해졌다. 이는 광해군의 점성술과 왕권 집착 따위의 쓸데없는 일에 집중한 통치력의 결여를 빼놓고 담백한 지도자로서의 평가만으로도 충분히 비판받는 실책들이다.

특히 집권 중반부부터 불필요하고 숱한 대규모 옥사였던 봉산옥사 계축옥사를 일으키면서 본인의 비호세력과 왕권 강화에 집착하여 많은 신하들의 숙청 이후에 본인의 비호세력마저도 광해군을 중심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자, 국정의 원동력을 이끌 신하들이 모호해졌다. 이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에 가까웠는데 광해군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중립 내지는 광해군에게 동조하였던 일부 서인 남인[23]의 인재들을 숙청하며 쓸데없이 적으로 돌리는 정치적 실수를 범했다. 광해군은 초반부터 대소신료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이은 실정 탓에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우호적인 인물들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주나, 정작 그들을 비방하고 내쫓아버린 건 왕 광해군이었다.

역대 조선국왕 중 친국, 옥사 숫자만 따져도 가장 많은 수준이지만, 그 중에 제대로 된 역모라고 볼만한 사건은 전무했다. 즉위 초 선조 말엽 생겨난 유당 정리작업은 필수적이었지만 이후에도 생사람을 계속 잡아대고 조정에 참소가 끊이질 않았다. 당대 사람들은 매년 옥사 때문에 궁궐에 비명이 끊이질 않고, 무당과 점쟁이가 침전에 드나들고 영향을 받는 걸 보면서 이건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말년의 광해군은 자신의 내치(內治)를 후회했는지 균형잡기를 시도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 윤휘였다는 점이 증거다.[24] 하지만 이미 국가는 파탄나고 수많은 쿠데타 위협분자들을 더 많이 만든 이후여서 늦은 대처였으며, 박승종의 고발 역시 신뢰하지 않으면서 몰락했다. 광해군은 폐위당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잡으러온 세력이 자신이 육성했던 이이첨이라고 알고 있었다. 서인을 다시 등용한 이유도 광해군 본인이 육성한 정치깡패 세력들에게서 협박을 받을 정도로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서 다른 신하들을 핍박해온 간신배 정권을 견제할 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말년에는 그동안 저질렀던 실책으로 국정 운영에 실패하면서 국고 파탄과 정치 파국에 대한 책임으로 몰락하였다. 재평가는 꾸준히 일어나지만 봐도 봐도 반정을 맞을만 했다. 폐위될 때는 호위를 맡은 군인들과 전쟁 영웅 일부가 적극적으로 쿠데타에 합류하여 광해군을 옥좌에서 끌어내렸고 당파색이 옅은 상당수의 군대와 명신들이 이를 방관했다. 참으로 막장 사태였다. 광해군이 즉위 후 정상적인 국가 경영과 정치를 했다면 말년엔 인기가 떨어질 수는 있어도 당연히 이같은 사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지만, 이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을 액면 그 자체로 곧이곧대로 믿는 수준에 불과하다.[25] 그리고 광해군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그 기록은 대개 광해군을 폄하했다는 서인 사관이 작성한 광해군일기이므로 이는 굉장히 모순적인 발언이다.

4.3. 소결

어쨌든 광해군은 세자 시절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돌보고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들을 조달했다. 이런 세자 시절의 모습은 선조 인조가 전쟁이 터지자 구국보다는 일신 보전에 급급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15년동안 집권하면서 숱한 옥사를 거치면서 점차 비대해진 김개시와 측근들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했고, 폐모로 반정의 구실을 만들었으며, 필요 이상의 궁궐 공사로 인한 치명적인 재정난과 민생난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이 크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80년대 운동권을 거친 세대에서는 대중적인 평판이 크게 좋아졌다. 광해군과 인조의 업적을 실제 역사보다는 계급주의 타파 및 '자주적' 외교와 엮는 관점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관점을 다루는 초기만 하더라도 광해군의 무능함과 실책을 정당하게 비판했으며, 지금처럼 광해군이란 암군 겸 폭군을 무결점의 명군처럼 다루는 것은 최근의 경향이다.

그 결과 대중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복권론을 이어받은 사극이나 창작물의 영향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미온적이었고 확대에 반대했으며, 각종 대형 건설사업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그는 궁궐 5개를 연달아 올리는 영건사업을 추진하고 조도사의 수탈을 비호하는 행보를 보였다. 민생을 생각하지만 신중했을 뿐이라면 공납의 부작용을 극대화시키는 영건사업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자 때는 민심 수습과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지만, 즉위 후엔 궁궐병과 재정 파탄 사태으로 조선 내정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궐 건축 사업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악영향을 미쳐 당시 국가 재정의 15% ~ 25% 가까운 자원을 소비함은 물론, 관련 비리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민중들에 대한 갖가지 수탈로 이어졌다. 대동법 등과 더불어 민중을 위했던 군주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잦은 궁궐 공사와 더불어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잦은 옥사, 사실 옥사란 왕이 재위하면서 한 번 정도는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왕들은 자신이 직접 기획했든 아니든 자기 자신이 절제하고 선은 지킨다. 즉 자기가 목표한 것을 거두면 그만둔다. 그리고 옥사를 벌여도 무고인지 아닌지는 봐가며 한다.

그러나 광해군에게는 그 정해진 선도 없었고 무고인지 아닌지도 보지 않았다. 봉산옥사의 경우 그냥 연루만 되면 죄다 닥치는대로 잡아들였고 안위가 조극신을 무고했을 때도 둘 다 잘못했음에도[26] 조극신만 유배하고 안위는 풀어주었으며 계축옥사 이후 폐모론이 들고 일어났을 때 당시 장령 배대유가 죄를 저지르고 그 벌을 모면하려고 고변한 듯한 사례들을 2건이나 언급한다. 역모를 고변하면 천민의 경우 면천되고 벼슬까지 받는다는 어머어마한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거짓 고변자들이 생길 것임은 분명한데도 선을 지키기는커녕 거짓 고변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보호하고 앉았으니 거짓 고변자들이 판을 치는건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광해군이 쫓겨나는 데 일조했다. 그 많은 거짓 고변들은 신뢰하면서 정작 인조반정의 고변들은 잦은 옥사에 신물난 광해군이 무시해버렸기에 인조반정은 무려 2번이나 유출이 되었음에도 진행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인조의 경우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살한 것과 그것 때문에 정원군이 상심해서 죽자 이에 대한 분노로 역모를 계획한 것임을 감안하면 완벽하게 자승자박이다.

광해군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자고 한 것으로 주로 알려져있지만, 이외에도 정충신 등에게 첩보를 명하여 후금의 권력 구도나 병력, 군수 물자 등을 세세히 파악하게 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따로 편지를 받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심지어 후금의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것을 이용해 후금의 후계구도까지 파악하고, 훗날 청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를 친조선파로 만들기 위해 정충신을 통해 접촉함과 동시에, 다이샨과 이간질을 벌여 후금의 내분을 계획하기도 했다. 적어도 후금에 대한 정보나 안목, 홍타이지라는 청 태종이 될 인물의 위험성 파악 등은 매우 뛰어났다.

문제는 정작 자신의 정책을 지지할 사람들이 소속된 세력은 내치고 그렇지 않은 세력을 껴안은 것이다. 당장 광해군의 외교의 협력자인 윤휘, 정충신은 서인이고, 박승종은 소북 인사다. 오히려 자신이 키워준 대북 골육 세력이 자신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사실 즉위 초에는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영창대군 즉위에 찬성하는 사람은 소북탁 정도이고 인목왕후는 그냥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광해군은 최대한 다수와 협력하며 소신껏 능력껏 자신의 국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무슨 이유인지 영창대군을 죽여버렸고, 인목왕후를 폐비하며 대북파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무리수를 범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중신 남인 이원익을 필두로 반대가 넘치는데도 모두 쫓아내는 자승자박을 한 것. 결국 정치싸움에서는 대북 골육을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돌렸고 정책싸움에서는 그들에게서의 지지마저도 못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친위대를 지휘하는 훈련대장 이흥립의 배신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5. 외교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

광해군은 왕이 되자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들어선 에도 막부 조선과 선린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다.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토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즉위 직후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기유약조(1609년, 광해군 1년)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과의 관계 및 교역은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조선 왕조는 일본 에도 막부와 250여년에 걸친 평화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 범능적(범죄인)의 압송, 포로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확약받는 등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아울러 일본 측에게 왜란 이전보다 더 큰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국방 정책에 있어서는 조총수 및 포병을 양성하고 후금에 밀정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진법 훈련이나 성곽 수축에도 진력했다. 사실 이 정책은 인성과는 별개로 매우 유능했던 선조가 이어지던 국방 대책의 연속이자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에 피난갔을 무렵부터 여진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라는 건주여진(뒷날 후금)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북방 대책을 계승하여 북방 방비를 위해 노력했다.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는 저서 《 임진왜란 한중관계》 등을 통해, 광해군의 만주에 대한 경계노선은 선조시절에 만들어둔 첩보망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입장을 펼쳤다. 애초에 임진왜란 이후의 선조도, 광해군도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외적의 침입에 대해 경계태세를 취하면서도 다방면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립외교, 즉 단순히 조선이 상처를 입지 않는 외교방식에 대해서는 선조, 광해군, 인조가 모두 공감했다. 또한 명 제국, 청 제국은 모두 조선을 우회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정충신을 만포 첨사에 임명하기도 하며 직접 후금에 다녀오게 하여 후금의 상세한 정보들을 알아오게 하고, 또한 방비하게 하였으며 인조실록 2년 9월 1일의 내용에 따르면 5년, 6년간 남쪽의 병사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 바람에 민심이 나빠지고 나라가 피폐해졌다고까지 언급한다. 인조 2년 3월 14일의 남이흥이 한 “금년에는 남방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과 합쳐지고 광해군이 수도 없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라고 화약 무기를 준비하라고 명을 하기도 하며 이런 행동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 10년대로 인조실록 2년에 (광해 대에) 5년, 6년간 병사들의 징발을 계속했다고 언급되는 것과 기간이 일치한다.

또한 명에 구원병을 보낸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자, 이후 그로 하여금 계속 연락을 취하게 하여 후금의 정탐에 활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했을 뿐으로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설이 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27]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실제로 학계내의 대표적인 전쟁사학자인 임용한 교수 또한 광해군 밀지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28]

무엇보다 이러한 밀지설은 해당 주장의 유일한 근거가 인조반정 당시 서인측의 반정 명분으로 끌어들였던것이며 편향성으로 지적받는 광해군일기조차도 항복하라는 밀지를 교서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29] 이후 일본 제국의 역사학자 다가와 고조가 주장했던 내용, 곧 식민사관이 근원으로 주류 학계에서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판단한다. # 더해 항복을 위한다면서 1만의 정예 포수를 차출한 점, 명군이 전멸한 이후에도 지속된 조선군의 항전과 강홍립의 자결시도, 조선군의 매우 큰 피해등 정황적으로도 밀지설을 사실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해당 밀지설은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어떤 경위로든 강홍립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광해군이 후금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던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사르후 패배 이후에도 명나라는 후금에 응전해 복수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속국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광해군은 그 때마다 이를 번번이 회피한 것이다. 가령 후금에 대한 반격을 논의코자 명의 사신이 칙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광해군은 조선이 엮이지 않게끔 잘 구슬려 보냈으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 명에 재차 군사가 동원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적어도 후대 인조 시기 모문룡 사건이 비화되기 전까지 주변국간 충돌의 빌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광해군일기 중 이런 부분도 있다.
전교하였다.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담론으로써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1일 신미 4번째기사
또한 명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염탐이라고 말하면서 후금과 사신 교환을 하던 것도 있고 정충신이 이로 인해 후금의 막대한 정보들을 가져와 보고하기도 했다.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
전교하였다.
"이 적들이 요동성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므로 중국의 장관들이 차례로 적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 지방의 인재들 2백여 명이 원 경략(袁經略)을 결박하여 넘겨 주었다고 한다. 비록 30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일찍이 오랑캐를 경험하지 못한 군사들이다. 영솔하는 대장들이 과연 이목(李牧)이나 이정(李靖)과 같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파손되어 형편이 없다고 한다. 멀리에서 온 군사들이 어떻게 정예롭고 건장하겠는가.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차관을 만포(滿浦)로 옮겨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체로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다시 더 의논해서 잘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또한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반(反) 조선파라는 사실을 진작에 파악하고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을 지원해서 홍타이지의 대항마로 세우고 둘을 이간시켜 서로 싸움에 빠져 내분을 일으키게 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에게 뇌물을 보내서 친(親) 조선파로 포섭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며 홍타이지를 미리 경계하며 주목하고 있었다.[30]

강홍립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외에도, 당장 정충신을 파견해서 홍타이지의 회유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다이샨과 싸움을 붙이려고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후금 내의 정보들과 군사 배치 등을 자세히 손쉽게 얻어낸 것이 큰 이득이었다. 광해군도 홍타이지를 크게 경계해 회유하려고 하면서도 전쟁 가능성을 높다고 생각했기에 홍타이지를 전문적으로 마크하며 홍타이지에게 광적인 경계심을 보이며 사실상 최대 숙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충신을 통한 파견 등으로 얻어낸 제일 큰 성과는 후금의 군사 배치와 내부 사정을 소상하게 알아내 후금에 관한 막대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1910년에 이나바 이와키치 이래 수정주의 사학에서는 후금이 경제적 문제로 인해 조선을 공격했다는 주장을 개진했으나, 최근 일련의 호란 연구 성과[31]에 따르면 정묘,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경제적인 면은 사실상 없거나 부차적인 수준에 멈춰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병자호란 직후 청이 조선을 복속함과 동시에 세폐 등을 요구한 것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김에 식량 문제를 타개하려 한 것일 뿐이다. 물론, 그들이 쳐들어온 가장 근본적인 전략적 원안 자체는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등에서 명과 청이 공유했던 인식론으로서, 조선이라는 국가는 광해군 정권처럼 결국에는 명 제국에 부역할 가능성이 있는 후방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는 웃기게도 명이 바랐던 대로 광해군이 후금에 대하여 어그로를 끄는 역할을 수행해주면서 명이 바랐던 대외전략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는 한계는 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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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부정적 평가

광해군이 육성해놓은, 명에 대한 사대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또한,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인목 대비 문제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린 것에 대해 관심을 돌려보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나마 소북 중 영의정 박승종 정도만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역시 이이첨이 싫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광해군은 1622년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후금의 지도자를 ''으로 호칭하는[33] 국서를 보냈는데, 저 국서를 보낸 지 1년 2개월 만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저 국서가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는 주장도 있으며, 실제로 정변 당시 교서에서 반정 명분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외교 문제이다.

무엇보다 광해군이 입바른 신하들을 숙청을 하며 키워놓은 정치깡패 지지세력마저도 명나라를 잃을 바엔 광해군과 싸우겠다며 이탈을 시작했던 유생들이라서 외교고 나발이고 간에 광해군의 후반기는 본인이 키운 세력에 국가정치 자체가 작동하지 않고 혼미했다는 것이다.[34] 광해군 본인이 온갖 숙청과 정치적 악행의 도구로 써먹으며 양성한 정치세력들이 거기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중립외교는 그 지지동력이 제대로 없었다.

광해군의 조정은 광해군 옹호자들이 비난하는 서인들보다 외교적으로 모험적이었다. 서인들은 인조 집권 후 숭명 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35] 광해군은 조선 왕조에서 단기간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들을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각당이 가진 인재들이 일부는 숙청되거나 골고루 등용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 북인 친명파들을 이용하여 입바른 신하들을 없애다보니 친명파 유생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조선을 전쟁터로 삼을 수 있었던 명과 청이라는 양대 제국에서 광해군의 의사와 외교를 특별히 신경썼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광해군이 최대한 청과 우호하고 동시에 명에게 최대한 관심을 덜 받으려고 했던 흔적은 보이지만, 광해군 시대의 외교 행보를 경험했던 명 제국, 청 제국은 "조선을 명이 철저한 따까리 고기방패로 써먹어야할 국가이자, 청이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 꼭 행동불능에 빠트려야할 후방전선으로 보는 생각"을 각자 내부적으로 더욱 강화했다. 광해군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든지 명청 두 제국에게는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중립외교라는 단어가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이미 찬반이 존재하고 있다.

6. 북한에서의 평가

남한에서는 여러 차례 재평가와 학술적 논쟁을 거쳤으나 북한에선 여전히 광해군을 연산군급 폭군으로 보는 사관을 유지하고 있다. 진지한 학술논의 자체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니 놀라울 일은 없지만 그걸 감안해도 좀 심할 정도로 광해군을 비방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를 근거로 들면서 광해군에 대해 '왕관을 쓴 인간추물, 폭군'이라고 평가한다.

[1] 광해군 [2] (註 033) 내선(內禪) :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줌. [3] 심지어 상국인 명나라조차도 정 오겠다고 한다면 온다는 사람을 말릴 수야 없겠지만 진짜로 넘어올 거임..? 이라는 반응이었다. [4]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6월 13일 기사부터 7개월간의 내용은 선조의 요동행보를 말리는 신하들의 고군분투기록을 담고있다. [5] 나머지 2개는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이다. [6] 상술했듯 파천 자체는 어쩔 수 없었으나 무작정 요동으로 가려고 했었다. [7] 일본과 한국의 "교차" 검증으로 일본군이 한양으로 입성 전에 이미 궁궐은 불에 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측에서는 불분명하고 일본측 기록으로는 임금이 불살라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마치 러시아 원정 당시 성공적으로 몽진한 알렉산드르 1세가 가기 전에 남아 있는 장군을 보고 궁을 불살라버리라고 했듯이. 그리고 이후 수도에서 여기저기 방화범이 속출하고 그때마다 프랑스군은 이들을 잡아 처형하기 바빴다. [8] 다만 함경도는 원래 여러 차별로 민심이 안 좋았고, 국경인 등의 순왜들이 부추긴 탓도 있으며 그 함경도마저 왜군과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 의병이 일어난다. [9] 실제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기 전에도 의병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자 의병 활동이 활발해졌다. [10] 동양의 문화권에서 수렴청정의 기준은 20살이었다. 성종의 경우도 그러했고, 고종도 그러했다. [11]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보다는 뒷 수습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들이 더 신뢰가 가는 건 사실이다. [12] 마치 독소전쟁 초기 소련에 패배주의와 유럽을 쟁패했다는 독일군에 대한 공포로 망연자실할 때, 스탈린이 충성심 확인차 퇴임 소동을 벌인 것과 비슷하다. [13] 처음 경복궁을 재건하겠다고 공표했을 때엔 의외로 백성들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었고, 스스로 기부금을 낸 사람들도 많았다. 문제는 재건 도중 화재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공사를 해야했고 자금을 충당할 원납전 당백전 발행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된 것이다. [14]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참고로 창덕궁 공사 자체는 선조 시기부터 재건 공사를 진행 중이었고 광해군 2년 때 완성되었으니 사실상 선조가 재건한 궁궐이나 다름없다. 창경궁은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 완공되었다가 파손된 궁궐로 광해군이 새로 만든 궁궐은 아니다. 즉, 광해군이 새로 만든 궁궐은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이다. [15] 실제로 서인의 영수인 이항복은 광해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게다가 광해군의 지지세력이 아닌 서인 출신의 군인과 장교들이 오히려 광해군의 이른바 '중립외교'의 중요인물이거나 지지자인 경우가 많았다. 이걸 쓸데없이 적으로 만들어서 본인의 정책 지지자들을 반대파로 바꿔버린 것도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력이다. [16] 이이첨의 딸과 박승종의 맏아들이 혼인을 맺은 후 방심하던 이이첨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 자기 가솔들까지 동원하여 이이첨과 극한의 대립을 하기도 했다. [17] 윤휘는 인조반정 강경파에 속한 서인들에게 이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해서 살해 위협도 받았다. [18] 대북도 사실상 왕따 상태였기 때문에 갈아탈 새로운 지도자를 찾지 못 해서 광해군과 함께 썰렸을 뿐, 상당수의 관료들이 야인으로 쫓겨난 상태였던 서인들에게 권력의 핵심이었던 왕과 집권당을 모두 버리고 재빨리 협력하는 괴현상이 일어났다. 사실상 누가 반정을 계획하더라도, 실패할 뻔했던 인조반정조차 갑자기 덜컥 성공했던 것처럼 적당한 얼굴 마담만 생기니 단기간에 협력자들이 대거 붙어서 반란이 강제로 성공당해버릴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것. [19] 일본 제국, 좌 • 우 정당, 민족주의자 [20] 학계에선 서인들이 역사왜곡을 저질러서 광해군의 실제로는 뛰어난 업적(?)들이 삭제되었다는 주장이 헛소리라며 묻혀버린지 한참이 지났다. 각 시대와 정책에서 남아있는 증거, 참여한 신하들의 행적, 백성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백성들에게도 혐오받던 광해군에게 사실은 업적이 있었는데 그것만 골라서 지워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서인들이 광해군의 업적을 왜곡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세자 시절 광해군이 남긴 전쟁 영웅으로서 좋은 기록을 삭제하는게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21]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각과 군사 규모 증강을 강조하는 평가의 대다수에 들어맞는 행동을 했던 군주는 재밌게도 광해군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인조였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근대의 시작, 조선의 산업 복구는 인조나 아니면 효종 때부터 제대로 되었다고 봐야 정확하다. 그러나 환단고기 이후 영토 확장 같은 마초적인 판타지를 꿈꾸는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선 인조가 매우 혐오스러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에게는 인조 시대의 업적을 덮어씌우고, 도리어 인조는 광해군과 비슷한 부분을 작은 것이라도 더 못 한 것처럼 깎아내리는 인상 조작을 일으키면서도 이것이 비역사적인 태도라는 것을 신경쓰지 못 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22]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23] 실제로 서인의 영수인 이항복은 광해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24] 윤휘는 인조반정 강경파에 속한 서인들에게 이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해서 살해 위협도 받았다. [25]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패자는 무조건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폄하된다는 논리를 펼치면 세조는 역사적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역사적 패자인 단종을 악의적으로 폄하하지 못했는지 따지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제 아무리 역사적 승자라도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26] 조극신은 원래 안위와 함께 거짓 고변을 하려고 했지만 안위가 뒤통수를 때렸다. [27]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 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에 포위 섬멸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 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 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 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영,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 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28] 강홍립 밀지론은 역사학자들까지도 속여넘겨서 1970~80년대까지도 학계에서 정설처럼 돌아다녔다.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루머가 거꾸로 광해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는 게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광해군을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 가짜 뉴스를 굳게 믿는다. 정치 투쟁에서 가짜 뉴스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정치인들 사이에 오가는 가짜 뉴스를 우리는 음모와 모략이라고 한다. 이건 광해군만의 비극이자 불운이었을까? 아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군주들이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음모론에 쓰러졌을까? 그것은 그의 체제가 그만큼 불안정했고, 상대를 포용하는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조현영 지음) - p. 53. 사르후 전투> [29] 간혹이를 ‘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라는 광해 11년 2월 3일 정사 2번째기사를 들어 실록의 내용이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기라는 정 반대의 내용이다. [30] 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 그리고 13년 9월 2일에 정충신에게 시켰던 홍타이지 포섭 계획 및 다이샨과의 이간 계획이 명나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첩보 활동으로만 알려지게 하려는 명령도 내렸다. [31]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영진(2020), 천총 연간 후금의 조선 사신 접대 양상과 그 의미,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계승범(2020), 정묘호란의 동인 재고 [32] 광해군이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명은 조선을 후금에게 대신 쳐맞아주는 역할의 고기방패로 던져주고 뒤에 숨어서 전략을 굴리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사실 조선에 대한 수탈과 후금의 조선침략과 동시에 명나라의 방관 및 느린 개입이라는 큰 틀에는 큰 변화는 없었으리라는 예측이 많다. 상당수의 옹호 측에서도 광해군 개인이 신경썼던 첩보의 의의를 고평가 해주는 것과, 구체적인 외교력의 실제 파급력은 전혀 별개라는 평가. [33] 이는 사실상 후금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소리다. [34] 현대에는 이런 유생들의 성향을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나라는 고작 20여 년 전에 조선을 멸망 위기에서 구해준 바 있고, 또한 최소한 당대 조선 유생들의 사상과 인식에서 명나라에 비해 후금은 조선이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재조지은 병자호란 문서 참조. [35] 물론 후대의 인조 역시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한 만큼 친명에 더욱 얽매이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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