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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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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62년( 명종 17)
사망 1623년 4월 13일 (향년 60 ~ 61세)
(음력 인조 1년 3월 14일)
자결
재임기간 제100대 영의정
1619년 4월 26일 ~ 1623년 4월 12일
(음력 광해군 11년 3월 13일 ~ 광해군 15년 3월 13일)
봉호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1]
시호 숙민(肅愍)
본관 밀양 박씨
효백(孝佰)
퇴우당(退憂堂)
공훈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
부모 부친 - 박안세(朴安世)
모친 - 창원 황씨 황림(黃琳)의 딸
부인 김귀희(金貴姬, 1561 ~ ?)[2]
자녀 장남 - 박자흥(朴自興, 1581 ~ 1623)[3]
차남 - 박자응(朴自凝, 1589 ~ 1645)

1. 개요2. 생애
2.1. 벼슬의 시작과 광해군 정권2.2. 영의정 임명과 이이첨과의 대립2.3. 영의정 당시 대내 정책, 대외 정책2.4. 인조반정과 사망2.5. 이후
3. 평가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 관료.

2. 생애

유일한 밀양 박씨 출신 정승. 박승종의 증조부는 명종 당시 홍문관, 도승지, 대사헌, 관찰사, 판서 등을 역임한 박충원으로 영월에서 관리들이 족족 죽어나가는 일이 있자, 박충원을 미워한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이 그를 영월 군수로 좌천 보내었는데, 단종의 묘소를 가꾸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제문을 지어 위로하여 곱게 살아서 돌아왔다. 박승종의 조부이면서 이와 똑같은 관직을 지낸 박계현은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三上(중상보다 딱 한 단계 더 높은 점수)을 받자 임금과 대신들이 박충원의 아들이라 평소 글 솜씨가 뛰어난 자이고 위 답안도 아주 우수한데 그날 시험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채점이 개판이었다고 깐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아버지와 함께 공문서 작성에는 유능하기로 명성이 있던 자였다.

벼슬없이 한량으로 지낸[4] 박안세의 아들이다. 북인의 핵심 인물이나, 이이첨을 제외한 류희분, 기자헌, 유몽인, 박홍구와 같은 광해군 시절 북인의 권신들이 모두 그렇듯, 대중적 인지도는 전혀 없다.[5]사실 광해군의 며느리의 할아버지이고 광해군 말기 5년간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라 광해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다.[6]

2.1. 벼슬의 시작과 광해군 정권

23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문명이 높던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벼슬길[7]이 그러하였듯이 봉교(奉校. 왕의 칙서를 기록), 지제교(知製敎. 왕이 내리는 교서 초안) 등으로 벼슬을 시작하는데, 정여립의 절친인 이진길(李震吉)을 사관으로 추천하면서, 글의 솜씨가 괜찮으니 한 번 써보는 것으로 했다가 한 죄로 한 번 짤리나 곧 복직되고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예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 대사헌 등으로 별탈 없이 승진한다. 한 때 유영경과 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 즉위 이후에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이후 다시 복귀하여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애초 명론과 교격(矯激 : 글과 말을 과하게 화려하게 쓰는 것)을 싫어하는 가풍 탓도 있어 북인에 속하게 되면서 박승종의 인생은 이후 강제 가입으로 점철되게 된다. 애초 정치색이 크게 없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생전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하고도 은근히 친했다.

북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으로 갈리고, 소북은 또 강경 지지파인 유영경의 탁소북, 온건 지지파인 남이공의 청소북으로 갈리게 되는데, 이 때는 또 탁소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선조 사망 직후 탁소북 내에서도 광해군을 몰아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이들이 많아 탁소북은 그냥 자멸하게 되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의 처남이자 청소북 소속인 유희분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광해군 정권은 이이첨이 중심이 된 대북보다는 소북과 남인과 서인의 연합 정권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세자빈 책봉이 이루어지는데, 대북과 소북의 타협 속에서 그나마 온건파인 박승종의 손녀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된다.

임진왜란에 따른 전후 복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상황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영의정은 광해군 즉위 직후에는 류영경 (소북)이 유임되었으나 대북세력에 의해 탄핵된 뒤 이원익, 이덕형 (남인)으로 이어지고, 좌의정은 허욱 (소북)과 기자헌 (대북) 등 북인 계열이었다가 이덕형 (남인)과 이항복 (서인)으로 이어지고 우의정 한응인 (서인)이었다가 심희수 (남인), 이항복 (서인)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기자헌과 이이첨 등이 수장에 있었던 대북이 이들의 집권 내내 극심한 공격을 가한다. 결국 1611년 회퇴변척소[8]→ 1612년 봉산옥사→ 1613년 계축옥사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동 속에서 영창대군 살해 반대와 인목왕후의 폐위 문제로 서인과 남인은 순차로 사직, 탄핵되었는데 소북은 완전히 방관하고 있었다. 이후 봉산옥사로 정인홍 (대북)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슬슬 대북이 성장해나가기 시작해 나가다가 계축옥사로 이항복과 이덕형이 탄핵되면서 대북 정권이 수립된다. 당시 박승종은 형조판서를 하다가 병조판서로 옮겼고 봉산옥사 당시에 판의금부사였던 박동량이 대북파의 탄핵을 받아서 물러난 뒤 판의금부사까지 겸직하게 된다.

한편 이원익은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영 이상하게 남인이 되었다. 본래 본인은 당색이 그다지 없었으나 스승인 이준경이 이이를 엄청 깐 탓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 주류인 이황의 제자들과도 학맥이 완전히 다르고, 스승의 가르침 으로 이황의 제자들과도 교류가 없었다. 외직으로 밀려난 이원익을 번번히 중앙 요직으로 임명하여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막상 이이였는 것이 또 개그이다. 사실 이원익은 성격이 원만하고 모두와 두루 친해 적이 없었고, 류성룡과 친하게 지내 남인 취급을 받았다. 류성룡, 이덕형 실각 후 사망하자 딱히 남인의 중심이 되줄 사람이 없고 그만큼 오래 살은 이원익이 자동적으로 남인의 구심점이자 원로가 된 것이다.

이덕형도 마찬가지로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장인은 북인의 대부 이산해, 절친은 서인 계열의 이항복이었다. 심지어 이산해의 연줄로 정인홍 밑에서 배운 적도 있다. 먼 친척이지만 이이첨과도 같은 가문 사람이기도 하다. 왜 남인인지 이해 불가. 다만 상대적으로 북인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보였고, 분당 초기라 남인으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까지는 당색이 달라도 서로 친교를 맺고 양가 집안끼리 혼인을 하기도 하는 등 크게 척을 지진 않았다. 흔히 서로 얼굴보기싫어 병풍치고 상대 당파 구성원보고 이놈저놈 욕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것은 잦은 환국으로 붕당 질서가 파괴되는 숙종 이후부터다.

2.2. 영의정 임명과 이이첨과의 대립

그 다음 영의정은 기자헌(대북), 좌의정은 정인홍[9](대북), 우의정은 정창연(대북)인데, 기자헌은 대사헌 때 정여립 모반 사건에 관련된 서인을 모조리 탄핵하고, 좌의정 때 선조의 광해군 세자 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광해군을 위해, 류영경, 임해군을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고 심지어는 봉산옥사 계축옥사까지 광해군과 같이 주도하여, 영창대군의 피살까지 찬성하는 등 광해군의 옥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 영창대군 살해를 반대했던 서인과 남인들까지 내쫓자 민심이 많이 악화되었고, 이이첨과 허균이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펴자, 기자헌은 서인과 남인들의 대규모 반발, 민심 악화와 이유로 반대하며 온건책을 냈다. 후에 기자헌은 박승종, 유몽인과 함께 대북 내에서도 폐모살제를 반대한 온건파인 중북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정창연은 우의정에 재임 중에 대북세력의 횡포에 반발해 사직을 했고 한효순이 우의정이 되는데 한효순은 대북세력에 영합해 폐모론에 참여한다.[10]

그리고 기자헌이 탄핵당하면서 결국 대북 강경파의 극렬한 공격을 못 버티고 3년만에 정권이 갈린다. 그 이후 영의정에는 정인홍(대북), 좌의정에는 정창연(대북)이 임명되지만 정창연은 이번에도 대북세력의 횡포에 반발해 또 사직을 했고 이후 좌의정에 한효순(대북 내지는 이이첨에게 영합한 남인), 우의정에 민몽룡(대북)이 오르면서 완전한 대북정권이 수립된다.

당시 박승종은 우찬성을 거쳐서 좌찬성으로 승진해 있었다. 하지만 대북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다시 좌의정에 민몽룡(대북)이 오르고 우의정에 박승종(소북)이 된다. 그 뒤 다시 좌의정에 박승종(소북), 우의정에 박홍구(소북)가 오르면서 이이첨 세력은 약해진다.

결국 영의정은 박승종이 되는데, 사람들은 광창부원군 이이첨(예조 판서 겸 대제학), 밀창 부원군 박승종(대제학을 거쳐 정승), 문창부원군 유희분(柳希奮 1564년 ~ 1623년,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우찬성, 병조판서)을 묶어 "삼창"이라고 부르니 일단 이이첨의 일파로 분류된다. 실제 맏아들인 박자흥이 이이첨의 딸과 혼인하여 이이첨과 사돈이기도 했다. 광해군 이이첨의 사돈인 박승종이 영의정이 되니, 대북은 이제 잘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좌의정은 소북인 박홍구가 되고, 우의정도 대북과 소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조정이 임명되면서 이이첨 세력은 제법 약화되었고 이이첨 역시 예조판서에서 물러나고 겸직인 대제학, 판의금부사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이이첨은 찬성의 자격으로 원접사에 다녀오지만 예전에 비하면 권력이 약해졌다.

출신이 탁소북이다. 박승종은 심지어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될 때도 반드시 은퇴한 명신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다였다. 그게 반대의 의사 표시이기는 했다. 은퇴한 명신들은 북인 꼴보기 싫어 은퇴한 건데 당연하게도 찬성할리가 없었다.

다 물러나고 혼자만 남으니 박승종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데, 항상 오리 알만한 비상을 품고, 여차하면 자결할 곳이라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고, 대북이 싫다며 대문을 외문이라고 부르며 인목왕후 폐위 및 더 이상의 옥사는 없다며 이이첨과 극한 대립을 선포한다. 애초 정치적 입지가 불안하였던 광해군 14년에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윤인 등이 인목왕후를 죽이려고 한 것을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막은 적이 있던 터이라 자신들의 가솔을 데리고 교대로 인목왕후가 기거하던 서궁에 변란이 없는지 보살피도록 한다. 더불어 기존에 계축옥사, 해주 옥사 등이 반복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옥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변은 철저히 조사하여 무죄 방면한다.

2.3. 영의정 당시 대내 정책, 대외 정책

광해군의 업적으로 명나라 후금 간의 중립 외교를 뽑는데, 공식 기록에는 의외로 대북 관련 관료들은 청나라(후금)와 한판 뜨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는 대북의 근본이 강경파 소장 관료이기 때문이다. 당시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지지하던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강홍립이 광해군 11년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도 이러한 입장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비변사의 입장 역시 초반에는 강경일변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단 영의정이었던 박승종이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인 모문룡을 절대 내륙으로 들이지 말 것, 이미 도착한 후금의 국서는 정식 국서를 보내어 답할 것, 이후 후금에서 사신이나 국서를 보내오면 국경 지대 고위층 관료들이 즉시 후금으로 넘어가 답례하도록 할 것(그래야 정식 국서를 안 남길 수 있으니),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는 후금의 정탐 목적 때문에 이들이 후금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해 놓을 것 등을 주장하였고, 비변사가 광해군께 이를 보고하니 광해군은 이를 따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게 과연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생각하고 박승종을 시켜 이를 공론으로 내놓게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박승종이 중립 외교를 생각하고 광해군이 이에 따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들 생각보다는 중립 외교라는 것이 대북 내에서도 인기가 정말로 없었다. 대체로 집에서 술만 먹고 놀다가, 이이첨이 서궁을 급습하려 하거나 옥사를 기획하여 선비들을 떼죽음 시키려 하는 조짐이 보이면 부리나케 관청에 나와 풀어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이이첨은 이후 자기의 사돈 겸 광해군의 사돈인 박승종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손발이 묶인 상태가 된다. 이 때를 전후로 성질이 더 나빠졌다는 기록도 많다. 소북 출신 삼정승이었던 박승종과 박홍구 덕분에 이 시기에 남인, 서인 계열이 외직 겸 하급 관직을 많이 제수받는데 문제는 이들이 인조 반정의 주축이 된다.

사르후 전투 이전부터 후금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사람이다. 주요 대책은 국경 지대에 쫙 깔린 성과 진에 병사를 흩어 놓지 말고 그 중 요충지를 골라 병사와 병졸을 모으고 대비하자 하였다. 광해군 집권 초기 병조 판서이기도 했고, 광해군일기에는 사관이 병조 판서로 일한 적이 있어 병졸들의 신망이 높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르후 전투로 병사들이 모조리 녹아 내리자 새로 군사를 뽑아 훈련시키기 보다는 각 도의 정예병을 한 곳에 모아 즉시 주둔지를 만들고 훈련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광해군과 함께 정충신, 남이흥, 장만, 정준 등 당시 유명한 무장들을 국경 지대에 열심히 깔았다. 이괄 인조반정 직전에 함경도 병마 절제사로 임명이 끝난 자[11]인데 국경 지대에 안 가고 생까다가 인조 반정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국경 지대 무장들로 하여금 후금에 사신 혹은 밀사로 자주 다녀오게 했고, 명나라에 들키면 염탐 및 적진을 살필 목적 등도 있다고 잘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광해군과 박승종이 국경 지대에 열심히 심어놓은 국경 지대 고위층 관료들은 인조반정 직후 모조리 갈린다. 후금과 내통하는 프락치라고 죽은 사람도 많다. 따지면 프락치는 맞긴 하다. 명나라 몰래 우린 너희랑 싸울 생각이 없다는 국서를 열심히 보냈으니. 이괄도 부원수로 부임하고 나서는 막상 이들이 없어 곤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나마 남은 무인들도 이괄의 난 때 한 차례 더 갈리는데, 인조반정 당시 배신을 때렸던 훈련 대장 이흥립도 이괄의 난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죽는다. 광해군 때 출세했던 사람들인 만큼 애초 북인 출신이 많기는 했다. 살아남은 무장 중 서인 계열이었던 정충신 이항복의 제자이다. 그런데 서인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친구들은 다 북인이다보니 역모사건 때,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그밖에 남은 북인은 사위가 인조 반정에 참가한 최명길이었던 장만,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남이흥 정도인데 이들은 이후 죽을 고생을 하여 정묘호란을 그럭저럭 넘긴다. 나중에 벌어지는 병자호란은 이들의 은퇴 및 사망 트리로 다들 알다시피 대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그나마 장만은 본래 문관이여서 무에 능하지 못 했고,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 때 미흡한 대처로 욕을 많이 먹었다. 남이흥은 정묘호란 당시 분전 끝에 전사했고, 정충신은 능력에 비해 상부에 미움을 받아 외직을 전전하다가 쓸쓸히 죽고 만다.

2.4. 인조반정과 사망

박승종도 인조 반정을 손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당시 한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던 훈련 대장은 심복이었던 이흥립을 뽑아 놓았고, 경기 감사도 본인의 맏아들이었던 박자흥은 경기 감사가 되기 직전 벼슬이 대사성(성균관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는데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담당한다. 비변사에서 병조 판서도 아닌 사람이 왜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하냐고 대차게 깐 기록이 있다. 이이반과 김신국이[12] 인조 반정 전날 저녁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인조 반정 사실을 듣게 되고 바로 고변하자, 박승종은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여 이후배를 궁궐 마당에 포박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광해군이 이때 김자점에 매수된 후궁과 잔치를 벌이던 참이라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박승종은 이흥립을 불러 '너 혹시 김류, 이귀하고 함께 모반하려고 하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이흥립이 '제가 딴 사람도 아니고 공을 배반하겠나이까.'라고 하자 그 말을 믿고 만다. 이흥립은 나중에 인조 반정 공신 목록에서 1등 공신을 받는다. 심지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이라는 자는 이흥립을 추천하였다는 공으로 3등 공신을 받게 된다.[13]

결국 다음 날 새벽 2시 드디어 인조 반정이 벌어지는데, 경황 중에 겨우 몸을 내뺀 광해군의 첫 마디는 ' 이이첨이 그랬느냐?'였다는데, 박승종이 전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박홍구와 같이 김류, 이귀 싹 잡아들이자고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오로지 이이첨 생각이었다. 박승종 역시 손만 놓고 있던 건 아니어서 맏아들인 경기 감사인 박자흥에게 낌새가 이상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인조 반정이 벌어지자 박자흥은 재빨리 경기 감사의 직위로 수원 부사 조유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즉시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하였고, 당시 5촌 당숙이었던 양주 목사 박안례에게도 병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거병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인조 반정 당일 이미 병사들이 한양으로 부리나케 뛰고 있었다고 한다.

파주 목사 윤정에게도 병사들을 모집해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했는데 여기는 소식이 늦게 도착해서 병사들을 출병하지 못했다. 당시 인조 반정 측에서는 수원 부사인 조유도는 인조 반정에 참가한 조정의 아들이라 조정이 직접 설득하기로 하고,[14] 양주 목사 박안례가 이끄는 군대는 이서가 군대를 이끌고 막기로 한다.

그런데, 궁궐이 완전 점령되고 이미 임금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자 박승종은 양주 목사인 박안례에게 이미 임금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둘째 아들인 영광 군수 박자응에게는 너는 자결하지 말고 살아 남아 제사를 지내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맏아들인 경기 감사 박자흥에게는 다 끝났으니 즉시 병사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인편을 보낸 후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15]

한편 조정에서는 김류가 박승종과 유희분의 죄가 크긴 하지만 이이첨과는 다르니 살려주자고 청하였다.[16] 인조는 "신하가 되어 불충한 것은 그 죄가 모두 균등한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이덕형(李德泂)도 광해군이 왕으로 있은지가 16년인데 어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겠냐고 반대하여 인조가 "개진한 일에 대해서는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희분이 죽은걸 보면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웠을듯. 이후 그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도 이귀와 김류가 모두 박승종을 옹호하였는데, 이귀는 "유희분과 박승종이 비록 탐하고 교만하고 사치한 죄는 있으나 사류(士類)를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습니다. 어찌 이첨과 죄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김류는 "무오년 간에 신이 여러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졌었는데 승종이 극력 구제함으로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승종이 만약 폐군의 뜻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이첨이 폐모론으로 폐주를 현혹시키고 옥사를 꾸밀 때 승종은 극력 그 논의를 배격하면서 사류를 구호했으니 어찌 그 탐장(貪贓)의 죄만을 가지고 이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인조는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이후 이서가 박승종의 시신을 거두어달라고 인조에게 청하자 인조가 "상소를 살펴보고 경의 신의에 감격하여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경이 충의를 분발하여 윤리와 기강을 세웠고 옛 은혜를 잊지 못하여 버려진 시신을 거두고자 하니, 경은 실로 금세의 선비가 아니다."라고 칭찬하면서 시신을 검시한 후 매장하라고 하였다. 결국 인조 1년 4월 30일, 관작을 추탈하고 유희분의 전례에 따라 재산을 속공하면서 유희분처럼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지 못해서 아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복권 논의가 있었고, 마침내 1857년(철종 8) 6월 13일에 우의정 조두순이 박승종이 비록 광해군의 척신(戚臣)이며 당시의 혼정을 방관한 혐의는 있지만, 군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킨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유몽인도 광해군을 위해 절의를 지킨 점이 인정되어 뒤늦게나마 신원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며, 박승종 부자에게도 그와 같은 조처가 내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박승종 부자는 사후 230여 년만에 생전에 그들이 지녔던 관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고종 8년, 숙민(肅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2.5. 이후

김류 이귀는 막상 인조반정 당일 광창부원군 이이첨, 밀창부원군 박승종, 문창부원군 유희분 등 소위 '3창'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에서 박승종이 " 인목왕후 폐출을 반대했고 같은 반정 공신인 이서가 박승종의 친족이니 박승종을 살려주자"고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박승종은 손녀가 폐세자 이지의 빈이었고 이 부부는 귀양지에서 땅굴을 파다가 들통이 나 폐세자는 처형당하고 세자빈은 자결했는데 살아있어도 이 일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을 공산이 컸다. 박승종과 함께 폐모론을 반대한 유희분을 이귀, 김류 등 반정 공신들이 살려주자고 인조에게 청했지만 인조는 반정 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17] 유희분과 아우 유희발을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18] 인조는 박승종을 부정적으로 생각한걸 보면 박승종 역시 유희분처럼 처형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19]

박승종의 직전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은 대북이기는 한데 기대승과 친척이다. 정확히는 형인 기진의 아들이 기대승이고 동생인 기준의 증손자가 기자헌이다. 기대승은 이황과 사단칠정론을 벌인 대학자로 이는 나중에 서인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할아버지인 기대항은 1563년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의 지시를 받고 사헌부의 죄상을 모조리 탄핵한 사헌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던 사람이다. 의외로 붕당 초기에는 서로 족보가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일례로 윤두수는 이황의 대제자이다. 기자헌은 서인과 남인 정치인들이 광해군의 옥사에 반대하였을 때 대북의 영수면서 대척점에 서서 찬성했지만 이후에 소북 정치인과 비슷하게 이이첨과 허균이 주도한 인목왕후의 폐출을 반대하였던 인물이 되고 정치에서는 은퇴한지 6년이 다 되가는 터라 인조반정 당시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인 정권은 이이첨과 류희분을 죽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중북 류몽인이 광해군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 류약과 함께 처형당했고 급기야 이괄의 난이 발생한 직후에 기자헌을 포함한 북인 정치범 38명이 잡히고 있었는데 이귀는 38명에 대해 국문을 통해 사형 유배를 가릴 것임을 의견을 냈으나 김류는 전부 처형할 것임을 의견을 냈다. 조정에서는 김류의 의견이 받아들여 기자헌은 사약을 마시고 사실상 자결했고 나머지 북인 정치범 37명은 무자비하게 참형되었다. 기자헌을 포함한 북인 정치범 38인은 이원익과 이귀가 3년 후인 인조5년인 1627년에 모조리 복권시켜 주기는 하지만 중간에 정묘호란이 겹쳐서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복권한 이후에도 그들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라 농민, 어민, 상인들과 같이 상민 신분으로 지내게 되면서 농사나 짓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등 생업을 이어가며 조정에서의 관심을 완전히 끊게 된다. 한편 북인 권신과 광해군의 측근들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북인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임취정과 박홍구 유효립등은 광해군을 복위 시키거나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같은 종친을 으로 옹립하는 거사를 준비하지만 발각이 되어서 처형당했다. 남이공과 김신국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정계에서 계속 이어가다가 이후에 남인에 흡수되면서 조정상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흔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20]

3. 평가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이원익과 비교하면 한 수 처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광해군 재위 시기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나름대로 유능한 정치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교안보에 대한 식견이 좋았는데, 사르후 전투 이전부터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거나, 광해군의 외교 노선에 토를 달지 않고 실무를 담당하는가 하면, 국경 지대에 관료들을 열심히 배치하여 곧 있을 환란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인조반정에도 그나마 대응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덤. 그러나 광해군과 박승종의 협력은 이원익 이외의 인재풀이 부족했던 당시의 관료계를 감안하면 부족한 편이었으며, 박승종 또한 능력을 다 꽃피우지 못한 채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4. 대중매체


[1] 인조반정 이후 익사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 [2] 김사원(金士元)의 차녀로, 정현옹주의 외5대손. # [3] 딸이 광해군의 세자인 폐세자 이지의 세자빈이다. [4] 나중에 받은 지돈녕부사는 증손녀가 세자빈이 되면서 명예직으로 받았다. [5] 대중매체에서 비중 있게 나온 사례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광해군편이 있다. [6] 다만 유희분, 기자헌은 사극에 많이 나왔고 박승종도 사극에 많이 나왔다. [7] 이들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글을 잘 썼다는 평가가 기재되어 있는 전통적인 글 셔틀 집안이다. [8] 정인홍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자, 이에 반대한 상소다. 그 중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9] 좌의정이긴 했는데 편지만 보내고 한양에는 안 왔다. 생각보다 좌의정은 오래 했다. [10]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남인의 괴수라고 탄핵 받았고 폐모론에도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1] 이전에는 제주 목사였다. 향후 전망을 보아, 싸움을 잘할 것 같아 보여서 승진시킨 것이라고 되어있다. 제주도에 짱박혀 있던 이괄을 부른 것은 결국 광해군에게나 인조에게나 대재앙이 된다. [12] 이이반은 반정 직후 참살되고, 김신국은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재등용된다. [13] 장신은 반정의 일원인 형 장유의 덕을 입은 것도 크다. 후에 병자호란 때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으나 실패하고 그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14] 얄궂게도 조유도는 유희분의 사위이자, 폐모론에 동조한 사람이였다. 성정이 거칠어 당시에도 평이 안좋았고, 모반 사건에 연루돼 귀양을 가 생을 마쳤다. [15] 박승종은 여차하면 자결하려고 비상을 항시 소지했는데 급히 도망친터라 비상을 잃어버린 후였다. 결국 노끈으로 충직한 하인을 시켜 목을 메 자살했다. 반대로 연산조 때 윤필상은 제 때 비상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목을 메 고통스레 죽었다. [16] 과격하기로 소문난 이귀조차도 저들은 폐모에도 반대했으니 좀 봐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다. 실록에 있는 사관평도 박승종과 유희분이 권세를 탐하기는 했지만 인목왕후를 보호했는데 이이첨과 똑같이 취급해 죽일 필요가 있냐며 평했다. [17] 박승종을 처형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귀와 김류에게 인조는 "박승종이 이이첨과 뭐가 다르냐"며 박승종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귀와 김류가 "이서에게 박승종을 죽이지 않겠다며 약속을 했다"고 말하자 인조는 "처음에 약속을 했을지 몰라도 법을 굽힐 수는 없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박승종에게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킨 박안례도 그 날 그냥 풀어주었고 박승종의 동생들은 형하고 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박승종의 둘째 아들인 박자응은 유배다녀온 후 박승종의 동생인 박승조와 함께 살았다. [18] 다만 박승종이 죽은 후에는 공신들도 유희분의 처형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신들은 어디까지나 박승종을 변호하면서 유희분도 덤으로 끼워넣어서 변호했고, 박승종이 죽자 변호할 이유가 사라져서 유희분을 살리는 것도 관심을 끊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실록에 박승종과 유희분이 인목왕후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이첨과 똑같은 취급을 한 것은 온당한 말이 아니라는 사관평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 인조가 박승종과 유희분을 처형하려고 한 일에 대해 부당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 물론 박승종은 인목왕후를 직접 지켰던 이력도 있었기에 대왕대비로 진봉된 인목왕후가 박승종만큼은 지켜줄수 있긴 했다. 실제로 인목왕후는 반정 직후 북인 숙청 과정에서 박승종만큼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지켜주려했다. 그렇지만 다르게 말하면 인목왕후가 언젠가 사망하고나면 박승종과 그 일가도 인조의 뒤끝으로 죽을 위험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기에 가시밭길은 확정이라서 이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기 싫었던 박승종이 자결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20] 영조가 여러번 소북을 언급하고 원경하가 대탕평을 주장하면서 남인 소북과 결탁하고 남인 소북등을 등용하려 했다는 것을 보면 일부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소멸해 버린 대북 중북과 다르게 소북 당색을 가진 인물들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