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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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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崔萬理 | Choi Man-ri
파일:최만리초상.jpg
<colbgcolor=#94153e> 성명 최만리(崔萬理)
본관 해주 최씨(海州 崔氏)
자명(子明)
강호산인(江湖散人)
생몰년 ? ~ 1445년( 세종 27)
역임 관직 강원도관찰사, 집현전부제학.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친인척 증외현손 율곡 이이[1]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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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최씨(海州)[2] 는 자명(子明), 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공혜(恭惠).

흔히 한글 창제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꼴통 혹은 사대주의에 찌든 답없는 이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건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 전기의 뛰어난 유학 실무자이자 청렴하고 올곧은 관료로 꼽힌다. 일단 세종 시기 자체가 천재들이 활보하는 조선의 리즈 시절 국가 최고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종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가 유지된 519년간 공식적으로 217명밖에 인정받지 못한 청백리 중 한 사람이다. 세종 대에 청백리로 선정된 사람은 12명인데 그는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2. 생애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1대손인 최하(崔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14년( 태종 14) 식년시 생원시에 2등 3위로 급제했으며 #, 1419년( 세종 1) 증광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했다. # 1420년 집현전에 보임된 후 계속 집현전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홍문관교리(校理)에 재직하던 1427년(세종 9)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 2등 1위로 급제하였다. # 143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440년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상급 직책인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등이 겸직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자의 시강학사를 맡기도 했다.


1444년 2월 그는 정창손, 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가 갑자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갑자상소문'이라고도 한다.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신들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심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들의 구구한 관견(管見)은 오히려 의심할만 한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裁)하시옵기를 바랍니다.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하나,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하나,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 서하(西夏)· 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3]하였으나,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4],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新羅 薜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 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必曰: "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礙〕 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하나,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5]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였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6]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7]나 기회(期會)[8]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9]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10]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11]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고려)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12]를 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하나,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13]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14]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15]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하나,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16]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17]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一,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罄肺腑, 仰瀆聖聰。
하나,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18]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19]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20]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21]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소를 읽고 세종과 최만리 등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 세종실록>에 전한다.
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薜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固當參決, 況諺文乎? 若使世子常在東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萬理等對曰: “薜聰吏讀, 雖曰異音, 然依音依釋, 語助文字, 元不相離. 今此諺文, 合諸字而竝書, 變其音釋而非字形也. 且新奇一藝云者, 特因文勢而爲此辭耳, 非有意而然也. 東宮於公事則雖細事不可不參決, 若於不急之事, 何竟日致慮乎?”

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 而後人皆效之?’ 此等之言, 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前此, 上敎昌孫曰: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昌孫乃以此啓達, 故今有是敎.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學崔萬理⋅直提學辛碩祖⋅直殿金汶⋅應敎鄭昌孫⋅副校理河緯地⋅副修撰宋處儉⋅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 命釋之, 唯罷昌孫職.
仍傳旨義禁府: 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 其鞫以聞.

임금이 소(疏)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23]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하였다.

최만리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이 변하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한 것은 다만 문세(文勢)에 따라 말 한 것일 뿐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24]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정창손이 이 말로 계달(啓達)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 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켰다.

그로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하여 아뢰라” 하였다.

그는 당시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는데 이에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으며 다음 해인 1445년 10월 23일 사망했다.

3. 평가

그의 사후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딱 두 차례 확인할 수 있다.
初上謂承政院曰: "予在東宮, 朴仲林、崔萬理, 爲侍學。 今依此例, 於書筵官擇可者。"

처음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박중림(朴仲林)과 최만리(崔萬理)가 시학(侍學)이 되었으니 지금도 이 예(例)에 의하여 서연관(書筵官)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라."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7일 무오 5번째기사
世子侍, 上謂弼善鄭孝常曰: "昔在世宗朝, 文宗爲世子, 書筵官崔萬理、朴仲林等輔翼世子, 一有小失, 輒諫不已。 予到今思之, 玆二臣者, 可謂能盡其職, 非偶然人也。"

임금이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 문종(文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서연관(書筵官) 최만리(崔萬理)·박중림(朴仲林) 등이 세자(世子)를 보익(輔翼)하는 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한데, 우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7월 11일 갑술 1번째기사
그 밖에도 최만리를 언급하는 몇몇 조선시대 문헌이 있으나, 특별히 이렇다할 평가 없이 행적이나 경력 위주의 짧은 소개가 다였다.

그러다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에 대한 찬양이 거듭되고 그 반대급부로 그는 사대주의자, 수구꼴통 유학자로 까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유교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으며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한글은 민족 유산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조선 시대의 왕들이 전반적으로 폄하되는 가운데도 세종만은 한글 창제라는 업적으로 인하여 높은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정립되면서 최만리는 '유교적 관념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개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조선을 퇴보시킨 구시대 양반 세력', '민족 문화를 저버리고 외국 문화를 추종한 민족 반역자'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25]에 중독된 가짜 명나라인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김윤경, 조선문자급어학사,(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신복룡 교수는 그를 역사의 죄인으로 본격적으로 단죄한 최초의 학자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어학자인 김윤경이라고 보았다. 김윤경은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을 연구하며 그를 위와 같이 평한 바 있다. 당시 환경 속에서는 실증적, 종합적 연구보다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을 정립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였으니 민족의식의 주요 구성요소인 한글 창제를 반대한 그는 반민족행위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경의 평은 학자의 논평이라기에는 감정적이다. 특히 그를 부패한 저능아라고 평한 것은 인신공격에 가깝다.[26]

해방 이후 한국어학계와 한국사학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배경에 관해 실증적, 종합주의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그의 상소는 정치, 사회,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함이 지적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그의 주장을 재해석해 일부나마 옹호하는 주장들도 나온다. 보통은 그가 <훈민정음>의 장점을 미처 알지 못하고 새로운 문자를 사용할 경우 이전까지 한문을 기반으로 한 정치 및 학문체계 등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우려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상소 중 창제 작업의 성급함과 세자의 참여 문제는 <훈민정음>의 중요성을 배제해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세종 본인과 세자 문종, 극소수 최측근 인사의 참여로 이루어졌는데 해석에 따라서는 세종 혼자서 작업을 수행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당시 세종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나빴기 때문에[27] 중요 국정은 문종에게 거의 10여년 간 대리청정을 맡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자 창제 작업에 크게 열중한 것은 그에게는 자칫 더 중요한 국정 운영에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쉽게 표현하면 "문자 만드느라 나라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정작 만들어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보수주의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 역시 최만리의 상소를 완벽하게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세종의 반박 내용을 보면 상소를 올린 신하들에게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고 권위에 호소하는 등, 다소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가 가져올 외교적,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한 것이지 훈민정음의 음문학적 내용을 비판한 것은 아니므로 올바른 반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평소 세종대왕이 가졌던 토론 친화적인 태도와, 경연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나갈 정도로 학문에 열심이었던 세종의 모습을 생각하면 훈민정음에 대해서만 다소 감정적으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최만리가 아예 틀린 소리를 한 것도 아니거니와 세종이 얼마나 훈민정음에 애착을 가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정말 틀린 소리를 했던 쪽은 정창손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거냐면서 핵심을 찌른 최만리와 다르게 정창손은 무지렁이 백성은 교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서 유학자로선 절대 해서는 안될, 유교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폭탄 발언을 꺼냈고 결국 반대 상소를 올린 인물 중 정창손만 정말로 파직되었다. 최만리나 하위지 등이 잠깐 하옥된 것은 아무리 옳은 소리를 했다곤 해도 왕의 행동을 대놓고 깠으니 불경을 저지른지라 일종의 통과 의례였고 정말로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정창손이었던 셈.

최만리에게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세종의 반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2~6항에 대해서는 격하게 반응했지만 사대에 대해서는 아무리 훈민정음에 애착을 보였다곤 해도 전혀 반박하지 못했다. 당시에 중국에 대한 사대는 최만리 뿐 아니라 세종까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으로 중국이었으며 모든 법제나 기술 등의 중심 역시 중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 시각과 다르게 전혀 굴욕적인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는 강대국에 대해 이익을 챙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명나라가 전혀 신경쓰진 않긴 했지만, 만에하나 글자 창제를 가지고 '중화'를 벗어나려는 것이냐며 명나라가 태클이라도 걸었다면 조선 입장에서는 대하기 매우 껄끄러웠을 것이다.

최만리의 우려와 다르게, 조선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현상의 발생과 확대는 현실화된 적이 거의 없다.[28] 조선 치세 내내 한문 위주의 에크리튀르(écriture)는 공고했다. 오히려 한글은 세종 뒷목 잡을 정도로 취급이 박한 편이었다.[29] 그의 예상은 조선 왕조 이후, 20세기 말부터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로 최만리의 시점에서는 엄청나게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다.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달라서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이라서라고 반대하는 부분은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문명권 사이의 문화적 공유성이 줄어들고 상호간 이질성이 심해지는 것을 염려한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생기는 문명의 가치 체계의 대변동을 염려했다고도 해석된다.[30]

4. 대중매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여서 세종대왕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가 나온 3개의 작품 중 그나마 명암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은 대왕세종 뿐이다. 그래도 정창손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100% 악역인 정창손과는 달리 진짜 신념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5. 기타

6. 관련 문서


[1] 외손자 이천(李蕆)의 손주. [2] 현감공파(縣監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전한공파(典翰公派)의 직계 파시조이다. [3] 중국의 문화로 오랑캐를 올바르게 바꾼다. [4] 소합향은 이란이 원산지인 소합향나무에서 채취하는 진액으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향이 진한 고급 약재였다. 반면 당랑환은 쇠똥구리가 굴려 만든 말똥 혹은 소똥으로 만든 약재였다. 그러니까 소합향을 버리고 당랑환을 취한다는 것은 훈민정음 반포를 두고 '한자처럼 고귀한 문자를 버리고 급이 낮은 문자를 만드는 짓'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5] 항간에 떠도는 언어로 간단히 말해 민중들의 언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6] 노끈을 이용해 표현하는 방식. ## [7] 정부 부처의 일지를 말한다. [8] 회계 업무 중 하나. [9] '문자' 훈민정음은 1443년 12월에 이미 28글자로 창제되었고 최만리의 상소문이 올라온 것은 1444년 2월이다. 1446년에 반포된 것은 '책' <훈민정음>이며 예조판서 정인지의 서문에도 '계해년(1443년) 겨울에 28글자를 창제하였다고 적혀 있다. 최만리가 어떠한 글자를 빠뜨리고 27자라고 했는지도 학계의 떡밥 중 하나다. [10] 행정업무의 다른 이름. [11] 학문을 숭상함. [12] 선왕이 남긴 유산을 실행하지 않던 노나라를 도로써 변화시킨다는 고사성어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13]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의 흐름을 깨우치는 것, 즉 문맥 파악이 되는 것을 말한다. [14] 억울하게 당하는 것. [15] 용의자의 진술서. [16] 모든 벼슬아치. [17] 청주시 내수읍 초정리이다. [18] 성리학에 마음을 둠. [19] 유학자들이 즐겨야할 기예 6가지. 몸가짐과 마음가짐 올바르게 하는 것(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 [20] 시민(時敏)은 창경궁의 동궁인 시민당을 말한다. 시민당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장소로 해석하면 "언문 창제는 세종의 왕세자의 공부에 방해만 된다." 정도가 되겠다. [21] 시를 쓰거나 서화를 그리는 것을 말한다. [22] 일본은 가나, 여진은 여진 문자, 몽골은 몽골 문자, 티베트는 티베트 문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한국의 이두에 비해 좀 더 독자적인 문자였다. 이들 나라들은 당시 한국에 비해 한문이나 중국 문화의 통용도가 낮은 편이었다. [23] 세자가 국가의 행정을 돌보고 있는데, 어떻게 훈민정음 창제에서 뺄 수 있겠는가 [24] 조선의 사상적 밑바탕인 성리학은 누구나 올바르게 배우고 익히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정창손은 사람의 자질을 언급하며 "태생부터 천한 그들은 가르쳐봐야 안 된다"는 말을 했다. [25] 慕華丸 [26] 때문에 최만리의 후손인 해주 최씨 종가에서는 김윤경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27] 당뇨로 인한 체중 감소 및 실명이 진행 중이었다. [28] 다만, 세종 대에서 약 200여 년 뒤인 숙종 시절, 남구만이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언문만 익히고 한자를 모르는 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있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29] 천시한 것은 아니고 쓰기는 많이 썼다. 대비 같은 경우에는 상당수가 한글로 글을 작성했으며 제안대군처럼 무식한 왕족은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조정에서 근무하는 관리라면 모를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조선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 창제한 것인 만큼 적어도 왕실에서는 자기 조상님이 만든 거니까 평가가 높았다. 다만 전술한 세종대왕의 발언에서도 그렇고 최만리의 상소문에서도 보듯 한글의 창제 목적 중 하나는 형법 처리에 쓰이는 이두를 대체하려는 것이 있는데 한글은 그런 공문서로서의 쓰임에는 이르지 못했다. [30] 상소 내에서 여진 문자를 언급하는데 여진 문자는 이 예시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금나라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한 군주였는데 그런 군주가 여진 문자 보급에 힘쓴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31] 미생을 기점으로 대배우가 된 이성민이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이며 조연이라 그리 조명을 받지는 못 했지만 무명 시절부터 연기를 상당히 잘 했다. 본인도 조연으로써 가장 오래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라고 한다. [32] 2006년 개봉한 영화 타짜에서는 호구 아저씨 역. [33] 2008년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서는 효령대군 역. [34] 최경창 해주 최씨 전한공파로 최만리의 5번째 아들이 파시조로 있는 파이다. 최경창의 현손이 소론의 영수 최규서이다. [35] 후에 최경창도 숙종조에 청백리에 녹훈이 된다. [36] 집현전의 총책임자는 대제학이고 부제학은 2순위였지만 대제학 자리는 삼정승이 당연직으로 겸직했으므로 최만리가 사실상 총책임자였던 셈이다.